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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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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국무총리
초대
이승만
<rowcolor=#ffffff> 임시대통령
초대 제2대
이승만 박은식
<rowcolor=#ffffff> 국무령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이상룡 홍진 김구 안창호
<rowcolor=#ffffff> 국무회의 주석
제1-2대 제3대 제4대 제5-7대
이동녕 송병조 양기탁 이동녕
<rowcolor=#ffffff> 국무위원회 주석
제8-11대
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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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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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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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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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제임스 A. 밴 플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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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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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하일레 셀라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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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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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아드난 멘데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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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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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김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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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오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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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조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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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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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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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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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강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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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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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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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신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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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김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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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손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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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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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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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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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이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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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민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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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더글러스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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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해리 S. 트루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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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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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프랑수아 톰발바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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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다비드 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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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수루-미강 아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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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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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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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레옹 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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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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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하마니 디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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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조모 케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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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무테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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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파일:마다가스카르 국기.svg
1965
툰쿠 압둘 라만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1966
타놈 키티카초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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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쑹메이링
파일:대만 국기.svg
1966
천궈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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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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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천치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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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피델 산체스 아르난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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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조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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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임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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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필립 제이슨
(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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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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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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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시리낏 끼띠야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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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푸미폰 아둔야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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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전두환(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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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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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조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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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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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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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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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홍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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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국무총리
제2대 권한대행 제3대 임시서리
이동녕 안창호 이동휘 이동녕
임시대리 제4대 임시서리 제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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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제7대 제8대 임시서리
박은식 노백린 이동녕 양기탁
<rowcolor=#ffffff> 국무령
제5-8대 제9대 제10대 제11대
김구 양기탁 송병조 이동녕
<rowcolor=#ffffff> 국무원 참모총장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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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부주석
제1-2대 제3-4대
김규식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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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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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내각
이승만 정부
박은식 정부
초대
안창호
제2대
이동녕
제3대
홍진
제4대
김구
제5대
이유필
이상룡 내각
홍진 내각
김구 내각
이동녕 내각
제6대
이규홍
제7대
김구
제8대
최창식
제9대
윤기섭
제10대
김구
이동녕 내각
송병조 내각
양기탁 내각
이동녕 내각
제11대
차이석
제12대
조완구
제13대
차이석
제14대
조소앙
제15대
송병조
이동녕 내각
김구 내각
제16대
조완구
제17대
홍진
제18대
조완구
제19대
신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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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서리
이시영 남형우 안창호 신익희
제4대 제5대 서리 제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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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이유필 조상섭 이동녕 조상섭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이동녕 양기탁 이동녕 최동오
제15대 제16대 제17대
이시영 박찬익 최동오
대한민국 법무부장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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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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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rowcolor=#87ceed> 초대
안경수
제2대
이완용*
제3대
서재필
제4대
윤치호
간부
위원장 이완용* 고문 서재필
위원
김가진 남궁억 박정양 송헌빈
안창호 오세창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 1898년 7월 17일 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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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국갤럽 CI_White.svg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2004년 한국갤럽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보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조사 시리즈를 기획해 2004년부터 5년 주기로 발표하고 있다.
2014년
※ 2014년 한국갤럽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이순신 반기문 박정희 노무현
6위 7위 8위 9위 10위
정주영 이건희 김수환 김대중 김구
2019년
※ 2019년 한국갤럽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이순신 노무현 박정희 김구
6위 7위 8위 9위 10위
정주영 유관순 김대중 반기문 안중근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부모님 이국종 이건희 안창호
16위 17위
문재인 김연아
※ 응답수 50명 미만인 18위부터는 공개하지 않음.
2024년
※ 2024년 한국갤럽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이순신 세종대왕 박정희 김대중
6위 7위 8위 9위 10위
김구 부모님 정주영 안중근 유관순
같이 보기: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좋아하는 스포츠선수, 좋아하는 소설가, 좋아하는 탤런트, 좋아하는 영화배우,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예능인, 좋아하는 유튜버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파일:문화부 심볼.svg 이달의 문화인물
(1990-1997)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990년
7월
김정희
8월
장영실
9월
김소월
10월
세종대왕
11월
김홍도
12월
신재효
1991년
1월
나운규
2월
정철
3월
한용운
4월
김정호
5월
방정환
6월
정약용
7월
문익점
8월
안익태
9월
허준
10월
주시경
11월
윤선도
12월
이해랑
1992년
1월
이황
2월
정선
3월
박지원
4월
우장춘
5월
신사임당
6월
류성룡
7월
일연
8월
홍난파
9월
고유섭
10월
이윤재
11월
안창호
12월
윤동주
1993년
1월
이이
2월
이인문
3월
장보고
4월
이천
5월
윤극영
6월
원효
7월
지석영
8월
안중근
9월
박연
10월
최현배
11월
장지연
12월
윤백남
1994년
1월
우륵
2월
황희
3월
김유정
4월
홍대용
5월
강소천
6월
이상백
7월
안견
8월
박은식
9월
박승희
10월
이희승
11월
정도전
12월
신채호
1995년
1월
강세황
2월
조식
3월
월터 정
4월
최무선
5월
이원수
6월
김병로
7월
이육사
8월
김구
9월
채동선
10월
김윤경
11월
이수광
12월
곽재우
1996년
1월
김만중
2월
최치원
3월
이순지
4월
서재필
5월
김명국
6월
유일한
7월
도선
8월
심훈
9월
왕산악
10월
정인승
11월
전형필
12월
이제마
1997년
1월
송석하
2월
성현
3월
최윤덕
4월
이중환
5월
초의 (의순)
6월
한호
7월
이세보
8월
박제가
9월
박진
10월
장지영
11월
왕인
12월
송진우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등장인물 및 단체
{{{#!wiki style="margin:0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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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단군
동명성왕 온조왕
이사부 백결선생 의자왕 계백
김관창 김유신 문무왕 원효
혜초 장보고 고왕 강감찬
서희 정중부 최무선 죽림고회
김부식 지눌 의천 이종무
정몽주 문익점 최충 일연
최영 황희 맹사성 장영실
신숙주 한명회 이이 이황
신사임당 곽재우 조헌 김시민
이순신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사육신 생육신 논개 권율
홍길동 임꺽정 삼학사 박문수
한석봉 김홍도 김병연 김정호
영조 정조 정약용 전봉준
황진이 홍경래 김옥균
안중근 이완용 윤동주 지석영
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김두한 이상 이중섭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

<colbgcolor=#330066><colcolor=#fff>
{{{#fff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4대 국무령
안창호[1]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가 있다.]
安昌浩 | Ahn Chang-ho}}}
파일:490064_98207_4240.jpg
출생 1878년 11월 9일
평안도 평양부 초리방 칠리 봉상도현
(現 남포시 천리마구역)[2]
사망 1938년 3월 10일 (향년 59세)[3]
경기도 경성부 연건정 경성제국대학병원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묘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지명 제4대 임시정부 국무령[4]
1926년 5월 3일 ~ 1926년 5월 16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330066><colcolor=#fff> 본관 순흥 안씨[5]
부모 아버지 안교진(1851 ~ 1890), 어머니 제안 황씨[6](1846년생)
형제자매 형 안치호(1871년생) 외 1명(1900년 사망)
여동생 안신호[7](1884 ~ 1963)
배우자 이혜련(1902 결혼 ~ 1938 사별)
자녀[8] 장남 안필립, 차남 안필선, 3남 안필영
장녀 안수산[9], 차녀 안수나
학력 구세학당 (보통과 / 졸업)[10]
종교 유교 ( 성리학) 개신교 ( 장로교회)[11]
신체 175cm[12]
소속 정당 독립협회, 개화파, 만민공동회, 한인친목회, 서북학회
공립협회, 신민회,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청년학우회
수양동우회, 한국독립당, 한국노병회
치삼
도산(島山)[13] }}}}}}}}}

1. 개요2. 약력3. 생애4. 사상 및 견해5. 어록6. 대중 매체7. 여담8. 외부 링크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정치인.

2. 약력

3.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안창호/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사상 및 견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안창호/사상 및 견해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 어록

각자 맡은 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애국이며, 애족이다. 진정한 애국심은 그 말보다 그 실천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미국의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는 교포 노동자들에게)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라. 그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다."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 꿈속에서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뼈저리게 뉘우쳐라. 죽더라도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은 참되고 실속이 있도록 애써 실행하라.
낙망(落望)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청년이 다짐해야 할 두 가지 과제가 있다. 첫째, 속이지 말자. 둘째, 놀지 말자. 나는 이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청년은 스스로 생각할 때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
그대는 매일 5분씩이라도 나라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진실은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남의 결점을 지적하더라도 결코 듣기 싫은 말이 아니라 사랑의 말로써 조언해야 한다.
남의 의견이 나와 다르다 해서 그를 미워하는 편협한 태도를 지니지 않는다면 세상에 화평이 있을 것이다.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체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너도 믿고 나도 믿자.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자. 너도 주인이 되고 나도 주인이 되자. 공적은 '우리'에게로 돌리고 책임은 '나'에게로 돌리자.
도서관은 학교요, 책은 교사다. 도서관은 엄격한 학교이고 책은 엄격한 교사이다.
질서와 청결은 문명인의 자격이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네가 하는 일을 정성껏 하라.
역사에 다소 관용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요 무책임이니,
관용하는 자가 잘못하는 자보다 더 죄다.
우리가 세운 목적이 그른 것이라면 언제든지 실패할 것이요, 우리가 세운 목적이 옳은 것이라면 언제든지 성공할 것이다.
허황된 마음은 패망의 근본이요, 착실한 마음은 성공의 기초이다.
작은 일이라도 내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면 그것이 곧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다.
자기의 몸과 집을 자신이 다스리지 않으면 대신 다스려 줄 사람이 없듯이 자기의 국가와 자기의 민족을 자신이 구하지 않으면 구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바로 책임감이요, 주인 관념이다.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 영광을 누릴 수는 없다.
흔히 사람들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만, 기회란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잡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 전에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즉, 일에 더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만일 너도 한국을 사랑하고 나도 한국을 사랑할 것을 같으면 너와 나와 우리가 다 합하여 한국을 개조하자. 우리의 교육과 종교도 개조하고, 농업도 사업도 토목도 개조하고, 풍속과 습과도 개조하여야 한다. 음식·의복·거처도 개조하고, 도시와 농촌도 개조하고, 심지어 우리의 강과 산도 개조하여야 한다.
전문
세상의 모든 일은 힘의 산물이다. 힘이 적으면 적게 이루고 힘이 크면 크게 이루고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는 먼저 그 힘을 찾아야 할 것이다.
힘은 건전한 인격과 공고한 단결에서 난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그러므로 인격 훈련과 단결 훈련 이 두 가지를 청년 제군들에게 간절히 요구하는 바이다!
인간 사회는 유정한 사회와 무정한 사회로 구별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무정한 사회다. 우리나라를 무정한 사회에서 유정한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 모두가 '정의 돈수'에 힘을 써야 한다. 정의는 친애와 동정의 결합이다. 곧 사랑이다. 돈수는 두텁게 갈고닦는 것이다. 즉, 정의 돈수는 사랑하기 공부다. 친애하고 동정하는 것을 공부하고 연습하여 두텁게 하자는 것이다. 정의 돈수, 우리 국민의 사활이 여기에 달려있다. 우리는 정의를 기르기 위해 다음 일곱 가지를 유념해야 한다.
1. 남의 일에 개의치 말라.
2. 개성을 존중하라.
3. 자유를 침범하지 말라.
4. 물질적 의뢰를 말라.
5. 정의를 혼동하지 말라.
6. 신의를 확수하라.
7. 예절을 존중하라.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나라다. 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갖기를 동양인의 명예를 위해서 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길 원한다. 이웃인 대한을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시키는 것보다 우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덕일 것이다. 내가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이 인물이 될 공부를 하지 않잖는가.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자가 되라.
왜 우리 사회는 이렇게 차가운가? 훈훈한 기운이 없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세상을 만들어야겠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나와 다른 의견을 용납하는 아량이 없고 오직 저만이 옳다 하므로 그 혹독한 당쟁이 생긴 것이다.
나도 잘못할 수 있는 동시에 남도 옳을 수 있는 것이거든 내 뜻과 같지 않다 해서, 사문난적이라 하여 멸족까지 하고야 마는 것이 소위 사화요 당쟁이었으니 이 악습은 아직까지도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사상의 자유는 존중하되 우정과 존경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 무릇 문명국민으로서의 덕목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 천 만 가지의 의견이 대립하더라도 오히려 우정과 민족적 우애만은 하나일 수 있으니 사상의 대립 또한 서로 연마 발달하는 자극이 될 수 있고, 서로의 존경과 애정은 민족 통일을 묶는 실이 되어 안으로는 이런저런 의견 대립이 있다 하더라도 전 민족의 운명이 달린 일에 대해서는 혼연이 하나가 되어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나라를 잃은 것은 이완용 일개인 탓도 아니오, 일본 탓도 아니라 우리가 힘이 없어서였다. 그러하니 나라의 독립은 국민 개개인이 힘을 가질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점진적으로 힘을 키워나가는 방향으로 투쟁을 할 것이다.
자손은 조상을 원망하고, 후인은 선배를 원망하고, 우리 민족의 불행의 책임을 저마다 남에게만 돌리려고 하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일본도 아니요, 이완용도 아니다.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책임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망국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가슴을 두드리고 뼈 아프게 뉘우칠 생각은 왜 못하고 어찌하여 역적을 죽일 놈이라고 비난하며 그저 앉아만 있는가?
우리 민족이 저마다 내가 망국의 책임자인 동시에 또한 나라를 다시 찾을 책임자라고 자각할 때 우리나라에 광복의 새 지평이 열릴 것이다.
적어도 동포끼리는 서로 다투지 말자. 때리면 맞고 욕하면 먹자. 동포끼리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자. 오직 사랑하자.
성격이 모두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지 말라. 매끈한 돌이나 거친 돌이나 다 제각기 쓸모가 있는 법이다. 남의 성격이 내 성격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비행기(飛行機)를 이용(理用)하여 인심(人心)을 격발(擊發)케 하고 또(又)는 장래(將來) 국내(國內)의 대폭발(大爆發)을 촉기(促起)하려 함이라.
- 1920년 2월 17일에 그의 일기에 적은 글. 이 글귀 하나로 대한민국 공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6. 대중 매체

  • 1959년작 영화 <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에선 배우 강계식이 연기했으며, 1968년작 영화 <상해 임시정부>와 1972년작 < 의사 안중근>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 1969년작 영화 <춘원 이광수>에선 배우 겸 감독 전창근이 맡았다.
  • 1979년작 KBS-TV 8.15 특집극 <대한국인>에선 배우 민지환이 연기했다.
  • 1979년 KBS-TV <일요사극 맥> '벼랑 위의 파수병(2부작)'에선 배우 안대용이 연기했다.
  • 1982년작 MBC <거부실록: 백산 안희제>에선 배우 홍중기가 연기했다.
  • 1982년작 MBC 8.15 특집드라마 <한: 단재 신채호 일대기>에선 배우 한인수가 연기했다.
  • 1984년작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선 성우 정승현이 연기했다.
  • 1985년작 KBS1 국군의 날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이순재가 연기했다.
  • 1989년작 MBC 특집드라마 <백범일지>에선 배우 이묵원이 연기했다.
  • 1992년작 MBC 광복절 특집드라마 <춘원 이광수>에선 배우 정욱이 연기했다.
  • 1995년작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선 배우 민욱이 연기했다.
  • 2018년작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22화에서 잠시 출연했다. 유진 초이에게 콜롬비아 대학으로 가는 길을 물으며 유진에게 3년간 조선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마지막으로 통성명을 하면서 본인의 이름을 밝혔다. 배우는 박정민.

7. 여담

  • 평안남도 출신이라 서북 방언을 썼다고 전해진다. 다만 1919년 9월 28일에 안창호와 직접 대면한 이병상에 따르면, 말씨에 경성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세간에 알려진 사진은 비교적 젊은 시절에 찍힌 사진이고, 이후 고된 타지 생활과 오랜 독립운동으로 인한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해, 홍커우 의거로 붙잡혔을때 사진을 보면 엄청 초췌하고 깡마른 모습이 두드러진다. 도산의 다른 사진들
  • 안창호 선생의 장남인 안필립은 장성하여 미국에서 영화 배우로 성공한다. 그리고 LA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Hollywood Walk of Fame)에 이름을 남긴 첫 번째 한국계 미국인이 되었다. 안창호는 안필립의 배우 생활을 지지했다고 한다. 당시 할리우드에서는 한국 또는 조선이란 나라가 알려지지 않았기에 일본인 배역도 심심찮게 들어왔는데, 안창호는 예술은 별개로 봐야한다며 장려했다고 한다.
  • 안창호의 연설은 매우 뛰어났다. 젊었을 적 독립협회의 관서지부를 조직하기 위해 힘쓸 무렵, 평양 쾌재정[14]에서 교육진흥을 주제로 하여 '대국민계몽연설'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 연설에 크게 감명받고 독립 운동에 투신한 사람이 많았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오산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한 이승훈이다. 조만식 여운형도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아 독립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도산공원과 그 일대의 도로인 도산대로는 그의 호를 따서 만든 공원과 도로명. 그곳에는 안창호 부부의 묘소와 도산 안창호 기념관이 있다. 참조.
  • 호인 도산은 일본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던 중 하와이를 보고 지은 것이다. 섬 도에 뫼 산 해서 도산. 그래서 미국 본토 근처에도 못갔는데, 하와이 보고 벌써 미국에 압도당했다는 평도 존재한다.
  • 안창호 선생이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책도 있다. # 책 제목이 굉장무쌍하다.
  • 2000년대 후반에 안창호 선생이 한국 국민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언론을 타고 알려지기도 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민 집계는 일본 호구조사를 기준으로 했는데, 안창호는 이걸 하지 않아서 집계가 안 되었고, 결과적으로 훈장까지 받은 독립유공자면서도 한국 국민은 아닌 황당한 상황이었다.
  • 현재 공식적으로는 애국가의 작사가가 불명인데, 안창호가 작사자라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 안창호의 비서와 자녀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다만, 증언들만 있고 구체적 사료가 없어서 단언하기는 어렵다. 이미 1955년도에 정부에서 조직한 '애국가 작가 규명위원회'에서 조사한 적이 있으나, 규명불가로 결론을 내렸다. 이 문제는 그것이 알고싶다 946회 '누가 썼는가? 애국가 작사 미스터리'(2014-07-12) 편에서 다뤘다. 다만, 애국가 작사로 추정되는 시기에 안창호와 윤치호가 서로 만나 협력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 중에 애국가 가사를 어떻게 쓸것인지 토론하는 것을 들었다는 증언이 있으며, 1907년에는 대성학교를 공동설립했는데, 특히 안창호가 애국가 제창을 특히 강조했다는 것을 보면, 윤치호작이든 안창호작이든 서로의 영향이 일정 부분 있었을 걸로 보는 게 옳다.[15]
  • 도산의 장녀인 안수산 1915년 LA 출생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합중국 해군 소위로 입대하여 이후 포격술 장교(대위)로 복무하였다가, 일본군 암호를 해독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녀가 해군에 입대한 시기는 진주만 공습 직후였기에, 아시아계에 대한 적대감과 차별도 있어 퇴짜를 맞았지만, 기어이 입대했다. '왜 자원입대를 했느냐'에 대해 이유를 묻자, '아버지께서 하시던 싸움을 이어가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전역 후에는 1959년까지 계속 중앙참고부서 NSA의 책임자로 복무하였다.[16] LA 카운티 정부는 2015년 3월 10일을 안수산의 날로 선포하였다. 이후 6월 24일 자택에서 수면 중 사망하였다. 기사. 향년 100세. 안수산이 23살 때 도산은 사망했는데, 생전 딸에게 "훌륭한 미국인이 되어라"라면서 "그래도 뿌리인 조국을 잊지는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 2016년 8월 20일 방송된 무한도전 LA 특집에서 날림관광으로 잡은 코스인 코리아타운 IC, 남가주대(USC) 한국학연구소, 우체국, 한인회관[17]에 다 그의 이름(Dosan Ahn Chang Ho)이 붙어있다. 또한 도산의 자녀 5명 중 2022년 2월 26일 사망한 95세(사망 당시 기준)의 막내아들 안필영이 출연했는데,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상하이로 갔고, 그 곳에서 체포되어 구금생활 후 세상을 떠났기에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18] 두 부자가 서로 평생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임으로써 안타까움을 더한다. 장녀 안수산의 아들이자, 도산의 손자인 필립 안 커디도 나왔다.[19]
  • 안창호 선생의 묘소가 원래는 망우리 묘지에 있었던 까닭은, 그곳이 흥사단 동지인 태허 유태규[20] 선생이 안장된 곳이라 '같은 곳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을 남기셨기 때문이다. 1973년에 도산공원을 개장하면서 안창호 부부의 묘를 도산공원으로 이장하고 묘비를 새로 세웠다. 망우리 묘지에 있던 비석 역시, 도산공원 안에 있는 도산기념관 지하로 옮겨 보관하다가, 2016년에 망우리 묘지의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세웠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7년 대선 후보 시절에 "도산 안창호 씨를 존경한다."는 말을 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씨'라는 호칭은 그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하여 부르거나 이르는 말로, 공식적ㆍ사무적인 자리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에서가 아닌 한 윗사람에게는 쓰기 어려운 말로, 대체로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쓴다. 바꿔 말하면, 위의 상황은 대선 후보를 얼마만큼 '공식적ㆍ사무적인 자리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고 보는가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 있다. 대통령 선거 후보는 공직선거법 등 제도로써 규정되며, 불체포 특권으로 신분 보장까지 받는 만큼 단순히 사인(私人) 신분으로 한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정치인 이명박에 대한 호불호와 별개로 언어 사용 면에서만 보면 옳게 제대로 쓰인 용법일 수 있다.
  • 2018년 8월 14일에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 만장일치로 그의 생일인 11월 9일을 '도산 안창호의 날'로 제정하기로 하였다. 캘리포니아 주 리버사이드에 미국 최초의 한인 공동체를 설립하는 등의 공로와 더불어 그의 독립 운동 정신 등을 인정하여 제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관련기사
  • 안창호 vs 이승만은 광복 이후에까지 남한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비록 안창호는 해방을 미처 못보고 사망했으나, 안창호와 가깝던 여운형과 수양동우회 소속이었던 최능진은 이승만의 정적이 되어 그를 견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여운형은 암살을 당하고, 최능진은 조선인민군에 협력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을 당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 단, 이광수가 실력양성론을 민족개조론이라며 매도한 점에서 실력양성론이 까이는 감도 있다. 실제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안창호도 그래봤자 자치론자 아니냐'며 까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이광수는 '자치론 이상을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노선이었고, 안창호는 '언젠가 미래에는 독립해야 한다'는 노선이었다. 아마도 안창호가 옥고를 겪지 않고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그의 행적에 대한 명확한 평가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안창호는 자기와 엮이는 이광수의 행보를 당연히 좋지 않게 보았고, 감옥에서 그가 넣어준 사식을 거절하기도 했다.[21] 그리고 안창호는 '실력양성론'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독립국가'라는 전제하에 분명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직접 몸소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이광수 같이 '총독부에 순응하는 자치론'을 주장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참고해두자.
  • 부인인 이혜련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첫 아들이 돌을 맞이한 직후에 한국에 다니러 온다고 가더니, 통 돌아오지를 않아서 언제 오냐고 장문의 편지를 썼더니, 길이가 두 배나 되는 편지가 답장으로 왔다고 한다. 요지는 지금 조국의 상황이 이러이러한데, 내가 어찌 동포를 버리고 미국으로 갈 수 있겠냐는 것. 심지어 맨 마지막 줄에는 그럼 내가 어쩌면 좋겠소?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할 말이 없었던 이혜련 여사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지원에 뛰어들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덤으로 자식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평생 안창호가 사온 아이 옷은 유독 예뻐했던 둘째딸 수라의 아기옷 딱 한 벌뿐이었다고...( 1964년 이혜련 여사의 인터뷰 기사)
  • 처음으로 항공기의 가치를 알아보고, 항공기를 독립운동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항공선구자였으며, 그래서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임시정부 자체 조종사 양성, 비행부대 조직, 항공기 구매 등 임시정부 자체의 항공력을 양성하려는 움직임을 전개하기도 했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공군에 입대해서 공군 역사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다.
  • 2022년 2월 26일 막내인 안필영 선생도 97세에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자녀들이 고인이 되었다.
  • 사회주의 계열하고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았는데,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부르주아적 민족운동가"로 평가했다. 임정 초기부터 사회주의 노선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동휘의 노선에 찬성하지 않았다. 특히 1920년대 당시 물산장려운동을 비롯한 지식인과 기업인들이 주축이 된 운동들은 당시 식민지의 조선인들은 생존 자체가 문제인 상황이었는데, 국산품 수입품을 따지고 자시고 할 수준도 아니었기 때문에 좌익 계열이나 민중 사이에선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안창호는 주로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비롯한 소위 지식인과 부르주아 운동 노선의 좌장격이었다. 혁명이나 일치단결을 통한 민족 독립혁명을 이야기한 적은 있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그에 대한 전략은 거의 없었다. 대단결을 주장했다 하여도 사회주의의 통일전선 전술이나 1930년대에 반파시즘을 위한 연합전선 개념이었던 인민전선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안창호는 민족 혁명이나 보수주의적 혁명 개념은 있었을지 몰라도 민주주의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정치 체제로서의 민주정이나 조직 내부의 민주주의적 원리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한 적은 없다. 물론 대부분의 초기 독립운동가들이 정치적인 비전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 약점이었다 하더라도 당대의 민족 지도자로 손꼽히던 인물이 이러한 부분에서 명확한 이론이 없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여운형, 조만식, 조소앙 등과 무리없게 지낸 점을 보아[22] 좌익 계열이나 민주 계열 자체를 배격하진 않았고, 그 계열도 안창호를 배격하진 않은 듯하다. 김일성이 쓴 < 세기와 더불어>에 따르면, 1927년 당시 안창호가 길림의 재중동포들을 찾아 강연을 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안창호는 실력양성만 반복하여 이야기하고, 조선 민족의 후진성을 이야기 하며 수양만을 강조했다고 깐다. 김일성은 이때 자신이 질문지를[23] 적은 쪽지를 안창호에게 건넸고, 안창호는 자신의 날카로운 질문에 당황하여 급히 자리를 떴다고 한다. 물론 한국 역사가들은 이 기록을 신빙성이 없다며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당시 강연은 청중이 너무 많아서 연소자들은 입장불가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당시 15세였던 김일성은 아예 들어갈 수조차 없었고, 강연 내용을 따로 전해 들은 것을 차후에 비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24] 여하튼 이러한 이야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당대 독립운동가들은 안창호를 "독립 조선의 대통령감"으로 이야기하고 있었고, 자신도 그의 인품과 신력은 인정하는 점을 들어, 당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존경받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25] 사회민주주의 항목에 안창호가 분류되어있나 궁금해할 수도 있는데, 체계적인 이념으로 발전하지 않긴 했지만, 안창호는 분명 대공주의라는 이름의 미래 지향에 관한 연설을 몇 번 한 적이 있었다.[26] 이 대공주의는 후일의 삼균주의와 마찬가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위한 것이었는데, 개인과 개인간의 경제적 평등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8.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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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별칭으로 [2] # [3] 폐결핵 합병증으로 인해 사망했다. [4] 본인이 취임거부 하였고 지명만 되었다. [5] 1파-참의공파 26세손 ○호(○鎬) 또는 ○용(○鏞) 항렬이지만 다른 한자를 썼다. 본명인 '安昌'鎬에서 개명하였기 때문이다.( 족보) [6] 황기연(黃基璉)의 딸이다. [7] 새언니인 이혜련과 정신여학교에 진학했으며, 오빠와는 달리 고향에 남아 초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8] 안필립은 1978년에, 안필선은 2001년에, 안수산은 2015년, 차녀 안수나는 2016년 6월 18일에, 3남이자 막내 안필영은 2022년 2월 26일에 사망했다. [9] 안수산은 미국인과 결혼해서 아들이 있다. 이름은 외삼촌과 같은 '필립 안 커디'다. 필립 안 커디는 2024년 8월 15일 한화와 LG의 경기에서 시구를 했다. 무한도전 안창호 특집에 출연했으며, 외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사용하신 적 있는 곰방대머리(연기 뿜는 부분)를 보관하고 있다. 물론 다른 사진과 유품도 다수 있다. [10] 경신중·고등학교 [11] 새문안교회에 출석했다. 구세학당( 경신학교)을 세운 창립자가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였고, 안창호가 결혼식도 구세학당에 있던 미국인 밀러 주례로 치렀으므로, 구세학당 입학 후에 개신교인이 된 듯하다. 안창호는 티를 잘 내지는 않았으나, 주로 신약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12] https://news.joins.com/article/3838732 당시 평균 키를 감안하면 엄청난 장신이다. [13] 유래는 미국으로 건너간 뒤 주로 활동을 하던 하와이다. [14] 지금의 김일성광장 자리로, 경북 상주시의 그 쾌재정과 다르다. [15] 당시 같이 활동하던 안창호와 윤치호가 공동 작사했으나, 서로 합의하에 의도적으로 당시 명망가인 윤치호 이름으로 발표했으며, 이후에는 국내외 정세 때문에 서로 애국가 작사의 전말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가, 지금까지 왔다는 공동작사설이 있다. [16] 출처. [17] 회관은 기념관이며 그 앞의 광장 [18] 안필영은 1926년 9월 28일생이고, 아버지인 안창호가 사망한 것은 그보다 12년 뒤인 1938년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유복자가 아니지만, 안창호 선생이 안필영이 출생하기 전부터 투옥되어 사망 전까지 구금생활을 했으므로, 12년간 단 한 번도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즉 가끔 책 등에서 말하는 유복자 아닌 유복자인 케이스이다. 안창호, 이혜련 부부의 늦둥이이기도 한데, 형과 누나들과도 나이가 상당히 차이가 난다. 큰형 안필립이 1905년생으로, 무려 21살이나 차이가 나서 안필영이 말하기를, 큰형인 안필립이 자신의 아버지 구실을 했다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안필선(1912년생)하고는 14살, 안수산(1915년생)하고는 11살, 바로 위 누나인 안수라(1917년생)하고도 9살이나 차이가 났다. [19] 이때 독립기념관에 전시 중인 도산의 다섯 곰방대 중 가장 작은 곰방대에 담배를 담는 통이 없는 까닭이 밝혀졌는데, 알고 보니 어린 시절의 이 분이 몰래 빼낸 것이었다. 이후 엄마 안수산은 악의 없는 아들을 보고, 크게 웃을 뿐 혼내지는 않았다는 듯하다. 다행히 지금도 가지고 계시는데, 무도 멤버들한테 도산의 붓글씨 배달을 부탁했지만, 곰방대는 자신과 도산을 이어주는 물건이라면서 끝끝내 가지고 있겠다고 했다. 그리고 독립기념관 직원도 모르던 이 곰방대의 비밀은 무도 멤버들이 독립기념관에 전달하면서 '무한도전 보면 알 수 있다'고 알려준다. [20] 의사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 1회 입학생이며,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 선생과 동기이다. [21] 그런데 이광수의 후손은 안창호의 이름을 팔아먹으면서 이광수를 변호하고 있다. [22] 여운형과 조만식은 사실상 안창호와의 만남부터 독립 운동의 길을 선택했고, 안창호에게 항상 호칭을 "도산 선생님"이라고 불렀을 만큼 인생 스승에 가깝게 모시면서 안창호와 상당히 절친하였다. 조소앙의 경우는 임시정부 때 안창호의 취임을 반대한 계파에 속한 일이 있어, 완전히 친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23] 질문지의 내용은 "산업과 교육으로 실력을 배양하자고 하였는데, 왜놈들에게 나라를 통째로 먹힌 상황에서 그것이 어느 선까지 가능하겠는가. 조선 민족이 열등하고 정신수양이 낮다고 하였는데,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영국과 미국을 반드시 본받을 필요가 있는가. 조선은 영, 미의 원조를 받아 독립할 수 있는가."였다고 한다. [24] 그런데 안창호와 김일성은 생판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일성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던 손정도 목사는 임정 의정원에 있었고, 실제로 안창호와 막역한 사이였다. [25] 김일성도 서북 출신이고, 안창호도 서북 출신이어서 어느 정도 우호적으로 기술한 점도 작용했을 수 있다. 김일성은 항상 일제하 독립운동사에서 자신의 동향 사람들을 혁명의 주체로 표현했다. [26] 애초에 사회민주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공산주의를 포괄하는 훨씬 더 넓은 개념이다. 자본주의도 사회민주주의의 친척뻘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사실상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 외에 별다른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지 않고, 그 방향성을 잡을 때 공평 분배를 선택하면 공산주의가 되는 것이고, 능력별 분배를 선택하면 자본주의가 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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