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52대 황제
아르카디우스 ARCADIVS | Ἀρκάδιο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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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플라비우스 아르카디우스 (Flavius Arcadius) |
출생 | 377년 |
로마 제국 히스파니아 | |
사망 | 408년 5월 1일 (향년 31세) |
로마 제국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395년 1월 17일 ~ 408년 5월 1일 (13년 108일) | |
전임자 | 테오도시우스 1세 |
후임자 | 테오도시우스 2세 |
부모 |
아버지 :
테오도시우스 1세 어머니 : 아일리아 플라킬리아 |
배우자 |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
자녀 | 플라킬리아, 아일리아 풀케리아, 아르키디아, 테오도시우스 2세, 마리니아 |
종교 |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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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52대 황제. 395년부터 408년에 죽을 때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근거지를 삼고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을 다스린 황제이다. 제국이 테오도시우스 사후 분리 된 이후 최초의 동로마 제국의 황제다.[1]2. 생애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377년 또는 378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와 아일리아 플라킬리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동복형제로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인 호노리우스가 있다. 아르카디우스는 동생 호노리우스 못지 않게 못난 인물이었다. 아르카디우스는 키가 작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말과 행동이 굼뜨고 눈꺼풀이 두꺼워 늘 졸린 듯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거기에다 성격도 유약하고 머리도 좋지 않았다.사실 그에 대한 평가는 호노리우스보다 더 박해도 할 말이 없는 게 그나마 호노리우스는 가끔 가다 통치라는 걸 하는 척이라도 했고 나름 인선을 잘 한 사례도 있지만 아르카디우스는 후계자인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를 낳은 걸 제외하고는 아예 한 일이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사람 보는 눈은 좀 있어서 후계자를 위한 후견인 선정은 매우 잘해놓았다.
3. 동서 분리
그는 383년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공동황제가 되었고, 395년 아버지가 죽자 17살의 나이로 제국의 동방을 통치했다.[2] 이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호노리우스의 서로마와 아르카디우스의 동로마로 분리되었다.[3]4. 통치
4.1. 루피누스의 섭정
동생 호노리우스가 유능한 장군 스틸리코의 도움으로 반달족을 물리는 동안, 동생 못지 않게 무능한 아르카디우스 역시 프라이펙투스였던 루피누스의 영향 아래 있었다. 하지만 루피누스는 스틸리코보다 다소 떨어지는 인물이라서, 아르카디우스 재위 초기인 395년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반란을 일으키고 제국의 영토를 유린할 당시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4] 하지만 섭정으로 실권을 잡은 루피누스는 자신의 딸을 아르카디우스에게 시집보낸 뒤, 자신의 영향력을 더욱 키우려 하였으나,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스틸리코를 지나치게 견제하던 그는 396년 11월 17일의 열병식에서 병사들에게 난도질당하며 사망하였다4.2. 에우트로피우스의 섭정과 가이나스의 야심
어떤 사람은 시골의 저택을 바쳐 아시아의 관직을 얻었고, 다른 사람은 아내의 보석을 바쳐 시리아의 관직을 얻는다. (...) 유트로피우스의 공식 대기실에는 각 지방의 관직 가격을 알려주는 요금표가 걸려있다.
클라우디아누스, 매관매직을 한탄하며[5]
클라우디아누스, 매관매직을 한탄하며[5]
같은 해인 395년, 동고트족 가이나스(Gainas)가 이끄는 로마군대가 황제를 뒤에서 조종하는 프라이펙투스 루피누스를 암살한 이후, 루피누스가 행사하던 지위는 대머리 노인 환관이자 의전관인 에우트로피우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무능한 황제를 조종하면서, 지위강화를 위해 자신이 교육한 프랑크족 출신의 미녀 아일리아 에우독시아[6](Aelia Eudoxia, ? - 404년)와 아르카디우스를 결혼시켰다. 이 결과, 그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황후가 된 에우독시아 역시 야심있는 여인답게 남편 아르카디우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려고 노력했고, 에우트로피우스가 그녀를 협박하자 그녀는 그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400년 초에 가이나스는 막후 공작으로 에우트로피우스를 실각시키고 아르카디우스로부터 군 사령관 직을 빼앗다시피하여 얻게 되었다[7]. 자연히 동로마의 고관들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민들은 게르만 족 군대의 세력 강화에 불쾌하게 반응했고, 결국 400년 7월 12일,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수많은 게르만 족 병사들이 학살당하고 말았다. 이때 가이나스 역시 실각하여 추방되었고 동로마 군부에서의 게르만족 출신의 세가 급격히 위축되었다. 이후, 새로운 권력은 아르카디우스의 아내였던 에우독시아와 프라이펙투스인 아우렐리아누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참고로 이스탄불에 있었던 아르카디우스 기념탑은 이 숙군 작업을 아르카디우스의 승리로 간주해서 세운 승리 기념탑이다. 물론 이 숙군 작업이 5세기의 동로마가 서로마처럼 되지 않는 데에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도 창칼 맞대고 싸우는 일반적인 전쟁이나 전투가 아닌데도 승전기념비를 세운 것은 부족한 권위를 채우기 위한 정치적 선전이라고 볼 수 있다.[8]
4.3.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황후의 도안이 담긴 화폐 |
새로이 권력을 쥐게 된 에우독시아는 프라이펙투스 아우렐리아누스와 함께 궁정에서 반(反) 야만족 파를 이끌며 영향력을 확장해나갔다. 에우독시아는 인기가 높고 금욕적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9] 주교와 갈등을 벌였기에 평판이 좋지 않았다. 거기에다 방탕하고 음란한 성품이었기에 두 사람 간의 다툼은 더욱 잦았다.
에우독시아 황후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주교의 대립을 다룬 장면이 그려진 역사화 |
크리소스토무스는 여러 차례 에우독시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그때마다 에우독시아는 그가 강단에서 자신을 겨냥한 발언인 사치와 부도덕에 대해 분노했다. 결국 에우독시아는 크리소스토무스를 파면시키기 위해 교회 안에 있던 그의 정적들과[10] 험담가들과 손을 잡고, 403년 처음으로 파면을 시도했다. 이러한 시도는 404년부터 끊임없이 시도되어 결국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르카디우스는 아내의 뜻에 따라 크리소스토무스 주교를 실각시켜 추방했다. 더해서 이 일의 결과는 형제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 간에 균열이 생기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호노리우스가 크리소스토무스를 지지하며 아르카디우스 부부에게 개입했기 때문이다. 두 형제는 408년 아르카디우스가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않았다. 에우독시아는 2년 전인 406년에 출산 중 사망했다.
5. 사망
아르카디우스는 정치나 군사적인 관심은 거의 없었지만, 나름 경건한 인물로 종교에는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재위기간 내내 실권은 프라이펙투스, 용병대장, 환관, 황후에게 넘긴 채 명목상으로 통치할 뿐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간혹 일이라는 걸 했던 호노리우스와 달리 국가에 미친 악영향이 미미한 수준이라 평가가 나쁘지 않다. 아르카디우스의 이름을 딴 아르카디오폴리스(Arcadiopolis)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에 있었고 동로마 시대 트라키아의 중심지였다. 아르카디우스에 대한 평가가 심하게 나빴다면 이런 요지에 이름을 붙여줄 리가 없다.408년에 만 31세의 나이에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7살짜리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제위를 넘기고 죽었다. 마지막의 테오도시우스 2세의 후견인 선택을 보면 본인이 유능하지는 않아도 나름대로 사람 보는 눈은 있었던 듯하다. 테오도시우스 2세 항목 참조.
6. 매체에서
한국의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팬픽 소설인 아르토리아 로망스에선 세이버를 범하려는 동로마의 폭군으로 묘사된다.(...) 심심하면 오스만 제국(?!)을 침공하는 전쟁광으로 나오는데(?!?!) 애초에 해당 소설 자체가 역사적 고증은 눈꼽만치도 하지 않은 막장 소설이니 신경 쓸 것은 없을 듯.토탈 워: 아틸라에서는 동로마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동생처럼 능력치와 특성이 나쁘고 동쪽에 주적인 사산조가 버티고 있지만 게임 시작시 불가침 조약이 맺어져 있는지라 훈족과 온갖 야만족이 몰려드는 서로마에 비해선 쉽다. 물론 그리스에 서고트의 알라리크가 있고 중동지방에선 타누흐가 깽판 치니 마냥 넋놓고 있을 처지는 아니다. 루피누스와 함께 총독으로는 영 못써먹을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게임을 진행하다보면 나름 쓸만한 트레잇들도 붙는다는 점에서 무조건 암살시키는 것이 답인 동생 호노리우스 보다는 고평가 받고 있다.
로마 디펜스에서는 동방의 황제로서 등장했는데 초반 등장이 고증대로 무능하다. 특히 가니우스의 쿠데타에서 이 모습이 돋보여 탈출해야 한다는 친위대의 말도 안듣고 안에서만 벌벌 떨고 있어 때마침 병상에서 일어난 호노리우스가 뒤처리를 다했다(...) 쿠데타가 진압된 후에도 정치를 호노리우스와 에우트로피우스에게 떠넘기고 칩거해 버렸는데... 최신화 기준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안그래도 티마시우스의 반란 당시에 친서 관련 논란이 있던 상황에[11] 갑자기 죽은지라 이를 안 동방 프라이펙투스 파비우스의 혼란을 불러 일으키고 그 와중에 주인공이 암살 배후로 의심 받는 등 엄청난 후폭풍이 예상된다. 다음화에 에우트로피우스가 밝히길 황제는 우울감을 견디다 못해 자결했으며 동방의 혼란을 막기 위해 숨기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단 의심가는 이는 다 잡고 있던 파비우스는 에우트로피우스 역시 잡으려 들었고 에우트로피우스는 할 수 없이 훈족에게 도망치게 되며 주인공을 의심한 노장 사투르니누스도 잡히는 등[12] 동방에 큰 후폭풍이 들이닥쳤다.
[1]
다만 제국은 이전에도 지속적으로 분할된 상태에 자주 있었기 때문에 최초의 동로마 황제라 보기에는 어렵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최초의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불려도 무방하며, 아르카디우스의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1세도 동로마 일대를
그라티아누스로부터 받아서 황제가 된 케이스였다. 다만 476년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양대 제국이 한번도 통합되지 못했기 때문에 영구 분열된 동방 제국의 첫 황제라고도 볼 수 있다.
[2]
동생 호노리우스는 서로마를 통치했다.
[3]
로마 제국은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부터 분할 통치를 도입했으며, 이후로도 분할과 재통합을 반복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행정적 차원에서의 분할이었으며 서로 다른 국가로 쪼개진 적은 없다. 다만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 치세 이후로 서방 영토의 소멸까지 동서를 통합한 황제가 등장하지 않았다.
[4]
동로마의 발칸 야전군이 알라리크 반란 당시 스틸리코에게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5]
클라우디아누스는 스틸리코가 고용한 시인이자 선전가(panegyrist)로 스틸리코를 찬양하였지만 에우트로피우스, 루피우스, 알라리쿠스 등 고용주의 적은 비판하였다.
[6]
불과 몇 년 전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정황상 매우 높은 확률로 암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패사한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의 누이이다(...)
[7]
가이나스는 서방의 스틸리코와 같은 권력을 동로마에서 누리려고 하였다.
[8]
영어 위키백과 '
Column of Arcadius'에 'The column's construction was begun after 401 to commemorate Arcadius' triumph over the Goths under the renegade magister militum Gainas in the wars of 399–401.'라는 대목이 있다.
[9]
그가 유배지에서 죽은 뒤, 사람들은 그리스어로 '황금 입'이라는 뜻의 크리소스토무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요한 금구(金口)'라고도 부른다.
[10]
그 중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수장인
키릴루스도 있었다.
[11]
티마시우스가 내세운 명분이 황제가 보낸 친서였다. 물론 이 친서라 주장된 편지는 파비우스가 찢어버렸는데 그는 문맹이라 글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 즉, 찢어버린 편지가 진짜 친서일 가능성도 있는 것. 현재 친서의 정체가 무엇인지가 작품 내 최대의 떡밥이다.
[12]
파비우스 왈, 주인공은 일단 행동하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이런 음모 꾸밀 머리가 안된다며 계속 주인공을 의심하는 사투르니누스가 켕기는게 있다고 본 것. 물론 주인공은 이 점에 대해 황제는 누가 죽인게 아니고 자결한 것이 분명하기에 파비우스가 단단히 잘못 짚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