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40년대
북한이 만들어지기 약 1년 전인 1947년 10월의 한 공문서에 따르면, 이미 그 당시에 북한에는 17개 정도의 특별노무자수용소가 있었다고 한다.[1] 소장의 허가가 있으면 수감자가 가족과 면회, 외출이 가능한 일반 교도소 형태였다고 한다.2. 1950년대
첫째, 종파분자와 계급의 원수의 숙청(1953년∼1958년), 남로당파 숙청(1953년), 소련파 숙청(1953년∼1956년), 연안파 숙청(1956년∼1958년), 월남자 가족, 치안대 가담자, 적군 협력자, 지주 등 6.25 전쟁 때 한국 측에 협력한 자의 숙청.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1956년 소위 8월 종파사건 과정에서 반(反)김일성 세력(종파분자)들을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시키기 위해서 가족들과 함께 수용하는 통제구역을 평안남도 북창군 탄광지역에 개설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연안파 숙청과정 등 독재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반대세력과 그 가족들을 격리시키기 위하여 수용소가 확장되었다고 한다.( 황장엽의 증언)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현재의 정치범수용소가 아니라 반대파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원시적인 형태의 수용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성일도 8월 종파사건 이후 김일성이 정치범수용소 운영의 기초가 되는 상세한 지침을 내린 것을 전하기도 했다. #
3. 1960년대
둘째, 중앙당 집중지도사업(1958년 말∼1960년 말).경찰·검찰의 간부, 당 중앙학교 학생 전원, 각 도 간부학교 학생 전원 등을 조사원으로 임명하고 전 주민을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으로 분류한 다음 적대분자를 강제수용소에 구금했다. 적대계층으로 분류돼 숙청대상이 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① 월남자 가족 및 한국전쟁 때 치안대원으로 일한 자와 그 가족 약 2백만 명, ② 종교인, 지주, 기업가, 상인 약 10만 명, ③종파분자로 숙청 당한 자와 그 가족 약 10만 명, ④ 남로당계 잔당과 그 가 족 약 40만 명, ⑤ 귀환 북한군 포로와 그 가족 약 40만 명, ⑥ 일제강점기에 관직을 지낸 자와 그 가족 약 5만 명, ⑦실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거나 출소한 자와 그 가족 약 10만 명. 총계 3백20만 명.[2]
적대분자의 적발은 가혹할 정도로 철저하게 수행함으로써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게 김일성의 방침이었다고 한다. 안명철이 기억하고 있는 김일성의 교시는 다음과 같다. "독초는 적시에 제거하고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 "지난 시기에 우리 인민의 피와 땀을 빨아 살이 찐 착취분자와 종파분자는 무자비하게 숙청해야 하고, 다시는 고개를 들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앞뒤의 사정으로 보아 김일성의 교시는 아마 이 시기에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셋째, 대규모 강제수용소 건설 개시(원주민 강제이주).
요덕 제15호 관리소의 경우는 1959년에서 1964년까지 진행됐다.
넷째, 주민재등록사업(1966년∼1970년).
유일사상체제로의 이행에 즈음하여 출신성분을 중심으로 사상을 조사한 사업으로, 널리 알려진 51개 성분의 분류가 이 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정권은 1966년 4월 주민의 사상을 조사하기 위해 주민재등록이라는 것을 실시했다. 이어서 1967년 5월 도서정리사업이 실시되면서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유일사상체계가 조선로동당의 공식노선이 됐다. 8월 종파사건에서도 살아남은 갑산파와 남아있던 반(反)김일성 세력들이 숙청되었는데, 이들 반대파를 산 속에 위치한 강제수용소에 가두어 버렸고 그때가 바로 1967년 하반기에서 1968년에 걸친 시기였던 것이다.
소위 "김일성 교시"에 관해서는 전 경비대원 안명철씨가 상세히 밝힌 바 있다.[3] 그 대표적인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위 내용을 볼 때에 그 해에 수용소 내에서 폭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1968년 이후로 시간이 흐르면서, 각 강제수용소에 경비대가 배치돼 오늘날의 정치범수용소 형태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1967년 5월 유일사상체계가 제기된 때를 맞추어 김일성은 지식인 비판을 개시했다. 특히 1968년 3월 14일에는 <학생을 사회주의·공산주의건설의 믿음직한 후비대로 육성하자>라는 제목의 연설 가운데서 17세기와 19세기 사이에 활약한 조선왕조의 실학사상가들에 대한 과대평가를 경계했을 뿐 아니라 이순신장군까지도 비판했다.[4]
4. 1970년대
오늘날의 북한 강제수용소에 관한 최초의 증언은 1979년 국제앰네스티가 간행한 알리 라메다의 수기[5]이다. 베네수엘라 태생의 시인 라메다는 1967년에서 1974년까지 황해도 사리원에 위치한 강제수용소에서 복역했다. 베네수엘라 알리 라메다, 7년간 사리원 수용소에 수감여섯째, 강제수용소의 국가정치보위에의 이관(1972년).
국가정치보위부장 김병하가 이때부터 1983년까지 10년에 걸쳐서 강제수용소를 총괄했다.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탈출한 김용(가명)의 증언에 따르면, 본격적으로 북한 당국에서 운영되었던 정치범수용소는 1972년 전 국가정치보위부장 김병하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1968년 황해남도· 황해북도의 군사분계선(주로 개성, 금천, 용연, 장연, 안악, 은율, 취하, 장풍, 개풍, 판문 등)에 거주하던 월남자 가족과 6.25 전쟁 당시 치안대 가담자, 국군이나 미군에게 협조한 자, 지주, 친일파 중 그때까지 살아남은 본인 및 가족들을 북쪽의 주민들과 교환한다는 구실로 화물기차에 실어 12개( 안명철씨가 증언한 최초 12개의 수용소[6]) 험준한 산악지역에 설정해 놓은 특수구역으로 대대적으로 이주시키고 사회와 완전히 차단시킨 것이다.
이것을 주도한 김병하는 사회안전상(1969년 1월), 사회안전부상(1972년 12월∼1973년 3월), 국가보위부장(1973년 5월∼1983년)으로 요직에 두루 기용되었다.
그 무렵은 수용소 형태를 완전히 갖춘 것은 아니었고, 수감자 관리와 시설운영은 사회안전성 안전과가 담당했다. 격리수용된 사람들 중 본인에 한해 죄가 엄중하다고 분류된 자들은 개천교화소와 청진에 있는 청진 제25호 관리소를 정치범수용소로 개조하여 이곳에 별도로 수용한 것이 정치범수용소의 첫 출발이라고 한다. 그런데 탈출자가 속출하고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면서 경비 통제도 한층 강화되기 시작하였고, 오늘날의 정치범수용소의 형태가 된 것이다.[7]
강철환은 김용(가명)의 증언과 관련해서 함경남도 요덕군에서는 그 이전부터 수용소의 건설이 시작되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8]
"1959년 이전에 함경남도 요덕군에는 강제수용소의 일부분이 건설되고 있었던 것 같다. 요덕군의 비옥한 땅에는 원래 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틈엔가 타지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 원주민과 섞여 살게 됐다."
1959년부터 요덕군 원주민의 강제이주가 시작돼 1964년경에는 원주민이 모두 떠나고 말았다. 1987년 강철환이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난 다음 요덕군에서 살게 됐는데, 그때 이웃사람들이 "자기들은 같은 군내에서도 농사가 잘되는 고장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만 쫓겨나고 말았다"라고 푸념하는 것을 들은 것이다.
강철환의 말대로라면 1964년경 요덕군에는 대규모의 강제수용소가 이미 건설돼 대량의 정치범을 수용할 태세가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59년부터 원주민의 강제이주가 시작된 것은 이른바 중앙당 집중지도사업과 연관돼 있다. 중앙당 집중지도사업이란 1958년 연말에 시작돼 2년간 계속된 사업으로, 전 주민의 성분·사상경향을 조사해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이라는 3계층으로 분류하는 것을 말한다. 조사결과 적대계층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강제수용소에 갇히게 됐는데, 이 사업과 요덕 제15호 관리소의 건설은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9]
5. 1980년대
일곱째, 국가정치보위부의 명칭이 국가보위부로 바뀌면서 정치범수용소가 증설됨.1980년 제6차 조선로동당대회에서 김정일이 제2인자로 지명돼 후계자 문제가 낙착됐다. 이때부터 시작해서 1982년에 이르기까지 6천명 내지 1만 5천명이 권력세습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체포당하고,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4개소의 강제수용소가 새로이 건설됐다. 이로써 1980년 당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합계 12개소에 달하게 됐다.[10]
[1]
하기와라 료 편, 북조선의 비밀문서(상, 夏の書房, 1996)
[2]
김일성의 유언(たま出版, 1997) 263∼270
[3]
월간조선(1995. 5.)
[4]
이종석 저, 현대 북한의 이해(역사비평사(歷史批評社, 1995)
[5]
생명과 인권 No. 1
[6]
북조선절망수용소(KKベストセラ-ズ, 1997)
[7]
월간조선 2000년 5월호 321p
[8]
오가와 하루히사(도쿄대 교양학부 교수, 일본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 대표)가 2000년 7월 1일 서울에서 청취
[9]
북조선탈출(상하, 文藝春秋, 1994)
[10]
9) Asia Watch/Minnesota Lawyers International Human Rights Committee : Human Rights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p. 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