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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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1b23><colcolor=#fff>출생 | 1906년 10월 9일 | ||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조알 | |||
사망 | 2001년 12월 20일 (향년 95세) | ||
프랑스 베르송 | |||
재임기간 | 초대 대통령 | ||
1960년 9월 6일 ~ 1980년 12월 31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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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1b23><colcolor=#fff>부모 |
父: 바실 디오고예 상고르 母: 닐란 은디에메 바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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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지네트 에부에 (이혼)[1] 콜레트 위베르 상고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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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프란시스 아르팡, 기 왈리, 필리프 마골리앵 | ||
종교 | 가톨릭 | ||
학력 | 파리 대학교 | ||
정당 |
세네갈 사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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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éopold Sédar Senghor레오폴 세다르 상고르는 세네갈의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세네갈 대통령이다. 프랑스어권 문학의 대가이기도 하다.
2. 초기 생애
1906년 10월 9일 프랑스령 세네갈의 조알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세레르족 상인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세네갈에서 활동하던 가톨릭 선교사에게 선조들의 문화를 계몽하려면 프랑스에 의지해야 한다고 배웠다. 21살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7년간의 유학생활 후에 그는 프랑스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어 프랑스인들과 일체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파리 라틴 지구에 사는 젊은 흑인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프랑스의 식민지에 대한 동화주의에 반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에 그는 파리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흑인 민족과 흑인 문명의 독특한 공헌과 가치 및 특징을 옹호하는 흑인 의식을 설명하기 위한 네그리튀드(Negritude)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상고르는 프랑스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고등학교 교사 자격증인 아그레가시옹을 취득하기도 했다. 귀화한 프랑스인 신분으로 1년간 의무 군 복무를 마친 뒤 파리 인근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던 중에 독일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장교직을 허락받지 못하고 이등병으로 제대했다. 상고르는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는 18개월 동안 틈틈히 독일어 공부를 해서 괴테의 시를 원어로 읽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1942년 자유의 몸이 되어서 교사로 복귀했다.3. 정계 입문
1945년에 9명의 아프리카인들 중 세네갈 대표로 선출되어 600명 규모의 제헌의회에 참여했다. 그는 프랑스 제4공화국의 헌법 초안 작업에 참여하여 새 헌법이 '분할할 수 없는' 프랑스 연합의 본질을 강조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고 뛰어난 프랑스어 실력을 인정받아 문법 학자로 공식 채용되었다. 상고르는 프랑스 사회당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이내 1948년에 세네갈민주연합이라는 정당을 창당한다. 상도르는 무슬림이 압도적인 세네갈에서 성장한 가톨릭 교도이자 인종적 우위를 점하는 윌로프족이 아닌 세레르족 출신이기 때문에 종교적, 인종적 성향에 호소하지 않고 지지를 호소하면서 정치적 연합 조직을 꾸리는 것을 터득한다. 그는 정치활동을 하면서도 파리 센 강인근에서 작가나 시인들의 모임을 가지며 문학에도 열정을 발휘했다. 또한 유럽 사회주의를 아프리카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아프리카 공동체의 전통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아프리카식 사회주의'의 개념을 발전시켜 나갔다.1950년대 들어서 아프리카 대륙에서 맹렬한 반식민지 투쟁이 벌어지자 그는 온건한 입장에 선다. 상고르는 콰메 은크루마의 주장을 급진적이라고 비판하고 튀니지인들에게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또한 알제리 전쟁에 대한 전쟁 예산 지출에 찬성하고 민족해방전선과 벌이는 싸움에 세네갈 군인들을 파병하자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그는 경제가 허약하고 자원이 많지 않은 소규모 국가의 독립은 '가짜 독립'이라 비판하고 유럽 열강들과 협력하여 대규모 조직을 꾸리는 것이 장래성이 있다고 여겼다. 그는 코트디부아르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와 함께 대표적으로 온건한 자치를 주장하는 친불파로서 활동했으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와는 이견이 갈린 편이기도 했다. 이어서 말리의 모디보 케이타와 연합하여 말리 연방을 구축하기도 했으나 모디보 케이타와의 성향 차이로 이내 탈퇴한다.
1960년 9월 5일에 세네갈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고 다음날 취임한다.
4. 대통령 집권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상고르는 프랑스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급진주의자들에게 아프리카 사회주의를 지지한다고 공언했으나 신식민주의자들의 이익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들었다. 그는 프랑스 기업들이 세네갈에 대한 상공업 분야의 지배권을 유지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국가 안보를 위해 다카르 국제공항 인근 군사기지에 프랑스 친위부대를 배치했다. 또한 프랑스를 비롯한 외국기업들의 국유화에 대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는 것이라며 반대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그는 무능한 아프리카인들이 유능한 프랑스인들이 담당하던 일을 넘겨받도록 하는 것은 지나친 아프리카화 정책이라며 급진화를 경계했다. 땅콩수출에 주력하던 세네갈의 경제는 프랑스의 후원 속에서도 전반적인 정체상태를 벗아나지 못했다. 잇따른 가뭄이 발생하면서 땅콩 생산은 더욱 타격을 입었다. 상고르가 도입한 중앙집중적인 땅콩관리조직 역시 무능함과 부정부패로 유명무실해졌다. 그는 무슬림 종교지도자들에게도 많은 특혜를 제공하고 개발 산업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면서 무슬림형제단의 지지를 유지했다. 또한 정부 요직과 물질적 혜택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반정부 인사들을 회유했다. 또한 부패에 항의하는 대학생들에게는 최루가스 살포등으로 답했다. 1963년,1968년,1973년 대통령 선거에서 연달아 단독 후보로 당선된 그는 1976년에 다당제를 도입하여 1978년의 선거에서도 야당 후보에게 승리하고 1980년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5. 퇴임 이후
1984년에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 프랑스 문학과 통치술의 측면에서 불멸의 기여를 했다는 의미에서 불멸의 지성으로 인정받는 40명의 생존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2001년 12월 20일에 향년 95세를 일기로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은 2001년 12월 29일 다카르에서 거행되었다.6. 기타
상고르 대통령 내외가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1979년 4월 22일 한국을 공식방문한 적이 있다. #자유 프랑스 시절 프랑스령 차드의 총독이었던 펠릭스 에부에의 사위다.
Léopold는 프랑스어에서 레오폴드 또는 레오폴로 읽는데, 한국에서는 이 인물만 레오폴로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