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43대 황제
갈레리우스 GALERIV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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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Gaius Galerius Valerius Maximianus) |
출생 | 258년 |
로마 제국 다키아 | |
사망 | 311년 5월 (향년 53세) |
로마 제국 다키아 세르디카 | |
재위 기간 | 동방 부제 |
293년 3월 1일 ~ 305년 5월 1일 (2년) | |
동방 정제 | |
305년 5월 1일 ~ 311년 5월 5일 (6년) | |
전임자 |
디오클레티아누스 막시미아누스 |
후임자 |
막시미누스 다이아 리키니우스 |
부모 |
양부:
디오클레티아누스 친모: 로물라 |
배우자 | 갈레리아 발레리아 |
자녀 | 칸디디아누스, 발레리아 막시밀리아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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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43대 황제. 사두정치를 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 갈레리아 발레리아의 남편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동방 부제를 거쳐 장인의 은퇴 후 동방 정제로 있었다.2. 생애
2.1. 초기 생애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세르디카(오늘날의 불가리아 소피아) 근교 로물리아눔 출신이다. 아버지는 트라키아인이었고 어머니는 다키아인이었다고 전해진다.[1] 미천한 변방 출신으로 여동생이 있었는데,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바로 갈레리우스 여동생의 아들이다.부친은 일리리아 일대에서 살던 목동이었고, 갈레리우스는 비슷한 출신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직업을 가업으로 이어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 얻게 된 별칭이 집안 가업인 목동에서 따온 아르멘타리우스(Armentarius)였다.
2.2. 황제
세르비아 동남부에 남아있는 펠릭스 로물리아나. 갈레리우스가 모후를 위해 세운 궁전이다.
대개의 일리리아 출신 황제들이 그렇듯, 출세를 위해 로마군에 입대해 고위군 장교를 거쳐 로마 제국 지배층까지 오른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비슷하게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나 고위장교를 거친 세베루스 2세와 달리, 굉장히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또 그는 부제로 지명되기 전부터 탁월한 전략가이자 뛰어난 다뉴브 일대 주둔군 장군으로 평가받았다. 이후 당시 동부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제(帝)의 황녀 갈레리아 발레리아와 혼인하기 위해 본부인과 이혼했으며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제에 의해 그의 직속인 동부 부제(副帝)로 책봉되었다. 서방 부제로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임명되었다.
갈레리우스는 부제로 즉위하자 이민족 격퇴에 힘썼다. 293년엔 도나우 강의 야만족들을 격퇴하여 도나우 강 일대를 수복했고, 298년엔 사산 왕조(페르시아)의 나르세스 1세를 상대로 사탈라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크테시폰을 넘어 티그리스 강 동쪽까지 진출한다. 이는 로마 제국 역사상 최대의 동진(東進) 사례이기도 하다.
점령지에 대해, 공세종말점의 개념에 따라 사산조와 강화조약[2]을 맺어 크테시폰과 아르메니아 지방을 교환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약 40년간 평화상태를 유지하게끔 했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정제가 재위할 시기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가 이뤄졌는데 이는 부제였던 갈레리우스가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제에게 황궁에 화재가 일어난 건 기독교인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독교 신자들을 무참히 처형하는 조직적 박해가 이뤄졌다.
이후 305년 갈레리우스는 장인이자 동부 정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제의 돌연 은퇴 선언으로 그를 계승하여 동부의 정제가 되었다. 동시에 서방 부제였던 콘스탄티우스도 서방 정제가 되었다. 즉, 2차 사두정치의 시작인 셈이나 1차와 다르게 이것은 새로운 로마 내전의 씨앗이 되었다.
갈레리우스는 외조카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동방, 자신의 신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서방 부제로 임명했다. 306년 서방 정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군대를 일으켜 브리튼과 갈리아를 장악하고 그곳에서 황제로 추대되었는데,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를 서방 부제로 인정해 주고, 기존의 부제였던 세베루스를 서방 정제로 승격시켰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공치제였던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서방 정제를 참칭하고 아버지를 중조시키자( 사두정의 내전), 세베루스는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공격했지만 도리어 패하고 포로로 잡혀 처형당했다. 갈레리우스 역시 이탈리아를 공격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퇴각한다.
308년 갈레리우스는 친구 리키니우스를 서방 정제로 삼았으나, 막시미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 막시미누스 다이아 모두 반발했다. 이후 311년 중병으로 몸져눕자 기독교인들에 대한 관용조서를 발표했으나 6일만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 이후 로마 제국은 본격적인 내전에 돌입하였고, 콘스탄티누스 1세가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내전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