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20:52:31

유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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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30066><colcolor=#ffffff,#ffffff>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참모총장
유동열
柳東說[1]
, 柳東 등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 | Ryu Tong-nyŏl
파일:독립운동가 유동열.jpg
이명 유청송(柳靑松)
출생 1879년 3월 26일
평안도 박천군 군내면 남부동 매화동[2]
(현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읍 남부리 매화동)
사망 1950년 10월 18일 (향년 71세)
평안북도 희천군
묘소 애국렬사릉
춘교(春郊)
본관 문화 류씨[3]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종교 유교( 성리학)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대한제국 군인관료 출신으로 미군정기 군인관료까지 직무를 수행하였다. 초대 대한승마협회 회장.

2. 생애

1879년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면 남부동 매화동 #에서 유종정(柳淙楨)의 아들로 태어났다. 19세 때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구한말에 살았는데 당시엔 대한제국군의 군인들이 일본에서 교육을 받는 일이 많았다. 그는 일본육군사관학교의 예과인 세이조(成城)학교를 다녔고, 1903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병과는 기병이었다.[4] 그 해 12월 일본 육군기병대 견습사관으로 근위사단에서 실무를 익히던 중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대한제국 파견 무관 자격으로 일본군에 종군했다. 이후 서울의 일본군 6군사령부에서 근무하다가, 그해 8월 대한제국 군인으로 복귀하여 무관학교 교관, 시위대 기병대장, 참모국 제2과장을 역임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한반도 국권침탈 야욕이 가시화되자, 이에 커다란 분노를 느끼며 항일운동에 투신하였으며, 장교로 근무하며 노백린, 이동휘 등과 어울리면서 효충회란 단체를 세워 친일파를 암살하려고 하였으나 대한제국 군대해산 등을 겪으며 군 규모가 위축되자 군무국 마정과(馬政課) 마병 참령 계급이던 1909년에 베이징으로 망명했다. 이 무렵 비밀결사 단체로 공화제를 추구했던 신민회에 가담했다.

1910년에 한일합방이 이뤄지자 국내와 중국을 오가며 독립군 자금을 모집하다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911년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년 6개월 뒤에 나와서 중국에서 주로 독립운동을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대 초에는 같은 군인장교 출신이자 임시정부 국무총리였던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에 가담해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자유시 참변을 겪고난 후, 1921년 이후 병원과 농장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주력했다. 1929년 3월 지린에서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였으며, 1930년에는 임시정부로 다시 복귀하여 1944년까지 수차에 걸쳐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했다. 1935년 7월,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의열단, 대한인독립단 등 5개 독립운동단체가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공동 발기해 결성한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을 때, 조선혁명당의 대표로 참여해 반일 민족연합전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40년대에는 한국광복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귀국하여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한국광복군의 군인들은 미군정의 푸대접과 일본군, 만주군 출신 파벌이 군 내에서 다수를 차지한 것에 반감을 가져 군사영어학교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하지 않았는데 이응준의 설득과 조병옥의 추천으로 그가 미군정의 국방장관격인 통위부장 이 되자 광복군 출신 경력자들이 다수 입대하였다. 특히 일군 대좌 출신으로 미군정의 군사고문으로 임명된 이응준은 유동열, 지청천, 이범석 3인중 유동열을 선택하여 미군정 참여에 부정적이던 유동열을 설득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께서 말씀하시는 법통을 우리나라 군대로 하여금 계승하는 일이 숭고한 사명이라고 생각해 달라.
이응준이 유동열을 설득하면서

당시 광복군 출신들이 입대하자 일본 학병, 만주군 출신 장교들은 유동열이 군내에서 광복군을 중심으로 파벌질을 한다고 반발하였다. 그러나 그를 추천한 사람이 일본육사계열의 최선임격인 이응준이었고, 일본육사 출신들도 일단 해방 후에는 대부분 자숙, 근신하며 (구성인원에서는 자기들이 다수라고 해도) 임시정부와 광복군 출신 인사가 창군의 대표격 지위를 담당한다는 원칙을 수용하여 큰 반발은 적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납북되었고 평안북도 근처에서 사망하였다.

3. 기타

이응준이 군사영어학교 개설 시 광복군에 대한 인원배분을 동일하게 하였고, 유동열을 설득하여 통위부장에 위촉함으로써 광복군 등 중국에서 활동한 군경력자들이 한국군에 입대할 수 있는 정치적, 실질적 배경이 생기게 되었다. 이 덕분에 국군의 인적 구성이 일본군 만주군 일색으로 채워지는 것을 막았다. 광복군, 국부군 출신들이 대부분 당시 기준으로 중장년층으로서 군사학교 교육을 대부분 1910-20년대 중국에서 수료한 관계로 일본군, 만주군 출신 인사들보다는 군사 교육의 체계, 실전 경험 등에서 다소 떨어진 면이 없지 않았으나 국군의 정통성 차원에서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1949년 미 군사고문단 참모장을 맡았고 1981년까지 미 8군사령관 특별고문을 맡았던 짐 하우스만의 저작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에 따르면, 유동열은 김종갑이 상놈 출신이라는 이유로 진급을 막았다고 한다.
춘천 8연대의 수석장교인 김종갑 중위가 대위로 진급할 때였다. 그는 6.25 전쟁 기간 동안 사단장까지 지냈고 나중에 육군 중장으로 예편돼 국방차관까지 올라간 사람이다.그런데 이 사람의 진급 명령이 나오지 않았다. 통위부장 유동열 장군이 브레이크를 걸고 있었다. 그는 조선경비대의 장교는 반드시 양반 출신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유능한 김종갑의 가문을 잘 알지는 못하나 어쨌든 유동열 장군이 보기에는 조선의 고급 장교가 될 만한 양반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런 케이스로 진급이 유보돼 있는 사람이 많았다. 도대체 어쩌겠단 말인가. 지금은 단 1명의 장교도 아쉬운 판인데 능력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양반 논쟁으로 인사의 차질을 빚고 있으니 어처구니없는 입장이었다.

나는 부족한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현지 임관을 통해 장교 숫자를 늘리는 한편 육군사관학교 개설을 돕고 있었다. 유장군은 계속 장교의 조건으로 “양반”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그런 말이 새 경비대를 조직하는 마당에 통할 리가 없었다. 어느 미군 조직법에도 양반만이 장교가 돼야 한다는 근거가 없었다.
짐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p.127~128.

자매품으로 송호성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은 경비대 사관학교를 불시에 방문하여 신언서판(身言書判)이나 관상이 안좋다는 이유로 후보생 20여명을 그 자리에서 짤랐으며 자기 맘에 안드는 장교는 불문곡직 제주도 9연대에 처박았다. 이런 막가파 장군이 잘 나갈 수 있던 이유는 같은 중국군 출신인 통위부장 유동열이 밀어준 덕분이라고 한다.[5]

류미영(1921~2016)은 납북되지 않고 남한에 남았다가, 1986년에 남편 최덕신과 함께 월북했고, 2000년 이산가족 상봉때 북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남한을 방문했다.[6] 2016년에 사망했다.

4. 대중매체에서

1985년작 KBS1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최창호가 연기했다.


[1] [2] # [3] # [4] 이 때 같은 15기로 입학한 조선인들은 이갑, 김기원, 남기창, 박영철, 박두영, 전영헌, 김응선으로 유동열 본인까지 합하여 총 8명이었고, 이들은 흔히 8형제배(8兄弟輩)라고 불렸다. [5] 출처: 장창국, <육사졸업생>, p153 [6] 월북한 류미영이 북측 이산가족 대표단에 포함되어 온것에 반공 성향의 일각에서는 "우리도 황장엽을 이산가족 대표단에 끼워서 북한에 파견하자"는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