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26 18:31:15

왕승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1. 개요2. 생애

1. 개요

王承
생몰연도 미상

서진, 동진 시대의 인물. 왕담의 아들. 성정이 청허하고 욕심이 없었으며, 말할 때 문장을 가식적으로 꾸미지 않아,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믿을 만한 인물로 통했다.

2. 생애

약관의 나이에 명성을 얻었고, 태위 왕연은 그를 남양(南陽)의 명사 악광에 견줄만 하다며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영녕 원년(301년), 장사왕 표기장군 사마예의 부름을 받고 그의 막료로 들어가 참군이 되었다. 이후 팔왕의 난이 점점 격렬해지자, 왕승은 난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갔다. 동해왕 사공 사마월은 도망온 왕승을 맞아들여 종사중랑으로 삼았다.

광희 원년(306년) 6월, 혜제 사마충이 낙양으로 환궁할 때, 혜제의 대가(大駕)를 영접한 공으로 남전현후(藍田縣侯)에 봉해졌다. 또, 조정에서 그를 상서랑으로 삼으려 했지만, 왕승이 사양했다.

영가 원년(307년) 3월, 동해왕 태부 사마월이 허창에 진수하자, 왕승은 기실참군에 임명되어 그를 따라갔다. 사마월은 왕승을 중히 여겨, 그에게 자신의 적자 사마비(司馬毗)의 교육을 맡겼다. 그렇게 사마월을 섬긴 지 수 년이 지나고, 어머니가 고령이라는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사마월이 불허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동해태수에 임명되어 그곳으로 부임했다. 왕승은 청렴결백하게 지역을 다스렸고, 세세한 일에 구애받지 않아 간소하면서 관용적인 정치를 펼쳤다. 한번은 말단 관리가 연못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걸려서 잡혀오니, 왕승은
"문왕(文王)의 동산은 모두의 것인데, 연못의 물고기 따위가 어찌 아까울 수 있겠는가!"
라며 해당 관리를 용서했다.

오래지 않아, 서진의 관직을 버린 뒤, 하비(下邳)를 거쳐 장강을 건너고, 건업에 이르렀다. 낭야왕 진동장군 사마예는 그를 종사중랑으로 삼았다. 왕승의 명성은 강동에서도 드높아, 똑같이 북에서 도망쳐온 왕도, 위개(衛玠), 주의, 유량 등 쟁쟁한 명사들을 제치고 '중흥제일(中興第一)'이라 칭송받았다. 이후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조정에서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겼다. 아들 왕술이 후사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