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국 명나라의 극작가, 문인. 자(字)는 의잉(義仍)이고, 호는 해약(海若), 약사(若士), 형옹(螢翁) 등이 있었으며 필명으로 청원도인(淸遠道人)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최근까지 그의 작품이 정식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에서의 인지도는 비교적 떨어지지만, 전세계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극작가로 알려져 있고 중국의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별칭도 있다.
2. 생애
가정 29년 음력 8월 14일에 장시 성 무주(撫州)시 임천(臨川)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몸이 병약했기 때문에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지만, 총명하여 다양한 스승의 가르침을 전수받았다. 그 중에는 양명학 태주(泰州)학파의 진보적 학풍을 전수받은 나여방(羅汝芳)이라는 인물이 있었고, 이는 탕현조의 작품에 깃든 진보적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13세에 본격적으로 과거 공부를 하여 8년 후인 1570년( 융경 4년), 21세의 나이로 향시(鄕試)에 급제하였다.그러나 1571년(융경 5년), 1574년( 만력 2년)의 진사시에서 연달아 낙방했고, 1577년에 다시 진사시에 응시했다. 하지만 당시 내각 수보였던 장거정이 자기 아들을 급제시키기 위해 전국의 선비들을 모아 부정 시험을 계획하였고, 계획에 동참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거절하여 그 해 시험은 물론이고 3년 후인 1580년의 진사시에까지 낙방하고 말았다.[1]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공부한 끝에 1583년(만력 11년) 34세의 나이로 3갑 211등으로 급제한다.
그의 첫 벼슬은 난징의 태상시박사(太常侍博士, 정7품)라는 예악, 제사 관련 부서였다. 난징은 수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황제가 주관하는 제사를 드릴 일이 거의 없었고 탕현조는 이 때 독서와 유람, 그리고 저술에 몰두한다. 그러나 장거정의 제안을 거부할 때부터 떡잎을 보였던 그의 강직한 성품 탓에 인사과 관리로부터 미움을 사기 일쑤였고, 그 때문에 1588년(만력 16년)과 1589년(만력 17년)에 두 차례나 부서를 옮긴다. 하지만 그럼에도 탕현조는 1590년 달관(達觀)선사를 만나 수계를 받고, 당시 성리학을 반대하였던 이지(李贄, 1527~1602)의 사상에 동의하며 오히려 자신의 개혁적 가치관을 더욱 공고히 했다.
1591년(만력 19년) 윤삼월에 혜성이 관찰되자 황제가 이를 신하들의 태만과 불충으로 인한 흉조라고 여겼다. 이에 탕현조가 전국 방방곡곡의 감찰사들과 조정 대신들의 과오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 상소를 지지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하지만 실세 대신들이 반박 상소를 꾸준히 하여 도리어 자신이 광둥성 서문(徐聞)현의 말단 관직으로 좌천되었다.[2] 사실상 유배였던 것이다.[3] 그러다가 1593년(만력 21년) 저장성 수창(遂昌)현 지현으로 발령받아 거기에서 선정을 베풀었으나, 역시나 그 강직한 성품 탓에 한 수창현 출신 관료의 은닉 토지를 처분하여 그로부터 모함을 받아 1598년(만력 26년) 조정에 사직을 청하고 귀향하였다. 3년 후에 사직서가 처리되어 정식으로 면직된 탕현조는 소설 창작에 전념하다가 1616년 음력 6월 16일에 고향에서 사망했다.
3. 사상
탕현조는 명나라 후기의 인물로서 황제가 나태해지고 대신들은 사익만 챙기며 밖으로는 몽골과 왜구가 침입했지만 산업이 발전하여 시장 경제가 활발해지며 인쇄술의 발달로 서적의 유통이 증가한 당시 사회를 목격한 인물이다. 그는 사회 현실을 무시하고 인격 수양과 관료제의 정당화에만 사용되던 성리학을 비난하고, 양명학을 수용하여 개성과 욕망을 긍정하였으며, 자신의 사상을 소설과 희곡으로 표현하였다. 그 예로 <모란정환혼기>에는 자유연애와 여권 신장이라는 주제의식이 부각된다.한편 말년에는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여 <남가몽기>, <한단몽> 등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주제로 하는 희곡을 집필하였다.
4. 작품
5. 여담
유럽의 위대한 극작가와 소설가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미겔 데 세르반테스와 같은 해에 사망하였다.장시 성 무주(撫州)시 에는 현재 그를 기리는 건축물이 3개 존재한다. 하나는 탕현조의 묘지이고, 또 하나는 그의 업적을 기념하고 관련 자료를 보존하는 '탕현조기념관'이며, 마지막 하나는 '옥명당영극원(玉茗堂影劇院)'이다. 옥명당은 탕현조가 관직을 버리고 귀향했을 때 새로 지은 거처였으나 시간이 흐르며 사라졌고 대신 연극, 그림자연극을 상영하는 극장을 거기에 세운 것이다.
종합편성채널 채널A에서 방송하는 천일야사 109회에서 탕현조의 모란정환혼기에 대해 다루었다.[4] 문제는 탕현조가 모란정환혼기를 집필한 것 외에는 모조리 역사왜곡이다. 탕현조가 모란정환혼기를 집필한 이유를 자유롭게 살고싶다는 꿈을 꾸던 여동생이 여인들의 사회진출을 압박하던 시대상으로 인해 여동생이 자살하고 여동생 탕현아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집필한 것으로 극이 전개되는데 문제는 탕현조는 여동생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모란정을 관람한 여인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해 연쇄적으로 자살하고 그 책임을 묻기위해 재상이 탕현조를 참수하려다가 여인들이 호소하여 목숨을 부지해다는 황당한 전개로 이어졌다. 문제는 해당 재상은 장거정 인데 장거정은 1582년에 사망했고 모란정환혼기는 그 이후의 작품인데도 이미 죽은 장거정이 나와서 탕현조를 죽이려고 한다. 애초에 모란정환혼기는 탕현조가 온전히 창작한 것이 아닌 탕현조가 출생하기 약50년 전에 원본이 되는 소설이 있었던 것을 탕현조가 살을 붙이고 조연들을 추가시켰던 것인데 천일야사에서는 탕현조가 존재하지도 않던 소설을 아예 창작한 것으로 극을 전개시켰으며 탕현조가 모란정환혼기를 집필했다는 이유로 체포되거나 처벌받은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압권인 것은 모란정 편을 마무리할 때 천일야사와 계약을 맺고 활동하는 세계사 강사 윤미가 나와서 모란정 편을 소개해서 마치 실제로 해당 내용이 있었던 것처럼 소개하는데 윤미는 탕현조에 대해 동양의 셰익스피어라고 소개하면서 탕현조와 셰익스피어의 동상이 함께 놓여진 사진을 설명하면서 탕현조를 다른 서양에서도 존경하여 셰익스피어의 생가에 셰익스피어 동상 외에 탕현조의 동상이 함께 놓여질 정도로 서양권에서도 인정받는다고 설명했는데 완전히 허무맹랑한 거짓말은 아니라서 탕현조와 셰익스프어의 동상이 함께 놓여진 셰익스피어의 생가는 존재하지만 영국에서 영국인들이 탕현조를 존경해 제작해서 셰익스피어의 생가에 놓은 것이 아니라 중국 장시 푸저우 탕현조기념관에 진열된 “탕현조와 셰익스피어의 만남” 동상이 원본으로 중국에서 탕현조의 위상을 알리기위해 동상을 제작해 기증한 것이다. # 물론 탕현조가 동양권에서 인정받는 문학가이기는 하지만 서양권에서의 인지도는 한없이 낮은데 중국에서 탕현조를 추켜세우기 위해 동상을 제작하여 영국 셰익스피어 생가에 기증한 것을 셰계사 강사 윤미가 셰익스피어의 생가에 탕현조의 동상이 함께 놓여져 있어서 영국에서 탕현조가 셰익스피어 못지않게 인지도와 인기가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시청자를 기만하는 명백한 역사왜곡이다.[5]
[1]
한편 그와 친분이 있었던 한
심(沈)씨 선비는 1577년부터 장거정의 계획에 참여하여 1갑 1등으로 장원급제했고(...), 이때 장거정의 둘째 아들이 1갑 2등으로 급제했다. 1580년엔 장거정의 삼남과 장남이 각각 1갑 1등, 2갑 13등으로 급제했다.
[2]
현재는 개발되어 제법 부유한 지역이지만 예전엔 변방인데다 해안 지역이라 농사도 잘 안 되는 미개척지였다.
[3]
그는 서문현으로 가는 도중
광저우,
마카오를 방문하여 서양 문물을 접하고
마테오 리치를 만나가도 하였다.
[4]
방송시 제목은 <모란정> 죽음을 부르는 연극으로 원제인 모란정환혼기로는 끝내 소개되지 않았다. 작품이 유명해서 모란정으로도 모란정환혼기 문서로 다이렉트 되기는 한다.
[5]
영국에는 화교가 많으며 중국계 영국인들도 상당히 거주하며 셰익스피어 생가를 후원하는 이들 중에는 이러한 화교나 중국계 영국인들이 많은데 이들이 셰익스피어 생가를 후원하면서 동상을 제작해 기증하는 것을 셰익스피어 생가 측에서 거절하지 않는 것은 탕현조가 동양권에서 알아주는 문학가이기는 하지만 후원자들의 청을 거절하기 어려운 측면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