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27대 황제
발비누스 BALBINV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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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데키무스 카일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 (Decimus Caelius Calvinus Balbinus) |
출생 | 178년 |
로마 제국 | |
사망 | 238년 (향년 60세) |
로마 제국 로마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238년 4월 22일 ~ 238년 7월 29일 (98일) | |
전임자 |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
후임자 | 고르디아누스 3세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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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27대 황제. 3세기의 위기( 군인황제시대) 중 초반부에 해당한 여섯 황제의 해인 238년 약 3개월 동안 재위했다. 즉위 전까지의 이름은 데키무스 카엘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이며, 제위 등극 후 취한 제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데키무스 카엘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 피우스 펠릭스 아우구스투스이다. 238년 4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맞서려는 로마 원로원에 의해 푸피에누스로 잘 알려진 막시무스와 함께 옹립되었다.북이탈리아의 아퀼레이아를 포위한 막시미누스 군에 맞서기 위해, 푸피에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을 때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부자와 어린 고르디아누스 3세를 앞세운 지지자들의 폭력 사건과 수도 치안을 위해 로마에 남았다. 공동의 적이었던 막시미누스가 부하들에게 살해된 뒤, 혼란을 수습한 푸피에누스가 지지를 받자, 이에 불만을 품고 대립각을 세우며 권력 다툼을 벌였다. 이를 노린 반대파와 합세한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에게 암살당했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발비누스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별로 없으며,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그가 137년 집정관을 맡았던 푸블리우스 코엘리우스 발비누스 비불리우스 피우스의 후손이 거의 확실하다고 추측 중이다. 만약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발비누스의 가계는 2~3세기 내내 수많은 원로원의 정계인사를 배출한, 퀸투스 폼페이우스 팔코의 폼페이우스 팔코 가문과 1세기 때 활동한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의 피를 모두 물려받은 당대 최고의 명문가가 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아닌, 기록을 통해 주장되는 내용에 의해 살펴봐도 발비누스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의 귀족이었고, 실제 발언이나 행동들도 그 자부심이 상당했다.동로마 제국 시대의 역사가 요안니스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178년생으로 184년 카파도키아의 총독이었던 카엘리우스 칼비누스의 아들이었고, 즉위 전까지 총 2번 집정관을 맡았다. 이는 당대의 헤로디아누스나 후대의 믿을 수 없는 기록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도 비슷하게 언급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록들에 따르면, 발비누스는 성격 자체가 온화하고 예의바르면서도 상냥했다고 한다. 또 그는 엄청난 부자답게 사냥과 연회를 즐기는 자유분방한 원로원 의원이었고 사업 수완 역시 상당히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신흥귀족인 고르디아누스 1세처럼 처신술이 뛰어나 냉혹하고 독단적인 성향의 세베루스 왕조 황제들의 비위를 잘 맞췄고, 뛰어난 웅변가임에도 크게 자신을 드러내면서 야심을 내비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발비누스는 냉혹하고 옳고 싫음이 분명하기로 유명한 카라칼라에게 신임을 받았고 주변인들에게도 훌륭한 웅변가이자 작가이며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그 장남 카라칼라의 신임을 받은 것을 생각해보면, 카라칼라와 대립한 게타 쪽 인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따라서 203년 또는 211년에 카라칼라 황제는 발비누스를 자신의 동료 집정관으로 추천해 생애 첫 집정관 자리를 맡게 해줬다. 이후에도 세베루스 왕조 치하 아래에서 발비누스는 속주 행정 분야의 능력과 충성심을 인정받아 213년에 두번째로 집정관이 되었다.
세베루스 왕조 존속 기간동안 발비누스는 젊은 카라칼라의 호의를 진심으로 즐기고 황실과 어린 황제들의 호의 아래 힘을 행사했다고 한다. 당대의 역사가 헤로디아누스가 전한 믿을 만한 기록에 따르면, 발비누스는 201~202년에 아시아(오늘날의 튀르키예 아나톨리아)와 레반트, 흑해 연안과 북아프리카 일부를 포함한 7~8개 지역의 총책임자에 임명됐다고 한다. 이는 178년생인 발비누스가 젊은 나이임에도 이미 전직 집정관 출신 중 엄청난 요직에 임명된 인사이고, 세베루스 왕조 황제와 시리아 여제들의 신임을 독차지한 최측근이라는 증거라고 한다. 하지만 헤로디아누스나 신뢰성이 떨어진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모두 발비누스가 동방 일대의 총책임자 위치에 올랐다고 해도, 행정 실무만 맡았음을 직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발비누스는 함께 제위에 오른 푸피에누스와 달리, 젊은 시절부터 군사적 경험이 부족한 전형적인 문인 성향의 원로원 의원임을 알 수 있다.
카라칼라가 암살되고, 마크리누스가 잠깐 즉위했다가 율리아 마이사가 다시 세베루스 왕조를 부활시키고 함량미달의 엘라가발루스를 제위에 올린 이후에는 어떻게 지냈는지 진짜 알기 어렵다고 한다. 다만, 여러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4여년의 기간동안 로마를 떠나 있었고 정치경력이 끝난 상태는 아니었다고 한다. 이는 발비누스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동안 어린 황제의 고문을 맡았던 것으로 강하게 추측된다는 점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어쨌든 발비누스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모후 율리아 마마이아와 독일 마인츠에서 암살되기 전까지 당시 원로원 내에서 세베루스 왕조의 최측근이며, 원로원 귀족을 대표하는 인사였다.
2.2. 황제 즉위
238년 3월,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맞서 싸우자며, 아프리카 속주와 로마의 동맹을 호소했다. 고르디아누스 1세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기록에서 주장한 것과 달리 오현제의 후손이나 명문귀족 태생이 아닌, 튀르키예 아나톨리아의 프리기아 출신 신참자였다. 허나 그는 이 당시 원로원 내의 원로급 중진으로 가장 나이가 많았다. 고르디아누스 1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집안 사람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받은 소아시아 출신 그리스인의 후손인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달리 수백년째 로마시민권자였고,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잇는 세습 의원으로 당시 로마에서 최고 수준의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친구, 친척, 가문 일원들에게 서한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며 근위대, 원로원, 로마서민들에게 온갖 당근을 제안하며 자신들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와 동시에, 두 사람은 자신들의 부하들을 암살자, 선동가로 로마에 파견해, 근위대장 비탈리아누스를 비열하게 암살하고 그가 트락스에게 제거된 양 소문을 퍼뜨렸다. 따라서 로마에서는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를 지지하는 무리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운동이 벌어졌는데, 이때 이들이 보낸 서한이 원로원에 도착했다. 당시 로마 원로원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잔혹함에 불만이 상당해,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1세에게 그들이 말한 내용이 모두 맞고, 즉위 후 모든 약속을 이행해달라고 요청한 다음 이들을 황제로 승인했다. 이때 원로원은 두 황제가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로마에 도착할 때까지 막시미누스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막시무스(푸피에누스)를 포함한 20명의 원로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립했다.238년 4월, 누미디아 속주 총독 카펠리아누스가 두 황제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공격을 가했다. 카펠리아누스는 전직법무관 자격으로 누미디아에 부임한 세습 원로원 의원이었는데, 대다수의 속주 총독들처럼 고르디아누스 측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승인한 원로원 선언문에 대해 불만이 상당했다. 여기에는 고르디아누스 1세가 로마에 있던 시절부터 사이가 나쁜 카펠리아누스를 죽일 놈으로 규정해, 소환을 요청하고 일방적으로 자기 부하를 보내 강제로 물러날 것을 협박한 것이 컸다. 더욱이 양 측은 푸닉 일대의 소송 업무를 함께 도맡아 처리하면서, 아프리카 속주 총독 고르디아누스와 총독 휘하 군단 사령관 고르디아누스 2세가 벌인 월권 문제로 갈등이 심각한 터라 타협책은 없어 보였다. 이 결과, 카르타고 시가전이라고 불린 전투가 벌어지는데 제3군단 아우구스타를 이끈 카펠리아누스에 맞선 고르디아누스 부자 진영은 게릴라 전을 포기하고 전면전을 택해 승부가 일찌감치 끝나고 만다. 이 전투는 고르디아누스 2세가 민병대, 총독 관저 경비대로 구성된 1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저항하는 모양새였는데, 양 측의 무력 충돌 직후 고르디아누스 2세와 그를 따른 1천명은 그 자리에서 전멸했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목숨을 잃었고, 시체는 실종됐으며 참전한 농장주와 민병대는 한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후 카르타고 시는 제3군단에게 약탈을 당해 불바다가 되고, 반란에 참가한 농장주 가족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기대에 부푼 고르디아누스 1세는 총독 관저 내 침실에서 여유롭게 있다가,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전달받았다. 이미 협상장을 마련할 수 없는 현실에서, 좌절한 고르디아누스 1세는 매우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패배를 직감한 뒤 목을 매어 자살했다.
고르디아누스 1세는 오늘날의 튀르키예 출신의 평범한 집안 태생으로, 젊은 시절부터 오랜 군경험을 거쳐 50대에야 원로원 의원이 된 뒤, 60대 초반 이후 명예로운 경력을 모두 거치고 엘라가발루스의 총애 아래 집정관까지 오른 교양인이자 최고 부자였다. 따라서 원로원은 밑바닥부터 오랜 군경력을 쌓았고 교양까지 갖춘 문무를 겸비한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 아들 고르디아누스2세가 "모두의 지지를 받아 막시미누스에 맞서겠다"고 주장했을 때, 로마 원로원은 그들의 서한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고 황제로 지명한 터라 카펠리아누스의 공격 소식과 이들 부자의 몰락은 원로원 전체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측에서 권력을 쥐기 위해 자신들을 속인 것을 알게 되어 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따라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를 비롯한 중진 인사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대다수 의원들은 좌절해 있는 일부 동료들에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목소리를 높인 뒤 회의 소집을 명령했다.
콘코르드 신전에 소집된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소식을 접한 이후 일상적인 업무만 처리했을 뿐, 그들 자신과 공공의 안전에 대해서는 토론하기를 거부했고 겁에 질린 침묵이 한동안 좌중을 압도했다. 이때 트라야누스라는 이름의 의원이 동료 의원들을 무기력으로부터 일깨웠다. 그는 먼저 막시미누스가 야전군을 앞세워 이탈리아로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조심스러운 유화책은 더이상 소용이 없다고 말한 뒤 이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용감하게 전장으로 나아가 '포악한 야만인'과 싸우거나 고문과 치욕적인 죽음을 기다리는 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 의원을 황제로 옹립하자고 제안했다. 원로원은
"막시무스와 발비누스 황제 만세! 원로원은 그대들을 선출하여 행복합니다. 공화국 또한 그대들의 통치 아래 행복할 것입니다!"
원로원은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에게 집정관 및 호민관 권한을 수여하고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와 최고 대사제라는 직분을 안겨줬다. 두 황제는 로마의 수호신들에게 감사를 올리기 위해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갔다. 그러나 감사 의식은 로마 대중(더 정확히는 고르디아누스 일가 팬들)에게 방해받았다.
고르디아누스 1세가 서한을 보내고, 근위대장 비탈리아누스가 이들 부자 손에 암살됐을 때부터 수도장관 사비누스가 돌에 맞아 순직할 정도로 로마 시내는 이들 부자와 가문을 지지한 지지자들로 인해 치안이 엉망이었다. 그들은 두 황제 중 엄격하고 법과 원칙을 강조한 푸피에누스만은 절대 안된다며 난동을 피웠다. 이와 함께 그들은 자신들이 황제를 선출해야 한다며 원로원이 선택한 두 황제에 더해 제 3의 황제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오직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사람을 제3의 황제로 옹립하라고 요구했다. 또 그들은 "우린 두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다.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며 공동황제와 호위대, 원로원에게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이런 폭동에도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소란스러운 군중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러자 몽둥이와 잔돌로 무장한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은 떼를 지어, 앞을 가로 막고 물러서지 않았다. 이들은 고르디아누스 2세의 양자로 입적된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손자를 황제로 올릴 것을 요구하면서, "막시무스(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물러나라"고 소리 지르고 난폭하게 행동했다. 이미 이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가 황제로 선포될 때부터 제국의 공무원, 세금징수원, 근위대 병사들을 보이는 대로 죽여, 그 시체를 조롱하고 하수구, 테베레 강에 집어 던지고, 빚을 진 이들은 떼를 지어 채권자들을 개패듯 죽인 터라 통제불능이었다.
두 황제는 이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그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지만, 막시미누스 군대는 이미 이탈리아 북쪽 국경을 넘고 진격하고 있었다. 두 황제와 원로원은 트락스 군을 서둘러 막아야 했기에,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의 압력에 굴복했다. 그래서 그들은 집에서 머물고 있던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손자를 카파톨리누스로 불렀다. 이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당시 13세 소년이었던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내리기로 했다.
이후 두 황제는 겨우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의 협박과 포위에서 풀러났고, 비로서 국가 위기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때가 해를 넘긴 2월 초로, 이미 막시미누스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본국 이탈리아 침공을 시작한 뒤 이탈리아 북부 최대의 항구도시 아퀼레이아 근처로 진군하고 있었다. 두 황제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이탈리아를 수호하는 문제를 떠맡았는데, 군을 이끌고 막시미누스와 직접 무력대결을 떠맡기로 한 쪽은 푸피에누스였다. 반면 발비누스는 로마에 남아서 보급을 담당하면서, 로마 치안과 곡물 수습 등 민생 안전에 힘쓰기로 했다.
2.3. 죽음
막시미누스가 사라진 후, 발비누스는 푸피에누스를 상대로 권력다툼을 벌였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의심, 발비누스가 보여준 로마 공공질서 유지 실패 등으로 대립했고, 권력에 대한 경쟁심은 두 사람의 성격 차이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공동황제는 각자의 파벌이 있어 그들 간의 권력투쟁도 시작됐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를 참고했던 에드워드 기번의 <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푸피에누스는 파트너인 발비누스를 사치스러운 귀족이라고 경멸했고, 발비누스는 푸피에누스를 한미한 가문 출신의 군인이라고 깔봤다고 한다.[1]이러한 두 사람의 권력 분쟁은 당연히 기회를 엿보며 아들을 아우구스투스(정식황제) 직에 올리고 싶어한, 고르디아누스 1세의 딸 안토니아 고르디아나 및 고르디아누스 3세 지지자들에게 좋은 기회가 됐다. 하여 모종의 음모 속에서 어린 고르디아누스 3세 지지세력과, 두 황제의 불필요한 다툼에 질려버린 근위대는 각자의 속사정으로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기보단 그냥 두 황제 다 죽이기로 결정했다.
먼저 움직인 쪽이 고르디아누스 쪽인지, 프라이토리아니 쪽인지 불확실하나 행동으로 옮긴 집단은 후자였다. 어쩌면 전자가 후자와 비밀리에 접촉해 벌인 일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전자 쪽 인사 중 프라이토리아니를 조종할 인사들이 두루 있었고, 두 황제를 붙잡아 고문하고 죽인 병사들은 고르디아누스 가문이 권력을 쥔 이후 이 문제로 처벌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238년 7월 29일,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이 로마에서 카피톨리누스 언덕 행사가 한창인 틈을 타 팔라티노 황궁에 난입했다. 먼저 소식을 접한 쪽은 푸피에누스였다. 하여 그는 무력대응을 하기 위해 발비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양쪽의 갈등은 심각해, 발비누스는 거부했다. 이에 두 사람은 한 방에서 서로 논쟁을 벌이다가 방안에 난입한 병사들에게 체포되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진지로 끌려가 고문당하다가 살해당했고 시신은 한동안 로마 거리에 방치되다가 원로원에 의해 뒤늦게 수습되었다. 이때 발비누스의 나이는 대략 70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신뢰성이 떨어지는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아울러 푸피에누스의 출신 역시 최근 연구 발표 등에서는 한미한 가문 출신이 아니라고 밝혀지고 있기에 푸피에누스가 한미한 군인 출신이라고 단정짓기는 무리가 있다고 지적을 받고 있다. 발비누스가 생전 남긴 초상도안, 아내와 함께 묘사된 조각, 대리석관에서 완전 군장 차림의 군인적인 모습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그가 군인황제라는 이미지를 가진 푸피에누스에 대해 문관, 민간인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대립한 것은 일종의 세불리기 및 네거티브 전략 수단으로 분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