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 천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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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전 | 홍천귀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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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제회 교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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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홍천귀복 |
태평천국 초대 천왕 배상제회 교주 홍수전 | 洪秀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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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출생}}} | 1814년 1월 1일 | ||||
청나라
광동성 화현 관록보촌[1] (現 광둥성 광저우 화도구 화가도 관록보촌[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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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사망}}} | 1864년 6월 1일 (향년 50세) | ||||
태평천국
천경 천왕부 (現 장쑤성 난징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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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재위}}} | 태평천국 제1대 천왕 | ||||
1851년 ~ 186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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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성씨}}} | 홍(洪) | |||
{{{#000 휘}}} | 수전(秀全) | ||||
{{{#000 별호}}} |
천왕 天王 | Tianwa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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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연호}}} |
태평천국 太平天國, 1851년 ~ 186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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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종교}}} |
배상제회 拜上帝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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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초명}}} | 인곤(仁坤) | ||||
{{{#000 국적}}} | 청나라 → 태평천국 | ||||
{{{#000 신장}}} | 약 163 ~ 165cm[3] | ||||
{{{#000 왕후}}} | 뇌련영(賴蓮英) | ||||
{{{#000 자녀}}} | 홍천귀복 | ||||
{{{#000 부친}}} |
홍경양(洪鏡揚)(1775년 ~ 184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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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모후}}} | 친모 왕씨(王氏), 계모 이씨(李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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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 말기의 인물. 배상제회의 창시자이며 태평천국 운동을 주도했다. 본명은 인곤(仁坤). 황건적의 난, 홍건적의 난, 백련교도의 난과 더불어 중국에서 있었던 독특한 종교 집단의 반란인 태평천국의 난을 이끈 인물로 특히 긴 중국 역사를 통틀어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반란을 일으킨 인물은 홍수전이 유일했기 때문에 여러 의미로 주목을 받았다.2. 생애
2.1. 출생
객가 출신으로 본명은 인곤이며 부친은 홍경양(洪鏡揚)이고 어머니는 왕씨, 계모는 이씨(李氏)다.[4]시조는 북송에서 벼슬 자리를 지낸 홍매(洪邁)다. 강서성 상요(上饒)[5]에서 온 객가 집안이다. 정확히는 객가인이 많이 사는 광둥성 동부 매주(梅州)[6]에 그의 조상이 이주해 왔고 홍수전의 5대조가 화현(花縣)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복원수촌(福源水村)으로 이주했다. 그러다가 홍수전의 조부 홍국유(洪國游)가 홍수전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15년에 남쪽으로 13km 정도 떨어진 관록보촌(官祿布村)으로 이사왔는데 원래 살던 곳이 협소하여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주 당시 관록보촌(官祿布村)은 2가구만이 거주하던 곳인데 홍수전이 태어날 즈음에는 500여명이 살던 마을이었다. 홍수전의 사촌인 홍인간이 묘사하는 마을은 다음과 같았다.
"마을의 전면에 여섯 채의 가옥이 있고, 그 뒤편에 가옥들이 두 줄로 늘어서 있으며 그 사이로 골목길이 나 있었습니다. 세 번째 열의 서쪽에 홍수전의 양친이 사는 작은 집이 있습니다. 마을의 가옥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 흙탕물이 남겨 있는데, 이것은 마을 전체의 대소변이 빗물과 함께 흘러들어 농업용수로 사용하는, 이른바 마을의 비료 연못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방으로 냄새를 풍기기에 중국의 농촌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은 매우 견디기 어렵지요."
현재는 홍수전의 생가가 복원돼 있고 문화재로 지정도 받았으며
광서성 최초의 애국주의 교육기지가 됐다고 한다. 마을 구성원 대다수는 객가인이었고 그 중 홍수전이 속한 홍씨가 가장 많이 거주했다.또한 당시 관록보촌 뒤로는 18개의 산이 반달 모양으로 펼쳐져 있고 앞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홍수전이 12살 때 심은 용안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기묘하게도 이 나무는 그의 운명을 예견하듯이 25년간 꽃을 피우지 못하다가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49년에 꽃을 피우고 홍수전이 죽기 직전인 1864년에 벼락을 맞아서 죽었다고 한다.
2.2. 초기
3남 2녀 중 넷째이자 막내 아들로 태어났는데 남매들 중 그가 가장 머리가 좋아서 부친인 홍경양(洪鏡揚)이 그의 학업을 지원해 줬다고 한다. 집은 소 2마리를 가지고 있어서 농촌에서는 중농층에 들어가는 정도였다. 당시 그가 살던 화현(花縣)에 홍수전의 5대조부터 거주했지만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없었기에 홍씨 집안과 마을의 많은 기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상당히 똑똑했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젊은 시절의 그는 과거에 계속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했는데 타임라인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834년, 과거를 치렀지만 실패했다.
- 1836년, 두 번째 과거시험을 치르러 가던 중에 유학자 주차기(朱次琦)를 만나 예기의 예운(禮運)과 대동(大同)에 관한 설교를 들었고, 광저우에서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권세양언>(勸世良言)이란 기독교 복음서 요약본을 얻어 대충 읽었다. 권세양언은 중국 최초의 목사인 양아발(梁阿發)이 지은 성경 번역본인데 양아발이 학력이 깊지 않고 중국 정서상 용납할 수 없는 신비적 이야기를 뺀 결과 권세양언이 만들어졌다. 미국인 선교사가 누구인지는 불명이나 에드윈 스티븐스(Edwin Stevens)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때 홍수전은 권세양언을 대충 본 후 자기 집에 보관만 했다.
- 1837년, 현시(縣試)를 통과하고 부시(副試)를 치렀지만 다시 실패했다. 크게 상심한 그는 병을 앓고 다 죽어가는 중에 꿈을 꾸는데 야훼가 그를 아들이라 칭하며 신성한 칼을 선사하여 요괴와 같은 무리들을 무찌르는 꿈이었으며 예수가 꿈속에서 그의 형으로 나오는 등 화려한 꿈을 꾼 후 40일만에 병상에서 회복했다. 공교롭게도 광야의 유혹과 같이 40일간 앓아 누워 홍수전의 괴상한 사상을 더욱 강하게 했다.
-
1843년, 다시 과거에 떨어지고 외사촌 이경방(李敬芳)이 사는 연화당촌(連花塘村)에서 선생 노릇을 하며 살았다. 이곳은 현재
광저우 화두구(花都区) 바이샨탕(白蟮塘). 홍수전이 사는 관록보에서 동남쪽으로 17km 정도 떨어져 있고
광저우 바이윈 국제공항 근처.
그러던 어느 날 이경방이 권세양언을 빌려 달라고 한 후 읽었다. 그런데 기묘하게 이경방은 이 책을 홍수전에게 적극 권했고 이것을 바탕으로 자신이 예전에 꾼 꿈을 해몽하면서 자신이 야훼[7]의 아들이자 예수[8]의 동생이며 큰 뜻을 위해 태어났다는 사상을 가지게 됐다.
계모쪽 외사촌 이경방(李敬芳)을 첫 신자로 포섭한 후 엉터리지만 서로에게 세례를 주고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섰다. 이경방 다음으로 전도에 성공한 사람은 친척 동생 홍인간과 풍운산이었다. 뒤이어 홍수전은 성서에 나온대로 우상을 없애야 한다면서 공자의 위패를 없애는 것을 시작으로 사당, 절 등의 시설을 부쉈는데 이러한 과격한 행동 때문에 고향 마을에서는 홍수전에게 찬동하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거기다가 아주 매장당한 것은 아니지만 선생 자리에서도 잘렸다.
홍수전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1844년 봄 풍운산 및 그의 두 친척과 광둥성의 곳곳을 떠돌면서 전도를 개시하는데 34일간 160여 km를 나아갔지만 그들이 파는 붓과 벼루를 싸게 사기 위한 가짜 신도만 몇몇 생길 뿐 성과는 미미했다.
그런데 여기서 굴하지 않고 홍수전은 풍운산만 데리고 서쪽으로 광서성으로 나아가서 계평(桂平)(현 구이강(贵港))시의 현급시인 구이핑(桂平)시 지역까지 걸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최종 목적지는 광서의 귀현(貴縣) 사곡촌(賜谷村)이었다. 이 곳에는 홍수전의 외가인 왕씨 일가가 많이 살았고 특히 사촌형인 왕성균(王盛均) 및 친척들이 그곳에 살아서 향했다.
이 여행은 사실 위험천만 했는데 당시는 광동의 천지회가 설치고 있었고, 가는 길에 요족, 묘족 등의 이민족들이 많이 살아서 죽을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이 여행은 무난하게 흘렀고 두 사람의 신앙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당시 광서는 민속신앙이 발달한 곳이었고 당연히 홍수전의 사상은 먹히지 않아 몇 달 버티지 못하고 홍수전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풍운산은 주강(珠江) 일대를 떠돌며 전도를 계속했고 자형산(紫荊山) 일대의 금전촌(金田村)(현 구이강(贵港)시의 현급시인 구이핑(桂平)시 진티안진(金田镇))에서 근거지의 확보에 성공했다. 풍운산이 성공했던 배경에는 헌신적인 면모 외에도 홍수전보다 온건한 노선을 취해 우상 파괴에 주력하지 않고, 상제를 믿으면 현세에서 복을 누린다는 기복신앙을 퍼뜨린 것이 컸다고 한다. 또한 풍운산은 친화력과 설득력이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더없이 곤궁하게 살던 객가와 묘족, 좡족 등의 이민족 및 토착민들 모두 같이 상제의 형제자매라고 역설하며 잃을 것 없는 빈민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풍운산이 최초의 근거지로 삼은 금전촌 및 자형산 일대는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광서성에서도 빈민들이 모여 살았고 산이 깊어서 유격전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한편 풍운산이 기틀을 다지고 조직을 배상제회(拝上帝会)로 만드는 동안 홍수전은 팔력보(八壢埗)[9]에서 사상을 갈고 닦았다. 약 2년간 효과적인 포교를 위하여 세 작품을 만든다.
- 《원도구세가(原道救世歌)》
- 《원도성세훈(原道醒世訓)》: 통속적인 문체로 남녀의 평등, 대동사회 건설 등의 이상을 얘기한 작품
- 《원도각세훈(原道覺世訓)》: 상제에 반하는 부정한 것을 제거할 투쟁에 나서라고 말하는 저서
그리고 틈틈이 설교도 했다. 그리고 홍수전은 홍인간과 광저우로 향했는데, 이 때가 1847년이었다. 위의 세 작품은 1852년 태평천국의 《태평조서(太平詔書)》로 편집돼서 통합 출판된다.
그들은 광저우에서 선교사 이사카 제이콕스 로버츠(Issachar Jacox Roberts)의 초청을 받는다. 중국어명 나효전(罗孝全)으로 미국 남침례회 소속 선교사로 1840년에 홍콩에 온 최초의 선교사이기도 하다. 홍수전을 직접 오래 본 외국인이라 중요한 증언을 많이 남겼다
그의 지도 하에 2달간 성경 공부를 하여 기독교 교리를 익혔는데 로버츠는 홍수전을 좋게 본 것과 별개로 그가 꾼 황당한 꿈이나 교리에 대해서는 찬동하지 않았고 홍수전은 정식 세례는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유는 어이없게도 다른 중국인 신자들이 홍수전을 경계하여 그가 로버츠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부탁하는 말을 하도록 한 것이었다. 홍수전은 순진하게 말했지만 당시 로버츠는 돈을 구걸하러 믿는 척하는 가짜 신도에 학을 떼고 있었던 터라 홍수전을 오해하게 된 것. 이후의 양상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홍수전은 세례를 받지 못하고 배움을 끝내게 된다. 홍수전 본인은 이런 일에도 로버츠를 좋게 본 것인지 훗날 남경에서 로버츠를 재회했을 때도 우호적으로 대했다.
어느정도 기독교 교리를 익힌 후 1847년 8월에 홍수전은 금전촌에 머물던 풍운산에게 돌아갔는데 이때 배상제회는 약 3,000명의 신도와 양수청, 소조귀라는 인재까지 포섭한 큰 조직이 돼 있었다.
2.3. 태동하는 혁명
홍수전은 풍운산이 만든 조직을 보고 흡족해했고 풍운산은 스스로를 2인자로 칭하며 조직은 그대로 홍수전이 가지게 된다. 당시 두 사람의 역할은 나뉘었는데 홍수전이 교리의 정리 및 저술이라면 풍운산이 선전 담당이었다. 약 3,000명이 된 배상제회는 거칠 것이 없었는지 명성을 위하여 다음 목표를 감왕묘(甘王墓)로 삼았다. 감왕(甘王)은 광서의 상주(象州) 사람들이 섬기는 토지신인데, 상주(象州) 출신이며 남한을 정복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홍수전 무리는 그런 걸 상관하지 않고 기세등등이 감왕묘를 때려부쉈는데 당시 사람들이 섬기는 신앙의 대상을 부수고도 천벌을 받지 않자 자연히 배상제회의 이름이 높아져 갔다.이 일이 있는 후 홍수전은 더욱 기세등등 하여 주변의 사당들을 죄다 부수고 다녔는데 당연히 이는 지방 토호 세력에게 눈엣가시 같은 일이었다. 계평의 토호인 왕작신(王作新)은 행동에 나서서 무리를 이끌고 풍운산을 잡아서 감금시켰다. 그런데 배상제회 역시 기세가 올라서 오히려 풍운산의 사촌형 노육(盧六)은 여러 명을 이끌고 풍운산을 탈취해 왔다. 노육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계평의 아문에 남아 있는 풍운산의 진술서에 따르면 사촌이다. 원래 금전촌 출신인데 아버지 대에 자형산 일대의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와 정착한 인물이며 객가다.
왕작신 역시 이에 굴하지 않고 계평현 아문에 신고하여 풍운산과 노육은 잡혀가는데 사유는 불법집회, 혹세무민, 사당의 파괴 등이었다. 청나라의 구성민족인 만주족은 수가 많지 않아서 한족이 뭉치거나 하는 일에 대단히 민감했다. 풍운산은 스스로를 변호하며 있었고 홍수전 역시 손 놓고 있을 수가 없기에 계평의 현령이나 양광총독[10]에게 탄원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노육은 당시 열악한 감옥에서 사망했다. 또 홍수전이 총독을 만나느라 잠시 고향으로 간 사이 조직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때 이것을 구한 인물은 양수청과 소조귀였다. 1848년 3월 3일, 양수청은 갑자기 쓰러지며 하느님이 빙의했다고 말하며 천부하범(天父下凡)을 시전했고 소조귀는 천형하범(天兄下凡)을 시전하며 예수가 빙의했음을 말했다. 이는 신내림과 유사한 짓으로 여겨진다. 광서성은 무당이나 신내림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이를 통하여 흔들리는 조직을 다잡을 수 있었고 숯구이 조직 수령 출신의 양수청이 숯쟁이 신자들이 숯을 팔 때마다 일정한 분량을 저축하여 뇌물로 전달토록 해서 풍운산은 고향인 화현으로 압송되며 풀려났다.
홍수전 역시 자신의 권력이 흔들리는 것은 싫었지만 조직의 안정을 가져오고 현지의 실력자이기도 한 두 사람이 야훼와 예수의 대리인임을 인정했고 자연히 둘의 권력은 급격히 상승했다. 일시적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으나 양수청과 소조귀의 교단 내 권력 증대는 훗날의 피비린내 나는 사변의 원인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2.4. 배상제회의 반정부화
홍수전은 잠시 고향으로 귀향하여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한 후 다시 금전촌으로 돌아오는데 이때가 1849년의 여름이었다. 홍수전이 돌아온 후 조직은 금전 일대에 4개의 근거지를 만들었고 조직은 갈수록 성장하고 있었는데, 이 때 조직에서 포섭한 사람이 석달개와 위창휘였다.한편 주변의 상황은 1850년에 이르러서 급속히 전개되고 있었다. 토호들 및 청나라 지방 정부는 배상제회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충돌이 심화됐다. 좋지 못한 치안 때문에 향촌이 자체 무장하고 자경대를 만들었는데 이런 자경대와 금전촌의 배상제회 무리 간의 충돌이 잦아지고 있었다. 또한 지방 관아에서도 탄압을 시작하니 자연스럽게 배상제회는 청나라를 적대하는 입장을 더욱 굳히게 됐다.
또한 금전촌 인근의 귀현(貴縣)에서 결혼 문제로 인한 계투가 발생하여 객가와 토착민의 갈등이 터져나왔고 배상제회는 이 때 쫓겨온 상당한 인원을 흡수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배상제회는 홍수전이 기적을 통하여 병을 치료한다고 선전하여 종교 단체를 넘어서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로 태동하고 있었다. 물론 홍수전이 기적을 일으킨 것은 아니고 홍수전이 의학 지식을 파편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또한 당시 태평천국에는 본명이 이준창(李俊昌)인 이준량(李俊良), 하조원과 같은 전직 군의관들이 상당히 가입해 있었다. 덧붙이자면 홍수전의 처남인 뇌한영이 의사 출신이었다.
2.5. 태평천국 운동
관련 문서: 태평천국 운동,
태평천국
홍수전은 추종자 3,000여 명과 함께 일명 배상제회를 조직했는데 풍운산을 비롯한 추종자들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당초에는 종교 운동의 성격이 강했으나 추종자들이 체포된 사건을 계기로 홍수전은 정치적인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해 혁명에까지 뜻을 두게 되었다. 마침내 1851년, 홍수전은 금전촌에서 태평천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스스로를 천왕으로 칭했다. 그리고 양수청을 동왕으로, 소조귀를 서왕으로, 풍운산을 남왕으로, 위창휘를 북왕으로, 석달개를 익왕으로 임명하여 조직을 구성했다.
그런데 양수청과 소조귀가 각각 스스로 야훼와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를 받는다면서 설치자 홍수전의 입지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양수청은 무당의 재주가 있었던지 평소와 다른 목소리로 말하면서 천부하범이랍시고 자기의 몸에 상제(야훼)가 직접 내려왔다고 선전했다. 처음 홍수전이 배상제회를 만들었을 때는 양수청의 이런 재주가 보통 사람들한테 먹혀서 포교에 도움이 되었으나, 이후 태평천국이 점차 성공을 거두어나가자 자신이 홍수전과 대등한 위치에 서려는 야심을 품고 홍수전에 맞섰다.
보통 사이비 종교는 교주 외의 인물이 신의 계시를 받는다고 설치면 분리 독립하거나 교주에게 제거되는 경우가 많은데, 홍수전은 특이하게도 양수청과 소조귀가 신의 계시를 받는다는 것을 공인하고 스스로도 그에 따랐다. 이런 걸 보면 홍수전의 정치적 면모가 모자랐으며 심지어 양수청의 괴뢰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2.6. 난징 점령과 천경 개칭
어쨌든 청군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력이었던 태평천국군이 청군에 연전연승하면서 태평천국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수많은 민중들과 장강 이남의 반청 세력들이 홍수전에게로 모여들었다. 홍수전은 본격적으로 태평천국의 체계를 갖추려면 남경을 점령해야 한다는 위창휘의 간언에 따라서 남경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한다.마침내 홍수전은 1853년 남경을 점령하고, 이름을 천경으로 고친 뒤 본격적으로 황제 행세를 하게 된다. 그러나 남경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소조귀와 풍운산이 전사하면서 세력 균형이 깨어졌고, 남은 왕들 중 양수청과 위창휘가 더 큰 권력을 누리기 위해 암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양수청은 야훼가 자기 입을 빌려 말한다면서 홍수전을 다른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면박을 주었고, 위창휘는 석달개가 총애받는 것을 시기하여 석달개의 일가를 몰살시켜 홍수전의 권위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자, 위창휘에게 양수청을 제거하게 만들고 이어 위창휘 일파를 제거하는 것으로 문제를 일단락시킨다.
2.7. 내분으로 쇠퇴하다
이후 홍수전은 자신의 형인 홍인발과 홍인달을 그나마 믿을 수 있다고 보고 왕으로 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홍인발과 홍인달은 욕심 많고 사악한 주제에 무능하기까지 했다는 점. 끝내 이들의 수작에 환멸을 느낀 석달개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남경을 떠나 쓰촨 성 원정을 강요받고 거기서 죽는 일이 터지고 만다. 석달개가 그나마 태평천국에서 군사적 재능을 보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최후였다. 믿었던 형들이 대들자 홍수전은 홍콩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동생 홍인간을 왕으로 임명해 두 형을 견제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홍인간이 지나치게 근대적이었던 탓에 이렇다 할 결실을 거두지 못하게 된다.한편 서양 각국은 홍수전의 태평천국이 기독교 신앙에 입각하여 건립되었다는 사실에 흥미를 가졌고, 이용가치를 살피기 위해서지만 어느 정도 접근하기까지 하는 등 초기에는 관망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으나, 홍수전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 즉 하느님의 둘째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단으로 간주되었고, 거기다 반열강 성향인 태평천국이 청나라와 맺어둔 조약을 이행할 리 없다고 판단하여 청나라 편을 들어주기로 결정하였다.
2.8. 최후
태평천국이 이렇게 내분으로 힘을 소진하고 국제정세도 불리하게 변해 갈 동안 한때 형편없이 밀렸던 청나라는 증국번을 필두로 하여 전력을 재정비, 1862년부터 본격적으로 태평천국을 조이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 상하이를 비롯한 동남 해안 도시들에는 외국인 체류자들도 많았는데 이 중 미국인 장교 출신인 프레드릭 타운센드 워드를 필두로 서양인 탈영병, 모험가들을 동원한 용병부대로서 태평천국을 토벌할 소위 '상승군'이 조직되었는데 비록 처음에는 내부 의견 마찰로 금세 와해되었으나 워드가 이후 자신의 의견을 잘 따라줄 필리핀 출신 용병들과 현지 중국인 자원자들을 선발하여 상승군을 재건, 태평천국군을 각지에서 압박하고 승리하면서 세력을 불려나간다.그러나 워드가 무리한 진격 끝에 공성전 도중 전사해버리자 이후 영국 출신의 찰스 조지 고든(1833년 ~ 1885년)이 상승군을 접수하여 전력을 재정비한 뒤, 증국번의 군세와 서양 각국의 군세와 협력하여 태평천국을 계속해서 압박하였다. 고든은 이때의 공으로 청 황실의 총애를 받아 일명 차이니즈라는 별명을 얻는다.[11]
궁지에 몰린 홍수전은 반격을 위해 상하이 공략을 시도했으나 되려 증국번과 서양 각국의 군대가 잇따라 천경(남경)을 향해 진군해오자 1864년 6월 1일 스스로 자결했다고 한다. 다만 홍수전의 최후는 확실치 않은데, 천경이 함락된 후 증국번의 공술에 의하면 수만 명이 최후까지 저항하였고 홍수전은 온 힘이 다하여 자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체포되어 처형된 부하들의 공술서나 당시 목격담에 의하면 부족한 식량을 위해 천로[12]가 내린 풀을 떡으로 먹던 홍수전이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고도 한다.
포로가 된 이수성이 남긴 공장기가 2가지 판이 있는데 홍수전이 자살했다는 판이 조사결과 증국번 집안에서 초본으로 발견돼서 통설로 여겨진다. 홍수전이 저항하다가 자결했다는 설은 증국번이 전공을 세우기 위해서 꾸몄을 가능성이 있다. 증국번은 홍수전의 무덤을 파해쳐 시체를 검시한 다음 부관참시하여 머리를 가져갔고 시체는 현장에서 소각했다고 한다. 이렇게 태평천국의 난이 종결되었다.
3. 기타
당시 중국의 악습인 전족을 매우 싫어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전족한 여인들을 보기만 하면 발을 끓는 물에 집어넣어 억지로 발을 펴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도 첩을 잔뜩 들이고 환관을 대거 늘렸기 때문에 결국 별 거 없는 전제 군주였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청나라도 전족을 싫어했던 건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신해혁명을 일으킨 쑨원이 어릴 적에 존경했던 인물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멸만흥한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홍수전은 혈통적으로 한족이었을지언정 기독교에 사상적 기반을 둔 교주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한족 문화 같은 것에는 오히려 부정적이기까지 하였으며 당시 반청 운동이 반청복명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홍수전은 " 명나라가 망한 지가 몇 백 년 전인데 반청은 그나마 가능해도 복명은 말이 되냐?"면서 의외로 멀쩡한 사고방식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아Q정전》에 주인공이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혁명군들을 숭정제의 원수를 갚으려는 부대라고 생각하는 내용이 있다. 당시에 삼합회, 천지회 등의 반청(反清) 조직은 반청복명(反清復明)을 기치로 내걸고 있었다. 태평천국 수뇌부는 이들을 포섭했지만 동시에 그들의 다른 사상 때문에 융화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었다.[13]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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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花縣 官禄布村.
[2]
花都区 华街道 官禄布村.
[3]
홍수전혁명의 진실(洪秀全革命之真相)에서 홍수전의 키에 대해 키가 약 5피트 4 ~ 5인치(约五呎四五吋)(약 163 ~ 165cm)였다는 기록이 있다.
[4]
어머니인 왕씨도
광서성의 객가 집안 출신이다.
[5]
현
강서성 상라오(上饒)시
[6]
현
광둥성 메이저우(梅州) 시
[7]
당시 태평천국에서는 상제(上帝)라고 불렀다.
[8]
태평천국 교리에 따르면 천형(天兄)
[9]
홍수전의 고향인 관록보촌에서 북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곳인 후우(胡屋)
[10]
광둥성,
광서성을 모두 다스리는
총독
[11]
하지만 그는 21년 뒤, 영화《
카르툼》에서 묘사된 대로
수단 공화국 카르툼에서
마흐디가 이끄는 이슬람군에게 참패해 효수당하게 된다.( 영화에서도 중국에서 받은 관복을 이슬람 지도자에게 선물로 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일부 청인들은 그가 효수당한 걸 알고 매우 통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파쇼다 사건 문서로.
[12]
하늘의 이슬, 성서의
만나.
[13]
왜냐하면 태평천국은
아편과 술을 금지하고 약탈한 재물은 모두 공동보관 창고인 성고에 바치라고 강요했는데, 반청 조직들은 그러한 규율을 지키기 싫어하여 처음에는 태평천국과 손을 잡았다가 나중에는 태평천국과 결별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