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2 16:14:13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이름 섹스투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Sextus Aurelius Victor)
출생 320년
사망 390년
직위 판노니아 세쿤다 총독, 로마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대표작 카이사르의 책

1. 개요2. 생애3.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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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정치가, 역사가. 4세기에 활동한 인물로, 로마 제국의 역사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2. 생애

320년경 아프리카 속주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361년경 율리아누스 황제로부터 판노니아 세쿤다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389년경 로마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역임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그를 "역사의 작가"라고 칭하며 절제력이 훌륭했다고 평했다. 그 외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3. 작품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삼는 과정이 진행되던 4세기의 이교도 작가였기 때문에, 중세에 필사를 맡은 수도자들에게 외면받았는지, 현재 남아있는 빅토르의 역사서는 별로 없다. 허나 타키투스, 디오 카시우스의 저서 등이 이교도가 쓴 것임에도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알듯이,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의 저서가 인기 없는 진짜 이유는 이 사람의 편향된 저술 스타일과 각 황제들에 대한 지역주의적인 비평의 탓도 크다.

그는 아우구스투스부터 콘스탄티우스 2세까지의 로마 제국 역사를 다룬 카이사르의 책(Liber de Caesaribus)을 집필했는데, 약 50쪽 분량의 소책자였다.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2권의 필사본 만이 남아있으며, 그나마도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1장의 짤막한 글 외에는 3세기와 4세기에 벌어진 사건들에 관한 서술만 존재한다. 카이사르의 전형(Epitome de Caesaribus)도 그가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현대 학자들의 연구 결과 그가 서술한 짤막한 글만 인용됐을 뿐, 대부분의 내용은 4세기 익명의 이교도 역사가가 집필한 것으로 밝혀졌다.

빅토르는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글 첫문장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건국 722년[1], 로마는 한 사람에게 복종하는 습관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가 군인과 신민, 기타 모든 이를 어려움 없이 복종시키고, 수많은 군사적 업적을 거두고 인재들을 적극 기용하여 제국을 행복으로 인도했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초기 제국은 2세기 동안 평화, 질서, 번영을 누렸지만, 한편으로는 방종과 사치가 갈수록 심해졌다고 밝혔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제국의 역사를 아우구스투스부터 네르바까지의 발전기, 네르바부터 세베루스 왕조까지의 황금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부터 시작된 3세기의 혼란기, 그리고 디오클레티아누스 부터 시작된 새로운 시대로 분류했다. 그는 첫번째 단계에서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가 즉위하면서 독재 정치가 결정적으로 확립되었다고 평했다.

빅토르는 235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즉위한 이후 "학문은 빛을 거의 잃었고, 군단의 의지만으로 권력이 좌지우지되었다."라고 밝혔다. 그는 권좌가 "야만인에 가까운 군인의 규율없는 탐욕"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으며, "좋고 나쁘고, 고귀하고 천박하고, 종종 교육받지 못한" 통치자들은 변덕스러운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기 일쑤였다고 하였다. 그나마 프로부스처럼 원로원을 존중하며 문치주의를 표방한 황제가 있었으나 매우 드물었으며, 타키투스처럼 원로원의 추대와 군인들의 동의로 집권할 수 있었던 이도 드물었다고 하였다. 특히 갈리에누스가 원로원 의원이 군 사령관이 되는 걸 배제한 것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등장 이후 제국이 혼란스러웠던 3세기보다는 많이 안정되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관료들은 갈수록 부패해지고 신민들은 지나친 과세에 신음하고 있다고 비평했으며,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가 로마 건국 10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인 걸 언급하면서, "1100주년은 별다른 의식 없이 지나갔다"고 슬프게 논평했다. 이는 그가 전제화되어가는 제국 체제에 비판적이었으며, 기독교의 세력이 갈수록 강해지면서 옛 로마의 문화가 상실되어가는 걸 바람직하지 않게 여겼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빅토르는 문화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통치자들이 학문을 닦아서 교양있는 로마인들의 이상적인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아우구스투스가 학문을 장려한 걸 강조하면서, 로마 제국이 융성해질 수 있었던 건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며, 통치자들에게 학문의 길을 따르라고 권고했다.
야만적인 박해조차도 작가의 명성을 해칠 수 없다. 이러한 방식의 죽음은 실제로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영광의 원친이며, 그것을 명한 사람에게는 저주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후세 사람들에게, 학문의 영예는 공공질서의 붕괴와 순전한 광기를 통해 억압될 수 없다.

허나 이런 문장에도 빅토르의 저술은 후기 로마 제국 아래에서 각 지역 간의 민감한 여론을 건들고, 그 중심 문화 역시 본인의 고향인 푸닉 지방(북아프리카 해안)과 발칸 출신 황제, 귀족들의 시각에서 기록한 단점이 뚜렷했다. 더군다나, 미국의 고대 로마사 연구자이자 대학교수 HW 버드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의 저서를 영어판으로 발행하면서 언급한 것처럼,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의 저서는 도덕서 이상으로 많은 주석을 필요로 해서 로마 제국 최고 관료 출신의 저서치곤 인기가 진짜 없었다. 로마 시대에 남아 있던 여러 사람의 저술 중 이 사람의 저서가 많이 필사되지 않은 이유는 이런 것이 컸다.

다음으로 빅토르의 저술은 도덕주의적인 훌륭한 논평에도 유독 북아프리카, 이집트 출신 황제들에 대해선 날카로움이 떨어지는 한계도 가지고 있다. 일례로 그는 세베루스 왕조 황제들에게는 호의적이며, 이 왕조의 동시대 디오 카시우스, 헤로디아누스 등과 달리 카라칼라, 엘라가발루스에 대해 호의적인 평이 많고 자신이 충성을 다한 황제들에게는 극찬을 아끼지 않는 이중잣대 모습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 빅토르의 역사 기록은 군인 황제 시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현대 학자들에게 그 시대의 몇 안되는 귀중한 문헌자료로서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또한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는 4세기 때 이교도 학자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글로서도 주목받고 있다.

[1] 기원전 3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