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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
興士團 Young Korean Academ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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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일 | 1907년, 1913년 |
설립자 | 유길준, 안창호 |
현임 이사장 | 박만규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22 (동숭동 1-28) |
홈페이지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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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士團 / Young Korean Academy
1. 개요
흥사단(興士團, Young Korean Academy)은 1907년 유길준이 설립한 계몽 단체였고, 1913년 5월 13일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재결성한 민족 운동 단체이다. 1907년 유길준이 조직한 흥사단은 1911년 일본 제국의 탄압으로 해체되었으나 유길준 사후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 조직을 부활시켰다. 흥사단의 국내 지원 단체로는 대한인 국민회, 수양 동맹회, 동우 구락부, 수양 동우회 등이 있었다.무실, 역행, 충의, 용감을 기본 정신으로 삼고 있다. 단체의 상징은 기러기이다. 흥사단은 독립 운동가들을 탄압한 일본 제국과 군부 정권 시기를 모두 이겨내며, 1세기가 넘도록 존속하고 있는 단체라는 점에서 한국 근-현대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현재는 한국이 독립된 상태이기 때문에 당연히 독립 운동은 안하지만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들을 돕는 사업, 민주 사회를 위한 활동, 다양한 교육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일반 대중들의 인지도는 부족하지만 회원수만 해도 10만명에 육박한다. 요즘에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동아리들에게 적극 홍보하고 있으며 이에 젊은 청년들의 가입이 늘어나고 있다.
2. 역사
2.1. 배경
흥사단이라는 명칭은 유길준이 1907년에 설립되면서 사용되었다.유길준은 국민 개개인을 선비로 만들고, 국민 개개인을 민주 시민으로 육성한다는 포부를 밝히고 교육, 계몽 사업을 추진하였다. 유길준은 일심회 사건으로 불리는 쿠데타 계획이 발각되었다가 사면을 받은 뒤, 흥사단과 한성부민회를 설립하여 개화 운동을 벌였다. 유길준의 흥사단은 국민 계몽 교재와 문맹 타파, 계몽 운동, 위생 운동, 시민 윤리 교육 활동과 함께 어린이용 교과서를 편찬하는 출판 사업을 시작했으나 1911년에 해체되었다.
흥사단의 재건은 1911년에 발생한 105인 사건에서 비롯된다. 이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고 서북 지역의 항일 인사들이 대거 투옥되었다. 사건이 일단락된 뒤 관련자들은 크게 두 방향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승훈과 안창호 등은 준비론에 입각하여 실력양성을 시작하였고, 이시영, 이동휘, 김좌진 등은 만주로 이동하여 무장 항쟁을 준비하였다. 이때 안창호 등이 실력 양성론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창단한 단체가 흥사단이다.
2.2. 일제강점기
1913년 5월 13일 안창호 등에 의해 흥사단이 재건되었다. 부활한 흥사단의 멤버로는 안창호, 윤치호, 이광수, 장이욱, 주요한, 주요섭, 김동원, 조병옥, 안병욱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흥사단원들은 안악사건(일명 ' 105인사건'), 3·1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등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해 독립 운동에 기여하였다. 같은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홍언(경기도), 염만석(강원도), 조병옥(충청남도), 민찬호(황해도), 송종익(경상도), 강영소(평안도), 김종림(함경도), 정원도(전라도) 등의 8도 대표를 포함하여 25명의 창립 위원으로 하여 흥사단 미국 지부가 탄생되었다.흥사단은 미국내 한인 교민들의 사회 활동, 권익 보호, 언론 활동, 교민 사회 단결과 사회 활동 등을 적극 지원하였다. 흥사단은 미국 캘리포니아와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필라델피아 등으로 지부가 확산되었고, 멕시코, 브라질 등 한국인 교민들이 정착한 곳으로 지부가 확산되었다. 1919년에는 흥사단 원동 지부가 결성되고, 1922년에는 이광수 등에 의해 흥사단 원동 지부 조선 지회가 조직되고, 흥사단 조선 지회의 측면 지원 단체로 김동원에 의해 동우구락부, 이광수에 의해 수양동맹회가 조직되었다. 수양 동맹회와 동우 구락부는 다시 통합하여 수양 동우회로 개편, 흥사단 조선 지회의 활동을 보조, 지원하였다. 흥사단 조선 지부는 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해산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부활하게 된다.
2.3. 해방 이후
해방 이후 1948년에는 본부를 국내로 옮기고 재조직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장이욱, 오정수, 이용설, 김붕준, 오천석, 전규홍, 정일형, 이묘묵, 최능진, 안맥결, 양한나, 황애시덕, 전영택, 최희송, 백영엽, 김선량, 안원생, 노진설, 하경덕, 김동원, 주요한, 주요섭, 조병옥, 장택상 등이 흥사단의 주요 인물들이었다. 흥사단계는 미군정 시기 남조선과도정부의 정부 부처 중 거의 절반 가까이인 5개를 차지하였으며, 기타 경찰계나 교육계, 여성계, 기타 지방 도지사나 군수 및 지역 고위 행정관 등에 주요 인사들이 포진하여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이는 흥사단계 인물들의 대다수가 미국 유학 경험이 있어 미군정이 필요로 하는 한국어-영어 통역 능력이 잘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잡지 《새벽》을 발간하였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적극 지지하였고, 새 정부 수립 후 사회 개혁 운동, 교육 사업, 장학 사업, 언론 감시 활동 등 다양한 정치, 사회 활동을 주관하거나 동참하였다.이들은 미국 유학 등의 경험으로 인해 자유주의를 경험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새 국가 건설을 적극 옹호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개인의 개성 존중, 균등한 기회 마련 등 지극히 자유주의적인 원칙에 기반한 것들이었으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일제 잔재의 청산을 주장했다. 다만 이 일제 잔재 청산은 부일협력자에 대한 물리적 청소가 아닌 일제가 남긴 정신적, 문화적, 사회적 요소의 청소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전체주의적이고 상명하복적인 문화, 관존민비의 분위기,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지역 관리의 토호와의 유착 등의 민주적이지 못한 요소들을 혁파하는 민족적 자아혁신과, 이를 통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에 걸맞은 민중적 생활양식을 갖추기 위한 생활혁명을 주장했다.
본부는 대학로에 있으며, 현재까지 배출된 회원수는 10만명에 달한다.
1948년 이승만의 정부 수립을 지지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과거 안창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점 등이나, 자유당 정권 자체가 독재화되면서 제1공화국 기간 중에는 정권 요직에서 배제되어 한국민주당에 참가해 반독재 야당 운동에 참여했다. 4.19 혁명이 벌어져 제2공화국이 성립되자 장면 국무총리를 지지하며 다시금 정부 주요 요직에 흥사단계 인물들이 기용되었다.
1963년 대학생 아카데미와 고등학생 아카데미가 창립되면서 전국적인 아카데미 운동 시대가 열렸다. 흥사단 아카데미 출신의 민주화 운동가도 배출되었다.
1977년 본부를 명동에서 동숭동으로 옮겼다. 흥사단 강당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의 집회장소로 유명했는데 1984년 5월 민청련에서 주최한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추도식이 열리기도 했다. 이는 당시 운동권에서조차 ‘쉬쉬했던’ 1980년 민주화운동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최초의 집회였다.
2005년에 ‘광복60주년 기념 독립 유공자 후손 돕기 운동 선포식’을 열고 독립 유공자 후손들에 대해 장학금 지원 사업을 시작하였다.
3. 역대 지도부
3.1. 역대 이사장
- 유길준 1907년 ~ 1911년
- 안창호( 1913년 ~?)
- 송종익
- 곽림대( 1929년 ~ ?)
- 김성권
- 이암
- 한시대
- ?
- ?
- ?
- 이용설 ( 1967년 ~)
- ?
- 이대위
- 백낙준
- 박원선
- 최희송 (? ~ 1980년)
- 김주흥 ( 1980년 ~ 1983년)
- 서영훈 ( 1983년 1월 1일 ~ ?)
- ?
- ?
- 안기영 (? ~ 1995년 1월)
- 김종림 ( 1995년 1월 ~ 1999년 1월 9일)[1]
- 이대영 ( 1999년 1월 9일 ~ ?)
- 김소선
- 구치모 ( 2006년 10월 18일 ~ 2007년 2월)
- 박인주 ( 2007년 2월 ~ 2009년)
- 반재철 ( 2009년 ~ 2013년)
- 이윤배 ( 2014년~ 2016년)
- 류종열 ( 2017년 ~ 2020년)
- 박만규 ( 2020년 1월 ~)
3.2. 역대 총재
4. 운동본부
흥사단은 ‘흥사단 3대운동’으로 민족통일운동본부와 투명사회운동본부, 교육운동본부를 운영한다.4.1. 민족 통일 운동 본부
흥사단 민족 통일 운동 본부 또는 흥민통은 1997년에 흥사단 3대 운동 중 가장 먼저 생긴 운동 본부이다. 뉴스 기사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 청소년과 대한민국 청소년이 한중 청소년 친선 문화제를 주최하고, 통일 아카데미, 통일 포럼 등을 진행하는 통일 운동 단체이다.
4.2. 투명 사회 운동 본부
2001년에 흥사단 투명 사회 위원회를 확대하여 발족한 시민 운동 단체로, 반부패 운동이 목적이다. "불투명한 관행과 기업 경영, 부패한 사회에 대하여 불이익을 주고 있으며 부정부패 문제는 국가 경쟁력 더 나아가 국가의 존망으로까지 비화되고 있다"는 지적에서 출발하였고, 국제 수준에 부응하는 부패 방지 입법 등 제도 개혁과 국민의 의식 전환을 촉구하는 생활 개혁을 동시에 추구한다. 뉴스4.3. 교육 운동 본부
2002년에 출범한 흥사단 교육 운동 본부는 건강한 청소년 육성이라는 목표를 위해, 민주적 교육 체제의 구축과 청소년 세대의 의견 경청, 인성 교육 실천 등을 과제로 삼고 있다. 2005년에는 교육 운동 본부 운영 위원을 맡은 현직 교사가 학교 내 폭력 단체인 일진회의 실태를 폭로하기도 했다. 영상 다만 교육 운동 본부 출범 이전에도 각급 일선 학교에서는 동아리 형태로 흥사단 활동은 이어져오고 있었다.5. 도산 아카데미
민족의 스승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과 사상을 바탕으로 통일 문제를 비롯한 국가 사회 발전에 필요한 과제를 연구하고 실천함으로써 한국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1989년 6월 3일, 흥사단 부설 '도산 아카데미 연구원'으로 설립되었으며, 2000년 7월 19일, 행정 자치부에 '사단 법인 도산 아카데미'로 등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산 아카데미그 동안 학술 및 정책 연구, 사회 교육 및 지도자 훈련, 홍보 및 출판 사업을 꾸준히 전개해 왔으며, 특히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지도층 인사들을 대상으로 도산 정신을 일깨워 옴으로써 지식인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 모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도산 아카데미는 조찬 세미나, 스마트 사회 지도자 포럼, CEO 코칭 포럼 등을 운영하고 있다.
<주요 사업>
- 민주 시민 의식을 함양하는 사업
-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을 실천.보급하는 사업
- 국가 사회 발전과 관련된 정책 연구 사업
- 토론회 및 강연회 개최
- 회보 발간 및 출판 사업
- 기타 법인 목적 달성에 필요한 사업
6. 사건사고 및 논란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내부에서 공공기관 용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신입직원이 가족명의의 사업자등록증을 개설하여 공공기관 예산을 편취하고, 법인카드를 사적으로 유용, 업체를 통해 리베이트를 받거나 지인을 허위로 사업에 참여시켜 수수료를 착복하는 등 공공기관 용역사업을 진행하던 활동가가 공금을 횡령하여 개인적 용도로 활용한 것에 대하여 벌금형의 약식기소 처분이 됨.제보자는 이 모든 과정을 내부에서 7차례 이상 제보 하였으나 내부에서 모두 묵살하고 은폐되었으며 도리어 제보자에게 업무배제, 임금삭감, 폭언 등 심각한 수준의 불이익행위가 가해짐. 상황이 개선되지 않자, 2020년 국민권익위원회에 정식으로 부패신고를 하여 공익신고자로서 보호결정을 받음. 제보자에게 은폐를 지시한 당시 상임대표와 운영위원장은 흥사단으로부터 해임처분을 받았고, 해임무효 소송을 거쳐 최종 패소함. (2심)
그러나 국민권익위원회 보호결정문을 단체채팅방에 게시하고 수년간 신고자의 사진을 게시하고 폭언을 가하는 등 2023년 7월 현재까지도 흥사단과 투명사회운동본부 내부에서 탄압은 계속되고 있음.
특히, 은폐를 주도한 운영위원장 등은 인신공격과 허위주장에도 모자라 신고자를 무려 12번이나 형사고소했으며, 신고로 인하여 해임된 것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라는 민사까지도 진행중임. 고소인은 형사고소는 돈이 들지 않는다며 괴롭힐 목적으로 고소를 정당화하고 있음.
또한, 신고자를 보호하고자 했던 내부 회원들 역시 형사고소와 민사 소송에 시달리고 있어 신고자 보호는 커녕 조직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음.
국민권익위원장 및 신고자를 보호하기로 결정한 위원들과 권익위 담당조사관, 담당 과장, 수사기관의 경찰관들, 방송사 기자 등 70여건이 넘는 고소를 진행하였으나 모두 혐의없음으로 결론이 났음.
여기서 더 아이러니 한 것은, 4.3에 언급되고 있는 일진회 폭로했다는 교사가 신고자 가해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임.
6.1. 내부고발 직원 탄압
7. 같이 보기
[1]
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