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라틴어: Lucius Verginius Ruf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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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4년 ~ 97년 |
출생지 |
로마 제국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노붐 코무 (현재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코모) |
사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에퀴테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미상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63년 |
전임 |
퀸투스 유니우스 마룰루스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
동기 | 가이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
후임 |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
임기 | 69년 |
전임 |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
동기 |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
후임 |
그나이우스 아룰레누스 카일루스 사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
임기 | 97년 |
전임 |
티베리우스 카티우스 카이시우스 프론토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icus |
동기 | 네르바 |
후임 |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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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네로 황제에 대항하여 황제가 되라는 라인 군단병들의 요청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2. 행적
14년경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노붐 코무(현재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코모)에서 에퀴테스 집안인 베르길리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부모의 신원과 어린 시절, 집정관이 되기 이전의 행적은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다만 명예로운 경력을 순조롭게 이어가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신임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훗날 라인 군단 사령관으로 부임한 것을 볼 때 군공도 착실히 쌓았을 것이다.그는 고향에서 같은 에퀴테스 신분인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를 친구로 사귀었다. 친구 세쿤두스가 사망한 뒤 세쿤두스의 어린 아들 소 플리니우스의 후원자이자 스승이 되어줬다. 63년 가이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 시기에 그리스의 유명한 웅변가인 니키타스와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후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총독으로 선임되어 라인 강에 주둔한 3개 군단을 지휘했다. 소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네로 황제가 니키타스를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로 보냈을 때, 두 사람은 서로 화해하고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니키타스는 훗날 소 플리니우스의 가정 교사가 되었다.
68년 4월,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총독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가 폭정을 일삼는 네로를 타도하자는 명분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즉시 라인 군단을 이끌고 출진해 반란에 가담한 베손티오(오늘날의 브장송)을 포위했다. 빈덱스는 베손티오를 구하러 달려왔고, 두 군대는 얼마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서신을 주고받았다. . 빈덱스는 네로를 타도하는데 힘을 보태달라고 청했지만, 루푸스는 거부했다. 이에 빈덱스는 베손티오로 접근했고, 루푸스의 병사들은 즉시 반격했다. 이렇게 벌어진 전투에서, 빈덱스의 반란군은 괴멸되었고, 빈덱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네로에게 반감이 있던 건 라인 군단도 마찬가지였기에, 그들은 루푸스에게 황제가 되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루푸스는 단호히 거부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베르기니우스는 그의 병사들 앞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황제에게 경의를 표했고, 자신은 황제라는 명예를 스스로 취하지 않을 것이며,
원로원이 별도의 인물을 선출하기 전에는 누구도 그 명예를 취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군단병들은 루푸스가 끝까지 거부하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더 이상 네로를 위해 싸우지 않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그 사이 네로는 궁지에 몰린 끝에 자살했고, 갈바가 새 황제에 올랐다. 갈바는 루푸스를 잠재적인 정적으로 여기고 해임시킨 뒤 방탕하고 탐욕스럽기로 유명한 비텔리우스와 늙고 장애가 있는 호르도니우스 플라쿠스를 라인 군단 지휘관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69년 1월 갈바에게 불만을 품은 군단병들이 비텔리우스를 받들어 반란을 일으키면서, 갈바의 이 선택은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69년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와 함께 보결 집정관에 선출된 그는 갈바를 시해하고 황위에 오른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를 지지했다. 그 해 4월 오토의 군대가 비텔리우스를 지지하는 라인 군단에 패배했다. 패잔병들은 그에게 자살한 오토를 대신하여 황위에 올라 비텔리우스 일당에 맞서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거부했다. 이후 원로원에게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얻어낸 뒤 파비아에서 비텔리우스와 대면했다. 한때 그의 지휘를 받았던 병사들은 오토를 따랐던 그를 배신자로 간주하고 죽이려 했지만, 비텔리우스가 이를 막은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후 베스파시아누스와 비텔리우스간의 내전이 벌어지자 로마 북서쪽의 작은 해안 마을인 알시움(현재 라디스폴리)에 있는 사유지에 은거하여 문학 살롱을 열고 많은 문인들과 교류했고, 옛 문인들의 로마 역사서와 시를 탐독했다. 그렇게 30여 년간 조용히 지냈던 그는 96년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새 황제에 선임된 네르바의 부름을 받고 97년 로마로 돌아온 뒤 네르바와 함께 집정관에 올랐다. 현대 학자들은 그가 과거에 황제가 되기를 거부하고 원로원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던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군대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던 네르바가 그를 내세워서 군대를 복종시킬 의도로 불러들였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러나 그는 3번째로 집정관에 오른 영광을 오래 누리지 못했다. 집정관이 된 직후 연설을 하려 했을 때,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리자 몸을 굽혀 책을 집으려 했다가, 광택이 나는 바닥에 미끄러 넘어지는 바람에 엉덩이뼈가 부러졌다. 이후 몇 달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고, 당시 집정관을 맡고 있던 역사가 타키투스가 장례식 연설을 맡았다. 루푸스의 묘비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혔다고 한다.
빈덱스를 물리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국을 위해 제국의 권력을 돌려준 루푸스가 여기에 있다.
소 플리니우스는 서한집에서 루푸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의 미덕은 일부 황제들의 의심과 질시를 샀지만, 끝까지 체포를 피하고 살아서 진정으로 선하고 우호적인 통치자가 등극하는 것을 보았다. (중략) 그는 83살이 되었고, 은퇴하여 우리 모두의 깊은 존경을 받으며 살았으며, 손이 떨리는 것 외에는 건강이 양호하여 문제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루푸스는 알시움에 있는 자신의 집을 소 플리니우스에게 물려줬고, 플리니우스는 그 집을 시어머니에게 물려줬다. 그가 죽은 지 9년 후에 플리이누스가 시어머니를 방문했을 때, 그는 루푸스의 소박한 무덤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찬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