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9:26:07

생육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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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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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행적3. 남효온의 포함 여부에 대한 논쟁4. 기타

1. 개요

생육신()은 세조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6명의 신하를 말한다. 세조의 찬위 사건을 불의의 행위로 단정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원칙에 따라 두문(杜門) 혹은 방랑으로 일생을 보냈다. 이들은 벼슬을 버리고 단종을 추모하면서 절개를 지켰다.

생육신과 사육신 등의 신하들을 통칭하여 다른 훈구파와 구별하여 따로 절의파(節義派)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생육신과 기타 세조 찬위에 분개하여 벼슬길을 단념한 사람들을 통칭하여 청담파로도 분류하고, 사림에 넣기도 하는 등 학자에 따라 이견이 존재한다.

2. 행적

生六臣
생육신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 김시습: 호는 매월당. 8개월에 글을 알고, 5살에 중용 대학에 통달하여 세종이 찬탄한 천재였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삼일을 통곡하고는 은둔 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어[1]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서울 노량진에 암장했다고도 하고, 엄흥도와 함께 단종의 삼년상을 치렀다는 말도 있다. 공주에 동학사 숭모전을 지어 사육신의 초혼 제사를 했는데, 놀랍게도 다음해(1457년) 세조가 동학사에 들렀다가 초혼단을 보고 감동하여 팔폭 비단에 억울하게 망자들의 명단을 적어 유교 불교 양식을 섞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남효온, 김종직 등과 교류했다. 이미 중종 때 이조 판서, 선조 때 전기가 쓰이는 등 빠르게 복권되었다.
  • 성담수: 자는 미수(眉叟) 또는 이수(耳叟), 호는 문두(文斗)이다. 성석린의 동생 성석용의 증손자이자 성삼문의 할아버지 성달생의 형 성개의 손자로 성삼문의 육촌 동생. 사육신의 난에 얽혀 고문 받고 김해로 귀양을 갔다가 풀려났다. 그의 아버지 성희 역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그로 말미암아 사망. 세조는 그에게 감시 목적으로 참봉, 봉사 등의 관직을 내렸지만 받지 않았다. 벼슬을 단념하고 파주의 외진 곳에서 자연 속에 파묻혀 지내며 일생을 낚시와 독서로 소일했다. 사후 정숙(靖肅)의 시호가 내려졌다.
  • 원호: 문종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다.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강원도 영월로 쫓겨가자 세상과 접촉을 끊고 살았는데, 단종이 살아있을 때에는 조려, 이수형과 함께 영월을 찾아 관란정(觀瀾亭)에 유숙하며 단종의 문후를 드리기도 했다.[2] 1457년 단종이 세상을 떠나자 원주에 내려가 있는 것을 세조가 호조참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야사로는 머리를 향상 단종이 잠든 자리가 있는 동쪽으로만 향했다고 한다. 생전에 손자 원숙강(元叔康)이 출사하였으나 예종 때 사관으로서 〈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던 중 대신들의 허물을 적어놓은 자기 사초를 수정하려고 했다 발각돼 사형당한 뒤, 자신이 쓴 책을 모두 소각하고 자손들에게 글을 읽어 명리를 바라지 말라고 타일렀다 한다. 은거 중인 선비 원자허가 꿈에서 사육신과 단종을 만난다는 줄거리의 소설 원생몽유록의 주인공이다. 자허(子虛)는 원호의 자.
  • 이맹전: 호는 경은(耕隱) 자는 백순, 병조판서 이심지의 아들로 세종 때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사간원 정언, 지제교, 소격서령을 지냈으며, 시세가 어려워질것을 예상해 외직을 자청하여 거창현감 등을 지냈다. 거창현감 재직시 선정으로 백성을 보살펴 청백리로 불리었다.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권을 찬탈하자 눈이 잘 보이지 않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는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났다.[3] 그 후 고향인 구미 선산으로 내려가 김숙자 김종직 부자등과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조정의 끈질긴 출사 요구와 협박에도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훗날 정조때 이조 판서와 양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사후 시호는 정간(靖簡)
  • 조려: 호는 어계. 단종 원년 성균관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명망이 높았다. 그 뒤 국자감에 입학하여 학문 연구를 하던 중, 세조가 즉위하자 바로 고향 경상남도 함안군 원북에 은거했다. 단종이 살아있을 때에는 원호, 이수형과 함께 영월을 찾아 단종의 문후를 드리기도 했다. 사육신의 난이나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 등에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문후, 문상을 자유롭게 드리는 등 국문을 받지 않은 걸 보면 명확한 근거는 없다. 단종이 사사당하자 문상을 하러가던 그는 영월 청령포 앞에 이르러 배가 없어 통곡할 때, 호랑이가 나타나자 조려가 호랑이를 보고 "네 녀석이 충절이라는 것을 안다면 내가 이 강을 건널 수 있게 도울 수 있느냐" 며 하소연하자 호랑이가 그를 등에 업고 영월 동강을 도강하여 문상했다는 야사가 있으며 3년간 상복을 입고 삼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그 뒤 벼슬을 받지 않고 독서와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사후 시호는 정절(貞節) .

3. 남효온의 포함 여부에 대한 논쟁

  • 남효온은 수양대군의 쿠데타인 계유정난이 일어난 1년 후에 태어났고, (1454년생) 단종이 사망할 당시에는 4살이었다. 그러니까 단종, 세조 치세에는 어린아이였다. 그런 남효온이 생육신 계통에 포함된 것은 남효온의 스승이 바로 '조의제문'을 지어서 나중에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는 김종직이며, 그 김종직의 글을 사서에 넣었던 김일손과는 사형제가 되기 때문. 이렇게 생육신은 사림파와 직통으로 이어진다.

    다만 남효온 자신은 세조에 의해서 물가로 이장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릉인 소릉을 이전해야 벼슬에 나가겠다고 했다가 바로 대신들에 의해서 무시당했다. (김종직은 세조 때 이미 출사한 상황이긴 했었다.) 이후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기소설 육신전(六臣傳)을 저술하는 등의 행적을 보이며 방랑 생활하다가 사망하여 생육신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무오사화 때는 이미 사망한 이후이지만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것과 소릉 이전을 청원한 것으로 인하여 부관참시 당했다.
역시 태어난 시기 때문에 생육신에 넣기가 애매한 것도 사실이며, 당대의 절의의 주요도로서는 권절[4]이 더 높다. 그러나 육신전, 추강냉화, 사우명행록을 짓는 등 기록을 남겼으며, 또 김시습을 제외하면 제일 유명한 것도 사실이다.[5]

4. 기타

사육신이라는 말부터 남효온이 지은 "『 육신전』"에서 비롯되었으며, 생육신 또한 나라에서 정한 공식 명칭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생육신 은 사육신보다 훨씬 더 짜맞추어진 감이 있다. 김시습, 성담수, 원호, 남효온은 정조 때 모두 이조 판서로 추증되고 봉향되었으며, 일찌기 숙종 때인 1706년 이들 6명이 조려가 배향된 서산 서원에 봉향되었다.[6] 이것이 생육신의 유래로 추정되며, 그런 만큼 조려에게도 여러 야담이나 행장이 따라 붙어있다.

훗날 육신전을 읽은 선조가 육신전의 팩트적 오류도 그렇지만 ‘왕을 인정하지 못하겠으면 당장 그만두거나 자결하거나 했어야지 그 밑에서 녹 받고 승진도 해 가며 섬기다가 반란 일으킨 건 뭐하는 경우냐’ 라는 논리[7]로 사육신을 디스하였는데, 그런 기준에서는 오히려 이 생육신들이야말로 흠 잡을 데 없이 절개를 지킨 인물들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은 수양이 불의를 행할 때 즉시 갖가지 핑계를 대어 물러나 버렸다. 물론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육신이 오히려 생육신들에게 공감과 존경을 받은 건 세조의 찬탈이 그만큼 부도덕했고 의분을 일으킬만 했다는 것이다. 참혹하기 그지없었던 세조의 처벌과 추후의 단종에 대한 냉혹한 처분도 그에 한몫 했을 것이다.

그 외 앞서 거론된 이수형[8]이나, 단종을 묻은 호장 엄흥도 등도 절의를 지킨 주요 인사로 거론된다.

[1] 다만 47세에 안씨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았다. [2] 이들은 치악산에 올라가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을 것을 굳게 맹세하고 치악산 정상에 이름을 나란히 새기기도 했다. [3] 일부 야사에서는 세상을 볼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아예 평생 눈을 감고 장님 행세를 했으며, 90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 눈을 뜨기 전까지는 가족들조차 그게 진짜인 줄 알았다고 한다. [4] 權節, 1422년 ~ 1494년. 문무를 두루 겸비하여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이전부터 그를 포섭하려 하였으나 거절하였고, 찬탈 이후에도 여러번 당상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거절하고 평생을 귀먹고 정신이 이상해진 척 하며 살다 갔다. [5] 실제로 사육신 묘역에는 김문기 포함해서 7기가 있다 [6] 위에 남효온과 함께 거론된 권절도 숙종 시기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7] 이 부분의 치명적 약점을 최대한 커버치기 위해 육신전에서 신하 신이 아닌 클 거를 썼다느니, 녹을 받기만 하고 안 먹었다느니 하는 말장난 내지는 말꼬리 잡기까지 나오는 것이다. 핵심은 이들이 어쨌든 수양대군을 임금으로 모신 기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극에서는 고문 장면에서는 육신전의 내용을 반영해 나리나 녹 드립까지 다 나오지만 그 전에는 세조를 전하라고 부르고 자신의 2인칭을 신이라고 하는 장면을 안 넣을 수도 없었다. 심지어 고문당하며 세조를 도둑이라고 매도하는 장면에서도 ‘신’ 을 쓴다. 일을 도모하기 위해 참으며 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그걸 위해서 어쨌든 세조 밑에서 한 행위들이 선비로서는 자기모순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8] 음보로 관직에 올라 선교랑(宣敎郞) 전생서령(典牲暑令)을 거쳐 조봉대부 평시서령(平市署令)이 되었다.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 경상북도 영천군 도촌리로 은거하였다. 단종의 3년상을 마친 뒤 산으로 들어가 삼면은 벽이고 북녘으로 문이 있는 집(공북헌)을 짓고 평생을 숨어 살았는데, 이는 단종의 장릉이 영천의 북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북.. 북향집! 21살에 은거해 73년간을 단종을 추모하며 상경하지 않다가 중종 23년이 돼서야 죽었다. 철종 때 돼서야 추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