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1 21:57:45

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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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특징

1. 개요

중인()은 조선의 특수 신분으로, 양천제 분류로는 양인이지만 대과 응시가 불허된, 지배층도 아니고 피지배층도 아닌 중간의 특수계층을 말한다.

2. 상세

전반적으로는 고려 기득권층 중 사대부가 아닌 이들의 후손으로, 일반 상민과 달리 양반처럼 한문으로 이름을 짓고 성씨와 관향이 있으며 족보도 가지고 있지만 대과 응시를 할 수 없었다. 이는 정도전이 조선의 건국을 주도하면서 고려 말의 폐단을 야기했던 부원세력, 향리세력, 상인세력을 한꺼번에 박살내기 위해 취한 극단적인 조치의 영향으로, 부연하자면 부원세력은 몽골어 통역으로 원나라 황실에 아부하며 매국을 했고 향리세력은 중앙정부의 지방행정에 반항했으며 상인세력은 사병보유와 재정교란으로 고려의 내정을 파탄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도전 본인도 향리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는 어떤 점에서는 사다리 걷어차기이기도 했지만, 조선이 건국될 때 유학을 익힌 사대부가 주도하는 질서의 수용을 거부한 기득권층은 아예 중앙관직에서 배제하니 분명히 유서깊은 혈통이긴 한데 양반을 할 수없는 중인이라는 계층이 생긴 것이다.

이 중인은 좁게는 역관(譯官), 의관(醫官), 율관(律官), 산관(算官), 화원(畵員) 등 잡과 출신 기술 관리를 가리켰다. 지금으로 치자면 외무공무원이나 지적직 공무원, 의료직 공무원 등 기술직 공무원, 법원공무원, 연구직 공무원에 해당되는 집단이 여기에 속했던 것. 넓게 보자면 여기에 관청에 소속된 녹사 아전과 이들의 자손들, 상단 행수급 이상 상인들과 지방 의원 및 양반의 서얼들이 포함된다.

잡과에 급제해도 벼슬을 받기는 하지만, 문,무과에 비해 낮은 접을 받았으며[1] 승진 품계에 한계가 명확했기에(한품서용) 문과 급제 가문에서는 잡과를 천시했고, 사대부로 대접 받지 못하는 이들을 가리켜 중인이라 하게 된 것이다.

중인들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체제적 노선 때문에 불이익을 받던 자들이었으므로 양천제가 사실상 반상제로 바뀌면서 양반과 상민의 구분이 짙어지던 때에도 양반들은 법적으로는 대과 응시가 가능한 상민보다 그나마 족보도 있고 돈도 많은 중인들을 더 경계하고 멸시하였다. 심지어 양반이 가세가 기울어 잡직으로 진출하면 양반자격이 박탈될 정도. 단적인 예로, 의주 만상 도방 임상옥이 지방 사또에 제수되어 근무 하던 중에 사저를 좀 크게 지었는데, 암행어사가 이걸 보고 감히 양반도 아니면서 집을 크게 지어 양반을 우롱한 죄로 봉고파직을 해버릴 정도였다. 심지어 국왕에게 직접 벼슬을 받았는데도 양반 대접을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중인이 멸시받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왕실 직속 경호원인 별감이 되는 것이었다. 별감은 국왕과 왕비와 왕세자의 수족이었으므로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별감은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된 대신 막후에서 막대한 금전적 이권과 사치를 누렸고 화류계의 큰 손으로써 유행을 주도했다. 물론 의관으로서 왕의 주치의가 되는 사례도 있었으나 하고싶다고 할 수있는게 아니었고...

어의 역관으로서 매우 큰 공을 세워 면천허통 조치를 받아 양반으로 신분상승한 사례가 있긴 하나 이는 천민이 공을 세워 면천허통된 사례만큼이나 희귀하였다. 오히려 중인은 면천허통되어도 당대에는 명예직으로 만족해야했다. 결국 기존 양반들보다 훨씬 높은 충성심을 입증해야 양반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천민이나 중인이나 별 다를 것도 없었다.

3. 특징

중인들은 대개 한양 중심에 살았는데, 가운데 신분이라서가 아니라 가운데 살기 때문에 중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양천제였으므로 중인은 공식적인 신분은 아니었고, 실제 사회적 대우로 구별된 계층이었던 것이다. 양반에 비해 여러 차별 대우를 받았지만 전문기술자로서 실무를 담당했고, 그 중 잡과 합격자들은 일단 관료로 대접은 받았기에 일정의 권리를 누렸고 수완을 발휘하는 자들은 양반 이상의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특히 역관들은 사신단에 참여하여 무역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후기로 가면 조정에서 반상제를 공식적으로 규정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미 사회적 변화로 경제력을 손에 넣은 이들은 당연히 반대했고 왕들은 새로운 파워로 떠오른 이들의 지위를 올려주기도 했다. 특히 상대적으로 제한이 덜했던 서얼들의 경우에는 중기 시절부터 계급 제한을 넘어서 출세한 경우도 가끔 나타났다.

중인 중 하나인 향리는 본래 고려시대 지방 호족세력의 후예이다. 고려는 지방 호족의 영향력이 큰 사회였는데, 조선 개국 후 정도전이 주도한 중앙집권 사회에서는 호족 세력의 영향력이 급감한다. 여말선초 기간 지방 호족 세력들은 향리로 전락하여, 지방 관아에서 실무 행정을 담당하였고 이들도 중인으로 분류되었다. 외지에서 부임해 와 임기 후 떠나는 지방관들은 그 지역의 정세에 밝은 향리에게 실무를 전담시켰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지방행정의 주축으로서 커진 영향력 탓으로 부패가 만연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구한말 서얼들의 차별이 공식적으로 사라지자, '우리도 따지고 보면 양반과 출신이 같다. 왜 우리만 사다리 걷어차기로 지방에서 홀대만 받아야 하냐'고 맹렬하게 항의한 끝에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전에야 공식적인 차별이 철폐되었다.
중인들의 직역은 대체로 세습되어 의관 가문, 역관 가문 등이 나타났고 전통의 과학 기술들도 중인 가문들을 통해 후대에 전해졌다. 따라서 조선 후기 해외와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양반 문화와는 별개의 중인 문화를 만들었으며, 이들은 경제력이 강하면서도 중간에 끼어있다는 처지 때문에 특유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조선 후기 서민 문화의 상당 부분은 이들이 만들어나간 경우가 많았다.

별감의 경우 중인 중에서도 격이 낮은 하급 관료 집단이었지만 임금의 곁을 보좌했기 때문에 왕들이 봐주는 경우가 많았으며, 조선 후기로 가면 별감 출신들이 궁녀가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측근 집단이었다. 또 기방의 주인이며 유행을 선도한 오렌지족이기도 했다.

광복 이후 제헌 국회의원 중 60%이상의 출신 가계가 중인 계급이었다. 천민, 양인들은 여전히 까막눈이었고 양반들은 일제의 탄압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1] 다만 조선후기에 무과 급제자가 폭증하여 합격해도 벼슬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무과에 비해 잡과의 위상이 크게 낮지는 않다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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