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90033, #330066 20%, #330066 80%, #190033); color:#fff"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fff> 국무총리 | |||
초대 | ||||
이승만 | ||||
<rowcolor=#ffffff> 임시대통령 | ||||
초대 | 제2대 | |||
이승만 | 박은식 | |||
<rowcolor=#ffffff> 국무령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이상룡 | 홍진 | 김구 | 안창호 | |
<rowcolor=#ffffff> 국무회의 주석 | ||||
제1-2대 | 제3대 | 제4대 | 제5-7대 | |
이동녕 | 송병조 | 양기탁 | 이동녕 | |
<rowcolor=#ffffff> 국무위원회 주석 | ||||
제8-11대 | ||||
김구 |
}}} }}}}}}}}} |
양기탁 관련 틀
|
||||||||||||||||||||||||||||||||||||||||||||||||||||||||||||||||||||||||||||||||||||||||||||||||||||||||||||||||||||||||||||||||||||||||||||||||||||||||||||||||||||||||||||||||||||||||||||||||||||||||||||||||||||||||||
|
<colcolor=#fff><colbgcolor=#330066> | |||
|
|||
출생 | 1871년 4월 2일 | ||
평안도
증산현 용연면 신경리[1] (現 평안남도 증산군 사천리) |
|||
사망 | 1938년 4월 19일 (향년 67세) | ||
중화민국 강소성 율양현 길당암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7호 | ||
지명 | 제2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2] | ||
1926년 2월 18일 ~ 1926년 4월 29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330066><colcolor=#ffffff> 본관 | 남원 양씨(南原 梁氏) [3] | |
부모 | 아버지 양시영(梁時英), 어머니 인동 장씨 | ||
자녀 | 아들 양효손(梁孝孫) | ||
학력 |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학과 | ||
정당 | 한국독립당 | ||
종교 | 유교 → 기독교 ( 개신교) | ||
아명 | 양의종 (梁宜鍾) | ||
이명 | 소화분 (蘇化芬) | ||
자 | 자명(子明), 만초(萬初) | ||
호 | 우강(雩岡), 운강(雲崗) | ||
서훈 | 건국공로훈장 복장[4] 추서 (1962년) | }}}}}}}}}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언론인. 1904년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의 합작하에 영자(英字) 신문인 <코리아 타임즈>를 발간했고 한문 신문인 <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주필로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었다.2. 생애
1871년 평안남도 강서군 용연면 신경리에서 아버지 양시영(梁時英)과 어머니 인동 장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兒名)은 의종(宜鍾)이었다가 후에 기탁으로 개명했고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다가 상경하여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했다.1897년 독립협회 회원으로 가입했으며 영국인 선교사 J.S 게일이 저술한 한영자전(韓英字典) 편찬을 도왔고 같은 국적의 언론 기자인 E.T 베셀과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즈를 발간했고, 궁궐에서 영어에 능통함을 인정받아 궁내부 영어 통역사로 활동했다.
양기탁은 보안회에 가입하여 애국 계몽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04년 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발행을 중단한 독립신문을 대신해 순한글과 영문판으로 발행, 주필로 활동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1907년 대구에서 처음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을 대한 매일 신보를 이용해 전국으로 확산시켰으며, 안창호와 신민회를 조직하여 독립 운동에 참가했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고 1915년 4월 출옥하였다. 이후 북간도· 연해주 방면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8년 중국 톈진에서 상하이로 가던 도중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중국 체류금지 처분을 받고 전라남도 고흥에 유배되었다가 이후 출옥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주역으로 참여하여 편집고문에 취임했다.
이듬해인 1921년 독립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봉천성 관전현(寬甸縣)[5] 등지를 전전하다가 미국 의회 의원단이 조선에 방문하자 조선의 독립을 정당화하기 위한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이후 가출옥하여 만주로 건너가 의성단을 결성했다.
1931년 11월 상하이로 도항하였으며 1933년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국무령에 선출되어 1935년까지 재임하였다. 이후 1938년 중국 장쑤 성에서 와병(臥病)을 앓다가 순국(殉國)했다. 향년 68세.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1993년 14대 대통령 김영삼의 문민정부 때 중국 장쑤 성에 매장되었다는 유해를 발굴함에 따라 그 해 유해가 서울특별시로 운구되어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04년부터 서울신문 사옥 1층 로비에 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흉상으로 세워져 있다.
3. 기타
- 어니스트 베델 덕분에 한동안 치외법권을 마음껏 누려 일본은 이 당시 양기탁에게 이를 바득바득 갈았는데, 뒷배가 어느 수준이었느냐 하면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저격당하여 사망한 소식이 알려지자 대한매일신보 2층에 대놓고 큼지막하게 태극기를 게양하고 동네가 떠나가라 축배를 들며 성대한 잔치를 주최했을 정도였다.
4. 대중매체에서
- 1979년 KBS <일요사극 맥> '벼랑 위의 파수병'에서는 배우 김봉근이 연기했다.
- 1984년 KBS 대하드라마 < 독립문>에서는 배우 임동진이 연기했다.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서는 배우 박영지가 연기했다.
- 1995년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 김구>에서는 배우 안형식이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