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16:13:11

오삼계



오주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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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 초대 황제
太祖 高皇帝 | 태조 고황제
파일:Wu Sangui.jpg
<colbgcolor=#000000> 출생 1612년 6월 8일
명나라 요녕성
(現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사망 1678년 10월 2일 (향년 66세)
오주 곤명시
(現 중화인민공화국 쿤밍시)
재위 청의 평서왕
1644년 ~ 1678년
오주 초대 황제
1678년 3월 ~ 1678년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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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성씨 오(吳)
삼계(三桂)
장백(長伯), 월소(月所)
연호 소무(昭武, 1678년 3월~1678년 10월 2일)
신장 173cm[1]
부친 오양(吳襄)
모후 주부인
묘호 태조(太祖)
시호 개천달도동인극운통문신무고황제
(開天達道同仁極運通文神武高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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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명나라의 장군3. 청나라의 번왕4. 통치5. 주나라의 황제6. 후손7. 평가8. 기타9. 대중매체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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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吳三桂

명나라 말기, 명청교체기, 청나라 초기의 장수이다. 후에 청나라에 불만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 후 사망하고 손자 대에 이르러 반란은 실패한다.

한족의 입장에선 민족의 배신자이자 기회주의자의 전형이며, 그가 투항하였던 청나라의 지배민족인 만주족의 입장에서도 기회주의자이자 배신자이다. 몽골족 중에서도 청나라 때 만주족과 일체화된 바 있었던 내몽골인들에게도 오삼계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다.[2]

2. 명나라의 장군

오삼계는 1612년 6월 8일 지금의 랴오닝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양(吳襄)으로 명나라의 장수였는데 원래 오양의 집안은 강소성 고우(高郵)에 살았지만 오삼계가 태어날 때쯤 만주족이 건국한, 후일 청으로 이름을 바꾸는 후금이 맹렬한 기세로 팽창해서 명나라 군 상당수가 요동 근처에 주둔하게 되었다.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도 이때 요동에 정착하고 아들 오삼계를 본다. 소년시절 오삼계는 아버지 오양이 만주군에게 포위되자 필마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아버지를 구했다. 나름 효자이자 맹장이라는 멋진 컨셉으로 데뷔한 것이다.

1641년에 29세에 제독이 되었다.[3] 명나라군은 송산 전투로 결국 만주지방에서 패퇴했는데. 이 과정에서 오삼계는 1만의 군대를 이끌고 결사적으로 청군의 포위망을 돌파해서 1만의 군대라도 건져서 산해관 안으로 후퇴했기 때문에 송산 전투의 패배로 산해관까지 공짜로 넘어가는 것은 막았으나 송산 전투에서 명나라의 손실이 너무 치명적이라 이자성의 반란군을 막을 수 있는 군사력까지 소멸되었다. 이후 후금군을 견제하며 버티기로 한다.

후금과 이자성 반란군 양측으로부터 투항권유가 날아오는데 후금측은 비록 만주족이라는 큰 단점이 있었으나 투항한 명나라 장수들을 실권은 없으나 그래도 섭섭치 않게 대우를 해주었고 점령한 명나라 영지에서 모병한 한인들로만 구성된 군대를 창설할 정도로 포용정책을 내세웠다. 반면 이자성 측은 오삼계의 부친의 신병을 붙잡고 있는 이자성이며 같은 한족인 이자성과 손을 잡아 후금을 막는다 라는 것이 가능했기에 부하들과의 논의 끝에 같은 한인끼리 뭉치자로 결정될 무렵 이자성이 명나라 수도 베이징을 함락하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약탈과 파괴를 일삼는 이자성과 그의 반란군의 모습을 보고 맘을 바꿔 되려 후금측에 사신을 보내 투항할테니 같이 이자성으로부터 북경을 되찾게 도와달라라는 사신을 보낸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자성에 의해서 멸망하였고, 그때를 틈타 후금군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서 산해관에 임박했다. 오삼계는 긴급징병으로 겉으로는 10만의 대군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송산 전투에서 겨우 수습한 1만과 어떻게든 명군으로 다시 복귀한 군대를 합쳐 제대로된 군대가 3만명 정도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군사적 규모차이, 이자성으로부터 제대로된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 등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서 결국 항복했다고 할 수 있다.

3. 청나라의 번왕

그런데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북경이 함락되고 명나라는 멸망하였다. 청나라군과의 전쟁으로 국력에 심대한 타격이 있었는데다가 결정적으로 송산 전투로 오삼계가 결사적으로 이끌고 퇴각한 1만정도의 병력을 제외하고 사실상 송산 전투에 참여한 명나라 정예군 13만 중 대부분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농민반란에 대처할 수가 없었다.

기존에는 송산 전투 등으로 인한 명나라의 피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북경에 있던 자신의 첩을 이자성군의 한 지휘관인 유종민이 뺏었다는 게 원인으로 알려져있었다. 이 첩은 '진원원(陳圓圓)'이라는 여성으로, 본래 기녀였으나 오삼계가 그녀의 자태에 반해서 애첩으로 삼았다. 이후 오삼계가 외지에서 근무하다가 이자성이 봉기하자 마음을 돌려 이자성군에 투항했는데, 진원원을 이자성 봉기군의 지휘관이 빼앗았다는 것을 알고는 화를 내더니 이자성군을 뭉개버리고 진원원을 되찾기 위해 청군을 산해관으로 들였다는 것.

첩 때문인 것이 사실이라면 오삼계의 첩 진원원이 중국 역사를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명나라가 쇠잔하기는 했어도, 산해관에서 청나라를 막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원원은 당대 오삼계의 배신에 분개한 이들이 '고작 여자 때문에 오랑캐에게 나라를 내어준' 존재로 비하하기 위해 강조된 설명이기도 하다.[4]

고작 여자 하나라는 원인이 신빙성이 떨어진다면 다른 한가지 원인은 이자성군의 만행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자성군에게 투항한 명나라 관리들이 많았는데 이자성군은 이들을 약탈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투항한 명나라 관리들을 고문하고 이들의 재산을 삥뜯었다.[5] 그리고 여기서 삥뜯긴 관리들 중에서는 오삼계의 아버지인 오양도 있었다. 명나라는 없어지고 이자성/청나라에서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서 오랑캐에 투항하긴 좀 그러니 그나마 같은 한족 정권인 이자성군에게 투항하려던 오삼계였으나 북경으로 가던 중 아버지가 감금과 고문과 약탈을 당했다는 소리를 듣고 분노해 투항을 포기했다.

이 사실을 인식한 이자성도 오양에 대한 약탈을 멈추고 풀어줬지만 이미 늦었다. 이자성은 발끈해서 오양을 죽이고 산해관을 공격했다. 북경을 점령한 이자성 군은 투항에 응하지않는 '명나라 사령관' 오삼계를 벌하기 위해 산해관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고 그 병력이 10만에 이르렀다. 당시 산해관을 지키는 오삼계의 병력은 정예이긴 했으나 3만에 불과했다.[6] 거기에 이 전쟁을 통한 어부지리를 노리는 청 섭정 도르곤이 산해관 밖에서 역시 1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대기 중이었다. 혼자 힘으로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오삼계는 청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욕 먹는 건 싫으니 명분을 투항이 아닌 동맹으로 하려고 했지만 청나라는 끝까지 귀순을 요구한다.[7] 숫적으로 열세인 오삼계군이 밀리면서 전세가 험악해지자 오삼계는 청나라에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즉 진짜 투항원인은 송산 전투의 패배로 명나라 주력군이 궤멸되어 실질적으로 청나라군보다도 명나라군 숫자가 확연하게 줄었기 때문에 산해관에서 막는게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청군은 투항한 명군과 함께 무서운 기세로 중국 본토로 들어와 보병위주의 농민병인 이자성군을 박살내고 결국 북경에 입성했다. 북경에 들어온 도르곤은 일등공신인 오삼계를 왕으로 봉하고 숭정제를 황제의 예우로 장례를 치러 민심을 다잡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잔여세력 처단에 나선 청은 중국 본토를 급속히 장악하였다.

오삼계는 산해관을 열어준 공로로 다른 한족 협력자와 함께 멀리 떨어진 귀주성 운남성의 왕인 평서왕(平西王)으로 봉해진다. 이때 오삼계를 왕으로 봉해준 이유는 단순히 항복한 장군을 우대해줬다기 보단 당시 오삼계가 가지고 있던 군사력 전체를 회유하고자 했던 청 조정의 의도가 내포되어있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청 조정에서는 다른 한족 협력자였던 상가희 경중명을 각각 평남왕(平南王)과 정남왕(定南王)으로 봉해 번왕으로 삼았다. 이는 아직 남쪽에 잔존한 남명을 확실하게 끝장내기 위해서였고 결국 남명은 이들 손에서 사실상 끝장난다. 오삼계는 왕으로 봉해지자마자 이자성 잡기에 돌입했고 결국 이자성을 완전히 처단했다. 이후 남중국 토벌을 명 받고 사천지역을 차지했던 대서군의 우두머리인 장헌충을 죽여 사천도 완전히 토벌했다. 이후 그 잔당이 남명 정권 밑으로 들어가자 당시 정서대장군이었던 국한과 함께 운남을 밀어버리고 최종적으론 버마로 도망간 영력제 주유랑을 데려와 곤명에서 죽였다.[8] 결국 오삼계는 자기 손으로 명을 완전히 뿌리 뽑은 셈이다.

4. 통치[9]

청 조정에서 명의 뿌리를 뽑는 공을 세운 오삼계에게 운남지역을 통치하도록 명령함으로써 그의 공을 치하했다. 운남은 중국 최서남의 변방으로, 토착세력이 대대로 통치하여 국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던 곳이었다. 또한 명말의 혼란기 속에서 반란과 반청세력의 최후의 근거지였던 만큼 통치하기 빡센 곳인 것은 당연했다.

오삼계를 여기 보낸 것은 삼번 중 가장 강한 오삼계를 변방인 운남에 보내 그를 격리하고자 한 정치적 의도와 그의 군사력을 통해 국가권력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고 반청복명세력의 중심지였던 운남을 통치하게 함으로써 반청세력의 소멸과 이후의 변방 보호를 통한 지방통치의 군사적 보안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오삼계는 이런 운남 통치를 위해 운남의 토착세력을 군사적으로 제압해서 통치했는데, 일부러 토착민들을 탄압하고 약탈하여 난을 일으키도록 조성해 조정에 번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내부적으론 난을 무력으로 때려잡고 땅을 몰수했다. 토추(土酋)에 대해서도 온갖 방법의 약탈을 자행하였는데, 이들에게 매년 조향(助餉)과 조병(助兵)을 강요하고 재산을 몰수하거나 지방 관원을 종용해 비리와 약탈을 부추기는 등의 악행을 지속하였다. 한마디로 탐관오리였던 셈이다.

특히 군량을 구실로 한 민간 착취를 심하게 하였는데 흉년이 들자 쌀값 폭등을 구실로 토지 700여경(頃)[10]을 번장으로 삼았다. 이는 운남 일대의 막대한 토지를 번의 땅으로 만들었고, 백성들에게 소작료를 내도록 하여 운남의 자경농 대부분이 번하 관병의 전호로 전락하게 되었다.

오삼계는 이런 착취를 통해 마련한 재산으로 염정(鹽井), 광산개발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관진(關津)을 독점해 상세와 공업, 무역업을 독점하며 고리대금업을 통해 재물과 부를 늘리는데 사력을 다했다. 또한 달라이 라마(達賴刺麻)와 통사(通使)하여 차, 말 등을 교역하는 시장을 개설하고 서장(西藏)을 통해 서번(西番), 몽골족과의 변방무역을 했는데 사천에서 생산된 황련, 부자와 같은 약재를 요동으로 판매하거나 요동지역에서 생산되는 인삼을 운남으로 판매했는데, 이러한 무역을 모두 번에서 독점했다.[11]

사실상 남중국의 왕으로 살았던 셈이다. 다른 번들도 상황은 비슷했는데 상가희의 경우 광산개발과 바닷소금(海鹽) 등으로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였고, 경중명의 손자인 경정충(耿精忠, 1644~1682)은 나루터 입구마다 관리소를 세워 염과를 징수하고 이익을 독점하여 폭리를 취했다. 하지만 이민족인 청나라도 중국사의 전통인 왕조 성립후 토사구팽에 들어간다. 아무리 변경이지만 제국 내에 국가나 다름없는 자치권을 인정받는 번국이 있다는 건 아무래도 이민족인 만주족 입장에선 부담스럽고, 무엇보다 번국이 중앙정부보다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기에 중앙정부로선 큰 위협이었다. 오죽하면 오삼계는 인사, 재정, 군사권을 가지고[12] 본인의 화폐[13]까지 주조해 사용했을 정도였다. 당시 청의 재정 수입이 은 875만여 냥인데 반해 운남에서 매년 은 900만여 냥이 군량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 많이도 해 먹었다 싶다. 이때문에 삼번의 난도 번을 폐지하기 위해 벼르고 있던 강희제가 일부러 조장했다는 설이 많다.[14]

5. 주나라의 황제

오삼계가 보기에 애송이인 강희제가 초반에 여러 문제 때문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자, 오삼계는 운남에서 한족 왕조를 다시 건국한다는 명분을 세워 군사를 이끌고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다른 번도 호응하여 1673년 반란을 일으키고 중원으로 군사를 몰았다. 이 때 북경에 살던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吳應熊)[15]과 오응웅의 2남인 오세림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나머지 어린 아이는 궁형에 처해져 내시가 되었다.[16][17] 여기에 1678년(강희 17년)에 삼번의 맹주 오삼계는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周), 연호를 소무(昭武)라 정했다. 삼번의 난 이전 청의 명장들이 건국 초기의 전통인 숙청에 휘말렸기에 청 진압군은 약체였고, 숙련된 장군인 오삼계는 진압군을 격파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이미 67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그 해 8월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오삼계의 사망으로 반군의 기세가 흔들렸고, 강희제는 전열을 다듬는 한편 한족 장군들까지 등용하며 군을 재정비, 반격에 나섰고 결국 삼번의 난은 1681년 뒤를 이은 손자 오세번이 자살함으로서 진압된다. 오삼계는 부관참시되어 곤명 저잣거리에 세워진 대나무 장대에 내걸렸다. 장대는 2개가 있었는데 오른쪽에는 이미 죽은 오삼계의 두개골이 걸려 있었고 왼쪽에는 오세번[18], 마보, 하국상, 이본심, 왕영청 등의 머리가 걸려 있었다.

6. 후손

현존하는 오삼계의 직계 후손들은 모두 오삼계의 또 다른 아들인 오응기(吳應麒)의 후손이다. 오응기는 지금의 구이저우성 지역으로 피신하여 몰래 숨어 살아간 덕분에 후손을 남길 수 있었다.

7. 평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한족의 배신자"로 악평이 높았다. 한족이 중국의 주인이라는 관점을 견지한다면, 한족 국가를 저버리고 외침을 한 변방민족의 앞잡이로 한족국가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한 한간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또한 2개의 나라를 섬기면서 그 2개 나라들에 대해 반역을 일으켰기에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이중 역적이기도 하다.[19]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 벗어나서 본다면, 오삼계를 일개 기회주의자로 치부하기엔 어려운 점도 있다. 그는 명나라의 장수로서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고, 그가 충성을 바쳐야 할 국가인 명나라는 이자성에 의해 멸망된다. 따라서 명을 넘보는 청나라도 적국이지만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군도 오삼계에겐 적이자 원수이다.[20] 이들 가운데 누구를 선택하는 것이 절대선이고 정의일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청에 붙어서 부귀영화를 누리다 청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도 까이지만, 가만히 있으면 오삼계는 지나치게 강력한 군세를 가졌기 때문에 숙청당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화려한 갈아타기 전적 때문에 정권의 명분을 세우는데 실패하여 민중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 삼번의 난 실패의 원인이지만, 이것을 오삼계의 간사함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더군다나 당시엔 민족이란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이기에, 민족이 애국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현대와 달리, 당시의 애국은 주군에게 충성을 하는 봉건적 형태의 충성이었기에, 현대의 관점으로 그를 민족의 배신자로 보는 건 무리가 있다.[21]

다만 숭정제가 오삼계에게 북경 구원을 요청했을 때 오삼계가 일부러 진군을 늦춘 점(다만 이 점에는 오삼계가 의도적으로 조정의 위험을 방치한 것이 아니라, 청에게 약점을 눈치채이지 않기 위해 속도를 조절하라는 숭정제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22], 진원원 사건(다만 오삼계가 정말 첩인 진원원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바꾸었다고 볼 근거는 없다는 반론이 있다.)+오양 감금과 약탈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오삼계도 이자성에게 항복하려고 했기 때문에 오삼계를 충신으로 여기고 청나라로의 투항도 명의 복수를 위한 것이라는 식의 정당화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남명의 황제를 미얀마까지 추격하여 죽인 것도 오삼계 본인이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기회주의자와 배신자의 대표주자로 널리 알려진 악명과는 달리 자신이 속해있던 나라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배신해가며 자신의 이익을 탐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최소한 평상시에는 별로 나무랄 데 없는 충성심과 유능함을 보여주던 인물인 것. 하지만 이 충성심이 시험대에 오르는 상황, 즉 충성심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그리고 자기 가문)의 희생이 요구되는 상황이 되면 가차없이 충성심을 던져버리고 새로운 충성의 대상으로 편을 바꾸는 데 별다른 거리낌이 없던 인물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르게 보자면 녹봉 받은 만큼 자기 일은 잘 하지만 지신이 손해를 보고 희생하면서까지 충성을 다하지는 않는, 유교적 가치관에 따른 충(忠)[23]보다는 차라리 일본 전국시대 사무라이[24] 및 현대의 직업적 계약관계에 가깝게 행동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로 귀순한 다음에는 명의 잔존세력을 가차없이 공격하여 후계 황제까지 직접 죽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굳이 긍정적으로 보자면 일단 충성의 대상을 바꾼 이상 새 나라에 그만큼 충실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전향(청나라로의 귀순) 자체는 외통수에 몰린 상황에서 '충성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고 보아 이해하더라도, 자신의 입지를 얻기 위해 한때 속해있던 나라를 적극적으로 공격할 정도라면 능동적 배신자와 별로 다를 바도 없지 않으냐고 지적하는 것 역시 가능할 것이다. 결국 그의 배신(또는 매국)행위에 나름의 사정이 있었음을 감안할 수는 있겠지만, 항상 손해를 감수하기보다는 신의를 저버리는 길을 선택했고, 신의를 저버리더라도 이익을 얻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를 피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울 것이다. 또한, 그의 처참한 말로 역시 명청 교체기의 혼란 속에서 계속 기회주의적인 행보를 보인 끝에 결국 누구에게도 신뢰받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청에 귀순한 이후 오삼계가 꼭 명의 잔존세력을 철저히 추적하여 뿌리뽑는 역할을 앞장서서 맡을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항장(降將) 출신인 오삼계가 운남·귀주의 번왕이 되어 남중국에서 독립 왕국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세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손으로 명나라의 잔존세력을 도륙해버릴 정도로 독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더 이상 명나라에 미련이 없고 새롭게 청나라에 충성하겠다는 명확한 제스처를 보여줌으로써 (그리고 강남의 지리와 정세에 익숙하지 못한 만주족 대신 남명 토벌에 앞장서는 공을 세움으로써) 가능했던 일이니, 만약 그가 이와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실제 역사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권세를 얻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기는 하다. 그러나 그 성공가도의 끝은 결국 자신은 반역자로 전락하여 시체까지 훼손당하고, 자신의 가문 역시 몰락하는 것이었으니 당대인들의 가치관을 생각하면 그렇게 얻은 부귀영화의 결말은 지극히 비참했던 셈이다. 차라리 살아남기 위한 전향 자체는 어쩔 수 없었더라도 그 후 보다 큰 출세를 위한 적극적인 배신자의 행보라도 자제하고 은인자중했다면 대단한 부귀영화와 권세를 얻지는 못할지언정 그나마 노후는 편안히 보내고, 가문이라도 온전히 보전하며 후세에 욕이라도 덜 먹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25]

무장으로서는 당대 수준급 백전노장. 이 때문에 삼번의 난 초기에는 청군을 상대로 굉장한 선전을 해 강희제도 쩔쩔맸다. 오삼계 생전에 삼번의 난의 기세는 정말로 청을 뒤집고 한족 국가가 다시 들어서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26]

일단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한간 정도의 강도 높은 비판은 아니고, 기회주의자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명말 청초를 다룬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어째 첩 진원원과 관련한 이야기 때문인지 로맨티시스트로 각색되는 경우도 많다.

종합하자면 중국 정부의 입장과 관점은 공기화 처리+기회주의자, 역사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나 한족주의 성향을 가진 입장에서는 한간, 만주족과 내몽골인의 입장에선 자신들의 중원 정복을 도와줬다가 이내 배신을 때리고 청나라를 멸망시키려 한 간사한 기회주의자. 역사를 좀 아는 입장에서는 강희제가 상대해야 할 보스급 캐릭터 정도이고, 여러모로 평가가 갈리긴 하지만 명나라의 입장에서든, 청나라의 입장에서든, 현대 중국의 입장에서든 충신으로 평가받기는 힘들 것 같다.

네이버캐스트 <명청전쟁> 시리즈 마지막편에 오삼계의 활약(?)상이 나와있다.

8. 기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u_Sangui.jpg
흔히 오삼계의 초상으로 알려진 위의 이미지는 사실 상가희의 초상이다.

9. 대중매체

소설 《 녹정기》(1969~1972)에서는 오삼계가 등장한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오삼계(녹정기)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0. 둘러보기

청사고(淸史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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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cd21
1권 「태조기(太祖紀)」 2·3권 「태종기(太宗紀)」 4·5권 「세조기(世祖紀)」
애신각라 노이합제 애신각라 황태극 애신각라 복림
6·7·8권 「성조기(聖祖紀)」 9권 세종기(世宗紀)」 10·11·12·13·14·15권 「고종기(高宗紀)」
애신각라 현엽 애신각라 윤진 애신각라 홍력
16권 「인종기(仁宗紀)」 17·18·19권 선종기(宣宗紀)」 20권 「문종기(文宗紀)」
애신각라 옹염 애신각라 민녕 애신각라 혁저
21·22권 「목종기(穆宗紀)」 23·24권 덕종기(德宗紀)」 20권 「선통제기(宣統帝紀)」
애신각라 재순 애신각라 재첨 애신각라 부의
214권 「후비전(后妃傳)」
효정경황후 · 정강귀비 · 각순귀비 · 효각민황후 · 액이덕특씨
※ 26권 ~ 160권은 志에 해당. 161권 ~ 213권은 表에 해당. 청사고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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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bgcolor=#00386a><tablewidth=100%> 215·216·217·218·219·220·221권 「제왕전(諸王傳)」 ||
애신각라 예돈 · 애신각라 액이곤 · 애신각라 재감 · 애신각라 탑찰편고 · 애신각라 막이합제 · 애신각라 서이합제 · 애신각라 아이합제 · 애신각라 파아랍 · 애신각라 저영 · 애신각라 대선 · 애신각라 아배 · 애신각라 탕고대 · 애신각라 망이고태 · 애신각라 탑배 · 애신각라 아파태 · 애신각라 파포태 · 애신각라 덕격류 · 애신각라 파포해 · 애신각라 아제격 · 애신각라 뇌모포 · 애신각라 다이곤 · 애신각라 다탁 · 애신각라 비양과 · 애신각라 호격 · 애신각라 엽포서 · 애신각라 석새 · 애신각라 고새 · 애신각라 상서 · 애신각라 도새 · 애신각라 박목박과이 · 애신각라 복전 · 영친왕 · 애신각라 상녕 · 애신각라 융희 · 애신각라 윤제 · 애신각라 윤잉 · 애신각라 윤지 · 애신각라 윤기 · 애신각라 윤우 · 애신각라 윤사 · 애신각라 윤당 · 애신각라 윤아 · 애신각라 윤도 · 애신각라 윤상 · 애신각라 윤제 · 애신각라 윤파 · 애신각라 윤례 · 애신각라 윤의 · 애신각라 윤희 · 애신각라 윤호 · 애신각라 윤기 · 애신각라 윤비 · 애신각라 홍주 · 애신각라 홍휘 · 애신각라 영황 · 애신각라 영련 · 애신각라 영장 · 애신각라 영기(永琪) · 애신각라 영종 · 애신각라 영선 · 애신각라 영성 · 애신각라 영기(永璂) · 애신각라 영성 · 애신각라 영린 · 애신각라 면개 · 애신각라 면흔 · 애신각라 면유 · 애신각라 혁위 · 애신각라 혁강 · 애신각라 혁계 · 애신각라 혁흔 · 애신각라 혁환 · 애신각라 혁합 · 애신각라 혁혜 · 민군왕
222권 「아합출등전(阿哈出等傳)」
아합출 , 석가노 맹가불화 이만주 완자독 맹가첩목아 범찰 동산 탈라 탈원보 불화투, · 왕고 , 왕올당,
223권 「만등전(萬等傳)」
, 호이간 맹가포록 대산 오이고대, · 청길노 · 양길노 , 납림포록 금태석 포한 포양고 포이항고, 포점태 · 배음달리
224권 「장황언등전(張煌言等傳)」 225권 「액역도등전(額亦都等傳)」
장황언 , 나륜 장명진 왕익, · 정성공 , 정금 정극장 정극상 정극거, · 이정국 액역도 · 비영동 , 삭해 왜흑, · 하화례 , 다적례 화석례 도류, · 안비양고 · 호이한
238권 「장혁덕등전(蔣赫德等傳)」
장혁덕 · 액색혁 · 차극 · 파합나 · 송권 · 부이점 · 여궁 · 성극공 · 김지준 · 왕영길 · 당숭아
247권 「팽이술등전(彭而述等傳)」
팽이술 · 육진분 · 요연저 · 필진희 · 방국동 · 우붕거 · 왕천감 · 조정표
250권 「이위등전(李霨等傳)」
이위 · 손정전 · 두입덕 · 풍부 · 왕희 · 오정치 · 황기 · 송덕선 · 이상아 · 아란태 · 서원문
251권 「도해등전(圖海等傳)」 252권 「감문혼등전(甘文焜等傳)」
마가도해 · 이지방 감문혼 · 범승모 · 마웅진 · 부홍열
253권 「막락등전(莫洛等傳)」
막락 · 진복 · 왕지정 · 비아달 · 이흥원 · 진계태 · 진단적 · 마비 · 엽앙류
255권 「장용등전(張勇等傳)」
장용 · 조양동 · 왕진보 · 손사극
256권 「채육영등전(蔡毓榮等傳)」
채육영 · 합점 · 항애 · 화선 · 동위국 · 동국정 · 주유덕 · 장덕지 · 윤벽 · 왕계문
257권 「조국조등전(趙國祚等傳)」
조국조 · 허정 · 주구 · 서치도 · 호세영 · 당희순 · 이린 · 조응규 · 조뢰 · 이방술 · 진세개 · 허점수
261권 「양첩등전(楊捷等傳)」
양첩 · 석조성 · 만정색 · 오영 · 감리 · 황오 · 방태 · 목혁림 · 단응거
262권 「위예개전(魏裔介等傳)」 263권 「왕홍조전(王弘祚等傳)」
위예개 · 웅사리 · 이광지 왕홍조 · 요문연 · 위상추 · 주지필 · 조신교
264권 「학유눌등전(郝維訥等傳)」 265권 「탕빈등전(湯斌等傳)」
학유눌 · 임극부 · 유홍유 · 유건 · 주배 · 장정추 탕빈 · 손지욱 · 육롱기 · 장백행
266권 「엽방애전(葉方藹等傳)」 267권 「장옥서등전(張玉書等傳)」
엽방애 · 심전 · 여두눌 · 서원공 · 허삼례 · 왕사정 · 한담 · 탕우증 장옥서 · 이천복 · 오전 · 장영 · 진정경 · 온달 · 소영조 · 숭축 · 왕서령
268권 「미사한등전(米思翰等傳)」 269권 「색액도등전(索額圖等傳)」
미사한 · 고팔대 · 마이한 · 전육선 · 두진 · 살목하 색액도 · 명주 , 여국주 불륜,
270권 「학욕등전(郝浴等傳)」 271권 「서건학등전(徐乾學等傳)」 272권 「탕약망등전(湯若望等傳)」
학욕 · 양소온 · 곽수 서건학 , 옹숙원, · 왕홍서 · 고사기 탕약망 · 양광선 · 남회인
273권 「이솔태등전(李率泰等傳)」
이솔태 · 조정신 · 낭정좌 · 동봉채 · 마륵길 · 시유한
304권 「장조등전(張照等傳)」
장조 · 감여래 · 진덕화 · 왕안국 · 유오룡 · 양여곡 · 장태개 · 양석불 · 팽계풍 · 손희렴 · 몽린
305권 「전진군등전(錢陳群等傳)」
전진군 · 심덕잠 · 김덕영 · 전재 · 제소남 · 진조윤 · 동방달 · 전유성 · 추일계 · 사용 · 왕창
306권 「조사일등전(曹一士等傳)」 307권 「위위곽전(魏韋郭傳)」
조사일 · 이신수 · 호정 · 중영단 · 시조생 · 저인지 윤계선 · 유우의 · 진대수 · 장윤수 · 진굉모
308권 「나소도등전(那蘇圖等傳)」
나소도 · 왕초증 · 서사림 · 윤회일 · 왕서 · 방현 · 풍광유 · 양석불 · 반사구 · 호보전 · 왕창
318권 「아계전(阿桂傳)」 319권 「우민중등전(于敏中等傳)」
장가아계 우민중 · 뉴호록 화신 · 소릉아
322권 「두광내등전(竇光鼐等傳)」 323권 「황정계등전(黃廷桂等傳)」
두광내 · 이수방 · 범의빈 · 조석보 · 사진정 · 전풍 · 윤장도 황정계 · 악미달 · 양정장 · 장유공 · 이시요 · 오미태 · 관보
324권 「방관승등전(方觀承等傳)」
방관승 · 부찰부명안 · 주원리 · 이한 · 이세걸 · 원수동 · 정대진 · 유아 · 육요 · 관간정 · 장조규 · 호계당
325권 「이청시등전(李淸時等傳)」 326권 「개태등전(開泰等傳)」
이청시 · 요입덕 · 이굉 · 하위 · 오사작 · 살재 · 난제석 · 한횡 개태 · 아이태 · 계림 · 원푸
340권 「왕걸등전(王傑等傳)」 341권 「경규등전(慶桂等傳)」
왕걸 · 동고 · 주규 경규 · 유관지 · 대구형 · 대균원 · 탁진 · 장후 · 노음부
342권 「보녕등전(保寧等傳)」 343권 「서린등전(書麟等傳)」
보녕 · 송균 · 배탄 · 박계특 서린 · 각라길경 · 각라장린 · 비순 · 장백령 · 백린
344권 「늑보등전(勒保等傳)」 345권 「영보등전(永保等傳)」
늑보 · 액륵등보 , 호시현, · 덕릉태 영보 · 혜령 · 의면 · 영선 · 복녕 · 경안 · 태승은
386권 「문경등전(文慶等傳)」 387권 「숙순등전(肅順等傳)」 388권 「계량등전(桂良等傳)」
문경 · 문상 · 보윤 숙순 · 목음 · 초우영 계량 · 서린 · 관문 · 문욱
389권 「백준등전(柏俊等傳)」 390권 「가정등전(賈楨等傳)」 391권 「왜인등전(倭仁等傳)」
백준 · 인괴 · 서상 · 전경 가정 · 주조배 · 주봉표 · 단무겸 왜인 · 이당계 · 오정동
392권 「새상아등전(賽尙阿等傳)」 393권 「이성원등전(李星沅等傳)」 394권 「서광진등전(徐廣縉等傳)」
새상아 · 눌이경액 이성원 · 주천작 · 노숭광 서광진 · 엽명침 · 황종한
395권 「상대순등전(常大淳等傳)」
상대순 , 쌍복 왕금수 왕수동, · 장문경 · 도은배 , 다산, · 길이항아 · 나준전 · 서유임 · 왕유령
396권 「오문용전(吳文鎔等傳)」 397권 「육건영등전(陸建瀛等傳)」
오문용 · 반탁 · 등이항 육건영 · 양정문 · 청린 · 숭륜 · 하계청
399권 「여현기등전(呂賢基等傳)」
여현기 · 추명학 · 대희 · 장비 · 황종 · 도정걸 · 풍배원 · 손명은 · 심병원 · 장석경
400권 「하계진등전(何桂珍等傳)」 401권 「상영등전(向榮等傳)」
하계진 · 서풍옥 · 온소원 · 김광저 · 이맹군 · 조경현 상영 · 화춘 · 장국량
402권 「오란태등전(烏蘭泰等傳)」
오란태 · 등소량 · 주천수 · 요문선 · 문서 · 팽사거 · 장옥량 · 노점오 · 유계삼 · 서쌍래 · 구등룡 · 왕국재 · 호곤원 · 대문영
403권 「승보등전(勝保等傳)」 404권 「승격림심등전(僧格林沁等傳)」
승보 · 탁명아 · 진금수 · 덕흥아 승격림심 · 서통액 · 항령 · 소극금 · 하건오 · 전순 · 사영춘 · 악선
405권 「증국번전(曾國籓傳)」 406권 「낙병장등전(駱秉章等傳)」 407권 「강충원등전(江忠源等傳)」
증국번 낙병장 · 호림익 강충원 · 나택남
408권 「이속빈등전(李續賓等傳)」 409권 「탑제포등전(塔齊布等傳)」
이속빈 · 정예의 · 증국화 · 이속의 · 왕진 · 유등홍 · 장익풍 탑제포 · 필금과 · 다융아 · 포초, 송국영 누운경 담등달, · 당인겸 · 유송산
410권 「팽옥린등전(彭玉麟等傳)」 411권 「이홍장전(李鴻章傳)」
팽옥린 · 양악빈 · 왕명산 · 손창개 · 양명해 · 사준여 이홍장
412권 「좌종당전(左宗棠傳)」 413권 「증국전등전(曾國荃等傳)」
좌종당 증국전 · 심보정 · 유곤일
414권 「이신전등전(李臣典等傳)」
이신전 · 소부사 · 이원길 · 유연첩 · 팽육귤 · 장시일 · 오유수 · 주남계 · 나봉원 · 이상화 · 소경연 · 오종국
415권 「황익승등전(黃翼升等傳)」
황익승 · 정의방 · 왕길 · 오가방 · 이성모 · 이조빈 · 강복산 · 유배원
416권 「정학계등전(程學啟等傳)」
정학계 · 하안태 · 정국괴 · 유명전 · 장수산 · 주성파 · 주성전 · 반정신 · 오장경
418권 「원갑삼등전(袁甲三等傳)」 419권 「낙병장등전(左宗棠傳)」 420권 「한초등전(韓超等傳)」
원갑삼 · 모창희 유장우 · 유악소 · 잠육영 한초 · 전흥서 · 증벽광 · 석보전
421권 「심조림등전(沈兆霖等傳)」
심조림 · 조육영 · 허내보 · 조광 · 주준 · 이함 · 장상하 · 나돈연 · 정돈근 · 방종로
422권 「왕무음등전(王茂廕等傳)」
왕무음 · 송진 · 원희조 · 문서 · 육록 · 서계여 · 왕발규 · 염조윤 · 뇌이함 · 도양 · 오존의 · 은조용
423권 「종직진등전(宗稷辰等傳)」 424권 「오진역등전(吳振棫等傳)」
종직진 · 윤경운 · 왕증 · 목집향아 · 유백천 오진역 · 장량기 · 모홍빈 · 장개숭
425권 「이혜등전(李僡等傳)」 426권 「왕경운등전(王慶雲等傳)」
이혜 · 오당 · 영한 · 유용 · 교송년 · 전정명 · 오원병 왕경운 · 담정양 · 마신이 · 이종희 · 서종간 · 왕개태 · 곽백음
451권 「이조의등전(李朝儀等傳)」
이조의 · 단기 · 정수창 · 증기봉 · 저유립 · 서철산 · 계중행 · 유함방 · 진횡거 · 유지개 · 이용청 · 이금용 · 김복증 , 웅기영 사복가, · 동조용
452권 「홍여규등전(洪汝奎等傳)」
홍여규 · 양종렴 · 사박 · 사극관 · 심보정 · 주기앙 , 주기조, · 종원한 · 서경장 · 서진 · 괴광전 · 진휼성 · 반민표 · 엄작림 · 당석진 · 누춘번
457권 「장동재등전(蔣東才等傳)」
장동재 · 이남화 · 동리고 · 동전승 · 우사한 · 조덕경 · 마복진 · 정문병 · 방요 · 등안방
458권 「서연욱등전(徐延旭等傳)」
서연욱 · 당형 · 하경 · 장조동
459권 「풍자재등전(馮子材等傳)」
풍자재 · 왕효기 · 진가 · 장종한 · 소원춘 · 마성치 · 왕덕방 · 장춘발 · 소득룡 · 마유기 · 오영안 · 손개화 · 소득승 · 장고원 · 구양이견
460권 「좌보귀등전(左寶貴等傳)」 461권 「송경등전(宋慶等傳)」
좌보귀 · 원영산 · 등세창 · 유보첨 · 대종건 송경 · 여본원 · 서방도 · 마옥곤 · 의극당아 · 장순
462권 「정여창등전(丁汝昌等傳)」 463권 「당경숭등전(唐景崧等傳)」
정여창 · 위여귀 · 엽지초 당경숭 · 유영복
464권 「이단분등전(李端棻等傳)」
이단분 · 서치정 · 진보함 · 황준헌 · 증화 · 양심수 · 양예 · 유광제 · 담사동 · 임욱 · 강광인
465권 「서동등전(徐桐等傳)」 466권 「서용의등전(徐用儀等傳)」
서동 · 강의 · 조서교 · 고아랍계수 · 하영년 · 희탑랍유록 · 육현 서용의 · 허경징 · 원창 · 토묵특입산 · 최가연원
471권 「성선회등전(盛宣懷等傳)」 472권 「육윤상등전(陸潤庠等傳)」
성선회 · 서징 육윤상 · 세속 · 이극탄 · 양정분 · 서방 · 노내선 · 심증식
473권 「장훈등전(張勳等傳)」 474권 「오삼계등전(吳三桂等傳)」 475권 「홍수전전(洪秀全傳)」
장훈 · 강유위 오삼계 · 경정충 · 상지신 · 손연령 홍수전
476·477·478·479권 「순리전(循吏傳)」
백등명 , 탕가상 임진단 우종요, · 송필달 · 육재신 · 장목 , 장훈(張塤), · 진여함 · 목수 , 진시림, · 요문섭 , 황정린, · 낙종린 , 최종태 조진조, · 조길사 · 장근 · 강고 , 장극억 가박, · 소사요 , 위입정 고음작 근양, · 최화 · 주중횡 · 유계 · 도원순 · 요기형 · 동국롱 · 육사 · 공감 · 진덕영 · 예복전 · 장림 · 염요희 · 남정원 · 엽신 · 시초정 · 진경문 · 주인룡 · 동화 · 이위 · 사중훈 · 이대본 · 우운진 · 장견도 · 소대업 · 주극개 , 정기 강기연 언여사 주제화, · 왕휘조 , 여돈화 주휴도, · 유대신 · 오환채 · 기대규 · 소희증 · 장길안 , 이육창, · 공경한 · 개방필 · 사소등 · 이갱예 · 이병수 · 적상경 · 장돈인 · 정돈윤 · 이문경 · 유체중 , 유후, · 장기 , 석가소, · 유형 , 서동, · 요간지 · 오균 · 왕조겸 · 조근 · 계초만 · 장작남 · 운무기 · 서대영 · 우수매 · 하왈유 · 오응연 · 유병림 , 진숭지 하자령 소세본, · 이병도 , 유주 주근인 추종준 왕무훈, · 괴덕모 · 임달천 · 방대제 · 진호 · 양영서 · 임계 · 왕인복 · 주광제 · 냉정형 · 손보전 · 가소경 · 도관준 · 진문불 · 이소 · 장해 · 왕인감
480·481·482·483권 「유림전(儒林傳)」
손봉기 · 황종희 · 왕부지 · 이옹 · 심국모 · 사문존 · 고유 · 탕지기 · 육세의 · 심윤 · 응휘겸 · 주학령 · 심호정 · 백환채 · 호승락 · 조본영 · 유원록 · 안원 · 이공 · 조포 · 이내장 · 이광파 · 장형양 · 왕무굉 · 이몽기 · 호방 · 노사 · 고동고 · 맹초연 · 왕불 · 요학상 · 당감 · 오가빈 · 유희재 · 주차기 · 성유 · 소의진 · 고염무 · 장이기 · 만사대 · 호위 · 모기령 · 염약거 · 혜주역 · 진후요 · 장림 · 임계운 · 전조망 · 심융 · 강영 · 저인량 · 노문서 · 전대흔 · 왕명성 · 대진 · 단옥재 · 손지조 · 유대공 · 공광삼 · 소진함 · 왕염손 · 왕중 · 무억 · 장술조 · 척학표 · 정걸 · 손성연 · 왕빙진 · 능정감 · 계복 · 강성 · 전대소 · 허강좌 · 공음식 · 육기 · 광계
484·485·486권 「문원전(文苑傳)」
487·488·499·490·491·492·493·494·495·496권 「충의전(忠義傳)」
497·498·499권 「효의전(孝義傳)」
주용순 · 오번창 오겸목 · 주정 · 적요 · 이경염 · 왕호 · 황농 · 조형 · 황가장 · 정명윤 · 유종수 · 하복한 · 허계각
500·501권 「유일전(遺逸傳)」
502·503·504·505권 「예술전(藝術傳)」
506 · 507권 「주인전(疇人傳)」
설봉조 · 공사연 · 왕석천 · 방중통 · 매문정 · 명안도 · 유상규 · 왕문계 · 주홍 · 박계 · 허여란 · 이황 · 왕래 · 진걸 · 시왈순 · 이예 · 낙등봉 · 항명달 · 정취충 · 사가화 · 오가선 · 나사림 · 고관광 · 좌잠 · 증기홍 · 하란상 · 추백기 · 이선란 · 화형방
508·509·510·511권 「열녀전(列女傳)」
518·519·520·521·522·523·524·525권 「번부전(藩部傳)」
526·527·528·529권 「속국전(屬國傳)」
조선 · 유구 · 월남 · 면전 · 섬라 · 남장 · 소록 · 구르카 · 호한 · 보노특 · 합살극 · 안집연 · 마이갈랑 · 나목간 · 탑십간 · 바다흐샨 · 박라이 · 아부한 · 감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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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 [2] 독립국가인 몽골국과 러시아 내 몽골 문화권인 부랴티야 공화국 · 칼미키야 공화국에서는 오삼계를 그냥 외국의 기회주의자 정도로 여겨진다. [3] 여기서의 제독은 해군이 아니라 그냥 육군의 지휘관을 말한다. 오히려 장성(將星)이란 말은 최근에 만들어진 조어. 제독이 해군 장성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된 것은 근대 일본이 Admiral의 번역어로 제독을 채택한 이후의 이야기이다. 유럽은 육군과 해군의 기원이 다른 나라가 많지만, 기본적으로 동아시아는 이순신, 진린의 예에서 보듯이 유럽과 달리 수군과 육군의 사령관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구분이 없다. 이 단어의 원조국인 중국(대만 포함)은 "提督"이라는 말은 현대에 쓰이지 않고 해군과 육군과 마찬가지로 해군장령, 계급으로서의 admiral(별넷)은 해군상장으로 번역한다. [4] 김용의 무협소설인 녹정기도 이런 부분에서는 여전히 전통역사의 관점을 유지했다. 다만 작중에서 등장하는 진원원 본인의 입으로 '사람들은 내가 명나라 황제와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 요녀라고 욕하지만 나는 평생 누구도 해쳐본적 없고 그런 마음도 먹은 적이 없다. 나는 정말 그토록 사악한 요녀인 것일까' 라며, 난세에 힘있는 남자의 소유물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풍파를 겪어야만 했던 그녀 시점에서의 입장을 소개하기도 했다. [5] 참고로 이들은 숭정제가 재정난으로 자금 좀 기부하라고 할 때 모두 없다고 궁상을 떨었던 자들이었다. 아예 투항을 작정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자성군은 힘없는 백성들도 약탈했다. [6] 송산전투에서 오삼계가 이끌고 결사적으로 포위망을 뚫은 1만명에 송산 전투 후 궤멸되었어도 복귀했을 군대 숫자를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3만의 군대가 있었다고 보는게 옳다. 거기에 긴급징병을 통해서 외형적으로는 10만을 유지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실질적으로 제대로된 군대가 너무 적었다. [7] 이때 동맹을 맺자는 오삼계의 서신에 도르곤이 자기 친동생인 아지거, 도도랑 머리를 붙잡고 진짜인지 고민하면서 출병을 고민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8] 이때 살려서 북경으로 보내자는 의견도 많았으나 영력제에게 비단끈으로 자살하라고 밀어붙였다. 밀어붙인 이유는 영력제가 살아서 북경으로 압송될 경우 남은 세력들이 그를 되찾기 위해 공격할 수 있다는 걱정과 명분상이라도 명의 마지막 황제를 만주족들에게 보낸 후 받을 악명에 자결시킨 것이란 추측이 있다. [9] 강희제 평전에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써 오삼계에게 불리한 내용이 많다. [10] 1경(頃)은 100무(畝)에 해당하는 토지로 현재의 개념으로 환산하면 약 2만 여평의 토지임. [11] 운남에서 먼 서변과 교역한 것은 산해관에서 총병으로 제수하던 대부터 쌓아온 요동과 오래된 관계가 도움이 됐다. [12] 청에서 왕은 일종의 작위로, 토지를 분봉 받거나 정사에 관여할 권리는 없고 단지 황제의 명을 받아 군대를 거느리고 출병할 때에 잠정적 군사 지휘권을 주는 것에 불가했다. 하지만 순치 16년(1659)에 운귀총관(雲貴總管)에 임명되면서 지역 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13] 이용통보(利用通寶) [14] 물론 청 왕조 입장에서야 당연히 번을 철폐하고 싶어했을 테지만 워낙 삼번이 강력하다보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상가희가 번왕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얼싸좋다 싶어서 철번을 밀어붙인 것이다. 즉, 일부러 조장했다기보다는(물론 그런 점도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15] 청태종의 사위였다. 청태종의 14녀인 건령공주와 결혼. [16] 적장자인 오세번은 북경 탈출에 성공하여 운남으로 도피할 수 있었다. [17] 청사고 열전, 오삼계전 吳應熊及其子吳世霖處絞,其餘幼子俱免死入官 [18] 자살한 후 시신이 부관참시되었다. [19] 세계사에 결코 남을 수 없는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자기가 세운 나라를 자기가 멸망시킨 견훤과도 유사한 셈이다. [20]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그래도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오랑캐 정권인 청나라보다는 그나마 같은 한족 정권인 이자성이 낫지 않냐는 비판을 하기도 하는데... 문제는 명을 직접 멸망시킨 게 청이 아니라 농민반란군 순나라고, 청은 한동안 명나라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행세했다. [21] 물론 명-청 교체기 당시에도 농경민인 한족과 수렵채집민인 만주족 사이에는 문화나 생활양식의 차이 및 역사적 경로 등으로 인한 차이가 명백히 있었고, 이 때문에 오삼계 역시 처음에는 명나라를 직접 멸망시킨 이자성의 순나라에 귀순하려 했었다. 즉 '민족국가는 근대 이후 발명된 개념'이라고 말할 때 흔히 예시로 주어지는 전근대 유럽 국가들처럼 민족 개념이 무의미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명-청 교체와 오삼계의 행보를 현대의 민족국가 개념에 끼워맞춰 '왕조 교체나 개인의 원한은 작은 일이고, 작은 일 때문에 이민족에게 나라를 팔았으니 매국노이다!' 라고 말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전근대 왕조국가의 충성은 민족국가와 같은 이념적 정치체를 대상으로 한 개념이 아니라 군주 개인이나 왕조와 같은 특정한 실체를 대상으로 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민족국가 자체를 가장 중요한 충성(애국)의 대상으로 제시하는 현대의 민족주의/국가주의 체제에서는 그 민족 국가 내에서의 정권 이동은 상대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정치행위의 일부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이자성이 '주씨 정권이 정치를 너무 못하니 내가 뒤집어엎어야겠다!' 고 외치며 봉기한다거나, 오삼계가 방어에 성공한 뒤 '나라를 구한 것이 나이니 내가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외칠 경우, 그것들이 최소한 이민족(만주족)에게 국체가 넘어가는 것보다는 낫게 여겨져 반역이 아닌 정변, 또는 정권교체 정도로 간주되어야 민족국가가 사회적 가치체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실체로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인데, 당대의 가치관으로는 '주씨의 나라'인 명나라에서 이씨나 오씨가 정권을 잡겠다고 나서는 것은 '매국'과 별 다를 것도 없는 '반역'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전근대 국가에 대해 근대 민족국가와 같은 '애국'을 요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22] 오삼계의 정예부대가 오면 베이징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숭정제는 이를 듣지 않았으며 오삼계가 빨리 북경으로 오면 청이 눈치챌까봐 이자성의 진군 속도에 맞춰 북경에 오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북경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막던 명의 장수들이 쉽게 항복하는 바람에 이자성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한 것이다.(출저:한 권 동양사) [23] 조선의 사대부 및 일본 에도 시대 중후기의 사무라이가 여기에 해당한다. [24] 위의 각주에 나온 에도 시대 중후기 사무라이와 달리 오히려 현대의 직업적 계약관계에 가까운 활동을 한 이들이었다. 흔히 알려진 부시도, 사무라이 정신은 에도 시대 중후기에 생겨난 것이다. [25] 같은 번왕이던 상가희가 이 케이스이다, 상가희는 은퇴를 요청하자 그와 동시에 번국을 폐지하라는 강희제의 명령에도 순순히 따랐으며 동시에 삼번의 난에도 반대하고 강희제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이에 반발한 장남 상지신의 반란으로 유폐되자 절망하여 자살 시도까지 하고 결국 건강을 해쳐서 병사하면서도 유언으로 청 황실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모습을 보였다. 이 덕에 삼번의 난 진압 후에도 장남 상지신만이 자진해서 자결하는 선에서 끝나고 나머지 가족들은 처벌받지 않았으며, 차남 상지효가 부친의 시신을 운구하여 북경에 오자 강희제가 직접 맞이하기도 했고, 상가희은 예우를 갖춘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26] 사실 이는 누르하치, 홍타이지와 함께 초원을 누리던 숙련도 높은 장수들이 죽거나 늙어서 인재가 많이 부족했던 탓도 있었다. 강희제가 인재를(특히 한족 인재들) 발굴하고 역습에 나서자 곧바로 삼번은 데꿀멍하게 되었다. 소설 녹정기에도 이런 모습이 나오는데 장용, 손사극, 조양동, 왕진보 등이(실존인물들이다) 위소보가 발굴해 강희제에게 바친 한족 인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