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0:59:57

사두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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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정치
Tetrarchia
파일:사두정의조각상.jpg
사두정의 네 황제 조각상.[1]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시기 1차 293년~ 305년
2차 305년~ 307년
3차 308년~ 311년
창건자 디오클레티아누스
주요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막시미아누스
갈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콘스탄티누스 1세
막센티우스
리키니우스

1. 개요2. 시기
2.1. 제1차 사두정치2.2. 제2차, 제3차 사두정치
3. 구조4. 장점5. 문제점6. 영향


[clearfix]

1. 개요

사두정치(四頭政治)는 로마 제국의 정치 체제 가운데 하나이다. 라틴어로 테트라키아(Tetrarchia)인데, 테트라(tetra)는 그리스어로 숫자 4를 뜻하는 접두사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치세인 284 ~ 305년 중 293 ~ 305년까지 12년간 계속된 제1차 사두정치와 305 ~ 307년 이어진 제2차 사두정치, 308 ~ 311년까지 이어진 제3차 사두정치로 나뉜다.

이 시기를 포함하여 여러 황제가 동시기에 한 국가를 통치할 경우, 그 황제들을 공치제(共治帝)라 부른다.

2. 시기

2.1. 제1차 사두정치

파일:Prima_tetrarchia_Diocletianus.png
293년에서 305년까지의 사두정치
막시미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갈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친구였던 막시미아누스를 286년 서방의 공동 황제로 올리면서 분할통치를 시작했으며 293년부터 동시에 부장들이었던 갈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각각 동방과 서방의 부제로 삼으면서 사두정치의 서막을 열었다.

제1차 사두정치 동안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독자적인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으며, 로마 제국을 전제군주국 비슷하게 개조하고 황제 네 명이 담당 구역을 나눠 게르만족 및 이민족의 침입에 대항해 국방을 유지하도록 했다.

따라서 제1차 사두정치는 이름만 '사두' 정치이지 국방을 제외한 부분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거의 단독으로 통치하고 다른 황제들을 지도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아예 스스로를 선임황제라는 뜻의 세니오르(SENIOR)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영어 단어 시니어의 유래이다. 역사상 유명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도 제1차 사두정치 시기에 시행되었다. 제1차 사두정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로마 황제 역사상 최초로 자의에 따라 퇴위하여 305년 끝나고,[3] 각각 서방 부제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동방 부제인 갈레리우스가 서방 정제와 동방 정제로 즉위하면서 제2차 사두정치 시기로 접어들었다.

2.2. 제2차, 제3차 사두정치

제2차, 제3차 사두정치는 동방의 정제 갈레리우스가 주도했다. 서방의 부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갈레리우스의 부장 출신이었고, 동방의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갈레리우스의 외조카[4]였던 것이다.

이렇게 잘 돌아가던 제2차 사두정치는 서방 정제였던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병으로 사망하고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군대가 콘스탄티누스 1세를 정제로 추대하면서 흔들리게 된다. 계승원칙상 원래 부제가 정제로 올라와야 했다. 그런데 군대가 콘스탄티우스가 정략결혼을 위해 본처였던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를 버렸지만, 그 사이에 얻은 아들인 콘스탄티누스를 정제로 추대하면서 혼란이 생긴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 콘스탄티우스와 1년간 같이 지냈다. 이때는 브리타니아 원정 중이었으므로 전시였기에, 실력이 있다면 그걸 드러내기는 평시보다 훨씬 좋은 환경이다. 더구나 내전이라면 정치적 부담이 있지만, 대외 전쟁이면 부담이 전혀 없다. 아들인 콘스탄티누스가 휘하 군인들에게 모범을 보여 천천히 군심을 모으다가,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져 타계가 가시권에 보이자, 여차하면 추대해 달라고 미리 뒷공작을 했을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도 주변에서 추대를 당했다고 보기에는, 로마처럼 혈통적 요소가 약하고 군사적 실력주의 문화가 강한 사회에서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갈레리우스는 서방 부제였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서방의 정제로 올리고, 콘스탄티누스를 서방의 부제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누스의 불만을 잠재웠다. 콘스탄티누스는 여기에 순응하고 부제직을 받아들였으나 문제는 퇴위한 선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에게 있었다. 막시미아누스는 서방 정제로만 20년 가까이(286~305년) 있었고, 자기는 그 적장자이지만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에 비해 콘스탄티우스는 그 20년 내내 아버지의 부하인 부제였고, 정제는 꼴랑 1년 하고 죽었다. 그마저도 막시미아누스가 죽은 것도 아니었고, 자의로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물귀신마냥 같이 용퇴하자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내려간 결과였다. 그의 장자[6] 콘스탄티누스는 그 1년 사이에 아버지 군대 안에서 뒷공작과 큰 그림을 그려 추대받아서, 먼저 정제로 흥정을 했고 결국 정제는 아니지만 부제를 받아냈으니까. 빡치려면 빡칠 만하다. 사두정치에 내재된 문제점이 이것이다.

결국 막센티우스는 로마에서 원로원과 일반 시민,[7] 프라이토리아니(근위병)[8] 등의 도움을 받아 황제를 칭하게 되었고,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도 다시 황제 자리에 복위했다. 그리고 막센티우스는 서방 정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제압하면서 제2차 사두정치는 완전히 붕괴했다.( 사두정의 내전)

그러나 막센티우스의 주장에는 중요한 논리적 결함이 하나 있었다. 그래도 콘스탄티우스 1세는 선임 황제[10] 노릇은 비록 1년이라도 해보고 죽었으나 막시미아누스는 선임 황제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게 치명타였다. 막센티우스가 그렇게 나오면 콘스탄티누스 입장에선 네 아버지는 애초에 선임 황제를 한 번도 해본 적 없었고 넘버2만 해보다가 그만뒀는데 이제 와서 나한테 뭔소리냐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막시미아누스조차 아들과의 불화로 인해 아들을 황제로 인정하기는 커녕 폐위시키려다가 실패해서 사위인 콘스탄티누스에게 도망갔고, 결국 이 틈을 타 갈레리우스가 308년 상황을 정리하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를 불러모은 갈레리우스는 이 자리에서 막시미아누스를 다시금 은퇴시키고, 막센티우스를 공동의 적으로 선포한다. 정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죽였다는 팩트가 확고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였던 리키니우스를 서방의 정제로 삼고, 서방과 동방의 부제로 각각 콘스탄티누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유임시킨다. 이때가 제3차 사두정치다. 저 회동 자체가, 물론 사두정치를 지키는 의도였겠지만, 오히려 스스로 사두정치를 파괴했다고 볼 수 있다. 정제를 부제에서 올려야지, 웬 듣보잡을 자기 친구라고 바로 정제로 올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명이었던 리키니우스의 정제 즉위는 서방 부제 콘스탄티누스[11], 동방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12]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그리고 311년 갈레리우스가 죽게 되자 결국 제3차 사두정치는 서로의 불신, 불만이 생기면서 무너졌다.

311년 갈레리우스의 사후 리키니우스는 동방에서 정제를 칭한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정복하기 위해 동방으로 향하게 되고 대신에 서방의 부제였던 콘스탄티누스와 혼인 동맹을 맺었다. 이에 대항하여 막센티우스 막시미누스 다이아 역시 서로 동맹을 맺으면서 2:2 구도의 양상이 되었다. 이 시점에서 적법한 정제는 리키니우스 하나 뿐이었으나 리키니우스가 누가 봐도 말이 안되는 낙하산 인사였기에 콘스탄티누스는 막시미누스 다이아 같이 일부러 정제를 자칭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를 격파하고 SPQR에서 정식으로 황제 추대를 받아 정제가 되었고, 313년에는 리키니우스가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격파하여 정제를 참칭하는 부제가 사라짐에 따라 콘스탄티누스-리키니우스 체제가 들어선다. 이 체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막시미아누스 구도와 같았으나, 콘스탄티누스는 애초에 낙하산 인사 리키니우스에 대한 존경심 따윈 없었고 리키니우스도 본인이 정제로서는 선배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군공과 정통성이 오히려 콘스탄티누스에게 밀렸던 이상 둘이서 오래 갈 수가 없었다. 결국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 사이의 내전이 발생하고 이 내전 끝에 콘스탄티누스가 유일한 황제가 되면서 로마는 다시 통일 황제의 휘하에 들어갔다.

3. 구조

사두정치는 다음과 같은 구조이다.
  • 황제는 정제와 부제로 나뉜다. 정제는 부제보다 높고, 부제를 원칙적으로 지휘통솔할 수 있다.
  • 전체 구성은 정제 2명, 부제 2명이다. 제국 전체를 4분해서 서방 정제-서방 부제, 동방 정제-동방 부제로 나눈다. 하지만 이것은 제국을 동등한 주권을 가지고 외교권을 가지는 다른 국가로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국방 담당구역을 지정하는 것이다. 몇 십 년 후 테오도시우스 1세가 395년에 타계하고 나서 그의 아들 아르카디우스 호노리우스가 행한 소위 '동서로마 분할'도 이것과 같다. 하지만 이후 다시 합쳐지지 못한 채 서방이 망했기에, 이 '마지막' '구역 지정'을 그냥 '분할'이라고 후대인들이 부를 뿐이다. 영어로는 영어 위키백과 등 여러 자료에서 just an administrative division, 즉 행정구역 분할이라고 칭한다.
  • 정제는 일정 기간 통치한 다음 은퇴하고, 부제가 정제로 승격해 새로운 부제를 임명한다. 단, 여기서 일정 기간은 딱 정해진 기간이 아니라 정제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적절한 기간을 뜻한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제외하고는 죽은 다음에 계승이 이루어졌다.
  • 각 황제들은 자신이 담당한 구역에서 군사적 지휘권을 보유하고 해당 방면의 방어를 책임진다. 대규모 전면전 같은 사태가 나면 황제들끼리 회의하는 등 과정을 거쳐 다른 황제로부터 군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 1차 사두정치[22]에 한해서, 동방 정제가 가장 우월하고, 군사적 측면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 대해 전체 권리를 가진다.[23] 군사적 측면에서도 대규모 전면전을 위해 다른 황제와 군대를 동원하고 황제를 임명할 권한 등을 보유한다.

4. 장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사두정치를 만든 이유는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 방어의 효율성 증가. 황제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여러 대책을 동시에 수행해 방어의 효율성을 높인다. 한마디로 말해서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이 들어와도 즉시 대처가 가능하다.
  • 내란의 조기 진압. 황제 4명이 상대적으로 좁아진 자신의 관할 구역을 철저히 감시해 내란의 가능성을 줄이고, 내란이 일어난다 해도 이를 조기에 진압한다. 종합하자면 내란을 단순한 소란으로 끝냄으로써, 내란이 길게 이어지거나 확대되어 내전이 되는 것을 막는다.
  • 능력 위주의 황제 즉위. 방어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임명되므로 다른 건 몰라도 군사적 능력 하나는 우수한 인물들이 혈통에 관계 없이 황제위에 오를 수 있다. 이에 따라 로마군의 전투능력을 높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5. 문제점

그러나 사두정치가 존속력이 강하지 못하고 대규모 내전으로 끝난 이유는 아래와 같다.
  • 황제가 여러 명이다. 즉 국가에 최고 지도자가 여러 명이라는 이야기인데,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다. 곧 단일 황제로 통합되기까지 내전이 발생하거나, 각자 국가를 찢어서 나누어 가지는 분할 상태가 돼버린다.
  • 1차 사두정치와 2차 사두정치는 성격 자체가 다르다. 원래부터 단독 황제고 모든 권력을 가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직접 유능한 장수와 동료를 골라서 황제(임페라토르)로 임명한 것이므로 이 경우에는 군사력(임페리움)만 대여 형식으로 배분한 것이기 때문에 오래 유지가 가능하다. 즉 1차 사두정치는 말만 사두일 뿐, 실제로는 황제 한 명과 장군 3명이다. 페르시아에서도 첫 사두정치 당시 전투에서 승리한 후 동방 부제였던 갈레리우스 측을 군주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이런 포인트를 확실히 알고 있었고, 로마 측도 처음에 그렇게 '부제는 군주 비슷한 무언가지만 실제 군주는 아니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공포했거나, 내지는 페르시아의 그런 시각을 묵인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건 1차 사두정치 때만 가능한 이야기이므로 2차 때에 이르면 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 실력 위주로 황제를 선발하다 보니, 사람들이 보통 인정하는 왕위 계승의 법칙에서 중요한 왕위 계승권이 있는 황제의 아들을 제외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내란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제위에 오르지 못한 황제의 아들이라는 점만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온다.[24] 사실 오현제 시대에서도 다들 아들이나 손자가 없었기에 양자로 다른 유능한 사람을 후계자로 삼을 수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5촌 조카이긴 했다.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의 외사촌이 트라야누스다. 반대로 말하면 트라야누스의 고종사촌의 아들이 하드리아누스다. 부자 상속이 아니라고 해서, 5현제끼리 전부 혈연이 서로 없었던 것은 아니다.[25] 최후의 오현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들이 있었으므로 부자 상속이 이루어져 최악의 암군인 콤모두스가 황제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26]

6. 영향

이런 문제점으로 인해 이후의 황제들도 공치제 제도를 활용하긴 했으나, 그 대상을 황제의 자식이나 황제의 형제 등 친족으로 한정했으며, 일시적인 제도로 유지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더라도 서로 내전이 발생하거나 기타 분란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서 항구적인 제도로 존속하지는 못했다. 특히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이게 심하다. 부자간, 심하면 까지(...) 할아버지뻘(종조부 등)과 손자뻘이 아니라 진짜 친할아버지와 친손자다!

한편, 사두정치 때 궁정 내지는 황제의 거처를 이탈리아 반도 밖에 둘 수도 있다는 개념이 시작되었다. 사두정치 당시의 니코메디아(이즈미트), 메디올라눔(밀라노),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트리어), 시르미움과[27] 5세기 서로마 당시의 라벤나에 대해서는 영어권 서적이나 영어 위키백과 등에서 'Imperial residence(황제의 거처)'라는 표현으로 지칭하는 것이 많이 보인다. 서로마 당시의 밀라노와 라벤나에 대해서는 수도(capital)라고 지칭하는 경우도 많으나, 엄밀히 말하면 서로마 원로원은 거기로 옮겨가지 않은 채 로마 시에 계속 있었고, 밀라노 혹은 라벤나의 시장은 한 번도 한국식으로 말하면 특별시장(Praefectus urbi)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밀라노 및 라벤나가 정식 수도는 아니었고, 서로마의 명목상 수도는 멸망 때까지 계속 로마 시였다.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경우는 좀 다른데, 교과서 등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를 했다고 서술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새로운 Imperial residence(황제의 거처)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전술한 도시들도 황제의 거처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을 때 확장 공사를 했으리라고 추정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그 확장 공사의 스케일이 차원이 달랐기 때문에, 같은 Imperial residence(황제의 거처)라지만 보다 높은 위상[28]에서 출발했던 셈이고, 이게 스노우볼이 굴러서, 330년 완공 후 불과 한 세대 정도 지난 359년에 시장과 시의회가 로마 시와 동급으로 격상되었기 때문에 이 때 비로소 imperial residence(황제의 거처)를 탈피해 완전히 정식 수도가 되었다고 본다.

당시 및 그 이전 군인 황제 시대부터 이미 이렇게 황제의 거처 역할을 맡았었던 여러 도시들이 새로운 로마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Two Romes》라는 책의 399p에 “In the generations before Con­stantine, when emperors ceased to reside at Rome, we find a proliferation of provincial cities hosting the court and being called New Romes.”라는 대목이 있다. 나아가 후대 본격적으로 전개될 동서 분열의 시초가 되었고, 제국의 중심지가 본래의 이탈리아반도에서 에게 해 주변의 동방 즉, 발칸반도[29] - 소아시아로 완전히 옮겨지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1] 300년경에 만들어졌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가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할때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 4차 십자군이 끝난 후 베네치아로 옮겨졌고, 현재는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에 위치해있다. [S] 선임 황제 [3] 동시에 친구이자 서방 정제인 막시미아누스도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은퇴시켰다. [4] 누나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S] 선임 황제 [6] 적자는 아니지만 서자도 아님. 왜냐면 이혼녀에게서 얻은 자식이기 때문이다. [7]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정제 및 부제위를 장군, 총독들끼리만 주거니 받거니 하니까. 시민들에게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문서에 써 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탈리아를 본국의 위치에서 격하시켜 일반 속주와 동등하게 했고, 면제되던 세금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로마 시는 예외라 계속 면세의 특권이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정부(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로마 시에서마저도 특권을 폐지해 세금을 걷으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 [8] 프라이토리아니의 로마 시내 주둔기지를 정리하는 작업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로 계속 차근차근 시행되고 있었다. [S] 선임 황제 [10] 이게 중요한게, 다른 국가에서는 선임 황제만 진짜 황제 취급을 하고, 나머지는 걍 장군 취급이었기 때문이다. [11] 서방에 영향력을 끼치는 임페라토르가 3명이라 불만. [12] 조카는 자기인데 조카보다 술친구를 우선시하는 숙부에게 불만. [S] 선임 황제 [14] 막시미아누스에게 정제로 추대받으나 진짜 정제는 312년부터 시작 [15] 서방 정제에서 동방 정제로 이동 [16] 동방 부제에서 동방 정제로 계승 [17] 이미 장인인 막시미아누스가 정제로 인정했으나 굳이 쓰진 않음. [18] 선임 황제(317~324) → 단독 황제(324~) [19] 콘스탄티누스를 단독황제로 만든 1등 공신이나 326년 처형당함 [20] 317년 처형 [21] 리키니우스의 아들이자 콘스탄티누스의 조카, 326년 크리스푸스와 같이 처형당함 [22] 디오클레티아누스 선임 황제 시기. [23]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신의 황제 직위를 분할하고, 모든 정제, 부제를 임명했기 때문이다. [24] 그나마 디오클레티아누스 쪽은 갈레리우스(그의 사위)를 통해 그의 인척이 계승하기라도 했지만(막시미누스 다이아), 막시미아누스 쪽은 완전 개차반 취급을 받았다. [25] 네르바 제외. 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지명하긴 했지만, 사실 트라야누스 즉위 자체가 근위대의 쿠데타이므로 혈연관계와 상관 없음. [26] 다만 콤모두스가 워낙 최악의 인간이라서 그런 거지 부자상속 자체는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다. 무엇보다 왕조의 지속성, 안정성 면에서는 부자상속이 택현보다 훨씬 낫기 때문. 당연히 내전의 가능성도 전자가 훨씬 낮다. [27] 시르미움의 위치에 해당하는 현대 세르비아의 도시는 현대의 이즈미트, 밀라노, 트리어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이름도 없고 규모도 작아서 현대 지명을 병기하지 않음. [28] 애시당초 비잔티움의 새로운 법적 명칭은 노바 로마(새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이다. [29] 그중에서도 그리스 트라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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