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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영(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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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장지영.jpg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출생 1887년 4월 22일
한성부 서부 반송방 지하계 교남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교남동)
사망 1976년 3월 15일 (향년 88세)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동
본관 인동 장씨 상장군계
열운(洌雲)
부모 아버지 장은상, 어머니 영해 박씨
학력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졸업)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3.1 운동과 문화운동2.3. 조선어학회 사건2.4. 이후의 경력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언어학자, 문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1887년 4월 22일 한성부 서부 반송방 지하계 교남(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교남동)에서 부친 장은상과 영해 박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4살 때부터 자택에서 한학을 수학했으며 호를 열운(洌雲)이라 정했다. 이것은 '한강 위에 뜬 구름’이란 뜻이다. 그가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그는 유교를 숭상하는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남들에게 고루하다는 평을 받아왔다고 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민영환이 자결하자, 그는 장례식에 참석했다. 훗날 그는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상여를 청진동에서 모셔나가는데 상행을 보호하기 위하여 앞뒤로 무명줄을 매어가지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붙잡고 갔다. 종로로부터 서소문으로 나가는데 나도 집불(執拂)하는 사람 중에 끼었다.… 상여를 모시고 가던 사람 모두가 통곡을 하였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나는 그 속에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예전엔 완고하고 중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두터웠는데, 그것이 변해서 우리는 언제까지나 역사적으로 남의 종노릇밖에 못하느냐?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냐? 오늘날 이 지경을 당하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우리도 자주독립을 하여야겠다는 생각이 팽배하여졌다.”
'나라사랑', 제29집(1978년)

당시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한어과 재학생이었던 그는 1906년 졸업한 뒤 한성외국어학교의 부교관으로 재직하면서 전덕기 목사가 주관하는 상동교회를 드나들며 이회영, 이상재, 이갑, 이준, 안창호, 김구 등과 교류했다. 특히 그는 주시경에게 감화되어 그의 문하에서 국어를 전공했다. 장지영은 주시경 문하에서 국어학을 연구하는 동안 신학문을 탐구하기 위해 1908년 이일이 설립한 창동 정리사(精理舍)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수학을 전공하고 1911년에 졸업했다. 또한 그는 1907년 7월 15일 박동 보성학교 강사가 되어 보성학교 소장이 된 주시경을 보좌했다. 그리고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선생으로 부임해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1911년 이승훈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투옥되면서 오산학교가 폐교되자, 장지영은 다시 상동교회 청년학원의 국어와 수학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상동교회 인사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해외로 망명하자, 그는 남궁억을 원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학감이 되었다. 그러나 1914년 8월 학원이 끝내 폐쇄되자, 그는 결국 이곳을 떠났다. 이보다 한달 앞서 주시경이 급사하자, 장지영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훗날 '주시경 선생 50주기 추도식'에서 스승의 요절을 애석해하며 통곡했으며, 주시경 회고록을 집필하기도 했다.

한편 장지영은 청년학원 교사로 재직하면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자활운동에 감명받고 유진태, 임경재, 김덕창 등 동지들과 함께 경제 자립과 문화 독립을 위하여 1912년에 물산장려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간디를 본받아 직접 무명옷을 짜입기로 하고, 고양·통진·김포 등지로 다니며 목화를 모아서 시골 부인들에게 목화실을 뽑게 하고, 이를 덕창직물공장에 가져가 옷감을 짜게 한다. 이듬해, 장지영은 이수삼, 백남일, 조규수, 김정섭, 정범진, 노대규, 이원행, 오의선, 홍덕규, 김용철 등과 함께 비밀결사 '흰얼모(白英社)'를 조직했다. 그는 동지들과 혈서로서 동맹을 맺고 만주에 망명한 여준, 이동녕, 이회영 등과 비밀 연락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꾀했다.

2.2. 3.1 운동과 문화운동

1919년 1월 고종이 붕어하자, 장지영은 고종이 일제와 매국노에게 독살되었다고 확신하고 이를 대중에게 폭로해 온 국민의 의분을 격동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흰얼모 동지들과 함께 이 문제를 논의한 뒤 당시 조선일보 정치부장이던 조규수로 하여금 포고문을 짓도록 했다. 포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문화라든가 역사가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데, 웬 억지손에 의하여 간악한 일국에 눌려 국권을 잃어버리니 이럴 수가 있느냐? 세계의 대의에서도 그냥 볼 수 없는 일이다. 지금 강화회의가 파리에서 열리는데, 거기에 특사를 보내려고 하니까 먼저 고종 황제를 없앨 양으로 독약을 바쳤는데, 거기 앞장선 놈이 윤덕영이고, 그 독약 심부름을 한 놈이 한창수로, 식혜에다 독약을 타서 드렸다.”

그가 만든 포고문은 대한국민회’의 포고문이라 하고, 2000장을 등사하여 그날 밤중에 남대문-을지로-동대문 방면, 서소문-종로-동대문 방면, 서대문 일대에 붙이고 여관에도 투입했다. 그는 민족대표 33인이 주동한 독립선언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지만, 민중이 3.1 운동을 감행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경신학교에서 국어와 수학을 가르쳤던 그는 1921년 휘문의숙에서 임경재, 최두선, 이규방, 이승규, 신명균 등 7명과 함께 조선어연구회를 창설했다. 초대 간사장은 임경재가 맡고, 장지영은 최두선과 함께 간사를 맡았다. 1926년엔 제2대 간사장이 되어 국어운동을 전극적으로 전개했으며, 1924년 5월에 <조선어전(朝鮮語典)>을 간행했다.

1926년 4월 경신학교 교사직에서 물러난 그는 중앙학교 교사를 잠시 맡다가 곧 물러나고 1926년 10월에 조선일보 기자로 부임했다. 그는 조선일보에서 기자, 지방부장, 문화부장, 편집인을 잇달아 역임하며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했으며, 1927년 2월에 발족한 신간회에 이상재, 신석우, 한기악 등과 함께 발기인 27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이후 조선일보 지면에 '신간회 고정란'을 두고 신간회 본부와 지부 사이의 활동 상황을 자세히 보도했다. 그러나 종로경찰서로부터 신문을 검열당해야 했고 검찰국을 여러 차례 드나들어 제재를 받아야 했다.

1929년 7월, 장지영은 조선일보 편집인으로서 문자보급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이후로 3년간 이 운동의 총책으로서 지면과 강연을 통해 열성적으로 활동했으며, 1931년에는 문화부 부장이 되었다. 또한 1930년에는 한글 철자법 강좌’를 55회에 걸쳐 장기 연재하기도 했으며, 조선어연구회를 확대 개편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1931년경 일제의 압력으로 조선일보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고, 이후에는 서울 양정중학교 교사로 부임해 1942년까지 재임하며 학생들에게 국어와 중국어를 가르쳤으며, 1936년에 조선어학회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2.3. 조선어학회 사건

장지영은 조선어학회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 위원으로서 한글 연구에 온 힘을 기울였고, 1937년 7월에 <조선어 표준말 모음> 간행에 기여했다. 이후 <우리말 큰사전> 발행에 관여했지만 1942년 10월 동료들과 함께 홍원경찰서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고 1년 후에 함흥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당시 그와 함께 고초를 겪은 이희승은 훗날 장지영이 겪은 고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열운도 이런 악형을 몇 번이고 당하였다. 그러나 나는 열운만이 당하는 기막힌 꼴을 보았다. 때는 1943년 양력 1월, 엄동설한으로 가장 추운 때였다.… 우리 동지 일행을 문초하는 무덕전이란 넓은 방에서 다른 사람들이 중시하는 가운데, 열운은 실오리 하나 걸친 것이 없이 발가벗겨서 팔 다리 네 공상으로 엎드리게 하고, 주전자에 담은 얼음 같은 냉수를 머리에서부터 등허리를 통하여 엉덩이에 이르기까지 물세례를 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몇 번 거듭하면 사람은 별 수 없이 동태 모양으로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까지 곁들이는 실로 야만적인 폭행이었다.”
'나라사랑', 제29집(1978년)

그 후 장지영은 1944년 10월 면소 처분을 받고 풀려났지만 함흥에서 거주제한을 당하여 바로 떠나지 못하다가 3개월만에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곧 경성헌병대에 또 잡혀서 얼마 동안 갇혀 있다가 풀려나왔다. 그뒤 양주에서 농사를 짓다가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2.4. 이후의 경력

장지영은 광복 후인 1945년 10월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 부국장이 되어 1948년 8월까지 역임했고, 조선어학회 제6대 이사장을 맡아 <우리말 큰사전>을 발간했다. 또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강사를 맡기도 했으며, 1948년 9월부터 1951년까지 세종중등국어교사양성소장을 지냈다. 1948년 9월 연희대학교 교수로 부임했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도 겸임했다. 6.25 전쟁 중에는 제주도로 피난하여 제주여자고등학교 및 제주농업고등학교 강사, 제주대학 설립위원, 제주대학 교수, 제주대학 문학과장을 지내다가 1952년 11월 서울로 돌아와 연희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복직했다.

1958년 연희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한 그는 1957년 9월 문교부장관에게서 국어, 국문연구발전공로 표창을 받았고, 1958년 서울시 교육회장에게 교육공로표창을 받았다. 또한 1958년 대통령표창 교육공로표창을 받았고, 1962년 광복절에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동년 한글날에는 한글공로표창을 받았다. 1964년 2월 학문의 업적과 한글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편, 그는 <향가>, <홍길동·심청전>을 간행하는 등 한국 문학에 대한 연구도 별도로 수행했다.

1976년 3월 15일 장지영은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에서 병사했다. 우연히도 장지영이 사망한 해는 스승인 주시경의 탄생 100주년이 된 해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장지영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