서로마의 비정통 황제에 대한 내용은 콘스탄티누스 3세 문서 참고하십시오.
콘스탄티노스 3세 관련 틀 | ||||||||||||||||||||||||||||||||||||||||||||||||||||||||||||||||||||||||||||||||||||||||||||||||||||||||||||||||||||||||||||||||||||||||||||||||||||||||||||||||||||||||||||||||||||||||||||||||||||||||||||||||||||||||||||||||||
|
로마 제국 제67대 황제
콘스탄티노스 3세 Ἡράκλειος Κωνσταντῖνος |
|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플라비오스 이라클리오스 노보스 콘스탄티노스 아우구스토스 (Φλάβιος Ηράκλου Νοβός Κωνσταντίνος Αύγουστος, 그리스어) 플라비우스 헤라클리우스 노부스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 (Flavius Heraclius Novus Constantinus Augustus, 라틴어) |
출생 | 612년 5월 3일 |
동로마 제국 | |
사망 | 641년 5월 25일 (향년 29세) |
동로마 제국 비티니아 칼케돈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641년 2월 11일 ~ 641년 5월 25일 (3개월) | |
전임자 | 이라클리오스 |
후임자 | 이라클로나스 |
부모 |
아버지 :
이라클리오스 어머니 : 파비아 에우도키아 |
종교 | 기독교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제67대 황제이자 이라클리오스 왕조 제2대 황제,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적장자. 콘스탄티노스 3세는 641년 중 채 100일 남짓 동안 재위했던 황제였다. 그는 이라클리오스와 그의 첫 부인 파비아 에우도키아의 적자였다. (다만 첫째 아들은 사생아 요안니스)콘스탄티노스의 이름은 태어날 때 헤라클리오스 노부스 콘스탄티누스로 지어졌고, 이후 쭉 그 이름으로 살아간다. [1] 공식적인 제국의 명명법의 관점으로는 그의 아들 콘스탄스 2세가 더 '콘스탄티노스' 3세로 어울릴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콘스탄티노스는 원래 이름이 '이라클라오스(헤라클리우스) 콘스탄티노스'였기에 원래대로라면 아버지와 똑같이 '이라클리오스', 즉 이라클리오스 2세를 황제명으로 삼아야 했으나, 아버지 이라클리오스가 그 전에 활약이야[2]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는 큰 땅을 잃은 실지(失地)황제로 황제 커리어를 마감하고 죽었기에 이라클리오스라는 이름을 차마 쓸 수가 없어 버리고 그 뒷이름인 콘스탄티노스로 황제명을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2. 생애
콘스탄티노스는 613년 1월 22일 아버지 이라클리오스에 의해 공동황제로 즉위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사촌 니케타스(Nicetas)의 딸, 즉 6촌 누이 그레고리아와 약혼했다. 사실 이 부부는 족보상으로 근친상간에 속했지만 부황도 근친으로 결혼을 했기 때문에 대충 넘어갔다. 거기에 아버지 이라클리오스가 조카 마르티나와 결혼하면서 온갖 비난을 탱킹한 점도 있다.콘스탄티노스와 그레고리아는 629년, 또는 630년에 결혼을 했으며 그해에 첫 아들 콘스탄스(이후 콘스탄스 2세)를 낳는다. 둘째 역시 아들이었으며 이름은 테오도시우스였다. 콘스탄티노스 부부는 이후 딸도 한 명 낳는데, 이 딸, 마얀(Manyanh)은 이후 사산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된 야즈데게르드 3세와 결혼한다.
641년 아버지가 죽자 콘스탄티노스는 황제로 즉위한다. 콘스탄티노스는 단독황제로 즉위하지는 못하고[3] 아버지 이라클리오스의 두번째 부인이자 본인의 사촌인 마르티나의 아들 이라클로나스와 공동통치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세 달 만에 결핵[4]으로 29세로 요절하였다. 제위[5]는 후임 황제인 이라클로나스가 이어받았지만, 원래 근친혼으로 시민들과 종교계로부터 인기가 없는 모자라 그런지 몇 달 못 버티고 이 콘스탄티노스의 아들인 콘스탄스 2세에게 공동황제를 허용한 후 결국 뺏겼다. 여기에다가 그는 코가 잘렸고 어머니 마르티나는 혀가 잘린 후 로도스 섬으로 유배를 당했는데, 이런 일련의 절차에는 언뜻 유명무실해 보이던 콘스탄티노플 원로원 의원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여하튼 여기에는 콘스탄티노스의 복안이 크게 작용했는데, 그 몇 달 안 되는 사이에 자기 쪽 측근인 발렌티누스를 동부군 사령관으로 심었고 그가 그 해 9월 아들 콘스탄티노스의 복위를 이끌었다. 하지만 발렌티누스는 딸을 새 황제에게 시집보내고 실권자가 된 후 야심을 품어 2년 뒤 공동황제위[6] 혹은 제위 자체(즉 찬탈)[7]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다가 성난 수도 시민들에게 살해당했다.
[1]
이후 콘스탄티노스라는 이름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의 약어로도 사용되었으며 이후 현대 역사서에 표준이 되었다. 수도의 창건자이고, 11세까지 쓰였으니까. 참고로 그 다음 많이 채택된 황제명은 요안니스와 미하일로, 둘 다 8세까지 쓰였다.
[2]
그래서 땅하고
성십자가를 찾고 딱 타이밍 좋게 죽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If론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3]
공동 통치가 아버지의 유지였다.
[4]
영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독살 의혹이 강하게 제기된다. 실제로도 세 달 전에 먼저 죽은 아버지 입장에서, 저렇게 금방 따라 죽을 것 같았으면 아예 황제 자리를 맡기지 않았을 법 하다.
[5]
공동 황제를 맡고 있었다고 했지만, 좁은 의미의 제위는 당연히 선임 황제, 즉 정제(正帝 : Augustus)위를 의미한다.
[6]
<비잔틴 제국의 역사>에 의하면
[7]
영어 위키백과에 의할 경우 :
Valentinus_(usurper)(찬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