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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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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王仁) / 와니(和邇, わに)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기록3. 유적지4. 기타5. 대중매체에서

1. 개요

파일:external/www.galleryartkorea.kr/28_13.jpg 파일:Wani.jpg
전라남도 영암군 왕인묘의 영정 부분.[1] 일본 화가가 그린 왕인의 초상화.[2]
옛날에는 문자가 없었는데, 우리의 삼국시대(三國時代) 백제(百濟) 사람 왕인(王仁)이 서적(書籍)을 가지고 일본에 들어갔다고 한다.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에게 무한히 감사하다는 뜻을 표시하고 있다.
- 일동기유(日東記游) 제3권 / 학술(學術) 7칙[3]

백제 박사.[4] 아직기의 추천으로 일본에서 초빙하여 일본에 천자문 논어를 전했다고 알려져 있다.

2. 기록

백제의 군주 조고왕(照古王)이 한 쌍의 말을 아치키시(阿知吉師)에게 바치게 했다.[5] 또 검과 거울을 바쳤다. (오진 덴노가) 백제에 현명한 이가 있으면 바치라고 명하였다. 이 명을 받아 바친 사람이 와니키시(和邇吉師)이다. 이때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 총계 11권을 함께 가져와 바쳤다.[6]
고사기 오진 덴노
천황이 아직기에게, “혹 너보다 뛰어난 박사가 또 있느냐”고 물으니, “왕인(王仁)이라는 분이 있는데 훌륭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가미츠케노키미(上毛野君)의 조상인 아라타와케(荒田別)과 간나기와케(巫別)을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불렀다. 아직기는 아지키노후비토(阿直岐史)의 시조이다. 16년 봄 2월 왕인이 왔다. 태자 우지노와키이라츠코(菟道稚郞子)는 왕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여러 전적(典籍)들을 배웠는데,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른바 왕인은 후미노오비토(書首) 등의 시조이다.
일본서기 오진 덴노

국내 사서에는 이름이 전하지 않고 아직기처럼 일본 사서에만 이름이 전하는 인물이다. 일본 측 기록에서는 와니(和邇)라는 훈이 달려 있으며 와니키시(和邇吉師, わにきし)라고 존칭어를 합쳐서 부르기도 한다. 키시는 건길지와 통하는 존칭으로 보인다. 고사기에는 근초고왕, 일본서기에는 아신왕이나 전지왕 대의 인물로 전한다. 일본서기를 신뢰하거나, 두 기록을 절충해 근초고왕(346~375년)부터 아신왕(392~405년) 때에 걸쳐 활동한 인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사기》의 기록에는 모순이 있다. 왕인이 가져왔다는 《 천자문》은 무제 시기인 502년부터 549년 사이에 성립되었기 때문에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후한 말의 인물인 종요가 이미 주흥사의 것과는 다른 《천자문》을 남긴 바 있기에 그 천자문을 일컫는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혹은 왕인의 행적에 천자문 전래 업적이 덧붙여진 것이거나, 왕인이 《천자문》이 만들어진 6세기 이후에 활동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후 왕인에 대한 전승은 보다 구체성을 갖게 되는데, 8세기에는 그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인물들에 의해 아래와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스님의 법명은 호교(法行)로, 교기라고도 한다. 야쿠시지의 승려이다. 속성은 고시(高志)씨로 휘가 사이치(才智)이며 자는 치호(智法)인 아버지의 큰아들로 태어 났다. 본래 백제의 왕자 와니(王爾)의 후손이다.
대승정사리병기(大僧正舎利瓶記)
칙을 내려 그 본계를 물으니 모오토 등은, “한 고제의 후손 난(鸞)이라 하는 사람의 후손 왕구(王狗)가 백제에 옮겨와 이르렀는데, 백제 구소왕(久素王) 때에 성조에서 사신을 보내어 문인을 찾으니 구소왕이 곧 그(王狗)의 손자인 왕인(王仁)을 바쳤습니다. 이가 곧 후미(文)·다케후(武生) 등의 선조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모오토 및 마카타 등 8인에게 스쿠네(宿祢)의 가바네(姓)를 내렸다.
속일본기》 권40 간무 덴노 엔랴쿠(延暦) 10년(791년) 4월 8일 #

위는 나라 시대 고승인 교기의 유골을 봉안할 때의 기록이다. 실제로 왕인과 백제 왕가와의 관련은 알 수 없지만, 속세에서의 성인 고시씨는 《 신찬성씨록》에서도 왕인의 후예로 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아래는 왕인 전승이 확대되어 그 시조가 한 고제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왕인의 정체에 대하여 6세기에 활동한 왕진이(王辰爾, おうしんに)[7]를 모델로 창작된 인물로 보는 설, 낙랑군 한인 왕씨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

3. 유적지

전라남도 영암군에 왕인이 백제를 떠났다는 설화(說話)가 있다. 영암군 군서면에는 왕인의 유적지가 있다고 전해져 영암군에서 매년 봄에 영암 왕인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하지만 고고학적 연구가 축적되면서 전라남도 영암 지역이 왕인의 고향일 것이라는 설은 허구로 가닥이 잡히고 있다. 영암 지역이 백제의 수중에 들어온 것은 한참 후대인 동성왕~ 무령왕 대라는 것이 현 학계의 주류인데, 왕인이 당시 독자적인 세력권을 인정해 주고 간접 지배를 하던 영산강 유역 일대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에는 왕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일본 측과의 기록을 통해 교차검증이 불가능한 상황이다.[8]

아울러 일본 측 기록이라 하여도 쉬이 믿을 수 없는데 왕인이 영암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일제강점기 당시의 나주에서 첫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나주 영산포 본원사의 주지였던 아오키 게이쇼(靑木惠昇)가 영암 구림이 왕인의 옛터라고 주장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 주장은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이라는 지리서에서 인용하면서 널리 퍼졌다. 그러나 아오키 게이쇼가 주장하는 바의 근거는 매우 불충분하다. 이미 영암에 퍼져 있는 도선의 설화가 결합 된, 그냥 지어낸 수준의 이야기라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왕인이 일본 땅에 처음 상륙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인 사가현 칸자키시에는 왕인 신사, 오사카부 히라카타시 나가오역 주변에는 왕인묘가 있다. 이 무덤은 원래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자연석이며, 지역 사람들은 이 바위를 ‘오니바카(オニ墓)’ 즉 귀신무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바위의 이름인 ‘오니(オニ)’가 왕인의 일본어 발음인 ‘와니’와 연결되어 왕인의 무덤, ‘왕인묘(王仁墓)’라고 하는 설이 17세기 후반에 제기되었다. 이후 사람들이 이 설을 믿고 ’박사왕인지묘‘라고 새겨진 비석을 세웠다. 영암군은 한국 전통 양식의 '백제문'을 지어 보냈다. 그러나 이 무덤이 왕인의 것이라는 설의 근거가 된 고문서는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

4. 기타

경기 카루타에서 시작하기 전에 불려지는 서가인 나니와즈라는 와카를 만들었다고 한다.

5. 대중매체에서

  • 2010~2011년 KBS 대하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극 중 내내 '큰어지'라는 이름의 꼬마로만 등장하는데 후일의 왕인이라는 자막이 따로 나온다. 아직기가 스승인 고흥에게 "그러니 네가 유학을 잘못 배웠다고 할 수밖에"라고 늘 핀잔을 듣는 것과 달리 왕인은 늘 칭찬만 듣는다. 최종화에서 고구려 정복 사업 도중 회군해 귀족들의 반란을 제압했으나 이를 역사서에 싣지 말라는 근초고왕의 명령에 고흥이 어명과 역사 왜곡 사이에서 갈등하던 중 반란의 내용을 지워버리고 은유적으로 지진이 일어났다는 표현으로 바꾸자[10] 아직기는 스승이 쓴 책에 손을 댔다고 꾸중을 하는 반면 고흥은 아직기보다 유학을 잘 배운 것 같다고 칭찬을 하는데 큰어지가 아직기를 보고 씨익 웃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1] 해당 영정은 걸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전신상이다. [2] 기쿠치 요사이(菊池容斎, 1788년~1878년)의 전현고실(前賢故實)에 실려 있다. [3] 일동기유는 1876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기수가 일본의 문물을 시찰한 내용을 기록한 책으로 그 당시에도 일본에는 왕인(王仁)이 일본에 문자를 가르쳐 준 것을 감사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지금의 학위가 아닌 유교 관직명이다. [5] 아치키시는 아치키노후비토(阿直史)의 조상이다. [6] 이 와니키시라는 이가 후미노오비토(文首) 등의 시조이다. [7] 아스카 시대의 인물로 지인(智仁)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으며 후나노후히토(船史)씨의 조상이다. 후나는 성씨인 우지(氏) 후히토는 등급, 직역을 나타내는 카바네(姓). [8] 젊은 시절 그곳에서 활동을 했거나 일본으로 건너가는 중간다리 길목이 되었을 수는 있다. 백제가 지배력을 행사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 일대의 세력가들은 독자적으로 중국이나 왜와 교류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바닷길에 밝았기 때문. 하지만 이마저도 상상에 가까운 추론이라 유의미한 가설이 되지 못한다. [9] 이름만 빌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게임의 등장 인물들과 연대가 심하게 차이 난다. [10] 역사서에 은유적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지진은 단순 자연 현상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반란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교묘하게 바꾼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극 중에서도 지진이 아닌 반란으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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