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라틴어: Lucius Aemilius Paull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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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29년 ~ 서기 10년[1] |
출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아버지) 코르넬리아(어머니) 소 율리아(아내) 아이밀리아 레피다(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아들?)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서기 1년 |
전임 |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
동기 | 가이우스 카이사르 |
후임 |
가이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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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손녀 소 율리아와 결혼한 로마 귀족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친혈육 대 율리아의 어머니 스크리보니아의 외손자이다.계모가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소 옥타비아의 차녀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인 덕에, 아우구스투스의 배려로 황족 특권에 준하는 것을 수여받아 서기 1년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동료 집정관을 지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배려로 딸 아이밀리아 레피다가 클라우디우스 1세와 약혼하면서,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방계인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보호자 자격까지 수여받았다. 그렇지만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추방된 서기 7년 전부터, 아내 소 율리아와 함께 사생활 문제 등으로 아우구스투스와 대립하다가, 반역 모의 후 그 혐의가 발각됐다. 이런 배경으로 서기 8~14년 사이 이 문제로 루푸스 등과 함께 처형됐다.
2. 생애
2.1. 출신 가문과 어린 시절
기원전 29년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인 아이밀리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코그노멘인 파울루스와 달리 실제로는 레피두스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는 기원전 34년 집정관을 역임한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2번째 아내였던 스크리보니아의 장녀 코르넬리아로, 이들 부부의 세 자녀 중 아들로 태어났다.아버지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2차 삼두정치를 이끈 레피두스의 형제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아들로, 할아버지는 술라가 급사한 직후 술라 체제에 반기를 든 장군이자 기원전 78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할머니는 아풀레이아이다. 그는 파울루스 가문이 마케도니쿠스 사후 대가 끊긴 뒤, 스스로를 파울루스, 레피두스를 함께 사용한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답게 개인이름으로 파울루스를 사용한 로마 귀족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기원전 34년 집정관으로 재임했고, 감찰관을 지낸 인물로 첫 결혼으로 맞이한 아내 코르넬리아와의 사이에서 세 자녀를 뒀다. 파울루스는 코르넬리아가 낳은 세 자녀 중 유일한 아들인데, 여자형제로는 아이밀리아 파울라, 아이밀리아가 있다.
어머니 코르넬리아는 아우구스투스의 한때 의붓 딸로, 대 율리아의 이부언니다. 그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난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결혼했는데, 기원전 18년 사망했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아버지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외할머니 스크리보니아 손에서 자랐는데, 그의 아버지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누나 소 옥타비아가 첫 결혼에서 얻은 둘째 딸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재혼했다. 두 사람 모두 재혼이었고, 각각 이전 결혼에서 자녀가 있었던 정략혼이었다.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는 이 결혼에서 아들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굴루스를 얻었는데,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이복동생인 그는 종종 레길루스로도 서명했고, 티베리우스 황제 아래에서 신임을 받으며 재무관을 지냈다. 그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아들이라는 추정이 있는, 칼리굴라의 둘째 여동생 율리아 드루실라의 남편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아버지일 수 있는 평을 듣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2.2. 출세와 성공
아버지가 황제의 조카딸과 결혼하면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자연스럽게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의 의붓아들이 됐다. 이때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는 이미 이전 결혼에서 아들이 있고, 재혼으로 레굴루스를 얻었음에도 파울루스를 후원했다. 이는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재혼하면서 황실과 밀접하게 연결되고, 호의적으로 변한 결과였는데, 기원전 11년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굴루스가 태어났다. 그리고 이 해에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사망하면서, 파울루스는 자연스레 외할머니와 계모 손에서 자라며, 황실과 밀접하게 연결됐다. 라이트먼, 사임 등은 이를 통해, 아우구스투스가 공화정의 대표적인 파트리키로 원로원 중심 공화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과 손을 잡을 목적으로, 정략혼이 이뤄지면서, 계획된 후원으로 평한다.파울루스는 생모 코르넬리아의 이부자매 대 율리아가 낳은 소 율리아와 약혼했고, 기원전 6년 또는 5년 아우구스투스의 손녀 소 율리아와 결혼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결혼을 통해 로마의 명문 귀족 가문인 아이밀리우스 씨족을 완전히 포섭하려고 했다. 그래서 파울루스에게 과거 마르켈루스,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가 보유했고,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수여받은 특권 중 일부를 내렸다.
이런 가운데, 서기 1년 파울루스는 불과 30세의 나이에 아우구스투스의 손자로 프린켑스 유벤투티스 신분의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는 로마에 있었고,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당시 동방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로마에서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대리한 집정관으로 그 위상이 올라갔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이 해를 전후로 아르발 형제 사제단에 지명되어, 사회적 지위가 더욱 높아졌다.
2.3. 몰락과 숙청
파울루스의 성공 기세는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서기 4년 2월 아르메니아에서 얻은 부상 후유증으로 요절한 뒤부터 점점 꺾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절, 파울루스는 여전히 좋은 직책을 수여받았고,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신임을 받았다. 따라서 파울루스, 율리아 부부의 딸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당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로 불리던, 아우구스투스의 양손자이자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 소 옥타비아의 외손자인 방계황족 클라우디우스 1세와 약혼했고, 각종 후원을 황실에게 선사받았다.이런 가운데, 서기 6년 6월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정식 입양되고 후계자, 상속자 지위 아래 공동황제가 됐다. 이때 파울루스의 도움을 받고 있는 그의 처남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역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입양됐고, 동서인 게르마니쿠스는 티베리우스의 법적 양자로 입양돼 사실상 티베리우스 사후 제위를 잇는 다음 후계자 반열에 올랐다. 동시에 파울루스, 소 율리아 부부의 딸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약혼한 클라우디우스가 티베리우스에게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을 물려받으면서, 아우구스투스의 후원 아래 이름을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로 개명하고, 황족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손자로 공표된다. 이때 파울루스는 미성년자로 14살에 불과한 어린 클라우디우스의 또 다른 보호자가 됐고,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혈육을 지켜주고 장인이 될 파울루스에게 힘을 실어줬다.
서기 7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직접 영구 추방되고, 모든 상속권이 박탈된 뒤 쫓겨났다.
당시 파울루스의 아내 소 율리아는 각종 기행, 사치 문제로 입방아에 오르고, 난쟁이 광대 노예를 애완동물처럼 데리고 다니는 문제 등으로 아우구스투스와 큰 갈등을 빚었다. 따라서 파울루스, 소 율리아 부부와 아우구스투스 사이의 갈등은 고조됐다. 이런 가운데,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파울루스와 소 율리아 부부는 본인들 소유 시골 토지에 웅장하고 사치스러운 별장을 지었다. 검소를 미덕으로 삼던 아우구스투스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격분해 건물을 통째로 허물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는 검증되지 않은 뜬소문을 그대로 싣거나 살을 붙여가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공격했던 인물이기에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믿을 만한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기원전 2년 어머니 대 율리아가 신전에서 공개 섹스를 벌이며 아버지의 명예에 먹칠하고 반역 음모를 꾀한 혐의로 판다테리아 섬에 추방된 사건이 벌어진 후, 딸에 대한 반감을 강하게 품은 아우구스투스가 대 율리아의 딸인 그녀까지 미워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다가 서기 8년, 소 율리아는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간통을 저지르고 아이를 가진 혐의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고발당했다. 그녀는 임신 중임에도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즉시 트레미티 제도로 추방되었고 재산까지 압류되었다. 이후 태어난 갓난아기는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산비탈에 던져 살해되었다.
반면 간통 혐의로 기소된 원로원 의원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대 율리아와 간통한 혐의로 처형된 율루스 안토니우스처럼 처형되기는 커녕 자발적으로 망명했으며 재산도 몰수되지 않았다. 그러다 서기 17년 티베리우스 황제의 허락을 받고 로마에 귀국해 여생을 평온하게 보냈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정황을 볼 때 실라누스가 실제로 율리아와 간통했을 가능성이 낮다고 보며, 아우구스투스가 미운털이 박힌 손녀와 파울루스가 자신을 음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간통죄를 뒤집어씌워 숙청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비슷한 시기,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역시 루푸스 등과 함께 아우구스투스 암살 모의를 했다가 발각되어 아우구스투스의 진노를 샀다. 따라서 파울루스는 아내 소 율리아가 간통죄 형태로 영구 추방되기 전, 반역재판에 회부돼 서기 8년 또는 서기 10년 혹은 서기 14년경 아우구스투스를 상대로 암살 음모를 꾀한 혐의로 즉결 처형되었다.
3. 후손 이야기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소 율리아 부부는 딸 아이밀리아 레피다를 낳았다. 칼리굴라 황제의 여동생 율리아 드루실라와 결혼했다가 나중에 칼리굴라에 의해 반역 및 간통 혐의로 처형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두 부부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지만, 파울루스의 이복동생 아이밀리우스 레굴루스의 아들이라는 추정도 있어 분명하지 않다.파울루스와 소 율리아의 자녀가 확실한, 딸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어린 시절에 클라우디우스 1세와 약혼했지만 부모가 아우구스투스 암살 모의, 아우구스투스와의 갈등 문제로 각각 몰락한 뒤, 황족 대우가 박탈됐고, 약혼이 취소됐다. 이후 그녀는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서기 13년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많은 자녀를 얻었는데,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2], 유니아 칼비나[3],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4],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5], 유니아 레피다[6] 중 제 명을 산 사람은 이들 부부의 딸 유니아 레피다 정도였다.
[1]
현재는 서기 8년, 서기 14년 중 하나로 보고 있다.
[2]
14 ~ 54, 46년 집정관. 54년 형제 루키우스의 원수를 갚으려드는 것을 사전에 막으려는
소 아그리피나의 사주로 처형됨.
[3]
? ~ 79, 미래의 로마 황제
비텔리우스의 형제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의 부인
[4]
? ~ 64, 53년 집정관,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을 자랑했다는 혐의로
네로 황제에게 자살을 강요당함.
[5]
? ~ 49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의 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약혼했지만,
네로와 옥타비아를 결혼시키고 싶어한 소 아그리피나가 여동생과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는 소문을 퍼트리는 바람에 원로원에서 추방된 뒤 클라우디우스 1세와 소 아그리피나가 결혼하던 날 자살함.
[6]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부인.
도미티아 롱기나 황후의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