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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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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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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8년 12월 3일 | ||
한성부 남부 명례방 명례동계
저동 (現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1가 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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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3년 4월 17일 (향년 84세) | ||
경상남도 부산시 (現 부산광역시) | |||
묘역 | 서울특별시 강북구 북한산 순국선열 묘역 | ||
재임기간 | 초대 부통령 | ||
1948년 7월 24일 ~ 1951년 5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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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 본관 | 경주 이씨[2] | |
부모 | 아버지 이유승, 어머니 동래 정씨[3] | ||
형제자매 |
형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남동생 이소영, 이호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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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경주 김씨[4] (사별) 반남 박씨 (재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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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아들 이규창[5], 이규열[6] | ||
학력 | 과거시험 합격 | ||
병역 | 해당사항 없음 | ||
종교 | 유교 ( 성리학) → 대종교 → 개신교 ( 감리회) | ||
호 | 성재(省齋)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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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부통령 취임식 당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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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2. 약력
- 1905 외부 교섭국장
- 1906 평안남도 관찰사
- 1907 중추원 칙임의관
- 1908 한성재판소장
- 1911.6.10. 신흥강습소 설립
- 1919.4. 임시정부 법무총장
- 1919.9.~1926 임시정부 재무총장
- 1930.1.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
- 1935.10.~1940 임시정부 초대 법무부장
- 1942.10. 임시정부 제2대 재무부장
- 1944.4. 임시정부 감찰위원장
- 1946 성균관 총재
- 1947.2. 재단법인 성재학원 이사장
- 1948.7. 초대 대한민국 부통령
- 1949 건국공로훈장 중장[7] 수훈
- 1952.5. 제2대 대통령 후보 (무소속, 낙선)
3. 생애
3.1. 구한말~일제강점기
1868년 12월 3일 한성부 남부 명례방에서[8] 6형제 중 5남으로 태어났다. 선조 때 영의정 이항복의 10대손으로 집안은 대대로 정승, 판서 등을 배출한 소론 명문가였다. 부친은 고종 때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지낸 이유승이고 모친은 동래 정씨 정순조[9]의 딸이다.과거에 급제하여 구한 말에는 평안남도 관찰사[10], 한성재판소 수반판사 등 여러 고위직을 맡았다.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손꼽히는 인물로 1910년 국권 피탈 후 일제의 회유를 뿌리치고 넷째 형 이회영 등 6형제와 함께 전 재산을 팔고 만주로 이주했다.[11]
이후 만주에 신흥 강습소를 설립해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이 풀리지 않자 상하이로 떠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에 참여했다.
이때 6형제는 엄청난 생활고를 겪었고 광복 때 살아서 귀국한 사람이 이시영 한 명뿐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광복을 보지 못한 채 고문사, 병사(病死), 객사(客死), 아사(餓死)했다.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소론 명문가 출신이었던 6형제들의 소문을 들은 나랏사람들이 이들을 찾은 것이고 겨레이자 독립운동의 인적 자원들을 끌어안아 거점으로 쓸 토지, 척박한 땅에서 실패한 농사로 인해 먹을 것을 사는 등 단순한 운영과 준비만으로 10대 부호조차 파산에 이르게 된 것이다.
3.2. 해방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 직전 기념사진[12] |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단독정부 수립 문제를 놓고 김구 등 다른 임시정부 요인과 달리 단독정부 수립을 찬성했다. 이러한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하였고, 이 덕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즈음에 이승만은 이시영을 부통령에 낙점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의견이 조정되지 않았다.
3.3. 말년
이승만은 한국민주당 당수 김성수를 불러 이시영을 부통령에 앉히겠다고 밝혔고 김성수도 이에 동의해 1948년 7월 20일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다. 한편 이승만이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일부 재산의 환급을 제안했으나 이때 이시영은 재산을 찾겠다고 독립운동한게 아니라며 거절하였다. 그리고 1949년 건국공로훈장 중장[13]이 수여되었다.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피난해[14] 있던 중에 국민방위군 사건을 지켜보면서 이승만 정부에 실망하여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후 정계를 은퇴했고 대신 자신을 찾아와 다음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것을 권유한 조봉암에게 반대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것을 권유했다.
그렇게 조봉암이 출마를 결심하자 반공 성향이 강했던 민주국민당 측에선 조봉암이 야권의 대표자가 되게 해서는 안된다며 신익희가 불출마를 선언한 이상 이시영이라도 출마시켜야 한다고 생각해 이시영에게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것을 강권했다. 그러나 2위로 이승만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 이승만이 발췌 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 도입을 시도하다 실패하자 정치깡패들을 동원해 야권 국회의원들을 잡아다 협박하는 등의 파행을 저지르자 김성수, 장면 등과 함께 부산에서 반독재 구국선언을 했으나 실패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통과되고 만다. 그해 10월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되었으나 부결되었다. 이후 은퇴하여 부산 동래로 내려갔다.
1953년 4월 17일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한국 전쟁 휴전 3개월을 앞두고 노환으로 사망했다. 서울특별시 정릉에 묻혔다가 뒤에 수유리 북한산 기슭으로 이장됐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8 | 제1대 부통령 선거 | 대한민국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
133 (67.51%) | 당선 (1위) | 초선[15][16] |
1952 | 제2대 대통령 선거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764,715 (10.89%) | 낙선 (3위) |
역대 후보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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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중매체에서
- 1968년작 영화 <상해 임시정부>에선 배우 김수천이 연기했다.
- 1979년작 KBS-TV <일요사극 맥> '벼랑 위의 파수병(2부작)'에선 배우 이신재가 연기했다.
-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는 성우 겸 배우 이도련이 연기했으며, 1989년작 특집드라마 <백범일지>, 1998년작 연극 <아!정정화>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 1995년작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서는 배우 이대로가 연기했다.[17]
- 2009년작 KBS 국권침략 100년 특별기획 드라마 <자유인 이회영>에선 배우 조영진이 연기했다.
- 2018년작 영화 명당에서는 배우 허성태가 연기했다.
- 대체역사물 대한민국 전쟁 영웅이 되었다에서 주인공 이강산이 자신의 동생인 이호영의 아들을 자처하자 이를 확인하기 위해 만남을 가지는 것으로 첫 등장. 이후 주인공의 신들린 호소에 자신의 조카임을 인정하며 이강산을 암살하려하는 애국회 소탕 작전을 돕게 되며 이때 박흥식을 직접 처단한다. 이후 지원 요청을 위해 미국에 건너간 대통령 이승만을 대신해 부통령 신분으로 국정을 돌보다 NKVD의 폭탄 테러 공작으로 치명상을 입게 되고 결국 노구의 몸으로 이겨내긴 역부족이었던지라 사망하게 된다. 그의 사후 대통령인 이승만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머물기로 하면서 생긴 국가지도자 자리의 공백은 당시 국회의장이던 신익희가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메워지게 된다.
6. 관련 어록
"삼가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에게 고합니다.
우리 겨레가 40년간 외적의 압박에서 신음하다가 우리 혁명 선열들의 순국 열혈의 결정(結晶)과 연합 우방의 호의로 말미아마 자유 해방이 되고 이제 우리 겨레가 대망하던 중앙정부를 수립하게 됨은 실로 경하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 국가와 민족이 현재 중대 난국에 처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우리의 전도에는 허다한 난관과 험로가 가로놓여 있는 것입니다.
양분된 국토를 통일하고 쇠퇴한 산업기관과 퇴폐한 문화시설을 재건하여 우리의 민생문제를 시급히 해결하지 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동시에 문란한 우리의 민족정기를 갱생시켜 우리의 정로(正路)를 규정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민족적 대과업을 달성함에는 동포 여러분이 삼천만 일심으로 모든 사(私)와 이(利)에 초월하여 오직 건국홍업(建國鴻業)에 일로매진하고 필사 노력하여야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중대한 난국에 처하여 불녕(不佞)이 80 노구로써 부통령의 자리를 맡게 되었으나 동포 여러분이 지워 준 이 중책은 과연 다할 수 있을는지 스스로 의심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로는 이승만 대통령을 보좌하고 아래로는 삼천만 애국동포 여러분의 적극 협력을 얻어 우리의 숙망인 조국 광복을 완수하여 빛나는 민족 전통을 기리 살리고 찬란한 민족 문화를 세계에 앙양하여 만방과 더부러 공존하고 공영케 하기에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여생을 바칠까 합니다."
초대 부통령 취임사
우리 겨레가 40년간 외적의 압박에서 신음하다가 우리 혁명 선열들의 순국 열혈의 결정(結晶)과 연합 우방의 호의로 말미아마 자유 해방이 되고 이제 우리 겨레가 대망하던 중앙정부를 수립하게 됨은 실로 경하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 국가와 민족이 현재 중대 난국에 처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우리의 전도에는 허다한 난관과 험로가 가로놓여 있는 것입니다.
양분된 국토를 통일하고 쇠퇴한 산업기관과 퇴폐한 문화시설을 재건하여 우리의 민생문제를 시급히 해결하지 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동시에 문란한 우리의 민족정기를 갱생시켜 우리의 정로(正路)를 규정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민족적 대과업을 달성함에는 동포 여러분이 삼천만 일심으로 모든 사(私)와 이(利)에 초월하여 오직 건국홍업(建國鴻業)에 일로매진하고 필사 노력하여야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중대한 난국에 처하여 불녕(不佞)이 80 노구로써 부통령의 자리를 맡게 되었으나 동포 여러분이 지워 준 이 중책은 과연 다할 수 있을는지 스스로 의심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로는 이승만 대통령을 보좌하고 아래로는 삼천만 애국동포 여러분의 적극 협력을 얻어 우리의 숙망인 조국 광복을 완수하여 빛나는 민족 전통을 기리 살리고 찬란한 민족 문화를 세계에 앙양하여 만방과 더부러 공존하고 공영케 하기에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여생을 바칠까 합니다."
초대 부통령 취임사
"먼저 이시영 씨는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임시정부가 국내에 들어온 이후로 많은 대중의 지지를 받으면서 꾸준히 변절 없이 정중하게 싸워 지켜 나온 이시영 씨입니다.
국내의 모든 동포가 그들에게 대한 기대가 많고 또 지지하는것을 우리가 볼 수 있읍니다.
양방(兩方)이 부통령이 되신다면 아마 국내의 여러 각 방면으로 무슨 반대하는 것은 없을 것으로 내가 믿는 바이얘요."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 이후 평가
국내의 모든 동포가 그들에게 대한 기대가 많고 또 지지하는것을 우리가 볼 수 있읍니다.
양방(兩方)이 부통령이 되신다면 아마 국내의 여러 각 방면으로 무슨 반대하는 것은 없을 것으로 내가 믿는 바이얘요."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 이후 평가
7. 여담
- 남산공원에는 백범 김구 동상의 바로 곁에 그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초급대학의 설립자이다. 만주의 신흥무관학교를 이은 이름이었으나 설립 과정에서 재정 문제와 설립 인가 등의 문제로 난항을 겪던 중 6.25 전쟁이 터져 더욱 힘들어지다가 1951년 5월 18일 재단의 부채 1,500만 원을 떠안는다는 조건으로 조영식에게 팔리면서 오늘날의 경희대학교가 되었다.
- 조선 - 대한제국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한민국의 관직을 모두 역임한 유일한 인물로 현재의 대한민국이 조선과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결되는 고리를 제공하는 사람이기도 하다.[18]
- 조선: 승정원 동부승지
- 대한제국: 궁내부 참의, 외부 교섭국장, 평안남도 관찰사, 중추원 찬의, 한성재판소 수반판사, 법부 민사국장
- 임시정부: 제1·15대 법무부장, 제2·17대 재무부장, 감찰위원장
-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 하도 청렴했던 나머지 재산으로 남긴 게 단 하나도 없어 역으로 후손들이 빈곤하게 살게 되었다. #
- 장인이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내각총리대신이었던 김홍집이다.
8. 가계
※ 독립명문가[19] 이시영 6형제[20]는 선조 때 영의정 이항복의 차남 이정남의 9대손이다. 이시영의 형 이석영의 양부이기도 한 고종 때의 영의정 이유원은 이정남의 8대손이다.※ ■: 독립유공자[21]
- 11대조: 이몽량 (1499 ~ 1564) - 명종 때 형조판서, 우참찬.
- 10대조: 이항복 (1556 ~ 1618) - 선조 때 영의정. 백사공파 파조.
- 9대조: 이정남 (1585 ~ 1653) - 인조 때 낭청[22].
- 8대조: 이시술 (1606 ~ 1672) - 현종 때 의주부윤[23].
- 7대조: 이세필 (1642 ~ 1718) - 숙종 때 형조참판[24]. 이조판서·좌찬성 추증.
- 6대조: 이태좌 (1660 ~ 1739) - 영조 때 좌의정.
- 5대조: 이종성 (1692 ~ 1759) - 영조 때 영의정.
- 4대조: 이경륜[25] (1735 ~ 1789) - 정조 때 황해도 관찰사.
- 증조: 이정규 (? ~ ?) - 순조 때 강원도 관찰사.
- 조부: 이계선 (? ~ ?) - 철종 때 사간.
- 부: 이유승 (1835 ~ 1907) - 고종 때 이조·예조·형조·공조 판서, 한성부판윤, 우찬성, 궁내부특진관. 이항복의 9대손.
- 모: 동래 정씨 - 고종 때 이조·예조·공조 판서 정순조의 딸.[26]
- 형: 이건영 (1853 ~ 1940)
- 조카: 이규룡(계)[27], 이규면, 이규훈
- 형: 이석영 (1855 ~ 1934)
- 조카: 이규준, 이규서, 성명미상(女)
- 형: 이철영 (1863 ~ 1925)
- 조카: 이규붕, 성명미상(女), 이규상, 이규화
- 형: 이회영 (1867 ~ 1932)
- 본인: 이시영 (1868 ~ 1953)
- 초배: 경주 김씨 - 영의정·내각총리대신 김홍집의 딸
- 계배: 반남 박씨
- 측실: 성명 미상
- 동생: 이소영[37]
- 조카: 성명 미상(女)
- 동생: 이호영[38] (1875 ~ 1933)
- 조카: 이규봉(이규황?), 이규린(이규준?)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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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로명주소 미발급.
[2]
백사공파 10대손, 중시조 35세 ○영(榮) 항렬.
[3]
고종 때 이조판서를 역임한 정순조(鄭順朝, 1810 ~ ?)의 딸.
[4]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내각총리대신인
김홍집의 외동딸.
[5]
李奎昶. 초명은 이규봉(李奎鳳).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李圭昌)과는 한자가 다르다.
[6]
李奎悅. 초명은 이규홍(李奎鴻).
[7]
지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8]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1가.
[9]
鄭順朝,(1810~1863) 고종 때 이조·예조·공조판서.
[10]
'감사'라고도 한다. 평안남•북도가 나뉘지 않고 평안도였던 때에는 평안도 관찰사 또는 평안 감사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도지사'.
[11]
이때 판 돈이 당시 소 값으로 13,000마리에 달한다고 한다. 지금이야 소 1마리에 대학교 1학기
등록금 내기도 아슬아슬하다지만 당시에는 소 있는 집이 부잣집이었다. 전형적인
농업 사회였던 당시에 소의 가치는 지금보다 몇 배 위였다. 간단하게 현재 소 시세를 약 500만 원으로 잡아서 계산하면 약 650억의 재산을 보유했었다는 소리인데 이것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이주할 때 절반 이하로 후려쳐서 재산을 급매한 결과다.
[12]
가운데 안경 쓴 인물부터 오른쪽으로
김구, 안중근의 조카인 안미생, 중절모를 쓴 노인이 이시영이며 김구 앞에 태극기를 든 아이는 이시영의 종손인
이종찬이다.
[13]
現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4]
이회영의 손자이자 이시영의 조카손자인
정치인 이종찬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에 이시영이 피난을 거부하고
서울에 머무르려 했는데 6월 28일 새벽에 독립운동 시절 동지였던
북한
김두봉의 특사가 몰래 찾아와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으니 부통령 선생께서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직을 승계하신 거 아닙니까?
김일성 수상이 정상 회담을 원하니 저랑 같이 갑시다."라고 했고 제안을 거절한 후 위기감을 느껴 피난을 나왔다. 직후 북한군이 서울에 입성했는데 대부분의
국회의원과 각료들은 전날에 이미 피난을 갔는데 이시영은 그 사실을 알고도 무모하게 저때까지 남아있다가 하마터면 북한에 강제로 끌려가 이용당할 뻔했다.
[15]
1951.5.9 부통령직 사퇴
[16]
제헌 국회에서의 간접 선거.
[17]
<자유인 이회영>에서는 그의 둘째 형 이석영 역으로 나왔다.
[18]
제3대 부통령인
함태영도 비록 임정에는 참여하지 않고 재야에서 독립운동을 했지만 제국 개창 전인 조선시대에 처음 벼슬길에 올라 대한제국에서 법조인을 지냈고 해방 후에는 부통령까지 지냈다.
[19]
이시영 일가는
명문가의 후손으로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그 공로로 광복 후 일가에서 건국훈장·건국포장 13명을 배출하였다.
건국훈장(12명) :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등 6형제,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이건영의 장남 이규룡(생부는 이회영),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 이회영의 차남 이규학·3남 이규창, 이회영의 사위 장해평(이규숙의 남편). 건국포장(1명) : 이시영의 장남 이규창(초명은 이규봉). 사돈인
조정구,
정이형,
신익희도 각각 건국훈장 애족장·독립장·대한민국장을 받았으므로 이들까지 포함하면 16명이 된다.
[20]
요절한 이소영을 제외하고 흔히 이회영 6형제로 칭한다.
[21]
광복 후
건국훈장, 건국포장 등을 받은 인물들만 포함함. 기타 독립운동가들은 포함하지 않았음.
[22]
郞廳. 일반적으로 정3품 이상 당상관에 비교하여 종3품 당하관 이하의 관원을 지칭하나, 좁은 의미로는 6조의 정5품 정랑 또는 종6품 좌랑을 지칭한다. 또한 비변사, 경리청, 준천사 등 일부 관청에는 낭청 자체가 종6품~정7품의 관직 명칭이다.
[23]
부(府)를 관할하던 종2품 지방 장관직. 경주·평양·전주·영흥·함흥·의주·강화·광주 등 8곳의 부가 있었다. 부윤은 절제사(節制使)를 겸직하였다.
[24]
참판은 6조의 장관인 판서를 보좌하는 종2품 차관직이다. 각 조의 중요 사무는 판서, 참판, 참의가 합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상당한 발언권이 있었다.
[25]
친조부는 이세필의 3남 충청감사 이형좌(李衡左), 친부는 이조판서 이종백(李宗白)이다. 이세필의 장남 이태좌의 아들 이종성에게 입양되었다. 즉, 양부인 이종성과는 실제 혈통상 5촌 당숙-당조카 관계다.
[26]
남산 밑에 회동(會洞)
동래 정씨를 중심으로
풍산 홍씨,
풍양 조씨,
경주 이씨,
대구 서씨 등
소론 명문가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27]
생부는 이회영.
[28]
형 이건영의 양자로 출계.
[29]
반남 박씨 박창서와 결혼.
[30]
독립운동가 장해평(장기준)과 결혼.
[31]
초명은 '이규호'였다고 함.
[32]
초명이 '이규석'이었다고 함.
[33]
형 이회영의 2남 이규학의 3남
[34]
형 이회영의 4남 이규동의 장남.
[35]
초명은 '이규봉'.
[36]
초명은 '이규홍'.
[37]
이복동생. 일찍 사망.
[38]
이복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