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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라틴어: Marcus Aemilius Lepid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52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조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아버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아들)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아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포르키나(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87년 |
전임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이우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
동기 |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
후임 |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임기 | 기원전 175년 |
전임 |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스푸리누스 |
동기 |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
후임 |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파울룰루스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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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감찰관, 폰티펙스 막시무스. 기원전 2세기 초중반 로마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인이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에 속하는 아이밀리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코그노멘인 레피두스를 처음으로 사용하는 첫번째 인물은 기원전 285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였다. 그 후 그의 조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기원전 232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기원전 218년 법무관을 역임하고 기원전 216년 집정관 선거에 도전했지만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에게 낙선했다. 하지만 그를 제치고 집정관이 된 파울루스가 뒤이은 칸나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8만여 명에 달하는 로마군이 궤멸되는 참사가 벌어졌으니, 낙선한 게 다행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그는 기원전 201년 전임 감찰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와 함께 이집트로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이로 볼 때 그 전에 쿠르수스 호노룸을 순탄하게 이어갔을 가능성이 높지만, 기록이 미비해 분명하지 않다. 이들은 로마의 동맹국인 이집트로 가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를 알리고 마케도니아 왕국과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로마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집트에서 로마로 귀환하던 사절단은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 5세가 로도스 섬과 페르가몬 왕국, 에게 해의 자유 도시국가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케도니아 왕국으로 가서 필리포스 5세에게 전쟁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이때 레피두스가 가장 강한 어투로 압박하자, 필리포스 5세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의 나이와 아름다움[1],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마 부족에 속한 것 때문에 너무 대담하게 나오는군. 로마인들이 감히 마케도니아를 공격한다면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
사절단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귀국했고,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곧 발발했다.기원전 199년, 레피두스는 고인이 된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를 대신하여 사제단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93년 또는 192년에 친척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와 함께 조영관에 선출되었다. 두 조영관은 많은 가축 상인이 공공 토지 임대를 남용한다며 비난하고 그들에게서 회수한 자금을 토대로 금박을 입힌 방패를 구입해 유피테르 신전을 장식했다. 기원전 191년 법무관에 선출된 뒤 시칠리아를 통치했고, 기원전 190년 총독의 자격으로 그곳을 계속 통치했다.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 아이톨리아 동맹 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해 출진한 로마군에 빵 공급을 책임졌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189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그는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그리고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와 경합했다. 선거 결과 노빌리오르만 집정관 당선에 필요한 표를 얻었고 나머지 셋은 각기 표를 갉아먹느라 당선되지 못했다. 이에 노빌리오르는 선거 다음날 불소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이듬해, 레피두스는 메살라와 마찬가지로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으나 메살라에게 낙선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기원전 187년 재차 출마해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와 함께 당선되었다.
기원전 187년 초 노빌리오르와 불소가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 거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원로원에서는 두 사람 모두 개선식은 고사하고 중벌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노빌리오르는 아이톨리아 동맹과 전쟁을 벌이면서 잔혹행위와 약탈을 서슴지 않아 로마인의 명예에 먹칠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불소는 원로원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갈라티아와 전쟁을 벌였기에 역시 비난받았다. 레피두스는 노빌리오르와 불소를 탄핵하는 이들을 지원했지만, 플라미니우스는 노빌리오르의 편에 섰다. 원로원은 처음에는 노빌리오르가 암브라키아인들로부터 빼앗은 재산을 돌려줘야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나중에 노빌리오르와 불소 모두에게 개선식을 거행할 권리를 부여했다.
그 후 리구리아를 배정받은 레피두스와 플라미니우스는 아펜니노 산맥 양쪽의 여러 부족을 협공해 모조리 정복했으며, 리구리아인들을 산에서 평원으로 이주하도록 강요했다. 레피두스는 이에 더해 리미니에서 플라켄티아까지 이르는 도로를 새로 건설해 플라미니아 가도와 연결시키고 '아이밀리아 가도'로 칭했다. 한편, 법무관 마르쿠스 푸리우스 크라시페데스가 반란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이유로 인수브레스족의 영역 서쪽에 살고 있던 케노마니족의 무기를 압수했다. 케노마니족은 다른 갈리아 부족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 때 언제나 로마를 지지했고,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거의 모든 갈리아 부족들이 한니발 바르카를 따를 때도 유일하게 로마를 배신하지 않았다. 비록 전쟁이 끝난 후 카르타고인 하밀카르가 갈리아인들의 사령관이 되어 로마에 재차 반기를 들었을 때 일부 부족민들이 참가한 적은 있었지만, 그나마도 하밀카르가 패배하자 즉각 로마에 귀순했다. 그런데도 이런 조치를 내리자 레피두스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레피두스는 그들이 지금까지 로마를 충직하게 따른 것을 감안해 무기 압수를 취소하게 했다.
기원전 183년 로마인들이 거주할 식민도시를 북이탈리아에 설치하는 위원회의 일원이 되어 기원전 파르마와 무티나를 건설했으며, 기원전 180년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가 사망한 후 그의 뒤를 이어 폰티펙스 막시무스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179년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두 사람은 기원전 187년 초에 벌어진 일 때문에 서로를 원수 취급했지만,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의 중재에 따라 화해했다. 두 감찰관은 여러 종류의 관세 및 세금을 도입하고 투표 절차를 변경했으며, 주노, 디아나 등 여러 신전을 건설했으며, 아이밀리아와 풀비아의 공화당을 건설했다. 한편, 레피두스는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177년에 대사 식민도시를 건설하는 임무를 맡은 위원회에 가담하여 루나 시에 로마인들을 이주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기원전 175년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어 리구리아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 후 그는 죽을 때까지 여섯 차례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선임되어 막후에서 원로원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로 승리한 후 로마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후계자가 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던 기원전 152년에 사망했다.
아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기원전 190년에 대대장을 역임했고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중장기병대를 친히 이끌어 로마군 숙영지를 급습한 안티오코스 3세를 2,000명의 분견대로 저지했다. 하지만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78년 집정관을 맡았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아버지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기원전 137년 집정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포르키나가 그의 아들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고대 사료에는 이를 입증하는 내용이 없어서 불분명하며, 퀸투스와 마르쿠스 포르키나 모두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활약한 트리부누스 밀리툼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레피두스의 자식들이라는 설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