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 라틴어: Aulus Atilius Calati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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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조부)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아버지) 파비아(어머니)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외삼촌)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58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플로루스 |
동기 |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파테르쿨루스 |
후임 |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블라시오 |
임기 | 기원전 254년 |
전임 |
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 노빌리오르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
동기 | 스키피오 아시나 |
후임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블라이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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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독재관, 감찰관.2. 생애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가이우스와 아울루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집안인 파비우스 가문의 여식인 파비아이며, 외삼촌은 기원전 292년, 기원전 276년, 기원전 265년 집정관을 역임하고 기원전 273년 이집트에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이다.기원전 258년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파테르쿨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오르기 이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그는 당시 시칠리아에서 한창 진행중이던 제1차 포에니 전쟁에 투입되었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그는 시칠리아 방면 로마군의 유일한 사령관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폴리비오스의 기록에 따라 그가 동료 집정관과 함께 시칠리아에 부임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는 시칠리아 방면 카르타고군의 요충지인 파노르무스에 접근하여 카르타고 사령관 하밀카르를 도발해 그의 부대를 성벽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하밀카르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는 동료와 함께 히파냐, 미티스트라티온, 엔나를 공격해 모조리 함락시켰다. 특히 기원전 259년 로마군의 공성을 7개월간 버텨냈던 미티스트라티온은 이번에도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수비대가 야밤에 빠져나가자 항복했지만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불태워진 뒤 주민 전원이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나가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이후 카이아티누스는 카마리나로 이동하던 중 매복 공격을 받아 죽을 뻔했지만, 대대장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플라마가 분견대를 이끌고 적의 주의를 산만하게 한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뒤이어 카마리나를 포위한 뒤 시라쿠사에서 보낸 공성 무기 덕분에 공략에 성공했다. 기원전 257년 로마로 귀환해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54년 스키피오 아시나와 함께 집정관에 재차 선임된 뒤 카마리나 앞바다에서의 폭풍으로 파괴당한 로마 함대 재건을 진두지휘해 3개월 만에 220척의 배를 진수한 후 파노르무스 공략에 착수했다. 이때 그는 육군을 이끌었고, 스키피오는 해상 봉쇄를 맡았다. 그 결과 파노르무스 공략에 성공한 두 사람은 여세를 이어가 테르마 시를 제외한 시칠리아 섬의 거의 모든 북부 해안 도시들을 복속시켰다. 이후 로마에 귀환했고, 스키피오 아시나가 거행한 개선식에 동료 무관으로 참석했다. 이로 볼 때 스키피오가 원정을 주도했고 그는 보조 역할만 수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49년 독재관의 자격으로 시칠리아에 재차 출진했다. 독재관이 이탈리아 본토 바깥으로 나간 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전에는 그가 유일했다. 그러나 어떤 고대 기록도 이 당시 그의 활약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 기원전 247년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아티쿠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으나 감찰관으로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기원전 241년 전직 집정관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부관 퀸투스 발레리우스 팔토가 카르타고를 상대로 최종 승리를 거둔 뒤 누가 개선식의 주인공이 되는 지를 놓고 심하게 대립했다. 카툴루스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승패가 판가름났으니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팔토는 카르타고를 최종적으로 굴복시킨 아이가테스 해전을 실제로 지휘한 것은 바로 자신이니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논쟁에 개입해 팔토는 카툴루스의 부관으로서 카툴루스가 정한 대로 지휘했을 뿐이니 카툴루스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로원은 고심 끝에 카툴루스는 카르타고인에 대한 승리를 기념해 개선식을 거행하고, 팔토는 시칠리아에서의 해전를 승리로 이끈 것을 기념해 또다른 개선식을 거행하게 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로마에 희망의 신을 섬기는 신전을 세웠다고 한다. 키케로는 그가 과거에 가장 저명한 로마인 중 한 사람이었으며 실로 훌륭한 경력을 쌓아 모두의 찬사를 받았다고 극찬했다. 하지만 기원전 241년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후손 역시 전해지지 않는다.기원전 245년과 기원전 235년 집정관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불부스가 그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