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leria Messalina 발레리아 메살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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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 |
왕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
전임 | 밀로니아 카이소니아 |
후임 | 소(小) 아그리피나 |
신상 정보 | |
이름 |
발레리아 메살리나 (Valeria Messalina)[2] |
출생 |
서기 17년 또는 서기 20년 1월 25일 로마제국 이탈리아 로마 |
사망 |
48년(항년 28세/31세) 로마제국 이탈리아 로마, 루쿨루스의 정원 |
배우자 | 클라우디우스 |
자녀 |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브리타니쿠스 |
아버지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 |
어머니 | 소 도미티아 레피다 |
형제 |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이부동생)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이부동생) |
1. 개요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셋째 부인이자[3] 황후. 본명은 발레리아 메살리나(Valeria Messalina)이나, 흔히 메살리나로 불린다.후임 황제가 되는 네로의 사촌누이로,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중 최초로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여러 악행과 그 최후 때문에 당대부터 사촌동생 네로와 함께 사생활이 난잡하고 악랄한 행적으로 악명을 떨쳤다. 사실 이런 난잡하고 악랄한 행적도 문제지만 로마 아우구스타 최초로 황제에게 반역을 꾀한 인물[4]이라는 점에서 기록말살형은 어찌보면 당연했다고 할 수 있다.
2. 생애
고대 로마의 명문귀족 가문으로 파트리키 계급에 속한, 발레리우스 씨족의 메살라 가문 태생이다.서기 17년 혹은 20년생으로 고향은 로마다. 부모 모두로부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창건자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피를 물려받은 방계황족으로, 아버지는 소 옥타비아의 외손자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 어머니는 소 옥타비아의 외손녀 소 도미티아 레피다이다.
아버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는 세습 원로원 의원이자 방계황족으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파에 속했던 전직 집정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아피아누스와 그의 아내로 소 옥타비아의 딸인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살리나의 할아버지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로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모친 리비아 드루실라와 같은 클라우디우스 씨족 가문의 풀케르 가에서 대를 잇기 위해 들어온 양자다. 그는 선동정치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조카뻘 친척이었는데,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와도 가까운 친척이었다. 따라서 메살리나의 아버지는 리비아 드루실라와 마찬가지로 본래 혈통은 파트리키 대귀족의 대명사인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람인, 발레리우스 집안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대 안토니아[5]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6]의 막내딸이다. 따라서 네로로 잘 알려진 5대 황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네로)는 메살리나와 사촌이 된다. 또 어머니 소 도미티아 레피다가 메살리나 아버지와 사별 후 술라의 직계후손과 재혼해 낳은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는 메살리나의 이부동생이다.
결혼 전까지 어떻게 자랐는지 기록이 전무하다. 그러다가 결혼적령기였던 16세였을 때, 당시 황제 가이우스(칼리굴라)의 주선으로 어머니의 이종 사촌 오빠인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했다. 가이우스 황제의 중매는 그녀의 부모가 모두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혈육이며, 그녀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가 혈통적으로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피를 이은 배경이 작용한 면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칼리굴라로 잘 알려진 가이우스 황제는 재위 기간 내내 자신의 가문인 율리우스 가문과 혈통적 본가 클라우디우스 가문 모두의 위상을 끌어올리고 두 씨족 내 지파인 카이사르와 네로, 그리고 증조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의 혈통적 본가인 풀케르 가의 연합을 공고히 하고자 무척 노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살리나는 외할머니의 여동생인 소 안토니아의 막내아들인 황숙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게 되는데, 남편이 된 클라우디우스는 47살의 상당히 많은 나이였다.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으로, 가이우스 황제의 작은아버지였지만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신체적 장애 때문에 일찌감치 제위계승 서열에서 밀린 상태였다. 그는 키가 매우 크고 매력있는 얼굴을 가진 미남이었으나,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걸음걸이가 불편했고 미세한 말더듬 증세를 가지고 있었다.
메살리나가 클라우디우스의 세번째 결혼 상대자가 되어 결혼식을 올렸고 서기 39년(또는 40년) 첫 아이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낳았다. 그런데 첫 아이를 출산한지 1년도 되지 않아 당시 황제 가이우스(칼리굴라)가 갑작스레 살해당했다. 이때가 서기 41년 1월인데, 황제 암살 사건 당시 암살범들은 메살리나의 남편 클라우디우스까지 죽이고 아우구스투스 직계혈육들을 모조리 제거하려고 했다. 허나 몇 암살가담자들의 변심과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끌고 있던 가이우스 황제의 또 다른 근위대장 클레멘스의 반격으로 인질로 끌려간 남편 클라우디우스가 새 황제로 옹립된다. 그리고 이때 메살리나는 아우구스타, 즉 황후가 됐다.
메살리나는 클라우디우스와의 사이에서 1남 1녀( 옥타비아, 브리타니쿠스)를 낳았는데,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메살리나가 평범한 외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했다. 따라서 메살리나는 황후가 된 순간부터 자신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주장해도 자신을 지지해주는 남편의 뒷배와 자신이 갖게 된 아우구스타라는 직위,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마지막 남자후손 브리타니쿠스를 출산해 얻게 된 인기를 배경 삼아 시간이 지날수록 거만해지고 그 허영심이 심해졌다. 더욱이 메살리나는 결혼 직후부터 출신 가문과 본인 혈통에 대한 자부심과 본래부터 갖고 있던 물욕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온갖 패악질이란 패악질은 다 부리고 아우구스타라는 직위를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음모를 다 꾸미면서 로마제국 역사상 최악의 황후이자 세기의 악녀로 사서에 기록되고 말았다.
대표적으로 로마 제국의 브리타니아 정복을 기념하는 개선식에 보란 듯이 참가해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든 사건이 있다.[7] 당시 개선식은 전쟁에 참가한 장군과 휘하 병사들에게만 주어졌고, 제정 시기에 들어와서는 오로지 황제만이 할 수 있는 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브리타니아 정복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은 어린 황후는 실제 전쟁에 참전해 승리를 거둔 황제, 장군, 병사들을 들러리 세우면서 마치 자기가 주인공인마냥 대놓고 설치고 다녔다.
어린 나이부터 지위를 이용해 치맛바람을 휘두른다고 비난받은 만큼, 궁중음모도 매일 같이 꾸미고 죄없는 여러 황족들에게 누명을 씌워 여럿을 죽이고 핍박했다. 그 피해자들로는 남편의 조카로 가이우스 황제의 첫째 여동생 소 아그리피나, 막내 여동생 율리아 리빌라 공주,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손녀로 아우구스투스의 손자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 율리아의 아들들이 있다. 이중 소 아그리피나는 네로의 어머니로 메살리나에게는 외숙모였는데, 메살리나는 몰락하기 2년 전부터 소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아들로 자신의 사촌인 네로를 어떻게든 죽이려고 온갖 술수를 벌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음모는 타키투스의 기록처럼 게르마니쿠스의 딸로 유일하게 생존했다는 타이틀 덕에 실패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메살리나는 서기 41년 전부터 자신과 사이가 나빴던 소 아그리피나의 여동생 율리아 리빌라를 기어이 다시 추방시킨 다음, 율리아 리빌라 공주가 23살의 나이에 쓸쓸히 죽게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메살리나는 권모술수의 달인으로 가이우스 시대부터 황실의 숙청 대상이었던 세네카도 이때 함께 추방시킨다. 그런데 게르마니쿠스의 두 딸(가이우스 황제의 여동생)들을 숙청한 일과 별개로 메살리나가 티베리우스의 손녀 율리아와 그녀의 아들들을 반역죄로 기소해 죽인 일은 오늘날 궁중 음모로 벌인 메살리나의 악행까진 아니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메살리나가 악행을 많이 벌였어도, 율리아가 그녀의 아들들과 함께 제위를 노리고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브리타니쿠스를 제거하려고 한 것은 재판에서 그 증거가 명백했다는 것이 교차검증되기 때문이다.
그 외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를 제거하는데 힘을 보탠것 역시 아시아티쿠스가 명백히 가이우스와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노린 반역을 꾸몄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사안이었고 그가 친구라 처벌을 망설인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판단을 확실히 도운 메살리나의 태도는 현대에는 꽤나 강단있는 판단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그 과정에서 루쿨루스의 정원을 비롯한 아시아티쿠스의 재산을 싸그리 자신의 사저로 넣은것은 역시 욕망에 충실했던 그녀다운 행동이었다고 봐야겠지만.(...)
허나 대개의 경우, 메살리나의 아우구스투스 직계 황족들 숙청들은 문제가 많았고 이 사건들은 그녀의 사촌동생 네로와 마찬가지로 비양심적이고 불법적인 면모가 상당히 많아 큰 질타를 받았다.
소 아그리피나를 핍박한 일에 관해서는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메살리나는 어린 네로가 세 살 어린 자신의 아들과 잠재적인 라이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고 한다. 특히 네로는 메살리나의 아들 브리타니쿠스보다 관중들로부터 더 큰 박수를 받았는데, 학자들은 이 때문에 메살리나가 네로와 그의 어머니를 상대로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고 추측한다. 이후 아그리피나는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의 범죄 혐의에 연루되었는데, 그녀가 "마법적이고 미신적인 관행"에 참여하도록 지시했다는 혐의였다. 타우루스는 자살했는데, 타키투스에 따르면 메살리나는 그녀의 새로운 연인 가이우스 실리우스에게 정신이 팔려 아그리피나를 더 이상 박해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메살리나는 금전욕이나 물욕도 강해서 사치도 꽤나 심했다. 그녀는 단순 사치만 심한 정도가 아니라 한번 눈독을 들인 재물은 갖가지 음모를 짜 누명을 씌우고 사람을 죽여서라도 가로챘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메살리나의 이런 행동들은 상당히 집요했고, 그 대상은 누구라도 가리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메살리나의 거짓 기소와 음모들은 남편 클라우디우스의 명성과 업적을 흠집냈다. 따라서 메살리나에 의해 누명이 씌워졌다가 클라우디우스의 꼼꼼한 재검토로 무죄방면된 귀족이나 부자들은 "아내한테 휘둘리는 늙은 얼간이", "본인이 누명을 씌우고 풀어주는 행동을 저지르는 이중적인 인간"이라고 클라우디우스가 죽은 뒤에도 비난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악명을 높인 것은 정도가 심한 불륜행각과 성욕의 분출이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뭔 짓을 해도 황제가 그녀에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자 그녀는 곧바로 쾌락에 몸을 던졌고, 궁정 안의 은밀한 방을 밀회 장소로 만들어 애인들과 육욕의 향연을 벌였다고 한다. 심지어 클라우디우스의 해방노예 비서들도 가까이 했다고 한다.[8] 물론 격무에 시달린 황제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앞서 아시아티쿠스 유가족들에게서 재산압류를 금지한 결정에도 루쿨루스의 정원을 유가족들에게서 기어이 빼앗은 메살리나는 곧이어 이곳에 빠져 지냈다. 메살리나는 아시아티쿠스가 아름답게 가꾼 이 저택에서 매일 같이 살면서 이곳을 자신의 호화 놀이터이자 불륜장소로 사용했다. 그래서 이 정원은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음탕함의 악명이 상당히 높은 장소로 기록되게 된다.
메살리나는 물욕을 채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 것처럼 성욕을 위해서 악랄한 행동을 거침없이 저질러 비난을 받았다. 황후는 자기가 마음에 든 원로원 의원 아피우스 실라누스가 유혹을 거부하자 황제를 부추겨 죽이기도 했으며, 이후에도 이런 식으로 그녀의 불륜상대가 되길 거부한 원로원 의원들을 누명을 씌워 죽이거나 추방하는 행동을 저질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원로원 귀족들은 황제가 메살리나의 말만 듣고 원로원을 공격하는데 신경도 안 쓴다고 비난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가 원로원을 존중하고 황제로서 어떤 특권도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황제와 원로원 사이는 나쁘게 흘러가게 됐다.
당시 고대 로마에서는 상당히 매춘이 성행했는데, 뭔 짓을 하고 돌아다녀도 황제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메살리나는 황궁의 은밀한 거처에서 벌이는 애인들과의 성관계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밤마다 팔라티노 황궁을 몰래 빠져나가 고급 매춘부로 일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어서 천민들이 이용하는 최하급 매춘굴에서 창녀로 일하며 날이 밝을 때까지 여러 손님을 받으면서 온갖 음란한 성행위를 했다는 얘기도 있다. 또한 과감하게 남근의 고리가 달린 '리시스카'(Lisisca)라는 창녀로서의 예명까지 적힌 문패까지 걸어놓고 손님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사후 기록말살형을 받은 만큼 악의적인 소문일 가능성도 있지만 메살리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동시대 학자인 대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메살리나가 로마에서 가장 악명 높은 매춘부를 선택해 밤샘 섹스 경쟁을 벌였는데 이 경쟁은 24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메살리나는 무려 1시간에 1명씩 총 25명의 남자들을 상대해서 섹스배틀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한 세대 후 로마의 시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유베날리스(55년~140년)는 자신의 시에서 매음굴에 다니던 시절 메살리나의 행각을 묘사했다. 그에 따르면 그녀는 황제가 잠든 것을 알았을 때 하녀와 함께 동행해서 매음굴로 떠나곤 했으며 그때마다 창녀의 두건을 쓰고, 팔라티노 황궁의 침대보다 매음굴의 매트를 선호했다고 한다. 거기서 그녀는 금발 가발로 자연스러운 머리카락을 감추고, 오래된 더러운 시트 냄새가 나는 창가에 들어가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젖꼭지에 금박을 입힌 것 외엔 벌거벗은 채 자신을 암컷 늑대(lupa, 창녀에 대한 로마시대 멸칭)라고 칭하며 손님들에게 아부하고 그들의 돈을 챙겼고 그런 다음 모든 남자들의 쓰다듬을 즐기면서 누워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포주가 창녀들 해산시킬때가 오면 그녀는 마지못해 그녀의 방에서 끝날때를 기다리며 가능한 마지막 시간까지 지칠때까지 섹스를 하며 욕정을 불태우고 황궁으로 다시 떠났다고 한다. 그는 메살리나를 창녀 황후(meretrix augusta)라고 칭했는데 이 부분은 로마의 정계에 간섭한 악명으로 이름 높았던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녀를 비교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주요 불륜 상대로 원로원 귀족들을 고르는 여인이 그 정도까지 막나가지는 않았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점잖은 원로원 의원이었던 대 플리니우스가 언급할 정도였다면 그녀의 성적 방종에 대한 당대 로마인들의 시각이 어땠을지 능히 짐작하게 만든다.[9]
결국 그녀는 스스로 파멸의 길에 들어서는데, 그 사건은 바로 서기 48년에 있었던 황후의 중혼과 궁정쿠데타 시도였다. 메살리나는 중년의 잘생긴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실리우스와 불륜을 저지르다가, 황제가 오스티아 건설을 위해 로마를 비운 틈에 궁전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참금까지 낸 결혼식을 강행했다. 거기에 더해 그녀는 클라우디우스를 폐위시키려는 반역음모까지 계획해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오스티아에서 메살리나가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실리우스와 결혼하기까지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클라우디우스가 없는 가운데 메살리나가 값비싼 결혼식 연회를 열었을 때에야 황제의 서신 담당비서 나르시수스가 그에게 알리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클라우디우스를 타도하고 실리우스를 황제로 세우려는 움직임으로 해석했는데, 당시 실리우스는 브리타니쿠스를 양자로 삼아 메살리아에게 아들의 황위 계승을 보장했다고 한다. 다른 역사학자들은 실리우스가 메살리나에게 클라우디우스의 타도가 불가피하다고 확신시켰으며, 그녀의 생존에 대한 가장 큰 희망은 그와의 결합에 있다고 설득했다 추측했다. 타키투스는 실리우스가 결혼을 고집했을 때에도 메살리나가 주저했지만, 결국 "그녀는 아내의 이름을 탐내고 있었다"며, 실리우스가 메살리나와의 결합을 기대하며 자신의 아내와 이혼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이를 인정했다고 서술했다. 소수설이긴 하나 메살리나와 실리우스가 포도 수확의 축제인 비날리아를 축하하는 도중에 바쿠스 신에게 바치는 의식의 일부로 결혼식을 흉내낸 것 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베스타 수석 여사제가 메살리나를 구명하러 나선 것이 이 소수설의 근거.
타키투스와 디오 카시우스는 이때 나르키수스가 "황후가 실리우스와 음모를 꾸며 황제를 살해하려 했다"는 것을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전했다고 기록한다. 나르키수스는 클라우디우스에게 이것이 그를 타도하려는 움직임이라고 확신시켰고, 근위대의 움직임까지 불안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갑자기 사태가 긴급해지자 클라우디우스는 서둘러 로마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자식들과 함께 길에서 메살리나를 만났다. 한편 수석 베스타 신전 여사제인 비비디아는 클라우디우스에게 메살리나를 비난하기 위해 서두르지 말라고 간청하기 위해 달려왔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는 곧바로 문제가 된 인물인 실리우스의 집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메살리나가 빼돌려 실리우스에게 선물한 클라우디우스 가문 조상들의 많은 가보를 발견했다.
이후의 상황은 당연하다는 듯이 흘러갔다. 메살리나가 궁전에서 남편에게 접근을 시도했을 때, 그녀는 나르시수스에 의해 거부당했고 클라우디우스의 비서들에 의해 그녀의 다양한 범죄 목록이 공개되었다. 자신의 최측근의 밀고와 그들이 내민 정황 증거까지 나오자 황제는 실리우스에게는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그녀에게 불리한 증거가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디우스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누그러졌고 메살리나의 애원에 마음이 흔들렸던지 자꾸만 처벌을 미뤘으며,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기도 했다. 결국 클라우디우스의 측근들이 황제의 마음이 흔들리는 걸 막기 위해 루쿨루스 별장에 숨어 있던 황후를 찾아내 칼로 찔러 죽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8세(혹은 31세).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단지 포도주를 한 잔 더 달라고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여태까지 그녀가 했던 일을 따지면 물욕과 성욕을 채우기 위한 행동을 제외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남편과 자식을 위한 행동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대놓고 자신을 신뢰한 남편에 대한 반역은 결국 그녀의 의도 역시 불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냥 그대로 소소한 악행(...)을 저지르면서 아우구스타 자리를 유지했으면 그녀가 그토록 경계했던 소 아그리피나나 네로가 권력의 중추에 오를 일도 없었을것이다. 결국 이런 도를 넘은 그녀의 폭주는 궁극적으로는 소 아그리피나, 네로 세력에게 암살당했다는 의혹이 있는 남편이나 대놓고 살해된게 확실한 아들 브리타니쿠스도 파멸시켜 버리는 원인이 되고야 만다. 결국 그녀의 지나친 욕망에의 폭주가 자신을 비롯한 주변을 모두 망치고 나아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망쳐 플라비우스 왕조가 들어설때까지 로마의 혼란까지 부른 장기적인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살해된 직후, 로마 원로원에게 만장일치로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이는 로마 제국에서 아우구스타 직위를 가진 여성 중 최초 사례였는데, 남편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워낙 온화한데다 그녀의 소생 브리타니쿠스의 정통성도 관련된 일인 터라 형식적으로 기록말살형이 의결됐을 뿐 조각상들이 파괴되거나 동전이 회수돼 녹여지는 등의 직접적인 처벌은 받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와 별개로 메살리나 추모는 엄격히 금지됐다고 한다.
생전 벌인 악행들 때문인지 몰라도, 그녀의 소생들도 좋은 결말을 맺지 못했다. 딸인 옥타비아는 어머니와 달리 착하고 현명했으며 정숙한 황후로 이름이 높아 로마인들의 동정과 사랑을 받았으나, 남편이었던 네로에게 냉대를 당한 끝에 간통 누명이 씌워져 죽임을 당했다. 아들인 브리타니쿠스 역시 네로의 황위를 위협하는 인물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10]
3. 평가
로마의 역대 아우구스타 중 소 아그리피나, 소 파우스티나와 더불어 아우구스타 직위를 가진 로마인 중 고대부터 현대까지 그 평가가 최악일 정도로 안 좋다. 어느 정도로 최악인지, 함께 꼽힌 소 아그리피나와 소 파우스티나 외의 다른 로마 황제들(특히 사촌동생 네로)와 비교해도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그 평가가 1, 2위를 다투고 있다.
동급으로 묶여 비난받은 두 아우구스타와 달리 메살리나는 "탐욕스럽고, 비열하고 잔인하며 비양심적이고 몰상식했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일관된 의견인데, 메살리나는 소 아그리피나가 가진 비열함과 권력에 대한 집착과 소 파우스티나가 사후 악명을 얻게 된 길거리 내 뜬소문을 실제 했던 것 때문에 여타 로마인들에게 그 평가가 최악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 로마 제국의 역대 아우구스타 중 기록말살형을 받은 첫 아우구스타인 까닭에 그 악명은 그녀가 죽고 2000년 가까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안 좋다. 그래서 현대의 여성 고대 사학자 칼리 실버의 경우,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하고 싶지 않은 다섯 명의 로마 아우구스타" 중 그녀를 1, 2위를 오가는 최악의 아우구스타로 언급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악행들과 몰락은 당대 기록은 물론이고, 타키투스, 카시우스 디오, 수에토니우스 등 후세 로마 역사가들의 저작에 실려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현대에 와서 그녀에 대한 기록을 그대로 믿지 말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당대 역사가들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의도적으로 비방한 점이 많은 것은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 네로 모두의 시대에서 꾸준히 확인되는데다 메살리나의 악행 중 유명한 사건이었던 율리아 모자 반역죄 사건이나 아시아티쿠스 반역 사건은 분명 악행이 아닌 명백한 모반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가 탐욕스러웠고 구제불능의 음탕한 황후라는 주장에 대해 메살리나의 만행이 부풀려졌다는 가설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의견은 갈수록 설득력을 얻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 때 처형당한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근래에 교차검증으로 재평가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라는 말로 사치와 향락의 결정체로 여겨졌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제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도박을 좋아하긴 했으나 당대 프랑스 귀족 기준 검소하고 사려깊은 성품에, 편애가 심했던 자신의 어머니와 달리 자애로운 어머니었으며[11],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모범적인 왕족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평가가 이루어진 지금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와 향락의 이미지가 강하다. 앙투아네트가 기록도 풍부하고 교차검증이 쉬운 200년 전 근대 인물인 것을 생각하면 2000년 전 고대인이었던 메살리나의 악행은 더욱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황족 여성에 대한 성적인 루머는 특히 그렇다. 로마가 성적으로 문란한 사회였다고 해도 황후가 매춘을 대놓고 할만큼 막장이지는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사생아가 있었을텐데 기록에 남은 메살리나의 자녀는 둘 뿐이다. 몇 세기 이후의 인물인 마리 앙투아네트도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불륜, 동성애, 수간, 심지어 7살인 아들과의 근친상간같은 온갖 헛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아들과의 근친상간 혐의는 민중 재판에 어거지로 기소되었다. 재판 당시 앙투아네트는 국고 낭비, 모반, 오스트리아와의 내통을 비롯한 다른 혐의들 대해서는 담담히 듣고만 있었으나, 아들과의 근친상간에 대한 혐의를 듣고는 매우 황당해하며 "여기 계신 어머니들, 이게 말이 됩니까"라고 항변했고 방금 전까지 앙투아네트를 비난하던 방청석의 여인들마저 동감했다고 한다. 여제인 예카테리나 2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또한 당대부터 음담패설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4. 기타
-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의 말에 따르면, 현대 이탈리아어에서 메살리나라는 이름은 '아무 남자와 동침하는, 몸가짐이 헤픈 여자'의 대명사로 쓰인다고 한다. 실제로 서양권에서 여성을 메살리나라고 부르는 것은 음험하고 성적으로 탐욕스러운 성격을 나타낸다.
- 이렇게만 본다면 어찌되었던 저찌되었던 매우 음란하고 사악한 황후라는 악명만 남았을거 같지만 후대 예술가들에게 메살리나의 이런 악녀적인 모습이 주도적으로 주변을 파멸시키는 팜 파탈적인 매력으로 느껴졌는지[12] 많은 예술가들의 소재로 다루어져서 후대에도 유명세를 크게 얻은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타 중 하나로 기억되게 된다. 그녀의 방탕한 요부 이미지는 후대의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기도 했고, 그녀를 소재로 한 그림들도 꽤 그려졌다. 일단 남은 기록들 자체가 굉장히 에로티시즘적으로 자극적이라, 많은 예술가들이 에로티시즘을 강조하는 의미로 그녀의 이미지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부도덕함의 반면교사로써 교훈을 남기기 위한 수단으로 그녀를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조각가 외젠 시릴 브루네의 메살리나 조각(후방주의) 초기엔 메살리나의 사악한 행동이 전적으로 강조되기도 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그녀의 성적 활동은 더 동정적으로 다뤄졌다. 이런 메살리나에 대한 양면적인 태도는 티베리우스, 메살리나, 칼리굴라가 저승에서 서로를 책망하는 후기 중세 프랑스 산문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같은 황실의 세 인물이 지옥에서 나누는 대화를 다루는데 메살리나는 그들의 죄가 자신의 죄보다 훨씬 더 나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자기를 비난하기 전에 자신들의 사악함을 뉘우치라고 제안함으로써 논쟁에서 승리한다.
- 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클라우디우스가 나이들고 장애인이고 칼리굴라의 비위를 맞추며 하루하루 연명하던 자기에게 아름답고 어린 메살리나가 시집와 준 것 자체를 매우 과분하게 생각하고 항상 일종의 죄책감과 열등감을 느껴 메살리나에게 끌려다닌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메살리나가 죽임당한 후 클라우디우스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끝장내 공화정을 복구시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일부러 암군 행세를 하며 사악한 소 아그리피나를 황후로, 네로를 황태자로 삼아 후일 그들의 폭정이 제정을 스스로 끝장내기를 바란다.
- 황후로서 성욕, 물욕 마음껏 발산하며 창녀까지 되어가면서 인생 멋대로 살았는데 천수를 누린 사례가 존재하는데 바로 중국 북제의 황후였던 무성황후 호씨다. 행적만 보면 호씨는 '성공한 메실리나', 메살리나는 '실패한 호씨'였던 셈이다.
5. 관련 문서
[1]
아들
브리타니쿠스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제작된 전신상이다.
[2]
일반적인 로마여성들의 작명법처럼 출신 노멘+코그노멘을 여성형으로 바꾼 이름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모의 것을 조합하는 경우도 있다. 자매끼리 비슷하게 짓는 경우, 이를 구분하기 위해 대(큰), 소(작은)을 넣으며 자매끼리 조합을 바꿔 짓는 경우에는 다른 이름이 된다.
[3]
이전의 두 전처는 클라우디우스가 제위에 오르기 전에 결혼하고 이혼했다.
[4]
소 아그리피나도 오빠인 가이우스 황제에 대한 반역에 연루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아우구스타가 아니었다.
[5]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소 옥타비아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장녀
[6]
네로의 친할아버지로, 전쟁영웅이었고 아우구스투스 ~ 티베리우스 시대를 대표하는 동방지역 최고의 외교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젊은 시절 당대 최고의 전차기수로 스타플레이어였고, 원로원 의원 생활을 하는 동안 귀족임에도 무언극 연기 배우로도 그 명성이 자자한 끼 많은 대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 루키우스, 그나이우스의 끝없는 방종과 비행으로 그 평판은 상당히 나빠 고대기록에서는 아들들의 악행을 온전히 뒤집어 썼다고 하며, 정적들에게도 거만하다고 미움을 받아 죽을 때까지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을 조작했을 것이라고 의심을 받았다고 한다.
[7]
로마의 개선식은 단순히 행진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그 순간만큼은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아서 신성을 의미하는 붉은 안료를 칠하는 전통이 있었다.
[8]
이러다 해방노예 비서진의 일원인 폴리비우스가 죽임을 당하자 관계가 틀어졌다고.
[9]
대 플리니우스는 '
가이우스 황제가 다소 기이한 행동을 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미치광이는 절대 아니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존경할 만한 성품을 갖췄고 당대의 가장 학구적인 작가들 중 하나였으나, 아내 발레리아 메살리나의 난행을 통제하지 못한 게 흠'이라고 지적할 정도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꽤 우호적인 평가를 내린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마저도 메살리나의 음란함은 지나쳤다고 지적할 정도면 당대 메살리나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가히 짐작이 가능하다. 이 일화는 동물들의 성욕에 대한 기록을 쓰면서 언급된 것인데 플리니우스는 동물도 이렇게 성욕을 발산하지는 않는데 사람은 이렇게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니 한심스럽다는 한탄의 목적으로 서술했다.
[10]
이들은 만약 메살리나가 살아있었다면 그토록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두 사람이 자신들의 모친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상적인 인품, 덕행을 보여주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까운 부분이다.
[11]
첫 아이를 낳고 패가망신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못 고친다는
도박 중독에서 벗어났다.
[12]
팜 파탈 문서에도 나오지만 '쾌락이나 정복욕,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 등의 이유로 욕망에 충실한 나머지 파멸할 가능성에 대해 무시하며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파국으로 몰고 가는' 유형의 팜 파탈에 메살리나가 딱 부합되는 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