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및 고려의 호족과 군벌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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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異才후삼국시대의 호족. 오늘날 대구광역시 일대인 수창군의 호족이었다.
2. 생애
그에 대한 기록은 최치원의 908년 저작으로 동문선에 수록된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전해온다.이재의 관직은 호국의영도장(護國義營都將)이고 관등은 중알찬, 즉 중 아찬으로, 대아찬으로 승진할 수 없었던 6두품들이 받았던 아찬의 중위 관등이었다. 수창군에 자리잡았다는 것 때문에 대구의 토착 세력으로 볼 여지도 있지만, 과거 지방관을 역임했던 최치원처럼 중앙 6두품 귀족 출신으로 통일신라의 지방관으로서 부임했다가 후삼국시대를 맞아 호족화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그는 지방 반란으로 신음하는 나라의 안녕을 빌기 위해 팔각등루라는 높은 건물을 세우고, 도성의 서쪽을 10년간 지켰다고 전한다. 난세를 맞아 임금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했고 그의 관직명에 있는 호국이라는 글자를 보아 신라 왕실에 충성하는 입장의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이재의 경우처럼 옛 신라 근처 지역에는 비록 완전히 충성하진 않더라도 신라 역사의 특수성을 감안해 적어도 적대하지 않거나 그 입장에 동정적인 호족들이 많이 있었다. 훗날 후백제에 붙는 강주의 왕봉규도 신라와 적당히 협력했고 진례 지역의 소율희도 신라에 비교적 유화적이었던 대표 호족이었다.
누각을 세운 이재가 국가를 해치던 자들을 토벌하던 충신이라고 최치원이 칭송한 것을 볼 때 후삼국시대 초반 연쇄 반란을 토벌하고 다니던 신라군 장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중과부적으로 조기 진압은 실패하고 수도 서라벌을 방어하는 요충지 대구에서 성을 쌓고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