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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애니메이션 ( 구작 1기 · 구작 2기 | 신작 1기 · 신작 2기) OST | 중세 반영 | 성경 인용 | 경제 |
1. 개요
판타지 소설 『 늑대와 향신료』에서 중세 유럽 시대상이 어떻게 반영 되었는지를 설명한 문서.작가인 하세쿠라 이스나가 12권 후기에 40~50권에 달하는 관련 서적 및 논문들을 읽어봤다고 언급한 만큼 사전 조사를 치밀하게 준비했고[1][2], 그 때문에 가상의 판타지 세계관을 다루고 있지만 중세 유럽의 문화나 경제 등이 잘 반영되어 있다. 문서 하단에 있는 재현 오류 부분과 판타지적 요소가 들어간 장면을 제외하면 실제 중세 유럽의 모습 그대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특히나 하세쿠라 이스나는 중세인들이 가진 관념, 개념등도 소설 속에 녹여냈다는 점이 대단 한데 몇가지 예시를 꼽자면
- 시간에 대해 상인, 도시민과 농노들이 각자 다르게 생각한다는 점을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슬쩍 이야기 하는 장면,[3]
- 더러운 성격을 세리에 빗대서 표현하는 장면,[4]
- 현대 시대에서는 비난 받을 행동인 노예무역(slave trade) 에 대해서 "그건 큰 돈을 벌 수 있는, 필요한 장사니까."라며 옹호하는 스탠스를 취하는 크래프트 로렌스의 모습,[5][6]
- 세이렌의 전설을 인용해 크래프트 로렌스가 에이브 볼란의 제안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표현하는 장면,[7]
이런 이유로 늑대와 향신료를 보면서 작가가 곳곳에 집어 넣은 중세 관련 소재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한 편이다. 본 문서에 수록되지 않은 중세 소재들도 있으니 직접 찾아보면 또다른 재미를 느낄수 있을 것이다.
2. 작가가 직접 참고한 자료들
작가는 16권 후기와, 블로그를 통해 자신이 읽은 자료 중 일부를 공개하기도 했다. 전부를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창의적인 글을 쓰고 싶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세쿠라 이스나. 참고한 도서 목록을 밝히며.
||그 외에 읽어보고 싶은 책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 신학대전』[9]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신의 나라, 이교도와의 대결(De Civitate Dei contra Paganos)』[10]을 꼽았다.
참고로 위에 언급된 자료 중 한국에 정발된 책은 성경, 황금가지이며, 나머지 책들도 출간된 지 오래된 책들이라 원서 구매도 힘들다. 특히 작가 본인이 읽어보고 싶다고 밝혔던 신학대전은 그 방대한 분량 탓에 일본에서조차 번역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판인데다가, 비기독교권 국가에서 본격적인 번역 시도가 이뤄진 것이 한국이 세계 최초일 정도다. 1994년, 번역 소식을 듣고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에 축전을 보낸 일도 있었을 정도. 자세한 내용은 토마스 아퀴나스 참조.
3. 모티브로 삼은 시기
작중 언급되는 사건들을 본다면 약 11세기부터 14세기의 중세 유럽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과거 국왕이 눈을 맞으며 교황에게 무릎을 꿇은 적이 있다.( 1077년)
- 국왕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한 도시들이 존재한다.( 11세기 이후)
- 20여년 전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다.(11세기~15세기)[11]
- 작중 시점에서 북방 십자군이 진행 중이다.( 12세기 말~ 15세기 초)
- 대륙 전역에 적극적인 토지 개간사업이 발달하고 있다.( 12세기 이후)
- 천재지변이나 전쟁 패배 등으로 기적을 바라며 성유물에 기대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12세기 이후)
- 상업의 발달로 도시가 활성화 되고, 영주들이 세금을 걷기 위해 설치한 관문이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다.(12세기 이후)
- 교황의 권위가 절정기를 찍고 내려오고 있다.( 13세기 이후)
- 3포제가 남쪽 선진국에서 개발되었고, 2포제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14세기)
- 여러 상회가 연합한 경제동맹체가 1개 나라에 선전포고를 한 적이 있다.(14세기)
-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개발된 환 어음이 점차 퍼지고 있다.(14세기 이후)
- 대항해시대가 열리기 직전이다.(14세기 말~ 15세기 초)
그리고 작중에서 묘사되는 생활상의 경우에는 작가가 " 14세기 독일 지역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위에 기준으로 제시된 사건들을 보면 카노사의 굴욕이나 자유도시의 탄생 등 11세기~ 12세기 중세 전성기의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작중 이런 사건들은 주로 '현재 진행중인 사건' 이라기보다는 '예전에 그런 일도 있었다'는 과거의 지식으로 다뤄지는 점을 감안할 때, 작중 배경은 상당히 명확하게 14~15세기, 중세 말-근세( 르네상스) 정도의 유럽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고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단순히 구체적인 생활상의 묘사뿐 아니라, 사회적 면모 자체가 꽤 명확하게 14말15초 정도를 모사하고 있는 것. 예를 들어 정점으로 치달았던 교황권이 명확하게 퇴조를 보이기 시작하고, 로렌스같이 각 도시와 영지를 돌아다니는 행상인들이 본격적으로 대두하여 상업조합이 영향력을 확장한 것은 교역망 자체가 사실상 붕괴했던 중세 전기나 갓 부활하기 시작한 중세 전성기가 아니라 중세 후기~말기의 특성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외 늑대와 향신료 1권의 역사 반영 분석 포스팅은 여기를 참고하고, 중세와 근대의 분기점으로 해석한 리뷰는 여기[12]를 참조. 이곳을 참조해 보는 것도 좋다. ##
4. 시대에 따른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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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호로가 "난 약속대로 그 마을의 보리밭을 참으로 훌륭하게 만들었어.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가끔 보리가 여무는 것을 나쁘게 해야하만 하는 때가 있었어. 땅에 무리를 시키려면 대가가 필요하거든."이라고 말하자 로렌스가 "최근 남쪽 선진국[13]의 새로운 농법을 서서히 도입하여 생산고를 높히고 있다고 한다."라고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2포제에서 3포제로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이영주 옮김,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알에이치코리아, 2015.
||"교회는 옛날부터 대단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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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가끔 전해 듣는 자연학자의 교회비판이라는 대목은
자연철학자들[16][17]이 교회의 사상과 충돌하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보여진다.
참고로 호로가 여행을 떠나 정착하고 다시 요이츠로 돌아가는 것이 서로마의 붕괴와 이민족들의 번영, 그리고 기독교의 번성을 나타낸다는 분석도 있다. 엔딩 스포 주의
참고로 호로가 여행을 떠나 정착하고 다시 요이츠로 돌아가는 것이 서로마의 붕괴와 이민족들의 번영, 그리고 기독교의 번성을 나타낸다는 분석도 있다. 엔딩 스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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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시점에서는 교회의 권위가 정점을 찍고 내려오고 있다는 문구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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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한 불평불만은 많았으나 뭐니 뭐니해도 가장 심한 불만이 쏠린 것은 교회의 재산이었다. 그럼에도 교회는 국왕들로부터 해마다 공납금을 거두고 있었다. 사교(司敎, 사제)[20]들도 취임할 때는 교회에 취임료를 바쳐야 했다. 교회당의 건립, 내부 장식, 걸인 구제, 전쟁, 그 밖의 무수한 일을 구실 삼아 교회는 갖가지 방법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다.[21]}}}
이영수, 「루터 종교개혁의 원동력」, 『독일학연구』, 제18권, 2002, pp.129-142,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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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시대에 따른 계급의 변화도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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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말~13세기 중반에는 봉건제 영주를 따르는 기사들이 있었고,
기사는 가문이나 혈통에 주어지는 계승 직위가 되기 시작하면서, 기사라 것이 준귀족화 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기사는
기사로 태어나는 것, 또는 군주가 하사하는 것이 된다.[23]
이어지는 독립 성주의 시대에는 사회관계가 기사와 농민으로 재편되며, 노예와 명사라는 표현이 사라진다. 기사는 토지 영주권([ruby(Seigneurie Foncier, ruby=세뇌리 퐁시에)]), 공권 영주권([ruby(Sei-gneurie Banale, ruby=세뇌리 바날)])을 행사하는 전사로 존재하며, 일종의
카스트가 이루어진다. 13세기 초에 이르면 신분 질서는 혼란되며, 부자들이 기사가 되기도 하고, 기사도가 출현하면서 귀족 혈통이 세습되고 폐쇄된다.[24]}}}『사료로 읽는 서양사 2 중세편: 게르만족의 이동에서 르네상스 전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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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자
십자군 전쟁,
백년전쟁을 거치며 국왕이 땅을 가진 이들에게 기사가 되라고 강요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는데, 목숨을 바치는 것이 두려운 귀족들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거부하며 반대 급부로 돈을 주고 사는
용병이 군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품에서 언급되듯이 상당히 높아지게 된다.
중세: 왜 ‘용병’ 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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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최근 파슬로에 인근 귀족들이 땅으로 돈을 불리는 것에 재미를 들렸다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이 또한 11세기 부터 중세 서유럽의 귀족들이 지주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J.M.로버츠, O.A.베스타 저. 노덕경 외 옮김, 『세계사(The History of the World)』, 2015년, p.530.
||- 16권에서 뮤리 용병단과 후고 용병단은 각각 데바우 상회의 전 주인과 현 주인에게 고용되어 짜고치는 싸움을 벌이는데 이때 묘사되는 전투 전황은 실제 14~15세기 용병단의 일방적인 용병의 싸움 방식과 동일 하다. 작중에서 뮤리 용병단과 후고 용병단이 전투를 벌이고 그걸 고용주들이 지켜보는 장면, 하루에 2차례 전투를 벌이는 장면, 일부러 싸우는 척하며 피해를 최소화 하는 장면 등이 바로 그것. 중세 시대에 자신의 고용주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는 뛰어난 충성심이 있던 것으로 유명한 스위스 용병이 당시에 가장 인기있던 용병이었던 것도 당시 용병들의 문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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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로렌스가 트레니 은화를 이용한 교섭을 추진하는 메디오 상회의 꿍꿍이를 추리하면서 "국왕은 귀족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그들에게는 특수한 권력이 부여되어 있다."라는 독백을 한다. 이는 중세의
봉건제도를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봉건제도 문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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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에서 가짜
성유물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스토리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며, 12권에서도 성유물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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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혼란했던 시기에서 사람들이
성인의 유물을 소지하거나, 집에 모셔다 두는 등의 행위로 안식을 찾고자 했고 그 때문에 성유물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 사회 전체를 뒤덮었었다. 당시 성유물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였나면 지체 높은 관리들 사이에서 성유물을 수집하는 관행이 성행했으며,
종교 개혁을 추진했던
마르틴 루터를 바르트부르크성에 보호해 주어서 끝내 개혁을 완성시키는 데 일조한
작센의 선제 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조차 5,005점의 성유물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출처14] 그러나 당연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는 달리 진짜 성인의 유물은 매우 한정적이기에, 가짜 성유물들의 제작 및 판매가 이루어지게 된다. 9권과 10권에 언급되는 늑대의 발바닥[27]을 둘러싼 교회, 국왕, 상인 간의 다툼은 바로 이런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집트인, 그리스인, 로마인이 가장 능숙하게 포도주를 제조할 수 있게 되었다. 중세로 접어들면서 고대의 과학적 발견 중 상당수가 잊히고 말았지만 포도주 제조법만큼은 수도자들의 노력 및 종교와 포도주의 밀접한 연관성 때문에 살아남았다. 1500년대쯤에는 교회가 벌이는 사업의 일환이었던 포도원 재배가 개인이 운영하는 형태로 전환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개인 중 상당수가 귀족이었다.}}}
에이미 스튜어트 지음, 구계원 옮김, 『술 취한 식물학자: 위대한 술을 탄생시킨 식물들의 이야기』, 문학동네,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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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륜전차,
파성망치, 마창상시합 등 당시의 무기체계에 대한 언급도 잠깐 등장한다. 다만 이륜전차의 경우 중세시대에는 기병으로 대체되어 사실상 경기용으로나 사용되었다.
또한 작중에서 긴 자루 끝에 도끼가 달려있는 무기가 언급되는데 이는 13세기 무렵부터 전쟁터에 등장한 할버드로, 할버드라는 단어 자체가 손잡이도끼, 장대도끼라는 뜻의 중세 저지 독일어 helmbarde와 중세 고지 독일어의 halmbarte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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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권에서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레노스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바우 상회의 부회장인
힐데 슈나우[28]가 새로운 화폐를 만들기 위해 광산 개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광산 개발 기술이 담긴
금서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이는 중세 독일 지역의 주요 산업 중 하나가 광물을 기반으로 한 광산업이라는 사실을 묘사한 것이다.
『케임브리지 독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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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중세시대 역사서의 일종인
연대기를 저술하는 작가들의 존재가 여러번 언급된다.
크멜슨의
연금술사이자 연대기 작가인
디아나 루벤스, 레노스의 연대기 작가이자 시참사회 서기인 리골로 데드리는 주요 조연급으로 등장.
||
실제 중세에는 역사를 기록하는 연대기 작가들[29][30]이 있었으며 이들은 전설을 비롯한 당시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기록해 남겼다.
호로의
전설속 고향인
요이츠와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하기 위해
로렌스가 연대기 작가들을 찾아 다니는 것도, 연대기 작가인
디아나 루벤스가
호로의 전설과 관련된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도 이를 근거로 한 설정이다.[31]
- 호로가 파치오에 들어서기전 로렌스로부터 사람이 많은 도시라고 말하자, "내가 아는 도시는 이 정도로 크면 왕이 있었어."라는 발언을 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 시절의 폴리스와 같은 도시국가들이 있던 시절을 의미한다.
-
양치기를 두고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한다는 내용은
고대~
중세에 양치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묘사한 것이다. 중세의 양치기들은 마을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졌고,
도시에 위치한
길드의 경우에는 특정 직업출신 및 그들의 자녀 기피했는데 이중 방앗간치기,
세리,
광대와 더불어
양치기도 포함되었다.
이택광 지음, 『마녀 프레임 - 마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자음과모음,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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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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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이 가문의 문장으로
독수리를 많이 쓴다는 언급을 하는데 이는 실제 13~14세기
독일 지역의 귀족들이 가문의 문양을 만들 때 독수리를 집어넣은 것을 의미한다.
고대 로마의 상징 동물이 독수리였고, 이후
이름은 로마이지만 고대 로마와는 전혀 상관 없는신성 로마 제국이 독수리를 황실 가문의 상징으로 사용하면서 이후 귀족들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관련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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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으로 올라갈수록 목조 건축물이 대세라는 이야기는 당시
북유럽 특유의 건축문화를 말한다. 이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바로
노르웨이에 위치한 우르네스 통널 교회(Urnes stavkyrkje)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교회...악천후에도 800년을 버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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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가
독보리와 관련해 인간의 탐욕을 바라보며 "악마는 악한 짓을 해서 악마가 아니다, 악마는 나쁜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라는 발언을 한다. 이는 고대로부터 인간의 삶과 종교에서 악마라는 악한 존재가 탄생하게 된 이유를 요약한 것이다.
<악마의 탄생>이라는 책을 저술한 19세기 과학철학자 폴 카루스는 "고대인들은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각종 재해를 바라보며 악마라는 존재를 탄생시켰고, 이것이 신이라는 개념과 종교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폴 루카스 지음, 이지현 옮김, 『악마의 탄생 : 선에 대한 끝없는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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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국가별로 숫자 표기법이 다르다는 대목은 실제 중세 초까지 각지역별로 숫자를 표기하는 방법이 달랐음을 의미한다.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가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된것은 1202년 레오나르도 피보나치가 유럽에 이를 소개하면서 부터였고 이것이 일반화 된것은 수세기가 지난 후였다.
5. 언급되는 사건들
늑대와 향신료를 보면 실제 유럽사에서 벌어졌던 사건들도 약간 변형해서 등장한다. 20년도 더 전에 온 세계에 불어 닥친 대전(大戰)의 열기 속에서 용병 비스름한 일을 했었지.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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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의 고향인 요이츠와,
토트 콜의 고향인 피누가 위치한 북쪽 지역은 이교도의 영향 세가 강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십자군 침공 이전의
동프로이센 지방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리투아니아는 고대부터
발트 신화의
다신교를 섬긴 나라로, 신 중의 신인 페르쿠나스(Perkūnas)의 숭배는 리투아니아에
그리스도교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
1389년까지 지속되였다. 이런 모습에 당시
유럽에서는 리투아니아를 이교도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고,
십자군 원정 이후 갈 곳이 없어진 독일계 기사단들이 폴란드 국왕의 요청으로 발트 해 해안선을 따라 원정을 감행해 이교도들을 정벌하였다. 대표적인 기사단이 바로
튜튼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으로, 그들은
폴란드 왕국 북부 해안의 이교도들을 몰아내고
강력한 기사단 국가를 건설하여
러시아까지 쳐들어갔다.[33] 또한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이교도들에 대해 패악질을 저질러
교황으로 부터 "님들 자제 좀;;"이라는 특사를 받기까지 하는데, 작중
토트 콜의 피누 지방에 대규모 정교인들이 찾아와 협박하고 본보기로 이교인들을 살해하는 등 잔혹한 행동하는 것의 모티브가 된다.
이들의 막강한 공격과, 무지비함 때문에 끝까지 다신교를 포기하지 않았던 리투아니아도 결국 폴란드 왕국과 연합하여 기독교로 개종[34]한다. 여담으로, 튜튼 기사단은 그룬발트 전투에서 궤멸당한 후 폴란드의 신하가 되어 세속 국가로 국체를 바꾸는데, 그것이 훗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연합해 발전을 거듭하여 독일을 통일하게 되는 프로이센 공국이며, 그들을 따라 동쪽으로 이주했던 수많은 독일계 주민들은 먼 훗날 거대한 비극 을 일으키는 한 원인이 된다.[35]
-
섬나라인 윈필 왕국의 주요 수출품이
양모이며,
동전을 적극적으로 수출·입 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 12세기
잉글랜드의 주요 수출품은 양모와 농산물이었으며, 주요 수입원은 화폐제조 등에 사용되는
은이었다.[출처1] 영국 왕실은 이를 통해 막대한 무역 흑자를 기록하게 된다.
『중세 유럽의 상인들 - 무법자에서 지식인으로』
||- 또한, 윈필 왕국의 국왕이었던 스폰왕[37]이 브론델 대(大) 수도원이 관리하던 양모 무역권을 박탈해 가려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 장면도 실제 있었던 일을 모티브로 삼았다.
-
브론델 대(大)
수도원 양모사업을 벌인 것은, 중세 수도원들이 포도원 혹은 양모사업을 이용해 부를 축적했던 것을 반영한 것이다.
『영국 양치기의 편지: 대자연이 가르쳐준 것들』
||-
잉글랜드의
존 왕은 나라의
양모 수입 사업을 독점하기 위해 양모를 보유한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패악질을 저질렀다.[38] 결국 영국의
주교들은 존 왕을 제명했고 이에 분노한 존 왕이 1209년부터 1211년까지 성직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의 소득을 국가에 귀속하기에 이른다.[출처1]
그리고 참다 못한 성직자들이 귀족과 손을 잡고 만든 게 바로 마그나 카르타
카노사의 굴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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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이후 9년 후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18권 시점에서는
대항해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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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한자동맹 참가 도시들과 주요 교역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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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중 로렌스가 토르힐트 공화국 건국 설화를 말해주는데, 이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꿈을 꾸던 중 하늘에 떠있는 십자가를 본 후 승리를 거둔 밀비우스 다리 전투 일화를 작가가 각색한 것이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 중 십자가를 바라보는 콘스탄티누스 1세. 라파엘로 산치오 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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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리나 루치라는 수녀가 성전을 번역하던 중 어느 주교구의
주교가 빌려달라는 요청에 번역본을 건네주었는데 기한을 넘긴 후에도 돌려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는 중세 인문학자이자 필사 장인이었던 포조 브라촐리니(Poggio Bracchiolini)가 1417년에 발견해낸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의 필사본을 당대 유명 필사장인이자 부유한 귀족이었던 니콜로 데 니콜리(Niccolò de' Niccoli)에게 빌려주었는데 니콜로 데 니콜리가 시간을 끌며 돌려주지 않았다는 에피소드를 차용한 것이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작가의 다른 작품인 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의 주요 스토리라인으로 차용된다.
6. 중세 상업
6.1. 무역
중세 여자 행상인을 그린 삽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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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프트 로렌스를 비롯한 다양한 행상인들이 등장한다. 로렌스의 말에 따르면
과거에 혼자서 다니기도 하고,
무리를 지어 다니기도 했다고 언급하는데 이는 여행상인(travelling merchant)과
대상(carovana)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로렌스의 최종 꿈이 자신만의 가게를 가지는 것인데 이는 중세 중기부터 행상인들이 정주상인으로 변한 것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상인의 위대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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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권에 용병단에 물자를 보급하는 상인이 등장하는데 이는 중세 전쟁터에서 물자를 담당했던 주보상인(酒保商人)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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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의 유대인경제사 5: 중상주의를 꽃피운 유대인들 근대 유럽 경제사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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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중 도시 간을 오가는 행상인들로 인해 무역이 이루어 지고 있음이 잘 드러나는데, 실제 12세기의 중세 유럽은 원격지 무역의 발달로 행상인들이 도시 간의 거래를 본격적으로 활성화하기 시작했으며, 이 덕에 생산지와 소비지가 구분되는 시기이기도 했다.[출처4] 또한 로렌스가 곡물이나 병구류, 청어, 가죽등을 자신의 전담 도시들을 오가며 거래하는 모습은 곡물과 소금, 포도주 같은 지역을 대표하는 대규모의 상품들은 전담 상인들에 의해 도시 간 이동 및 거래가 이루어진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 소금이 내륙에 점차 이동되던 시기도 바로 이때로, 1권 첫 부분에서 고급 담비털[42] 과 교환한 것이 바로 소금이었다. [출처1] 소금은 당시에 매우 중요한 교역 물자였는데, 거의 1,000여 년간 경제도시로 군림했던 독일의 뤼네베르크(Luenburg)는 956년부터 소금이 도시의 주요 수입원이었는데 1276년경에는 소금무역으로 전성기를 이뤘을 정도다.[44][출처9]
- 5권과 6권에 주요 거래품목으로 나오는 모피는 중유럽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였다. 주요 거래는 북유럽과 플랑드르를 통해 이루어 졌으며[출처12] 이들 지방에서는 모피의 수요가 부족한 상황이 발생하면 난감한 경우도 발생하기도 했다. 이슬람의 성장과 스페인의 무역실패 등으로 인해 무역이 일시 정지되었던 11세기에는 고급 모피였던 담비 털을 구하지 못해 왕실에 까지 상대적으로 낮은 품질이었던 토끼털을 사용했다.[출처2]
- 6권에서 동전을 실어 나를 때 정해진 규격의 상자를 사용한다고 언급되는데, 실제로 중세에 동전뿐 아니라 거래물품을 운반할 때는 정해진 규격의 나무통을 사용했다. 규격을 정한 나무통은 운반이 쉬운 데다, 세금을 측량하기에도 알맞았기 때문이다. 독일 뵈멘 지방에서는 동물이나 소금을 실어나를 때도 나무통을 썼을 정도.[48] 1500년대에 들어서는 해마다 28,000개의 큰 소금 나무통을 실어 날랐고, 1620년에는 연중 70,000개의 나무통이 실어나갔다.
중세 유럽의 소금길 |
다나카 야스히로 지음, 『부의 지도를 바꾼 회계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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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알게 된 영주들은 세금을 거둘 명목으로 소금길(Salzstraße)을 건설해 안전을 보장해주는 대신 돈을 받았다.
독일 북부 소금길들은 12세기~16세기 독일의 북쪽과 남쪽을 잇는 주요 교통로이기도 했으며 현재는 중요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출처9]
그 지방의 권력자가 만드는 경우도 있다. 길이 나도록 풀을 깎아내는데, 돈이 많은 곳에서는 돌을 깐 위에 목판을 올려놓아 마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한다. 물론 그런 길은 공짜가 아니라 상당히 많은 통행세를 내야 하는데, 그런 길에는 도적에 대한 대응도 철저하기 때문에 시간과 안전을 고려하면 오히려 싸게 먹힐 수도 있다.}}}||
6.2.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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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증인 제도가 언급된다. 이는 실제 중세시대의 공증인(notarii) 제도가 있음을 소개함과 동시에 실제 처벌 방식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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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야스히로 지음, 『부의 지도를 바꾼 회계의 세계』, 위즈덤 하우스, 2018년
||스티븐 그린블랫 저, 이혜원 옮김, 『1417년, 근대의 탄생: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 까치, 2013년,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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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환어음을 소개하며 "100년도 더 전에 남쪽의 상업국가에서 발명되었다."라고 나오는데 실제로 중세유럽에선 12세기 무렵부터
이탈리아에 위치한
도시국가들에서 처음 탄생한 이래 활성화 된 제도다.[50][출처15]
J.M. 로버츠, O.A.베스타 공동 저, 노경덕 외 옮김, 『세계사(The History of the World)』, 까치, 2013년, p.661
||남종국 저, 『이탈리아 상인의 위대한 도전』, 엘피,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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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예로
피렌체의 상인들은 프로뱅에서 모직물을 구입하고, 물건 값을 화폐가 아닌 환어음으로 지불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피렌체 상인이 환어음을 발행하면, 프로뱅의 현지 상인이 지정하는 제3자가 수취인이 되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물건값에 해당되는 돈을 제3자가 피렌체 상인의 대리인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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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에서
페르미 아마티에게
크래프트 로렌스는 신용거래를 제안하는데 이는 중세 중기부터 신용거래가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작중에선 이제 막 퍼지기 시작한 거래방식으로 보인다.[52]
『홍익희의 유대인경제사 3: 동방무역과 금융업 중세 경제사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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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고리대금업과 관련된 부정적 인식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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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실제
중세시대의 인식이었고 제5회 라테란
공의회[53]에서 "그 사용으로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것으로 아무런 노력이나 비용 혹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얻는 이익"을
고리대(usury)로 정의해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출처15] 이유는 크게 3가지인데,
중세
가톨릭은 고리대금을 못하게 했어요. 그런데 금융이 안 돌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유대인한테 "너네 이거 해."라고 했어요. "니네는 나쁜 놈들이니까 해. 어차피 기독교인이 아니니까."(라는 것이 그 이유였어요.)}}}
* 첫째, 당시 시간과 공간은
하느님의 영역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둘째, 돈을 빌리려던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는데, 가난한 사람들의 불행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 셋째, 하느님이 허락한 돈은 인간이 정직하게 일해서 번 돈뿐이었고, 일하지 않고 벌어들이는 돈인 이자는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은 돈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대 아테네부터 살인, 강간, 폭력 등의 범죄는 가해자가 자신의 죄에 대해 신물나게 되면 더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고리대금업자의 고리대금은 그렇지 않다고 여긴 풍습이 남아있었던 것도 한 이유였다. 그래서 1권에서 "마치 고리대금업자가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득히 먼 것에"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처럼 이자를 받는 이들은 천국에 가지 못할 것 이라는 인식이 강했다.[55][56]
당연하지만
자본이 존재하는 곳에 고리대금은 생기기 마련이었고 결국 고리대금을 담당하는 업자들은 주로
유대인들이 맡았다. 중세시대에는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은
가톨릭에서 지옥으로 가도 되는
이교도로 보았기 때문이다.
* 둘째, 돈을 빌리려던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는데, 가난한 사람들의 불행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 셋째, 하느님이 허락한 돈은 인간이 정직하게 일해서 번 돈뿐이었고, 일하지 않고 벌어들이는 돈인 이자는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은 돈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대 아테네부터 살인, 강간, 폭력 등의 범죄는 가해자가 자신의 죄에 대해 신물나게 되면 더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고리대금업자의 고리대금은 그렇지 않다고 여긴 풍습이 남아있었던 것도 한 이유였다. 그래서 1권에서 "마치 고리대금업자가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득히 먼 것에"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처럼 이자를 받는 이들은 천국에 가지 못할 것 이라는 인식이 강했다.[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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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지도를 바꾼 회계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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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16권에서 "교회는 이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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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대금과
이자의 개념은 별개의 것으로 중세시대에는 이자는 허용하되 고리대금은 허용하지 않았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돈은 교환의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돈을 빌려 주고 이자(usury)를 받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파는 것이며, 이는 정의에 반한다. 포도주를 돈을 받고 팔았는데 포도주를 사용하는 것(마시는 것)에 대해서 또 돈을 받는다면, 이는 두 번 돈을 받는 것이며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을 팔고 돈을 받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돈을 빌리는 것은 돈을 사용하기 위한 것인데, 이자를 요구하는 것은 사용에 대해 또 다시 돈을 받는 것과 같다.}}}||
이 문장만 보면 중세에서 이자는 원천적으로 금지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문제는 돈을 빌려주고 위험에 대한 담보로 적절한 금액를 받는 등 '정당한 대가'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는 점이다. 이 경우
토마스 아퀴나스는 '죄가 아니다'고 봤다. 이를테면 어떤 부자가 선원에게 돈을 빌려줬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선원이 돈을 들고 야반도주하거나, 혹은 바다에서 난파할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원금 그대로 돌려 받는 것은 부자에게 손해가 된다. 그런데 이 위험을 매꿀 수 있는 정당한 대가가 X라고 가정해본다면, 부자는 X를 선원에게 요구하는 것은 죄악이 아니게 된다. 다만 부자가 나쁜 마음을 먹고 X를 넘어서는 돈을 요구한다면 그건 죄악이 된다. 다시 말해, 이자를 받는 게 죄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이자가 '정당한 액수인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번역의 문제가 나타나는데, 일반적으로 '중세에서 이자는 죄악시된다'라고 말해질 때의 '이자'는 영단어 usury다. 그런데 usury는 고리대금업을 뜻하는 영단어이면서도 다소 고풍스러운 어투에선 '이자'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꼬인다. 위의 사례로 설명하자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에서 X+알파를 요구하는 것은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usury이지만, X만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대가'만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usury가 아니다. interest다. interest의 어원인 중세 라틴어 "인테레세"도 법률용어로 현재의 "이자" 개념이 아닌 "손해의 보상"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었다. 21세기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interest나 usury나 둘 다 이자로 해석되지만, 중세인들은 '탐욕스러운 개인'이 받는 이자(usury)와 '정당한 대가'인 이자(interest)를 구분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정리하자면, 중세인들은 usury를 금했지만 interest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interest가 적법하다고 봤다는 것이며, 늑대와 향신료 16권에서 호로가 말한 "교회는 이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발언에서 이자는 usury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번역의 문제가 나타나는데, 일반적으로 '중세에서 이자는 죄악시된다'라고 말해질 때의 '이자'는 영단어 usury다. 그런데 usury는 고리대금업을 뜻하는 영단어이면서도 다소 고풍스러운 어투에선 '이자'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꼬인다. 위의 사례로 설명하자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에서 X+알파를 요구하는 것은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usury이지만, X만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대가'만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usury가 아니다. interest다. interest의 어원인 중세 라틴어 "인테레세"도 법률용어로 현재의 "이자" 개념이 아닌 "손해의 보상"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었다. 21세기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interest나 usury나 둘 다 이자로 해석되지만, 중세인들은 '탐욕스러운 개인'이 받는 이자(usury)와 '정당한 대가'인 이자(interest)를 구분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정리하자면, 중세인들은 usury를 금했지만 interest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interest가 적법하다고 봤다는 것이며, 늑대와 향신료 16권에서 호로가 말한 "교회는 이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발언에서 이자는 usury를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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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계약을 교환한 상인들끼리 돈을 갹출해서 배를 빌리는 거야. 모아진 금액으로 실을 수 있는 짐의 양이 정해지는데,(중략)" 라는 말이 나오는데 실제 중세시대 있었던 코멘다 계약(Commenda)을 말한다. 코멘다 계약이란 상품 또는 금전을 투자하는 인물, 즉 자본가(commendator)[57]와 노동을 제공하는 상인(tractator)[58]간의 계약으로 이를 통한 이익금을 서로 나누는 계약이다. 보통 자본자가 이익의 ¾을, 노동을 제공한 상인이 이익의 ¼을 가져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사업은 돈은 있지만 위험을 감수할수가 없는 자본가와, 노동을 감수할 수 있지만 자본이 떨어지는 상인간의 단점을 줄여주는 계약이었다. 이 계약이 발달해서 오늘날의
합자회사와
익명조합으로 발전한다.
『이탈리아 상인의 위대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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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다양한 증명서류의 존재가 등장한다. 토지권리증명서, 외환통지서, 신용어음 등등.
||
또한 권리증명서의 존재가 언급되는데 실제로 중세에는 이런 권리증명서가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을 차용한 설정이다. 대표적인 권리증명서가 바로 중세 최고의 금융업자중 한명이었던 푸거가 발행한 푸거서류(Fuggerbriefe).
154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실의 재정이 극도로 악화되자 푸거는 예전에
로마에서
레오 10세 교황의 빚을 받았던 방식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빌려준 돈을 받을 궁리를 한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빚을 시장에 내다팔기로 한 것이다. 만약 푸거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에게 1천 원을 꿔주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이 10년 후에 2천 원으로 갚기로 했다고 치자. 푸거는 10년 후에 100원의 돈을 받을수 있는 권리 증명서를 20장 발행해 시장에 60원씩에 파는 방식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러면 푸거는 황제에게 1천 원을 꿔 주고, 1천 200원을 되받을 수 있다. 200원의 수익이 남는 것이다. 60원을 주고 황제에게 빚 받을 권리를 산 사람은 10년 후에 100원을 받을 수 있어, 40%의 이자를 받는 셈이다. '푸거서류(Fuggerbriefe)'라고 불리는 이 증명서는 오늘날의
채권이나
서브프라임 채권의 전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증서는 1540년대부터 벨기에 시장에서 거래되기 시작했다.[61]}}}『비지니스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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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로렌스의 친구인 와이즈를 비롯해서 환전상들이 자그마한 탁자를 올려놓고 업무를 보는 장면들이 꾸준히 등장한다. 이는 11세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을 시작으로 원거리 무역상을 상대하는 사람들인 반카(banka)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이들은 작은 탁자(banko)를 두고 원거리 무역상들을 상대로 환전, 신용장 업무등을 진행했는데 이것이 현재
은행(bank)의 어원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62]
IBK기업은행 공식 블러그,
은행의 탄생과 진화
|||| 피렌체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세 도시 특유의 모습을 한 폐쇄적이고 어두운 도시였다.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의 중심지역은 높은 탑과 요새화 된 석재 건물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고, 복잡하게 꼬인 좁은 길과 골목은 앞으로 삐죽 나와있는 건물 위층과 지붕 덮힌 발코니 때문에 한층 더 어두컴컴했다. 심지어 아지르 강 위에 놓인 오래된 다리ㅡ폰토 베키오(Ponto Vecchio : 단어 자체가 이탈리아어로 '오래된, 혹은 낡은 다리'라는 뜻이다/역주)ㅡ위에는 상점들이 서로 너무나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아무리 둘러봐도 도무지 빈공간을 찾을수 없을 정도였다.}}}
『1417년, 근대의 탄생: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 139p~140p
||호로는 거짓말을 가려낼 수 있는 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세리보다도 성질이 더럽다.}}}
||
크래프트 로렌스가 성질머리를 더러운 것을 세리에 빗대어 말한 것은 중세시대의 세리(稅吏), 즉
징세청부업자의 악명 때문이다. 당시
징세청부업자는 국가에게 세금 징수 권한을 구매한 후, 민중들에게 세금을 갈취 거두는 직업이었는데 국가에게 세금징수권한을 사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들어가게 되고, 당연히 이때 들어간 금액을 만회하고 수익을 내기 위해서 백성들을 쥐어 짜내서 중세 세리들은 악명이 높았다.
6.3. 길드
중세시대 직인들의 모습
-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길드와 관련된 설정들이나 소개는 실제 중세시대 상인길드를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원래 길드는
게르만족의 사교 모임을 의미하는 단어였는데
중세시대에 접어들며 도시를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자 뜻이 바뀐 케이스. 도시 내 거주하는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자신의 경제 활동을 보호받기를 원했다. 또한 그들의
이익 창출에
효과적인 방법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공통적인 직업을 가진 인적 집단 길드(
조합)인 것이다.
특허장[A]에 따르면 누구든 도시안에서 사업하려면 길드에 소속되어 있어야 했다.[출처12]
미셸라이브의 런던 이야기-중세기때 꼭 속해야만 했던 클럽, 『길드 (Guild)』
||
상인들이 모인 상인조합(商人組合)과 수공업자들이 모인 동직조합(同職組合)이 있으며[65] 작중에서 로렌스가 몸을 담고 있는 로엔 상회는 바로 상인 길드.
중세시대 clothwoker(옷감 다루는 사람)의 장인과 도제를 그린 그림
-
작품 속에서
도제(apprentica)의 존재도 등장하는데, 이도 실제 길드의 모습을 담고 있다. 길드는 소속 도시에 작업장을 둔
장인(
master)만이 가입할 수 있었는데, 이들 장인들은 한두 명의 직인(
journeyman)과 도제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중 도제는 여러 해에 걸친 수련기간을 걸쳐, 수련과전 종료후에는 자신의 작품(
Marsterpiece)를 제출해야 했다. 이 작품이 심사를 통과하면 장인으로 인정받을수 있었고 길드에 가입할 자격이 주어졌다.[출처12]
||
-
대도시마다 존재하는 상회 지점들 등장하고 로렌스가 몸담은 로엔 상회 또한 무역도시들마다 지점들이 존재한다. 이는 실제 중세시대 대형 무역상회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당시 대형 상회들은 각 무역망에 자신들의 지점을 세우고 그곳을 통해 금융, 무역업을 담당했다.
『이탈리아 상인의 위대한 도전』
||
이런 이유로 해당 상회 소속 상인들은 동료들에게 서신을 자주 보내야 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의 시장 상황을 같은 상회 동료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최선의 상업적 판단을 내릴수 있게끔 한 것이다. 3권을 비롯해 중간중간에 로렌스가 로엔 상회나 동료 상인들로부터 편지를 받고 그 편지로 시장 상황을 전달받는 등의 모습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러한 것을 반영한 장면이다.
로렌스 앞으로 몇몇 마을에서 보내온 편지를 건네주었다. 1년 내내 여행을 다니며 사는
행상인일지라도 계절에 따라 들르는 곳은 정해져 있으므로 편지를 받게되는 기회가 의외로 많다. 어느 어느 마을을 경유해서 올 것 같으면, 내년에는 아무개 상품을 사 와라, 그러면 높은 값을 쳐 주겠다느니, 지금 이 상품의 값이 비싼데 저쪽 지방은 어떠하냐 등등 여러 가지다.}}}||
『이탈리아 상인의 위대한 도전』
||
그리고 편지 첫 문구가 <친애하는 로렌스 님께>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고 "신의 이름으로, 라는 문구로 시작되지 않는 것이 그야말로 북쪽에서 온 편지다웠다."라는 로렌스의 독백은 당시 중세 상인들 사이의 편지의 첫 문구였던 "하느님과 이윤의 이름으로"를 묘사한 것이다.
13세기 서구 문화 속으로 침투한 신앙 이미지를 한 번 살펴보자. 교회가 황제를 임명하고, 작위를 받은 기사단 역시 모두 그리스도인이다. 모든 길드는 자신만의 수호성인과 수호축제가 있고, 약국과 약사는 모두 종교적 이름과 관계가 있다}}}
『젊은 복음주의자를 말하다』
||-
2권에서 야콥이 "틀림없이 조합이 떠안게 될 네 빚은 너는 네 힘으로 갚아야만 한다. 사기를 당했거나 강도를 만났거나, 병이 들었거나 다쳐서 빚을 지게 되었다면 우리는 조합과 상관의 명예를 걸고 너를 구하겠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아."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중세 조합원 간의 규율에 대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길드는 조합원들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며, 위험에 빠진 조합원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빚을 지고 도망가거나, 조합에 대한 배신행위를 했을 경우엔 가차없이 배척했다.
『만물은 서로를 돕는다』
||||
-
길드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선 안된다는 규정이 정해져 있다고 언급되는데 이는 중세 길드 간의 규제를 언급한 것이다. 수공업자 길드는 가격과 임금을 획일화 하고, 시간 외 작업을 금지했으며, 생산 방법과 제품의 품질에 대해 세부적인 규제를 가했으며, 타 업종의 업무를 침해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
||
6.4. 화폐
중세 화폐와 관련해서 중세 유럽 화폐 체계에 대해서 : 베네치아의 사례로 보기를 참고하는 것도 좋다. 본문 내용에 늑향을 언급하고 있기도하고.-
1권에서 호로가 자신이 살던 시대에는 동화폐 대신 가죽으로 만든 화폐가 활용되었다는 발언을 하는데,
고대
북유럽에서 가죽을 통화로 사용했던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이렇듯 물품을 화폐처럼 사용하는 것을 일컬어 물품화폐(物品貨幣) 혹은 실물화폐(實物貨幣)라 부른다.
||
-
13권에서 로렌스가 슈미 동화(銅貨)를 바라보며 "작고 도톰하여 화폐의 가장자리를 깎아 구리를 모으기엔 딱 좋은 화폐이면서도 다른 화폐처럼 문양이 망가질 만큼 깎여 있지 않다."고 언급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
이는 중세시대에 대표적인 화폐훼손 행위였던 테두리 깎기(Clipping)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Clip은 종이 뭉치등을 찝는데 쓰는
클립이 아니라
손톱깎이(nail clipper)의 그 클립이다.
테두리 깎기란, 발행되는
금화나
은화의 테두리를 살살 깎아 내어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을 모으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모은 부스러기들을 통해 또 다른 화폐를 생산할 수 있었다. 테두리 깎기 뿐 아니라 가죽가방 안에 동전들을 집어넣고 흔들어서 떨어지는 가루들을 모으는 땀내기(Sweating) 방법도 있었는데 이런 행위들로 인해 화폐의 신뢰도를 믿을 수 없게 되어 환전을 할 때 동전의 무게를 재는 방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행위들은
범법행위였지만 돈이 되기 때문에 처벌이 강화됨에도[68] 지속적으로 자행되었다.
그 후 1663년 당시 영국 조폐국장이었던 아이작 뉴턴의 지시로 화폐 주변에 홈을 파내는[69], 화폐 훼손을 방지하는 장치를 동전에 적용하게 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70][출처4] 참고로 이 홈은 20세기까지 사용되다 현재는 화폐 제조 기술의 발달등으로 인해 많은 국가들에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유로를 비롯해 엔화, 그리고 한국의 십원 주화에서도 이 홈이 빠진 것을 볼수가 있다.
테두리 깎기로 인한 동전 형태의 변화. 해당 동전은 동로마 제국의 은화였던 실리쿠아(Siliqua). |
그 후 1663년 당시 영국 조폐국장이었던 아이작 뉴턴의 지시로 화폐 주변에 홈을 파내는[69], 화폐 훼손을 방지하는 장치를 동전에 적용하게 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70][출처4] 참고로 이 홈은 20세기까지 사용되다 현재는 화폐 제조 기술의 발달등으로 인해 많은 국가들에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유로를 비롯해 엔화, 그리고 한국의 십원 주화에서도 이 홈이 빠진 것을 볼수가 있다.
-
화폐의 순도를 이용해 화폐가치를 조정하는 장면, 즉
주조차익이 1권과 15권에서 등장하는데 실제로 이런 점을 이용한 나라들이 많았다. 이유는 간단한데 중세 당시 유럽대륙엔 금과 은의 수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런 귀금속의 부족은 풍부한 은광산을 가지고 있던
아즈텍과
잉카를 정벌한 이후에 숨통이 트이며[72],
명나라의
은자가 대거 유럽으로 흘러들어오는 시기(16세기 이후)부터 해소되기에 이른다.
『스페인 은의 세계사 - 아메리카의 은은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
주조차익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기원전 6세기
아테네를 이끌던
솔론이 1달란트 = 6,000드라크마의 가치를 1달란트 = 6,300드라크마로 만든 것이 기록상 남아 있는 최초의 주조차익이다. 그 후 3세기 이후 점령지가 부족해진
로마 제국은 지출은 그대로인데 수입이 줄어들자 재원 확보를 위해
은화
데나리우스의 은 함량을 줄여 주조차익을 감행했다. 함량을 줄이게 되면 같은 무게의 은으로 만들 수 있는 동전의 수가 더 늘어나기 때문이다. 심지어
네로는 은도금(...)을 한 은화를 발행하기도 했다. 결국, 시민들은 은 함량이 높은 은화를 사용하지 않고 집에 감춰두었으며 결국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상황이 벌어지며 296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순도 100%짜리 은화를 발행하지만 이미 때가 늦어버렸다.[출처4]
그 후로도 동로마 제국의 명군이었던 알렉시오스 1세도 돈이 모자라자 "돈이 없어? 돈을 만들면 되지! 돈을 만들 금이 부족해? 구리를 섞으면 되지!"라는 막가파식(...) 주장으로 주조차익을 실현시킨 바 있다.[74] 중세로 넘어서면서 다양한 곳에서 화폐를 제조하게 되고 이후 각종 이권의 개입으로 인해 화폐의 순도가 오락가락 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신용도가 높은 화폐들이 바로 현재의 미국 달러와 같은 기축 통화의 역할을 했다.
현대에 들어서는 화폐의 순도가 아니라, 그 화폐의 신용도(=국가의 경제력)가 화폐 가치를 결정하게 된다.[75]
그 후로도 동로마 제국의 명군이었던 알렉시오스 1세도 돈이 모자라자 "돈이 없어? 돈을 만들면 되지! 돈을 만들 금이 부족해? 구리를 섞으면 되지!"라는 막가파식(...) 주장으로 주조차익을 실현시킨 바 있다.[74] 중세로 넘어서면서 다양한 곳에서 화폐를 제조하게 되고 이후 각종 이권의 개입으로 인해 화폐의 순도가 오락가락 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신용도가 높은 화폐들이 바로 현재의 미국 달러와 같은 기축 통화의 역할을 했다.
현대에 들어서는 화폐의 순도가 아니라, 그 화폐의 신용도(=국가의 경제력)가 화폐 가치를 결정하게 된다.[75]
환전상과 그의 아내. 마리누스 반 레이메르스바엘 作 15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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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화폐가 지역마다 달라 다양한 종류의 화폐가 등장[76]하고, 또한
환전의 중요성이 언급된다. 실제 중세시대에는 국왕으로 부터 특허장을 받은 도시들에서 개별적으로 화폐제조가 이루어 지는 바람에 유통되는 동전의 종류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1340년경에는
피렌체에는 피오리노 금화가 제조되었으며, 이 금화는
유럽 전역의 나라에서 모방되었다. 또한,
베네치아에서 제조된
두카트 금화는 무게와 순도가 정확해
국제통화의 역할도 담당했다.[77] 화폐 주조권을 다양한 인물들이 보유하게 되자, 결국 화폐의 사용보다는 환어음을 통한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화폐는 귀족들의 장식품으로만 사용되는 지경에 이른다.[출처4]
『이탈리아 상인의 위대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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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작중에 등장하는 가짜 주화가 무엇인지 궁금한 사람은
여기를 참고하자.
여기의 동로마 주화도 참조해보자. 이슬람 주화를 카피해서 썼다. 십자군 왕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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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전상이
저울과
주판을 이용해 환전을 하는데 이는 중세시대 환전상들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1권에서 호로가 금화끼리 부딪혀 소리를 듣고 순도를 판단하는 장면도 등장하는데 이 모습도 실제 중세 환전상들이 순도를 확인하는 방법중 하나였다.
『유대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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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여기서 사용한 주판은 아바쿠스(abacus)라 불리는 로마식 주판으로 현대의 주판과는 거리가 멀다.
카이사르가 새겨진 데나리우스 |
||
『중세 유럽의 상인들 - 무법자에서 지식인으로 -』
||- 1권에서 호로가 은화가 담긴 자루를 흔들고 그 소리를 듣고 순도를 파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Ping Test를 말한다. 아래 동영상에서 보듯이 은화의 순도에 따라서 부딛혔을때 나는 소리가 조금씩 다르다. 다만 호로처럼 자루 뭉탱이를 흔들어서 듣는 건 청력의 한계로 인해 불가능하고 호로는 귀가 무척이나 밝다는 설정이 있어 가능한 것으로 나온다.
7. 중세 생활상
- '늑대가 달린다'라든가 '독보리' 등 하인리히 야콥 저 『 빵의 역사』에 나오는 내용이 몇 가지 언급된다. 작가가 참고했는지는 확인불가. 단 4권에서 언급되는 독보리는 실제로 있는 독보리라는 식물과는 다른, 맥각병에 걸린 보리를 말한다. 작품에서 묘사하는 증세와 맥각병에 걸린 보리를 섭취한 후에 나타나는 실제 맥각 중독의 증세와 같으며 작중 이 병을 '리델리우스의 업화'라고 부르는데, 중세 시대에 맥각 중독증을 ' 성 안토니오의 불'이라고 불렀던 것을 살짝 바꾼 것이다.
중세 가정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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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내용은
링크를 참조 하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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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짚단을 엮은
침대가 등장하는데, 실제로 11세기부터 짚단 위에서 자기 시작했으며, 12세기부터 일정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짚단을 쌓아 잠을 자는 생활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페르디난트 자입트 저, 차용구 역,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 서울, 현실문화, 2013, p.148.
||-
1권에서 로렌스가 "
시간은 돈이야. 시간이 있으면 그만큼 돈을 벌 수 있다"라며 "네가 몇백 년씩 지켜봐 온 농부들도 시간에는 정확하잖아?"라는 말을 하자, 호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대꾸한다.
||
이 개념은 중세 계급별로 각자 다른 시간대를 가진 것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당시 중세 농민들의 경우 시간을 알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농민들은 시, 분, 초단위의 개념은 의미가 없었는데, 그들에게는
씨를 뿌리는 계절,
그것을 가꾸는 계절,
농작물을 수확하는 계절,
씨 뿌릴 날을 기다리는 계절만 알고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도시민들과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달랐다. 그들의 거래 물품의 가격, 환율 등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바뀌었으므로, 시간을 맞추는 것이 돈벌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용"을 얻을 수 있었다.
또 서양의 중세에는
수도원의 시간, 농민들의 시간 그리고 상인들이나 도시의 시간 등으로 분절되어 있었다. 도시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던 중세의 상인들이 가진 시간의 개념은 교회의 신성한 시간이나 농민들의 자연적인 시간과는 별도로 발전하게 되었다.}}}반면 도시민들과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달랐다. 그들의 거래 물품의 가격, 환율 등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바뀌었으므로, 시간을 맞추는 것이 돈벌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용"을 얻을 수 있었다.
||
이야기 독일사.
||
이외에 상세한 내용은
문화일보)중세의 시간과 근대의 시간,
『시간, 노동규율, 산업자본주의』 관련 포스팅을 참조해 보는 것도 좋다. 다만 작중에서는
시계가 따로 등장하지 않는데, 최초의 기계식 시계가 발명된 것은 13세기 후반이었고 교회나 도시의 공공장소에서 시계가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약 14세기 무렵이었기에[출처10][82] 작가가 따로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작중에서 숲에 대한 두려움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장면들이 묘사되는데, 12세기 이전까지 숲은 인간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늑대와 같은 야수들의 거주지이기도 했고, 한번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버리며, 거대한 숲은 사람들이 경외감을 가지게 만드는 등 인간의 공포심을 유발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
이런 숲에 대한 공포는 12세기 들어서 교역을 위해[83] 대규모 개간 사업과 도시 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숲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마을을 건설하고 도로를 연결하면서 차츰 옅어졌다.
-
작중에서 도시 개간 사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다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는 10세기 이후 활발해진 토지 개간사업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작가가 상당부분 차용한 중세 독일에서 일어났던
동방식민운동이 있다.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발달로 14세기까지 유럽 내에서 인구가 거주하지 않던 공지(空地)가 사라지며 국경선의 확립에 일조했고 이렇게 성장한 농업 경제를 바탕으로 상품 화폐 경제가 부활하면서 장원제는 쇠퇴하는 반면 왕권은 확고해졌다.
『홍익희의 유대인경제사 3: 동방무역과 금융업 중세 경제사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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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3권
복숭아 꿀절임에서 개간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진 도시 루와이 마을에 찾아가게 되는데 루와이 마을의 물레방아 건설작업 현장에 양치기, 농부, 광대, 직인,
수도자 등이 몰렸다고 언급된다. 이는 실제로 12세기~13세기에 이루어진 독일의 개간 사업에서 거주 중인 농부나 양치기 등을 동원한 것을 반영한 것이다.
-
13권 복숭아 꿀절임에서도 날쌘 마차를 타고 달려나가자 진동이 심해졌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실제로 당시의
도로 사정은 무척이나 열악했다. 영주가 세금을 걷기 위해 건설한 도로는 안전이 보장되고 도로도 평탄했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 길은 자갈과 돌이 가득하고 곳곳에 돌부리가 박혀 있었고 비가 오면 엉망이 되면서 진흙탕 길이 되어버리게 십상이었다. [출처6] 현재도 이런 길을 볼 수 있는데, 바로
러시아의
라스푸티차.[85]
중세시대 도로 사정이 이처럼 열악했던 것은, 고대 로마 시대보다 마차의 물량이 더 많았기 때문에 도로의 윗부분이 깨지고 갈라지는 현상이 발생했지만, 도로 보존과 관련된 기술이 실전되어 이를 보수하지 못해서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울퉁불퉁한 도로들을 마차를 타고 지나갈 때 상당히 진동이 심했다고 하며, 어느 정도냐면 마차나 달구지를 오래 타면 몸에 멍이 들 정도였다. [출처7]
또한 2권에서 용병단이 도로를 점거하자 난감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중세시대에는 전쟁이 발발하거나 도적떼가 도로를 점거하면 사실상 도로가 그 기능을 상실했다. 열악한 도로 사정과 기타 변수들로 인해, 당시 행상인들은 하루평균 약 25km 정도를 갈 수 있었다고 한다.[87][88]
- "상인들이 출항하기 전 기도한다"는 로렌스의 말이 나오는데, 상인들뿐 아니라 어부들은 바다에 나가기 전 자신들의 안전을 하느님께 부탁하며 기도를 했다.[89] 중세시대에는 우스개 소리로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는 1번 기도하고, 출항하기 전에는 2번 기도하고, 결혼하기 전에 3번 기도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 바다에 대한 두려움은 배의 진수식 때도 볼 수 있었는데, 배의 안녕을 기원하며 바다의 신에게 처녀를 바치기도 했다. 현재 배의 진수식 때 여성이 샴페인을 뱃머리에다 깨트리는 것도 여기서 기원한 것.
13세기에 그려진, 물레방아를 묘사한 삽화. |
-
4권과 18권에서 곡물 가공에
방앗간을 사용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실제 11세기부터 방앗간을 이용한 곡물 가공 방식이 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다. [출처3] 또한 4권에 등장하는 에반과의 대화에서 방앗간이
세금 징수를 담당한다고 언급되는데 실제로 중세 영주들은 방앗간을 소유했고, 방앗간 소유주에게 세금 징수의 역할을 맡겼다.
페르디난트 자입트 저, 차용구 역,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 서울, 현실문화, 2013, p.241.
||- 르 로와가 금서와 관련된 거래를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서적상들 중 금서를 취급하는 이들이 있었다. 초기 근대인 17세기 초, 파리에는 금서를 전문적으로 파는 상인이 약 50여 명이 되었고 200여 년이 흐른 후에는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당연히 시에서는 이들에게 책을 팔거나 사지 않도록 시에서 조처를 했으나 근절되지 않았고 심한 경우 사형까지도 당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1792년이 되어서 모습을 감추었다. [출처9]
- 7권에서 아픈 호로에게 로렌스가 묽은 사과주를 주면서 인간은 4가지 종류의 상태가 있다며 "사람의 몸은 차고, 뜨겁고, 건조하고, 습한 상태가 있고 이는 음식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는데 이는 고대 아테네로부터 전해져 중세의 의사들이 실제로 치료의 근거로 삼았던 4체액설이다.
중세시대 양초 직인들이 양초를 만드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
-
4권에서
엘사 슈팅하임이 "초는 꺼주시기 바랍니다. 이 교회는 형편이 넉넉하지 않으니까요."라는 발언을 하는데 중세시대 밀랍으로 만든 양초는 몹시 귀했다. 이를 대신해 보통 양고기 기름에 쇠기름을 섞은[92] 기름 양초를 많이 사용했는데 이 기름 양초는 불순물 때문에 냄새가 지독했으며 빛의 질도 나빴다.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우리가 외면한 또 하나의 문화사』
||
여담으로 종이 대신
밀랍에 나뭇가지를 긁어서 쓴다는 묘사가 18권에서 딱 한 차례 등장하는데 바로
두 주인공의 외동딸의 필기 노트로 쓰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는 로렌스가 외동딸을 얼마나 아끼는지 보여주는 대목중 하나다.
-
15권과 18권에서 "교회문자를 알고 있다면 먹고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라는 발언이 등장하는데 이는 사실이다. 당시 교회문자인
라틴어를 알고 있는 자들이 드물었으며,
성경 또한 라틴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라틴어를 알고 있다면 중세 지식인 층에 포함될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라틴어뿐 아니라 모국어라도,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읽고 쓸 줄 모르는 시절이었다.
『이야기 프랑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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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권에서 로렌스와 프리드의 결투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중세시대 마상창시합을 묘사한 것이다.[94] 또한 성 안뜰에서 결투를 펼치는 장면은 독일의 툐스트(tjost)라는 결투장에서 펼치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데 독일에서는 성 앞에 있는 툐스트에서 마상창시합을 가졌다.[출처14]
- 17권에서 "지하에는 돌로 짠 수로가 지나가 온천물을 통해 난방이 이루어지게 했다."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는 독일 북부 지역 및 북유럽에서 목욕탕에서 따듯한 물을 흘러 보내는 변형된 형태의 온돌이 존재했는데 이를 반영한 것이다.[96]
- 14권에서 "이 마을의 관습상 여행객은 촌장이 혼자 대접하는 것이 예의인지,"라는 대목이 등장하는 데 이는 접대의 관습을 말한다.
- 호로의 머리를 마끈으로 묶는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마는 마(식물)가 아니라 아마다. 마(식물)는 동북아시아가 원산지이며, 아마는 이집트와 소아시아가 원산지인 식물이다.
-
3권에서 도박과 관련된 내용이 언급된다.
||
카드와 주사위는 고대부터 이어져온 역사와 전통이 있는 기초적인 도박이다. 또한 까탈은 떠는 교회가 없다는 대목은 중세시대 교회가 도박문제에 골머리를 앓았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중세 교회는
수도원들에게는 도박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했으며, 민간인들의 도박 또한 규제하려 노력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도박장, 즉
카지노[97]의 시초가 바로 중세시대
도시국가 및 도시공동체에서 도박장소를 통제함과 동시에 자체 수입을 늘리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특히 축제나 시장과 같이 사람들이 몰리는 경우에 시에서 운영하는 도박장을 만들어 운영했다.
중세 유럽에 허가받은 도박장은 13-14세기부터 벌써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독일어권에서는 14세기말 뷔르츠부르크나 프랑크푸르트에 특정시기에 도박장이 개설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도박장의 관리는 궁정 출신의 인물이나 도시의 문벌가 출신이 맡았습니다. 승인받지 않는 도박이나 도박장 설치, 즉 시장 등 백주대로에서 도박은 엄격히 금지되었고, 이를 어길 경우 벌금형이나 자유형, 태형 등을 부과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언급된 토끼몰이의 경우에는 고대로부터 중세 귀족들이 즐겨했던 몰이
사냥[98]을 말하는 것이며, 이런 몰이사냥을 위해 탄생한 견종이 바로
포인터와
래브라도 리트리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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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로렌스가 "빚을 갚지 못하면 원거리용 선박에서 노 젓는 일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라는 독백을 하면서, "어차피 죽는 몸"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쓸모 없어진다는 문장은 손발이 잘려서 더 이상 노잡이로써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해적과 싸우는 선박에 실린다는 내용은 전쟁터로 내몰렸던 고대·중세 노잡이들의 일생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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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밑에 약재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약재를 가는 데 쓰는 막자 모양을 본뜬 간판이 매달려 있다."라는 대목은 중세 가게들이
문맹자들을 위해 자신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그림 간판을 매달았던 것을 묘사한 것이다. 현재도
독일 로텐부르크 거리,
오스트리아 게트라이데 거리등 중세시대의 모습을 간직한 곳에 위치한 가게들은 그때의 간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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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식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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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주인공을 비롯한 주변인들이 음식을 먹을 때 칼로 찍어 먹거나, 아니면 손으로 집어 먹는 모습만 나올 뿐
포크의 존재가 언급되지 않으며, 15권에서 루워드 등 뮤리 용병단과의 식사에서 딱 한번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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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당시 중세의
서유럽에서는 포크가 일반화 되지 않았음과 더불어, 최상위계급에서나 장식용으로 사용했던 것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사용된 포크는 성경에도 등장하고 8세기 말 앵글로색슨족 계 사람들도 사용했다는 것이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확인된다. 그러나 중세로 넘어오며 포크는 식탁 위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교회의 인식 때문이었다. 성직자들은 하느님이 만든 인간의 손가락만이 하느님이 주신 음식을 만질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어떤 목사는 '음식들에 손가락을 대지 않는 것은 신의 섭리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또한 악마의 형상을 그릴 때 포크( 삼지창)를 함께 그렸던 것도 사람들의 거부반응을 주기엔 충분했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11세기 베네치아 총독의 후계자인 도메니코 실비오(Domenico Silvio)가 동로마 제국의 공주인 테오도라와 결혼했을 때 테오도라가 포크를 가져 왔는데, 이를 보고 페트루스 다미아니(Petrus Damiani) 주교가 강력하게 비판하며 사회적 논란이 될 정도였으니 포크에 대한 거부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대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중세 서유럽 지역에 포크가 존재하긴 했지만, 자신의 부를 상징하는 장식용에 불과했다. [출처16]
1363년에서 1380년 까지 재위한 프랑스의
샤를 5세가 남긴 재산 목록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포크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식사용이라기보다는 과시용에 가까웠다.}}}고대 이집트에서도 사용된 포크는 성경에도 등장하고 8세기 말 앵글로색슨족 계 사람들도 사용했다는 것이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확인된다. 그러나 중세로 넘어오며 포크는 식탁 위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교회의 인식 때문이었다. 성직자들은 하느님이 만든 인간의 손가락만이 하느님이 주신 음식을 만질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어떤 목사는 '음식들에 손가락을 대지 않는 것은 신의 섭리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또한 악마의 형상을 그릴 때 포크( 삼지창)를 함께 그렸던 것도 사람들의 거부반응을 주기엔 충분했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11세기 베네치아 총독의 후계자인 도메니코 실비오(Domenico Silvio)가 동로마 제국의 공주인 테오도라와 결혼했을 때 테오도라가 포크를 가져 왔는데, 이를 보고 페트루스 다미아니(Petrus Damiani) 주교가 강력하게 비판하며 사회적 논란이 될 정도였으니 포크에 대한 거부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대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중세 서유럽 지역에 포크가 존재하긴 했지만, 자신의 부를 상징하는 장식용에 불과했다. [출처16]
조경숙, 이미혜, 「동서양 취식(取食)도구 문화에 대한 고찰 ― 포크와 나이프, 스푼식문화권(食文化圈)과 저식문화권(箸食文化圈)」, 『한국조리학회지』, 제9권, 제1호, 2003, pp.101-120, p.109-110.
||
이후 1608년에
영국인 토머스 코리어트가
유럽을 돌아다닌 여행기를 편찬했는데[100] 유럽 곳곳에서
포크를 사용하면 퍼시퍼(furcifer), 즉 포크잡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게 되었다.[101] 중세 유럽 전역에서 포크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17세기 무렵으로
늑대와 향신료의 모티브가 된 시대와는 거리가 멀다.
중세시대 농민들이 먹던 빵의 모습. 보기만 해도 딱딱하다. |
작중에서 호밀빵은 밀가루와 섞어서 만든다는 대목이 언급되는데, 실제로 호밀에는 글루텐이 부족해 빵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아 밀가루를 섞어 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호밀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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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의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나서, 음식을 먹을 때 딱딱하기 그지 없는 빵그릇에 담아 먹는다고 투덜대는 호로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는 중세 당시 농민들이 사용했던 트랑쇼와르(tranchoir)[102]를 말한다. 겨울에는 딱딱해진 호밀빵을 그냥 씹거나 그것을 물에 갠 죽을 마신다는 이야기도 언급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주와 농민의 식생활의 비교 (프랑스사, 2005. 8. 1., 미래엔).
||『비주얼 박물관』 49권, 중세의 성 (주식회사 웅진미디어)
||"그밖에도 냄비 바닥에 구워서 납작한 빵 같은 것도 있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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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이
포도주나
맥주를 마시는 장면들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오히려 물을 마시는 장면보다 많은데, 이는 중세의 널널한 음주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과거에는 수질 때문에 이런 음주문화가 발달했다고 여겨졌으나 현재는 수질과 별 관련이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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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먹는 장면들이 생각보다 많이 묘사되어 "뭐지?"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이는 중세 시대상을 봐야 한다. 중세시대에는 토지 면적보다 인간의 거주지역이 적었고, 그 때문에 넓은 농경지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넓은 농경지를 개간하고 곡식을 수확하려면 인력만으로는 당연히 부족하게 되고 가축의 도움이 절실해지는데 이 때문에 중세시대에는 가축을 보유하는 것이 "필수"가 되었고 가축의 수가 많다 보니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이러한 이유로 초기 중세시대에는 하루 소비 열량의 절반을 육류에서 얻었을 정도로 육류 소비가 활발히 이루어졌다.[출처8][104] 그래서 고기를 먹는 장면들이 생각보다 많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새끼돼지 통구이 같은 요리가 싸다는 건 아니지만.
유럽에 관해서 말하자면 유럽은 전체적으로 육식을 하였다. 정육점 주인들이 1000년 넘게 유럽인들의 배에 고기를 공급하고 있었다. 중세기 수백 년간 유럽은 고기와 음료로 식탁들을 채웠으니, 이는 19세기 아르헨티나의 수준에 필적할 만하다.
오랫동안 유럽은 지중해의 해변들을 넘어가면 절반은 비어있는 공간으로 남았으므로 유럽의 농업은 목축에 광범한 가능성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사료로 읽는 서양사 2 중세편: 게르만족의 이동에서 르네상스 전야까지』
-
로렌스는
육포를 들고 다니며 먹는데, 당시 육포는 흔했고, 또한 매우 짰다. 이유는 당시
유럽에서는
겨울에 저장해 먹을 보관방법이 극도로 부족했고, 이를 위해 소금에 절인 후 수분을 극도로 제거한
소시지와
햄,
베이컨과 같은
염장고기,
육포 등을 제조해 먹었기 때문이다. 이 음식들은 당연히 무척이나 딱딱했고, 염분이 엄청나 매우 짰다. 그걸 입에 달고 다니던 호로가 대단한 셈.
유럽 사람들이 왜 비싼 향신료를 그토록 선호했는지 살펴보자. 그 무렵은 냉장시설이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빵과 소금에 절인 저장육이 주식이었고 생선을 절여 건조시킨 것 정도가 전부였다. 소금에 절인 염장식품에 신물이 난 귀족과 세도가들은 후춧가루를 친 신선한 스테이크를 선호했다. 또 짜고 맛없는 음식에 정향이나 육두구 같은 향료를 넣으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홍익희의 유대인경제사 4: 스페인 제국의 영광과 몰락 중세경제사 下』
-
6권에서 레노스에서 만든
구리 증류기가 언급되고 그곳에서 만든 술이 세계 제일이라는 말이 나온다.
중세시대 구리 증류기
||
증류기 자체는 오래된 기술로
바빌로니아의 유적지에서도 발견되고도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를 이용한 술이 대중들에게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한참 후인
중세시대 부터다. 8세기 이슬람
연금술사들에 의해 개량된 증류기는
십자군 전쟁을 거치며 13세기 유럽에 퍼지기 시작했으며 15세기 부터
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진(술) 등의 생산이 적극적으로 이루어 지며 민간에 유통되었다.
역사속의 술 이야기, 증류주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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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향신료 17권 종막에서 로렌스가 호로가 먹고 싶은 음식을 적을 때 '말젖으로 만든 술'이 나오는데, 이는
아이락이다. '동쪽 끝에 있는 초원과 황야의 나라'는 몽골 지방을 가리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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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권에서
호로가 공작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로렌스가 기겁을 하며 일국의 왕도 먹어 보기 힘든데, 라는 독백을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상류층의 만찬 때만 등장했던 공작 요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치킨로드 : 문명에 힘을 실어준 닭의 영웅 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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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료를 일컬어 "기본적으로 요리의 맛을 돋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맛없는 것을 감추기 위한 것들이다."라고 하는 로렌스의 말이 등장한다. 이는 중세 귀족들이 향신료를 썼던 이유와 비슷하다.
『원더랜드』
||『비주얼 박물관』 49권, 중세의 성 (주식회사 웅진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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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권에서 거세한 수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실제
거세한 수탉을 묘사한 이야기다. 거세한 수탉은
고대 로마 시절부터 있었으며 이런 방식이 탄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군인들에게 식량을 빠르게 조달해주기 위함이라는 주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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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병아리들은 천성적으로 싸우기를 즐깁니다.그들을 잘 길들이려면 우리는 반드시 칼을 써야 합니다. 병아리들을 거세하려는것입니다. 거세란 즉 병아리의 고환을 제거해버립니다. 이렇게 수술한 후 수병아리들은 어떻게 변했을가요? 원래 높다랗던 계관이 거세한후 점차적으로 짧아지다가 위축되여 버립니다. 거세한
닭은 키가 더욱 커졌고 살도 더 쪘습니다. 수탉을 거세하면 체내의
남성호르몬이 크게 감소되여 성격이 매우 온순하게 변하며 다시는 싸움에서 이기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활동량이 적어졌기에 좋은점도 당연히 따라옵니다. 즉 살이 찌기 시작했습니다. 이 가슴팍의 고기도 특별히 풍만해지고 두꺼워졌습니다. 거세하지 않은 수탉은 많아야 3근 반인데 거세한 닭들은 5-6근 지어는 7근 짜리도 있습니다.
길림신문 - 수탉 거세하면 무게 배로
길림신문 - 수탉 거세하면 무게 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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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로렌스가 돈을 아끼기 위해 싼 와인을 마시면서 "포도 찌꺼기가 듬뿍 들어간 술"이라 부르는데 이는 중세
프랑스에서
와인을 양조할때 발생하는 찌꺼기들을 압착해서 만든 최하등급 와인인 뱅 드 프레스(Vin de Presse)를 말한다. 또한 17권에서 언급되는 훌륭한
포도주는 침전물이 보인다는 대목은 실제 숙성된 양질의 와인일수록 침전물이 생긴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침전물은 포도 찌꺼기가 아니라 주석(酒石)이라 불리는 물질로 주석산(Tartaric acid)과 칼륨이 결합해 생긴 물질이어서 주석산염이라 부르기도 한다.
주석산과 침전물은 좋은 빈티지나 잘 만든 와인일수록 양이 많다고 한다.
-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온천도시 뇨히라에 정착한 이후 벌꿀주가 자주 등장하고 그와 대비되어 포도주를 마시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는 북유럽 지방에서 포도의 재배가 여의치 않아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운 벌꿀로 술을 만들어 먹은 것을 묘사한 것이다.
- 19권에서 건포도를 일컬어 남쪽에서 올라온 것이라는 호로의 대사가 등장한다. 작중 뇨히라는 북유럽 일대를 묘사한 도시인데 실제 노르웨이등 북유럽에서 건포도가 들어온 것이 11세기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병사들이 들고온 것이 시초였다는 것을 호로의 이 대사를 통해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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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이교도 마을인 크멜슨에서 "불타는 포도주"라 불리는 투명한
증류주가 등장한다. 이명으로는 "영혼을 뒤흔드는 술"이라 불리는 이 술은 포도주의 찌꺼기를 모아 만든
브랜디를 말한다. 브랜디 중 가장 유명한 브랜가 바로
코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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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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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귀족들이 아니면 머리를 기르는 것은 힘들다"는 로렌스의 발언은, 중세에서 머리카락 또한 계급에 따라 구별됨을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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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뒷골목 사랑』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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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결혼 후 에피소드를 다룬 18권부터는 호로가 머리를 땋은 채로 등장하는데, 이는
바이에른 지방에서 결혼을 한 후엔 머리를 땋아 말아 올렸다는 것을 차용한 설정이다.
'(전략)중세 말기인 14세기에 이르자 독일에서는 목욕문화가 더욱 점진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당시 독일의 대중 목욕탕은 다른 유럽국가와는 달리 향연의 장소가 될 정도로 고대 로마 시대의 목욕문화를 답습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결혼식이나 특별한 연회가 있을 때면 일반 가정이 아닌, 대중목욕탕을 이용하였고 그곳에 초대된 모든 사람은 맨몸을 드러낸 채 환담을 하거나 술을 마시며 여흥을 즐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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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7년, 근대의 탄생」 p.219~p.220
||- 현랑 호로가 흰 피부에, 손과 손톱이 가늘고 길며, 발목도 가늘며, 빈유의 몸매를 가진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실제 중세시대의 미의 기준이었다고 한다. ##[출처9] 당연히 여주인공이니까 꼭 저런 설정이 아니더라도 예쁘게 나오겠지만.
- 19권의 에피소드인 "늑대와 꽃향기"에서 호로에게 장미로 만든 기름을 선물했다고 나오는데, 실제로 화장품이 발달하지 않았던 중세에는 장미잎을 증기로 쪄 원액으로 만든 장미 물이 인기였다. 중세에는 흰 얼굴과 창백한 외모가 인기였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장미 화장수를 팔러 다니는 아우스루퍼(Ausrufer)[107]들은 "장미 물을 사용하면 그대들의 흰 얼굴이 더욱 창백해집니다!"라는 홍보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출처9][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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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사프란이 언급되며 옷을 염색하는데 사용한다고 한다. 이는 실제 사프란의 용도 중에 염색이 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북유럽처럼 묘사되는 로렌스가 위치한 장소로 부터 상당히 먼 곳에서 왔다는 언급은 실제 사프란이
소아시아의
실리시아에서 건너 온 것을 의미한다. 유럽에 처음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961년
스페인을 점령중이던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인들에 의해서이며 이후 유럽의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십자군 전쟁을 통해 다시금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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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권에 등장하는 보라빛 꽃은 기름을 짜 사용한다는 점등을 보았을때 라벤더로 추정된다.
7.3.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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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종교용 희곡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마르하르트가 이야기한 이 교훈을 담은 종교용 희극은 실제 중세 말~근세 초에 유행했던 도덕극(morality play)을 말한다.
1375년
잉글랜드에서 처음 탄생한 도덕극은
신과 인간이 영혼을 두고 싸우는 이야기로 대개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이런 이야기들은 주로 종교적인 교훈을 담고 있으며 작자는 대부분 성직자였다. 이런 중세의 희극들은
상징과
은유, 그리고 연극 속 위트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윌리엄 앨런 닐슨 지음, 김영범 옮김. 『열린 인문학 강의 : 전 세계 교양인이 100년간 읽어온 하버드 고전 수업』, 유유, 2012
||안영옥 지음, 『스페인 중세극』, 지만지드라마.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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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권에서 호로와 로렌스의 대사에서 "기사가 갇혀있는 공주를 안고 도망친 옛날 이야기들 처럼?"이라고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이는 중세 초기에 유행했던 기사문학을 말한다. 기사문학이란 기사의 용맹함, 사랑 등을 묘사한 문학 장르로 11세기부터 12세기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발히 만들어 졌다. 그리고 이를 두고 옛날 이야기라고 언급한 이유는 작중 모티브가 된 세계관이 13세기 무렵의 북유럽이니 기사문학이 유행한 것은 작중 시점보다 최소 100년 전에 쇠퇴한 문학이기 때문이다.
7.4. 물품
벽에 창이 있기는 해도, 큰 상회들처럼 유리가 붙어 있는 게 아니라 창틀에 기름 먹인 마포를 달아 놓은 것 뿐이다.}}}||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우리가 외면한 또하나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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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전신 판금갑이 등장하고[111] 그 값어치가 비싸다는 대목이 나온다. 전신 판금갑의 경우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만큼 귀족만이 입을수 있을 정도로 비싸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평민들이 사입기엔 가격이 적은 편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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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호로에게는 새 옷을 선물해주면서 상당히 비싸다는 언급을 하고, 반면 자신은 북쪽 추위를 이기기 위해 허름한 헌 옷을 구매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중세시대에는 새 옷은 귀족들이나 입는 물건이었다. 당시 도시민들의 경우 귀족들이 입다 버린 헌 옷을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 때문에 중세에는 왕이나 귀족이 입다 버린 헌옷을 수선해 판매하는 헌옷 장수가 있었다. 이들은 깨끗한 옷보다 찢어지거나 얼룩이 묻은 옷을 더 선호했는데, 그 이유는 수선을 통해 자신만의 디자인을 새겨넣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디자인뿐 아니라 누가 입었는지가 인기의 척도가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농민들은 도시민보다 더욱 열악해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바지는 반바지에
스타킹 같은 바지를 입었다.[출처9]
그렇기에 호로가 로렌스가 힘겹게 모아 산 옷을 날려 먹고 이후에 값비싼 옷을 입을 수 있던 것도 로렌스의 배려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토트 콜의 경우 옷을 사주지 않고 기워 입으라고 실을 사주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113]
중세 시대 서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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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호로가 책을 빌려 볼 때 로렌스가 가죽으로 덮개를 만든 책은 조심히 다뤄야 한다는 말을 한다. 실제로 14세기까지는 책은 굉장히 비싸고 귀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종이뿐 아니라
양피지도 상당히 값비싼 물건들이었다.[114] 책은
그리스도교와 적대적인 관계였던
이슬람 도시의 주요 수출품이었으며[출처1] 그 때문에 수입하기가 굉장히 힘들었기에 저런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런 책들은 성직자들이나 귀족들 정도가 되어야 보유할 수 있었다.
서양화에서는 초상화를 그릴때 주인공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그들이 가진 재산도 같이 그렸는데 책도 엄연히 재산 중 하나로서 그려지곤 했다.
『구텐베르크의 귀환 : 출판문화의 re-르네상스를 위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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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모든 사람이
의무교육을 받고 대부분이
대학 공부를 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과 달리, 당시 교육은 정말이지 극소수 1%의 특권이었고, 오늘날과 같은
학교 교육도 보편화되어 있지 못했다. 그러니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도저히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없는 무지몽매한 상태였다.
『컨스티블』,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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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와 양피지 값만 비싼 것이 아니라,
제본 과정도 무척이나 복잡하고 어려웠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개발하기 전까지는 손으로 직접 복사하는 필사본이 대부분이었고 이 때문에 제작이 제한적이며 수량 또한 대중화 되기엔 크게 적었다.
『영문학으로 본 중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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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로렌스가 호로에게 화폐 순도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던 중 "그러니까 사람들은 화폐의 변화에 지극히 민감해지지. 그야말로 저울과 안경으로는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미세한 변화도 큰 변화로 여길 만큼."이라는 말을 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
{{{#!wiki style="margin: 24px 0 0 16px; float: right; width: 35%; max-width: 600px; font-size: .9em"
『위고 추기경의 초상』. 토마소 다 모데나 作. 1352년. }}}
이때 언급되는
안경은
중세 중기에 처음 등장하는 물건으로 작중 모티브가 된 시대와 일치한다. 13세기경에 처음으로 제작된 이 안경은 14세기와 15세기를 거치며 유럽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다만 현재까지 기록상으로
안경이 발명 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된 최초의 기록은 정확히 알수가 없다.
로저 베이컨이 1268년에 "누구든지 수정이나 유리를 통해 글자나 작은 물체를 관찰하면, 그리고 그 수정이나 유리가 둥근 것을 자른 단면이고 그 볼록면이 눈 쪽으로 향하고 있을 경우, 글자는 훨씬 더 잘보이고 더 크게 보일 것이다."라는 기록을 남겨 안경의 개발자로 여겨지기도 하나,
렌즈뿐 아니라 테두리까지 포함된
안경의 존재는
1305년
2월 23일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피사의 조르다노가
미사 도중 신자들에게 언급한 것이 <피렌체의
사순절(Quaresimale Fiorentiono)>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어 의견이 분분하다. 안경이 그려진 가장 오래된 그림인 <위고
추기경의 초상>은 이로부터 50여년이 지난 1352년에 제작되었다.
실제로 안경을 착용하고 돌아 다닌 것이 확인이 된 것은 베니스의 뮤라노(Murano) 섬에서 연질 유리를 볼록 렌즈로 깎아 안경테두리에 결합해 끼고 다닌 것이었다. 출처 그러나 이 시기 물건은 품질이 좋지 않았던 데다 값비싼 물건이었기에 아무나 사용하지 못했다. 이런 안경의 주요 소비층은 성직자와 상인으로 공부 및 필사를 위해 독서용 안경을 낀 성직자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장부 기록을 위해 안경을 착용했다는 상인들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이 가능하다. 소수의 인원들이 착용했던 안경은 15세기 부터 렌즈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 지며 사용이 확산되었고, 15세기 후반에는 근시를 위한 안경이 발명 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뭐,
콜처럼
신인지 뭔지에게 기도하려고? 눈이 좋아지도록?"}}}실제로 안경을 착용하고 돌아 다닌 것이 확인이 된 것은 베니스의 뮤라노(Murano) 섬에서 연질 유리를 볼록 렌즈로 깎아 안경테두리에 결합해 끼고 다닌 것이었다. 출처 그러나 이 시기 물건은 품질이 좋지 않았던 데다 값비싼 물건이었기에 아무나 사용하지 못했다. 이런 안경의 주요 소비층은 성직자와 상인으로 공부 및 필사를 위해 독서용 안경을 낀 성직자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장부 기록을 위해 안경을 착용했다는 상인들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이 가능하다. 소수의 인원들이 착용했던 안경은 15세기 부터 렌즈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 지며 사용이 확산되었고, 15세기 후반에는 근시를 위한 안경이 발명 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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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콘 공식 홈페이지.
흥미 있는 안경렌즈의 역사 2편 - 중세시대
||『중세 3 : 1200~1400: 성, 상인, 시인의 시대』 中
||- 19권에서 맷돌의 존재가 등장하는데 이를 두고 "중세 유럽이 아니라 동양풍 아니냐?"고 반문 할수도 있다. 하지만 맷돌은 아시아권에서만 사용한 물건이 아니다. 곡물을 갈아서 섭취하는 문화는 동양과 서양 모두에서 존재했으며 이미 신석기 시대의 유물등을 보더라도 한국 전통적인 맷돌과 동일한 모양의 물건, 즉 Quern-stone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했음을 알수가 있다. 이후 중세를 넘어 산업시대를 맞이하기 전까지 중세 유럽에서도 널리 사용된 물건으로 자세한 내용은 영문위키나 해당 포스팅을 참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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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권에서
류트를 연주하는 무희의 존재가 언급된다. 류트는 16세기 무렵부터 악보가 제작되어 전해지고 있으나,
고대 이집트와
페르시아에서 이미 존재했던 물건이었고 위키백과에 의하면 중세 말기 및
르네상스 초기였던
15세기까지는 즉흥 연주에 사용되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
-
케르베에서 키건과
에이브 볼란 사이의 사건에 휘말린 로렌스가 로엔
상업 조합에서 온 편지를 받게 되는데 이때 편지에 새빨간 밀랍 인장이 찍혀있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는
실링 왁스를 말한다. 특히 중세에 접어들어서 가문이나 길드의
문장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던 시기였기에 자신들이 보낸
공적인 문서들에 밀랍 혹은
셸락을 이용해 자신들의 문장을 새기는 일이 무척이나 흔했다.
||
- 작중 로렌스가 지도를 보면서 "도움이 되진 않지만, 있는 게 낫다"고 말한다. 이는 중세 당시의 열악한 지도를 묘사한 것이다. 중세시대의 대표적인 지도 형태는 마파 문디(Mappa mundi)라 불리는 지도들이 대표적으로 당시 측량술의 부재, 열악한 교통망 등으로 인해 지도의 정확도가 높은 편이 아니었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24) - 중세 지도, 중세의 지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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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권 행상인과 잿빛기사 에피소드에서 부싯돌에 불을 붙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실제 불을 붙이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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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가 쓰는
빗이
거북이 등껍질로 만들어 진 빗이라고 나온다. 실제로 거북이 등껍질로 만들어 진 빗은 세계 각국에서 오래 전 부터 사용된 고급 물품으로 중세시대에도 부유한 이들이 주로 들고 다녔던 물품이었다.
바다거북의 등껍질로 주로 만들어 졌는데, 1973년부터 푸른바다거북의 포획이 금지되면서 현재는 플라스틱으로 모양만 비슷하게 만든 가품들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도 조선시대에 제작된
별갑(거북이 등껍질)으로 만들어진 빗이 전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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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중세 도시
8.1. 자유도시와 대학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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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국왕과 싸워 자유를 쟁취한
도시'들이 언급되는데, 11세기부터 시작된 상업의 발달로 도시의 경제와 인구규모가 성장하자 국가(=국왕)로부터의
자유를 쟁취해낸 도시들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
베네치아, 아말피, 바리, 피사,
제노바 같은 지중해의 무역 해상도시들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 도시들은 자기 지배(self-governing)를 실현하고 있었으므로 왕실의 지배에 벗어나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도시를 자유롭게 운영했다.[출처2][118] 이들 도시에는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중앙 정부와는 별개로 운영했으며 시를 보호하는 군대도 별개로 운영했다. 화폐의 주조권도 도시에게 부여되었기에 중세시대 각종 화폐들이 난립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민석홍 저, 『서양사개론』, 제2판, 제37쇄, 서울, 삼영사, 2016, p.21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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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작중에서 한 몇몇 도시들은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 1,000년경에
베니스 등 일부 도시들은
그리스도교와 적대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슬람 세력과도 교역을 진행하는 등의 종교와 무관한 움직임을 보였다.[출처3] 또한 12세기
베네치아의 경우 종교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 대해 관용을 베풀고 피난처를 제공했다. 이는 베네치아의 급격한 성장에 도움이 되었고 14세기에 이르러서는 16,000명이 넘는 직인들이 활동했다.[출처2]
{{{#!wiki style="margin: 24px 0 0 16px; float: right; width: 35%; max-width: 600px; font-size: .9em"
『위고 볼로냐 대학교의 수업 장면. 135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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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트 콜이 아렌트라는
대학도시에서 공부한 것으로 등장한다. 실제 중세 대학도시는 11세기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이슬람의 서적들이 대거
유럽으로 흘러 들어왔고, 상업이 자리잡으며 이것이 생활의 풍요로 이루어지며 "배움"에 대한 갈망이 생겨난 것에서 유래했다. 기존의 교육을 담당하던 성당학교(Cathedral school 또는 schola)들의 그늘에 벗어난 교육 환경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를 중심으로 한 대학도시였다.[123] 그리고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서 학생들이 돈을 모아 박사에게 강의료를 지급하는 방식이 이루어 진다는 설명이 이어지는데 이는 중세 남부 유럽의 대학들에서 이루어지던 수업 방식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박승찬, 「중세 대학의 설립과 발전 -학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보루-」, 『가톨릭철학』, 제26권, 2016, pp.5-56, p.13.
||
그리고 나이 어린 토트 콜이 어떻게
대학도시에서 공부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중세시대 대학들의 커트라인은 12세 이상이라면 계급에 상관없이 돈은 상관 있지만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중세 대학의 학생들은 대개 14~15세 때 대학에 입학하였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은 그 전에 감독학교나
수도원에서 7, 8세 때부터 3학 4과, 즉 문법, 수학, 음학, 수사학, 논리학, 윤리학, 천문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대학원에는 법학(교회법과 민법), 의학, 신학의 세 분야가 있었고, 이 대학원 졸업생들은 중세 사회에서 최고의 직업을 가지고 최고의 대우와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다.}}}||
8.2. 도시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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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등장하는 상업도시들[124]은 모두 강을 끼고 있다는 것이나, 도로망의 부실함, 시벽, 시장, 성당의 위치, 도시내에서는 촛불 사용의 규제가 있다는 언급, 그리고 자치권과 길드의 발달등도 모두 중세 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작중 세계관을 그린 지도. 뤼빈하이겐을 제외한 상업도시들은 모두 강을 끼고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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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7년 중세시기의 베네치아 |
- 1권에서 인공적으로 물을 끌어다 만든 수로의 존재가 등장하는데 중세시대의 인공수로를 묘사한 것이다. 중세에도 필요한 곳, 예를 들어 공공 시설이나 도심지역에 물이 필요하면 수로를 건설하고 그 수로들은 거대한 인공연못과 연결되어 물길을 저장해 사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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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지하에 거대한 묘지가 있고, 이를 교회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카타콤을 말한다. 현재 남아있는 카타콤으로는 로마와 파리에 남아있는 것이 유명하다. 또한 지하수로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지하 수로는
고대 로마 시절부터 존재했던 건축물들이다. 로마의 경우에는
아그리파의 지시로 건설한 아쿠아 비르고(aqua virgo)[128]라는 길이 20km, 부피 100,000m³에 달하는 지하 수로가 존재했고, 로마 멸망 후 폐허가 되었다가 1453년에 복구된 이후 현재까지 운용되고 있다.[출처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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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도시민은 여러 계급으로 구분되어 차별 대우를 받았다. 계급에 따라 사는 지역도 달랐다. 도시민이기는 하나 시민권이 없는 경우에는 성안에 살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또 계급에 따라 입는 옷, 심지어 착용하는 장신구까지 세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근대초인 1621년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시는 도시민을 다섯 계급으로 나누는 법을 만들어 일상생활을 엄격하게 규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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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지은 성 문루의 둥근 천장에는 구멍이 여럿 있다. 위에서 이 구멍으로 물을 부어 불을 끄거나 공격군의 머리 위로 돌이나 끓는 물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비주얼 박물관』 43권, 중세의 기사
||『비주얼 박물관』 49권, 중세의 성
||8.3. 도시의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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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시참사회가 등장하고[130], 17권 시점에서는
에이브 볼란이 남쪽의 대 제국에서 큰 돈을 벌며 시참사회의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시참사회는 중세 도시에 있었던 시 정부조직의 일원인 도시참사회(都市參事會)를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중세도시는
특허장을 받아 이를 근거로 운영되었는데[A] 이들 특허장에는 시 정부를 조직함에 있어서 사법권을 가진 재판소와 1명의 시장 그리고 최대 40여명 이상의 참사회원(參事會員)으로 구성하게끔 되어 있었다.[출처12]
중세도시는 자유와 더불어 영주재판권이나 교회법으로부터 해방되어 독자적인 재판권과 사법권을 갖는 특수한 법적 구역이 되고, 시참사회(concilium: curia)라는 독자적인 행정기관과 시민군 등을 갖는 자치체가 되었다. 시민들은 도시 내에서의 질서유지를 위한 벌칙을 포함한 도시법을 제정하고, 선서에 의하여 이에 복종하고 도시를 수호하는 동시에, 상호 원조할 것을 서약하였다. 시민들은 저마다 예외없이 도시의 혜택을 향유하는 동시에, 수입에 따라 평등하게 시(市)의 여러 비용을 부담하였다.
-민석홍 저, 『서양사개론』, 제2판, 제37쇄, 서울, 삼영사, 2016, p.213.
도시에서는 보통 12인으로 구성되는 위원회가 도시 안의 여러 업무에 대해 최종 결정을 하고 그들이 대표로 선출하는 시장이 최고의 책임을 진다. 또 살인 같은 중범죄는 다룰 수 없으나 사기나 절도 같은 사소한 범죄들은 도시 재판소에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18권 에피소드인 "진흙투성이 배웅하는 늑대"에서 "좁은 도시 안에서의 권력 투쟁. 심지어 말 그대로 한창 발전 중인 도시니 참사회의 자리는 황금의 옥좌나 다름없다."라는 말이 언급되고, 각종 길드간의 시정참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독자적인 행정조직과 군대를 보유한 시참사회의 권한이 강력했다는 점과 중세 독일의 일부 북부 도시들[133]에서 시참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 길드들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다. 독일 북부의 괴팅엔의 경우엔 상업길드가 돈이 궁했던 귀족들을 후원해주는 대신 시참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상업길드 소속원들이 도시사회를 통제하기도 했다.
괴팅엔의 경우 도시의 건설시기에 상업활동에 참여한 자들 중에 귀족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었고, 영주가 상인들에게 경제활동에 대한 특권을 부여했으며, 상인들이 도시공동체의 주도세력으로서 시참사회를 중심으로 상인세력의 이해관계와 도시의 자치를 지켜내기 위해 전방위로 노력한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중세말 괴팅엔 상인길드는 직물 위주의 상품으로 원거리교역을 수행하면서 도시경제의 주축을 형성했고, 소속 조합원들은 시참사회를 통해 경제정책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사회까지 통제했다.
로렌스는 눈을 힘껏 감았다가 이내 확 뜨고 뛰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다시는 호로와 만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어두운 골목을 내달리고, 수도 없이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 달려 나갔다. 큰길을 일단 가로지르고, 다른 블록의 골목으로 뛰어든 뒤 다시 서쪽으로 향했다. 아직도 떠들썩한 소리가 들린다. 저쪽도 그리 오래 소동을 피울 수는 없을 것이다. 도시의 자경단(自警團:지역 주민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조직한 민간단체)에게 걸렸다간 골치 아파질 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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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자경단을 비롯한 야간 순찰대는
중세시대에 존재했었다. 1667년경
유럽 길거리에 처음 야간전등이 설치되기 전까지 중세의 길거리는 밤만 되면 암흑의 천지가 되었는데, 특히
독일의 경우 겨울철에는 4시만 되어도 어둑어둑해지는데 이 때문에
베를린은 중세에 "어두운 도시"라는 이명을 가지기도 했다. 거기다 오블라텐(Oblaten)[134]장수나 불을 켜주는 상인 등 야간에 활동하는 상인들도 필요한 존재지만 사고의 위험이 있기 이 때문에 야간의
치안이 상당히 중요해졌고[135] 이로 인해 도시에는 야간 순찰대를 운영했다. 이들은 연장을 손에 들고 한 손에 종을 들고 다니며 자정이 되면 "12시가 되었습니다!"라고 외치며 불순자들을 감시하는 등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출처9]
또한
샹파뉴 정기시(-定期市)도 어느 정도 모티브가 된듯하다. 샹파뉴[138]에서는
북유럽과
남유럽의 상인들이 만나 여는 대규모 시장이 개설되었는데 한번 열게 되면 6개월간 북유럽, 남유럽 등의 상인들이 모여 종교와 관계없이 장사를 진행하게 되었고 이 덕에 막대한 자금이 도시로 흘러들어와 도시가 자치권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 도시를 출입할 때 통행증을 요구한다는 설정은 중세시대 도시 및 항구에서 신분증명서를 요구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잉글랜드의 헨리 5세 때 국가가 이를 공식적으로 규정한다고 선포하게 되고, 이후 현대의 여권으로 변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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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곳곳에서 도시 내 시장의 개시를 알리는 종소리의 존재가 언급된다. 이는 실제 중세 도시들에서 시간을 알리기 위해 치는 종소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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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도시에서 사람들은 닭이 홰치는 소리, 처마 밑에 둥지를 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외곽 지대
수도원의 종소리, 하루의 시작을 알리거나 시장의 개장을 알리기 위해서 시장 광장에 새로 설치된 종각에서 울리는 차임벨 소리에 눈을 떳다.
『역사 속의 도시 2』
『역사 속의 도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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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향신료 3권에서
페르미 아마티가 로렌스에게 결투를 신청함과 동시에 공증인을 세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중세시대 선술집이 재판소이자, 행정업무를 담당하던 장소였다는 점을 차용한 장면이다.
중·근세 유럽에서 선술집은 단순히 술 마시는 곳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중세 유럽의 농촌에선 선술집이 재판소로 활용됐으며 독일에서는 돈을 빌려주는 은행 역할을 했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곳도 선술집이었다. 혁명가들은 선술집에 모여 거사를 모의했고 민중의 동참을 호소했다.
9. 중세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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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 슈팅하임이 자신의 신념을 곧추 세우며 한 말에서 창조주가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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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작은 마을에 으리으리한
수도원이 건설된 걸 보니 귀족의 자제라도 들인 걸까"라는 로렌스의 독백은 중세시대 귀족 자제들이
수도원에 들어가 생활했던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시대에는 가문의 계승 원칙이 자리잡기 시작했고[139] 이에 밀려난 가문의 자제들이 수도원에 강제로 들어간 경우가 있었고, 또한 중세 초기에는 수도원이 교육 기관의 역할을 담당해 배움을 위해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출처17]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늘날에는, 강제로
수도회에 입회시키는 일은 없다.[141] 수도회와 입회 희망자의 뜻이 서로 맞아야 입회한다.
『비주얼 박물관』 43권, 중세의 기사
||"에네크를 주운 뒤로 양치기가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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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 아렌트가 자신은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빈민구제원에서 일을 거들며 살았다는 말을 한다. 이는 중세 수도원이 사회안전망을 담당했던 것을 차용한 것으로 실제 중세 빈민구제 등의
사회복지는 교회나 수도원이 담당하는 일이 많았다. 오늘날도
가톨릭
교구와
수도회에서는 어린이, 청소년, 장애인, 미혼모, 노인, 가난한 사람들, 재소자, 이주노동자 등등을 위한 다양한 사회복지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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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의 발달과 사상』, 김성미 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02년,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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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5권에서 로렌스가 교회를 찾으러 갔다가 교회 근처에서 서성이는 걸인으로부터 "이 교회에서
빵,
콩을 우리에게 나눠준다."라는 말을 듣는데, 실제 중세시대 교회는 걸인들에게 빵 등을 나눠주는 역할을 담당했다.[출처9]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노숙자나 독거노인 등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한다.
- 떠돌아 다니던 여행자들이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로렌스의 말은 당시 교통사정이 좋지 못했던 당시에는 여행자들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고, 죽은 이들을 위한 장례 미사도 집전했던 수도원을 묘사하는 내용이다.[출처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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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에서 "교회가 기부금을 받아 경제적으로 풍죽하다"는 발언이 등장하는데 이는 중세 교회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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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모든 역사: 세계사 : 1월에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종하 저, 디오네, 2021년
||『비주얼 박물관』 43권, 중세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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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에서 교회의 도시 엔베르크가 테레오의 이권을 강탈하기 위해 엔베르크의 교회가 영주를 앞세워 디엔드란
수도원을 압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중세 초반 교회가 처한 현실을 묘사한 것이다.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상) -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로버트 스테이시 & 주디스 코핀 저, 박상익 옮김, 출판사 소나무,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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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권에서 "늑대에게까지 설교를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한 옛날 옛적의 성인"이라는 대목이나, 12권의 카테리나 루치가 들개들에게 설교했다는 대목은, 새들에게 설교를 한 것으로 유명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일대기를 참고한 것이다.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치스코. 조토 디 본도네 作
여담으로 이 내용은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에 다시 한번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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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성과 관련 에피소드가 등장하며, 시성이 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성유물이 된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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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들이 지켜야할 복음삼덕(福音三德)[144]과 관련된 내용이 자주 언급된다. 한 예로 18권의 특별 에피소드에서
토트 콜이 "순종, 순결, 청빈은 신을 섬기기로 결의한 자들이 맹세하는 3가지의 덕."라고 말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며 후술할 시토 수도원 관련 에피소드에서도 언급된다.
『
천주교 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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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에서 "
수도원은 시끄러운 속세에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순명과 정결, 청빈의 규율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외진 마을에 건설한다"고 언급하는데, 이는 시토 수도원의 규율을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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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이 기부해 수도원을 세울 때는 기본적으로 귀족 자신 또는 가까운 사람의 임종이 임박한 경우가 대부분이다."라는 로렌스의 독백은 실제 중세 귀족들이 수도원을 건설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자세한 내용은
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고증 문서의 수도원 문단 참고.
때로는 돈많은 영주가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것은 조금이나마 자신의 죄를 씻으려는 것이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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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 보넬리가 "키르야바이넨[145] 용병단"의
종군사제였다는 말과 함께 종군사제가 어떤 일을 하는 지 설명하고 있다. 이는 중세 유럽의 군 편제에서 종군사제가 존재했다는 사실과 그들이 실제로 해야 했던 일을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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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치기인 노라 아렌트가 읊어주는 하느님의 가호를 빌어주는 기도문을 보며 로렌스가 " 성경책에 실려 있는 고대 언어, 현재 각국에서 쓰이고 있는 그 어떤 언어와도 전혀 다른 양치기들의 독특한 언어는 몇 번을 들어도 신비롭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때 고대 언어는 라틴어 혹은 히브리어를 의미하고, 현재 각국에서 쓰이고 있는 언어들은 당시 지역별로 나뉘어 있는 속어를 말한다.
-
식욕은
칠죄종 중 하나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칠죄종을 보면 늑향에서 언급한 바와 달리 식욕을 의미하는 말이 나오지 않는데, 탐욕을 뜻하는 Gula은 원래
라틴어로 식욕을 나타내는 단어로, 칠죄종에서는 음식뿐 아니라 재물 등에 대한 욕망도 포함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866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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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보좌사제가 언급된다. 여기서 말하는 보좌사제는 본당에 거주하며 주임신부를 보좌하는 보좌신부(補佐神父)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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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랑 호로의 지혜를 이용해 엔베르크 주교의 음모를 파혜친
엘사 슈팅하임이 주교를 압박하며 "이 모든 기적이
악마의 소행임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 시켜달라며 품에서 꺼낸
성배에
축성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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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성배는
예수가 사용한 성배가 아니라 평범한 포도주 잔,
미사에 사용되는 제구인 성작(聖爵, Chalice)을 말한다.
한국 천주교에서 전례에 이용되는 제구의 정식 명칭으로
성작이라고 하는데, 가톨릭 외부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예수가 사용한 포도주 잔과 제구에 사용되는 포도주 잔을 뭉뚱그려 성배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런 문장이 나왔다.
또한 엘사가 언급한 축성은 주교나 신부가 하느님께 바칠 목적으로 특정 물건을 봉헌하는 것을 말한다. 작중에서는 이를 통해 악마의 소행이 아니며 하느님이 보여주신 기적임을 엔베르크 주교구의 반 주교가 입증해 테레오 마을을 이단으로 몰고가는 것을 막음과 동시에 테레오 마을의 교회를 정통 교회로 인정 받게 하기 위한 엘사의 방책으로 언급된다.
또한 엘사가 언급한 축성은 주교나 신부가 하느님께 바칠 목적으로 특정 물건을 봉헌하는 것을 말한다. 작중에서는 이를 통해 악마의 소행이 아니며 하느님이 보여주신 기적임을 엔베르크 주교구의 반 주교가 입증해 테레오 마을을 이단으로 몰고가는 것을 막음과 동시에 테레오 마을의 교회를 정통 교회로 인정 받게 하기 위한 엘사의 방책으로 언급된다.
- 디오드란 수도원 한 곳에 성구(聖具)가 쌓인 창고방이 언급된다. 미사, 전례에 사용되는 제구(祭具), 제의, 예식서 등의 물품을 보관하는 제의실(sacristia)을 가리킨다.
- 교회의 달력에 따라 행해지는 의식과 축제가 언급되는데 이는 전례력과 이를 바탕으로 열리는 각종 성인들의 축일을 의미한다. 현재도 유명한 주님 성탄 대축일이 바로 이 전례력의 중요 기념일 중 하나다.
-
작중에 "신은 천국을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영원히 행복한 세계로 만들었다."는 말이 나온다.
||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하는 이 완전한 삶, 곧 성삼위와 동정 마리아와 천사들과 모든 복되신 분들과 함께 하는 생명과 사랑의 이 친교를 ‘천국’이라고 부른다. 천국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며, 가장 간절한 열망의 실현이고, 가장 행복한 결정적 상태이다.}}}
『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장
##
||『
가톨릭 용어사전』
||10. 전설과 미신
- 작중 이교 설화가 소개되며 달을 사냥하는 곰과 투페로반의 대왕바다뱀이 등장하는데 이는 각각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하티 흐로드비트니손, 그리고 페니키아인들이 퍼트려 중세 대까지 이어진 바다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차용한 것이다.
-
작중
일각고래(외뿔고래)가 무척이나 귀한 존재이며, 이들의 뿔에는 신비한 마력이 존재한다는 미신이 전 세계에 퍼져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
실제 일각고래의 뿔은 중세시대 무척이나 귀하게 여겨졌다. 현재까지도 제대로 된 연구결과가 없을 정도로 희귀한 동물인 일각고래는
북극해 일대에 살고 있는 고래로 뿔처럼 생긴 엄니는
유니콘의 뿔과 닮아, 마력을 지닌 물건으로 여겨져 중세시대에 아주 값비싸게 거래 되었다.
북극 동물 중 외형적으로 가장 독특한 동물은 바다의
유니콘으로 알려진
일각고래다. 일각고래는
북극해와
캐나다 북부, 그리고
그린란드 주변 해역에서만 서식하는 고래로 흰고래인
벨루가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다. 나이가 들면 피부가 점점 하얗게 변해간다. 일각고래의 가장 큰 특징은 뿔처럼 보이는 뾰족한 엄니로 최대 3m 정도까지 자란다. 이 엄니는 중세 유럽에서 마력을 가진 것으로 인식돼 부의 상징이었으며, 같은 무게의 금값보다 20배나 높은 30억원에 거래됐다고 한다. 일각고래의 엄니는 독을 정화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독살을 두려워하던 귀족들은 비싼 돈을 주고 사 잔으로 만들어 썼다.}}}||
||
로렌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에이브는 아득한 시선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리키며 말문을 열었다.}}}
||
여기서 "인어의 노랫소리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애쓰는 선원"이야기는 세이렌의 전설을 인용한 것으로 고대 그리스의 전설인 세이렌은 인어의 모습을 한 존재로 지나가는 선원들을 향해 노래를 부르는데, 이 노랫소리를 들은 선원들은 뭔가에 취한듯이 바다에 빠져 죽게 된다고 한다. 이 전설은 중세를 거쳐 대항해시대에까지 선원들 사이에서 믿음 처럼 존재했다. 따라서 로렌스는 저 상황에서 죽음과 싸우는 선원처럼 매우 굳은 의지를 보였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11. 그 외
앙헬 폭포의 모습
- 13권에서 얼어있던 얼음들이 폭포 아래로 떨어져 거대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그 모습이 천사처럼 보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로 거대한 폭포의 용소(폭포 아래에 생기는 연못)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천사로 착각할수 있다. 남미에 위치한 앙헬 폭포의 경우가 천사(Ángel)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17권 "행상인과 잿빛 기사"에피소드에서
단검을 옛 말로
자비라고 부른다,라는 언급이 등장한다. 이는 자비를 뜻하는 영단어 Mercy가, 단검을 뜻하는
라틴어 Misericordia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묘사한 것으로 17권 역자 후기에서도 언급된다.
||
-
호로가 어느 격언을 인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
이는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억지로 먹일 수는 없다.(You can lead a horse to water but you can’t make him drink.)라는 서양 격언을 차용한 대사다.
11.1. 중세 이외의 소재를 차용한 설정
"싸다고 샀다가 돈만 날릴 수도 있으니까. 우선은 마음을 정리하는 게 먼저야."}}}||
서기인 이 사람은 그 밑으로 특징 있는 필체로 간결하게 상황을 기록해 놓았다.}}}
||
만의 하나 호로가 아마티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해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팍팍한 생활가 장사일 뿐이다.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시인은 노래하지만, 그 거꾸로 역시 진실이니까.}}}
||
이는
19세기에 활동한
미국의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 longfellow)[150]가 이야기한 "사랑은 자기 자신이 주는 것이다. 결코 돈으론 살수 없다.(Love gives itself; it is not bought)"를 차용한 대사다.[151]
11.2. 중세시대와 차이가 있는 부분
엄연히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 작품이기 때문에 현실의 중세시대와는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다. 다만 실제 유럽이 아닌 만큼 이는 어느 정도 의도한 설정일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하단에 서술된 내용 외에 사소한 디테일 부분에선 오류가 좀 있는 편.- 1권에서 호로에게 감자에 양젖 치즈를 얹어서 주는데, 감자는 약 200여 년 후인 16세기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 이후 남미에서 유럽에 전래한 작물로 11세기~14세기 중세 유럽 당시엔 존재하지 않은 작물이다. 또한 호로가 아주 오래전 부서진 난파선에서 고추를 먹은 것으로 등장하는데 고추는 1508년 콜럼버스가 유럽에 처음 소개하는 것으로 시대가 맞지 않는다.[152]
-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 소설들이 대부분 무시하는 부분이고,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면 작품의 분위기를 망칠 수 있는 부분이긴 한데 애니메이션이나 소설에서 등장하는 거리의 풍경에서 "오물과 악취, 소음"이 등장하지 않는다.
-
중세시대 당시에는 악취 등으로 도시에 사는 이들이 상당히 고역을 치렀다. 사람들은 오물을 피하고자 굽이 높은 구두를 제작한 것이
하이힐의 유래라는
카더라가 나올 정도.[153] 이 오물과 악취는 바로
배설물이 주요 원인이었는데, 집에 화장실이 따로 없었기에
요강과 비슷한 물건에 볼일을 보고 건물 밖으로 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이런 풍습은 작품의 주요 무대가 되는 13세기에 절정을 이뤘다. 얼마나 심각했냐면 1483년,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 3세(Fredrich |||)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뢰팅겐(Röttingen)[154]을 방문했을 때,
말을 타고 도시의 거리를 지나다가 말이 오물에 빠지며 곤욕을 치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귀족이 이런 봉변을 당할 정도였으니 도시의 길거리 사정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도시의 푸줏간 인근은 더 심해서, 이런 악취에 더해 고기를 잡을 때 나오는 피 냄새와 오물들 냄새까지 더해졌다.[155] 좁은 거리에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있던 터라, 그곳에서 배출되는 오물의 양도 상당했으며, 여기서 배출된 오염된 공기 때문에 코를 막고 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결국, 중세 말미에는 "각 집에서 나온 오물은 각자가 적절한 장소에서 처리하라"는 법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는데, 당시 도시를 그린 그림들의 분위기가 대부분 어두운 것도 오물과 악취가 가득한 도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귀족들이 지나간 자리에 내 버려진 짚더미와 각 마차에서 버려진 쓰레기들도 길거리를 더럽히는 오물 중 하나였는데, 높으신 분이 지나갈 때 마차의 덜컥거리는 소리를 줄이기 위해 지나가는 길바닥에 지푸라기 등을 깔았다고 한다. 문제는 이걸 지나가면서 치우질 않았다는 것.[출처9] 이런 열악한 위생 문제는 근세의 17~18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근대적 위생학의 태동과 함께 본격적으로 개선되었다.
- 소음도 상당히 심해서 앞서 언급한 대로 마차가 지나갈 때 나는 소음과 행상인 등이 내지르는 소리 등이 어우러졌다고 한다. 다만 당시 중세 사람들은 이 소음 사이에서도 자신이 필요한 물건을 외치는 행상인의 목소리는 귀신같이 알아챘다고.[출처9]
- 또 한 가지 간과되는 것이 중세 사람들의 이름 문화이다. 작중 잉글랜드를 모티브로 한 윈필 왕국 출신 인물들이 가끔 이름 뒤에 성이 붙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중세 잉글랜드 및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게르만 문화의 영향으로 성씨를 쓰지 않았다. 보통 농노들은 예속된 영지 안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동명이인이 존재하더라도 별명을 붙여부르는 식으로 구분했고 이동이 자유로운 자유민 같은 경우 출신지를 붙이는 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158] 귀족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머리왕 샤를, 비만왕 샤를, 단순왕 샤를 등으로 불렀다. 중세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다스리는 지역의 누구' 하는게 성씨로 자리잡혀서 쓰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양산형 판타지에서 주구장창 나오는 폰, 드, 데, 오브 등의 전치사 + 지역명이다. 예를 들어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비스마르크 출신의 오토라는 뜻.[159]
- 하지만 작중 많은 지역의 모티브가 된 공화국들의 경우 로마인들이 모여 만들어진 곳이 많아 신분귀천을 가리지 않고 성씨가 쓰였다.
- 3권과 5권에서 여관의 계산대가 등장하는데, 실제로는 19세기나 되어서야 건물 안에 현재의 바(Bar)라고 불리는 형태의 카운터가 생겨났다.
-
시대적으로 보았을 때 이미 화약 무기가 등장했으나, 작중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160]
화약의 경우 13세기 초에 이미 개발이 되었던 상태였고
백년전쟁 당시엔 이미 프랑스 군대는 화포를 운용하고 있었다. 화포의 등장으로 인해 성벽이 낮고 두꺼워지기 시작했고 작중 등장하는 레노스처럼 성벽의 존재가 사라진 도시들도 등장하기 시작한 때도 중세 후기였다.
김창성 지음, 『사료로 읽는 서양사 2 중세편: 게르만족의 이동에서 르네상스 전야까지』, 책과함께, 2014.
||
다만
임용한이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직접 밝힌 바로는 이렇게 알려진 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며 화약의 발달은 성벽의 강화로 이어졌다고 언급했다. 자세한 내용은
성형 요새 문서 참조.
우리가 역사시간에 제일 잘못 배우는 게 그건데. 우리가 역사시간에 이렇게 배우잖아요. 화약이 나오니까 성이 쓸모 없게 되어서,
기사들이 몰락했다. 이렇게 배우는데 그건 정말 잘못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기술은 액션 리액션이거든요. 하나가 발달하면, 리액션이 나오거든요. 사실은 대포가 나오면서, 그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졌잖아요. (화약의 발명으로) 성이 없어진 게 아니라 건축술이 획기적으로 발달해요. 대포에 견딜수 있는 축성술. 이게 아마 20세기 콘크리트가 개발하기 전까지는 최고의 건축술일 거에요.}}}||
- 작중에서 사막의 나라와 사이가 나쁘지 않은 것으로 묘사된다. 중세시대 향신료 값이나, 책값이 비쌌던 것은 이슬람 세력이 교역로를 막고 있었기 때문인데 사막의 나라쪽과 사이가 나쁘지 않다면 향신료나 책값이 비쌀 이유가 없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
엘사 슈팅하임의 경우
수도원의
수녀로 나오나,
고해성사를 들어주거나
수도복이 아닌
수단을 입고 있는 작중 삽화 등을 보면 영락없는
사제이다. 또한
노라 아렌트가 유행병으로
수도자가 모두 죽은 도시에서 임시로 부사제(
부제)가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2가지 장면은 명백하게 실제와 다른 부분.
성공회 등 일부 교회의 경우에는 여성이
성직자(주교>신부>부제)가 될 수 있으나,
가톨릭에서는 교회법에 따라 여성이 성직자가 될 수 없다.
《가톨릭교회법》 제1024조
||-
이단심문관에 대한 대사가 등장하는데, 실제 이단심문관이 악랄한 행위를 하게 된 것은
근세부터이다. 자세한 내용은
늑대와 양피지/실제 중세시대와의 비교 문서 참고.
||
- 2권에서 빚을 갚지 못하면 자신의 이를 뽑아서 의치로 사용될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고대 로마 이전 시기까지 이빨과 금으로 만든 실을 이용해 의치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중세시대에는 이빨을 치료하는 기술이 부족해 의치를 만드는 기술도 실전 되었다. 유럽 대륙 의치가 도입되는 것은 십자군 전쟁 이후 아랍세계의 의료기술이 유럽으로 흘러들어온 르네상스 부터다.
12. 관련 문서
[1]
늑대와 향신료 18권 작가 후기에 따르면 원래 '
막달라에서 잠들라'를 쓰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던 중 '막달라에서 잠들라'보다는 늑대와 향신료 시리즈에 어울릴 거 같다고 생각해, 연재 종료된 지 4년 만에 늑대와 향신료 18권과
늑대와 양피지 시리즈를 발매했다고 하니, 역사를 얼마나 깐깐하게 검증했는지 알 수가 있다.
[2]
작가 본인이 "
라노벨을 쓸 때는 참신한 소재와 그에 맞는 사전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전격소설대상 온라인 인터뷰에서 라노벨 지망생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질문에 격려나 조언을 해주는 다른 작가들과 달리 "라노벨만 보고 라노벨 쓰려고 하지마라."라는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원문은 "유행에 편승하겠다는 안이한 생각은 버립시다.
라노벨만 읽고 라노벨을 쓰려는 생각도 버립시다.(安易に流行に乗っかるのはやめましょう。 ラノベだけ読んでラノベを書くのはやめましょう。)"
[3]
늑대와 향신료 1권 中
[4]
늑대와 향신료 4권
[5]
늑대와 향신료 6권
[6]
심지어 로렌스는 2권에서 빚을 갚지 못해
노예로 팔려 나갈 뻔 했음에도 그런 생각을 이야기 한다.
[7]
늑대와 향신료 8권
[8]
なお、意図的に外している本とかあります。 教えたくない本とかありますので!皆が知らない情報が載っている本を見つけた!!、というのは作家を目指すうえで重要な要素だと思います。自分の書きたいジャンルのことを、皆が読まないような本を読んで調べれば、皆が思いつかないようなものが書けると思いますよ。
[9]
작가는 "이후
종교개혁을 소재로 한
늑대와 양피지를 준비하면서 찾아봤으나, 너무 난해하고 어려워 일부 파트만 읽어봤다"고 밝혔다.
[10]
한국에서는
신국론(神國論)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다.
[11]
단,
십자군 원정은 11세기 말~13세기 말까지 약 200년에 걸쳐 여러 차례 일어났고, 북방 십자군이나 대 오스만 십자군 등 아류 십자군까지 감안하면 15세기 이후에도 십자군 전쟁이라 불릴만한 전쟁이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20여년 전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다'는 서술만으로 '1095+20=1115. 12세기 초반이다' 라고 독해할 수는 없다. 애초에 작중 서술 자체가 '20여년 전 최초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20년 전 대규모 원정이 출격했다' 식으로 나오니 중후기 십자군 원정 기준일 가능성도 크다.
[12]
카페 가입 필요.
[13]
여담으로 실제
삼포제가 처음 개발된 곳은
카롤링거 제국으로 작중 배경이 중·
북유럽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남쪽 선진국의 모티브는 카롤링거 제국이 확실하다.
[14]
같은 땅에 여러 가지 농작물을 해마다 바꾸어 심는 일.
[15]
작중으로부터 약 수백 년 전.
[16]
현재의
과학자 정도로 보면 된다. 대표적인 인물로
티코 브라헤,
요하네스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등이 있다. 과학자와 다른 점은 자연 물리학을 관측하지만, 오로지 과학적 이론에 근거하는 현재의 과학자들과는 달리 철학적, 종교적인 개념도 활용했기 때문이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이유도 과학적 이유뿐 아니라 "
천동설에 따르면 태양과 행성들의 움직임들이 쓸데없이 복잡한데 하느님께서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었을까"라는
철학적
개념에서 시작했다.
[17]
또한 지금 관념에서는 과학자라고 취급되는 위인들도, 당시에는 스스로를 자연철학자(Natural Philosopher)라고 자칭했다.
아이작 뉴턴이 대표적. 애당초 과학(Science)과 과학자(Scientist)라는 단어는 19세기에 윌리엄 휴얼이 자연철학이라는 말이 너무 뜻이 심원하기 때문에 자신들은 지식의 탐구자(Scientist)라고 불려야 한다고 해서 제안된 단어다. 또한 이 19세기를 전후하여 철학적 색채가 많이 빠져나간 자연철학이 자연과학이라는 분야로 정착되며 지금의 과학/과학자라는 단어가 세상에 정착되게 된 것이다.
[18]
<늑대와 향신료>에서는
성지를 탈환하는 십자군은 이미 중단된 상태고, 이교를 정벌하기 위한 북방 대원정이 진행중이나 지지부진한 상황으로 묘사된다.
[19]
작중 주인공들의 이야기에서는 등장하지 않으나
노라 아렌트 외전에서 "역병이 돌아 인구의 절반이 사라진 도시"가 언급된다. 또한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흑사병이 언급된다.
[20]
일본 천주교회에서
주교를 가리키는 말.
한국 천주교,
정교회,
대한성공회에서는
주교라고 한다.
[21]
물론 오늘날
천주교에서는 주교와 사제가 취임료를 바치는 일도 없고, 헌금 명목도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오늘날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은
개신교다.
[22]
물론 일반적이지 않은 설명으로 다는 아닐지라도 18세기까지 나폴레옹처럼 친정을 한 황제나 왕이 있었고, 귀족들도 대검 귀족 가문이라면 장교로 복무했다.
[23]
국왕이 하사한다는 부분을 정확히 말하면 지위를 직접 내리는 것이 아니라 봉토를 주거나, 과거 미망인 등 봉토를 가진 여자와 결혼을 주선해주는 방식을 취했다.
해당 포스팅을 참고.
[24]
상기한 13세기 중반에 기사가 준귀족화했다는 서술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둘 다 사실이라서 그렇다. 11세기 이래로 기사가 '고귀한 신분'과 결부되는 개념은 계속 이어졌으나, 어디까지나 법적인 신분 자체는 자유민이었기 때문이다. 고귀한 신분이란 개념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그게 무엇인지 정해진 바는 12세기 말까지 없었다. 때문에 기사 계급이 세습하는 경향이 나타나면서도 동시에 군주들의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서 '저급한 신분'인 부르주아들이 기사로 서임되는 일은 끊임없이 있었고, 그런 신분 질서의 혼란이 절정에 이른 13세기 초중반부터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되는 것을 볼 수 없던 귀족들에 의해 기사를 포함한 귀족 계급이 법적으로 세습되는 것으로 고정된다.
[25]
신성 로마 제국의 경우 귀족들의 선거를 통해 왕위계승이 이루어 졌다. 이는 프랑스의 경우에도 별반 다르지 않아
카페 왕조의 시조인
위그 카페도 귀족들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출처14]
종교개혁, 성경 위에 예술을 꽃피우다.
[27]
루피마을을 지켜주던 늑대의 발바닥으로 그 늑대는
호로와 마찬가지로
정령이다.
[28]
대륙의 위치도 현재 유럽의
바이에른 지역일 뿐 아니라
힐데 슈나우도 독일식 인명이다.
[29]
대표적인 인물로 1137년에
아서 왕 전설의 초창기 버전을 포함한 연대기인 "영국 왕의 역사"를 저술한 몽마우스의 제퍼리, "프랑크 제국사"를 저술한
수도자 그레고리오, "성속(聖俗) 두 나라의 연대기"를 저술한 독일의 오토 폰 프라이징 등이 유명하다.
[30]
여담으로 유명 연대기들 중에서 영화로 유명한
베오울프나
영국판
실록인 앵글로색슨 연대기(Anglo-Saxon Chronicle)처럼 작자 미상인 연대기들도 있다.
[31]
참고로 중세시대의 연대기(Chronology)적 서술방식은 현재의 연대기적 서술방식과 달랐는데 "기독교 역사가들은 성경 중심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속세의 연대기를 창출해냈다."라는 말처럼 인간 중심이 아닌
성경 중심의 저술방식이었기 때문이다.
[32]
꽤 자주 등장한다. 한가지만 예를 들자면 밀로네 상회의 주인이 남쪽 상업국인 라온딜 공국 제33대 라온딜 대공이 공인한 대 밀로네 후작이 경영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남쪽 상업국이면서 공국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고지지도자인
도제(Doge)와 비슷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다만 도제는 귀족들의 투표로 뽑는 직책인 반면 대공은
교황이나
황제가 하사하는 직책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33]
정교회를 믿던
러시아를 개종시키기 위해서였는데, 결국
알렉산드르 넵스키가 이끄는
노브고로드 공화국 군대에 패배했다.
[34]
참고로
리투아니아에
그리스도교 문화가 스며들고, 발달하면서 생겨난 직업이 바로
딥디르비.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35]
결국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의 여러 정부에서는 독일인들을
오데르-나이세 선
서쪽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으로 추방시키게 되어, 현재 동유럽에는 극소수의 독일인만이 남아 있다.
[출처1]
『금융으로 본 세계사』
[37]
윈필왕국의 건국자인 윈필 1세의 손자라는 설정이 붙어있다.
[38]
심지어 은접시나 은젓가락도 가져갔다.
[출처1]
[출처11]
『이야기로 읽은 부의 세계사』
[출처4]
『세계사 속 경제학』
[42]
참고로
중세 귀족들에게 인기있던 모피중 하나가 담비였다. 밀로네 상회와 같은 거대 상회에 로렌스가 거래를 청하는 것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출처1]
[44]
이후 뤼네베르크의 명성은 항구도시
뤼베크(Luebeck)로 이동했다.
[출처9]
『중세의 길거리의 문화사』
[출처12]
『하룻밤에 읽는 유럽사』
[출처2]
『권력과 부』
[48]
참고로 동물을 실어 나를 때는 107파운드(약 48kg)인데 반해, 소금을 실어 나르던 상자의 무게는 144파운드(약 65kg)까지 무게가 나왔다고 하며 만약 12개의 소금 통이라면 약 780kg에 달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므로 소금장수들에는
말과 수레가 필요했고 따라서 소금장수들은 기본적으로 돈이 어느 정도 있는 이들이 할수 있는 직업이었다.
[출처9]
[50]
동양에서는 이전부터 어음과 비슷한 개념을 이미 활용 중이었다. 9세기 초
당나라에서는 상인과 세금 징수원이 비전(飛錢)이라는, 현재의 어음과 비슷한 개념의 지급 수단을 활용했다. 또한 중세 이슬람 제국에서는 환어음과 수표등의 어음이 화폐 역할을 사용했고,
고려 말에도
저화라는 어음이 활용되고 있엇다.
[출처15]
경영학,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경영학 신화에 질문을 던지다.
[52]
페르미 아마티는 어린 나이부터 시장바닥에서 활동한 유능한 상인으로 나오는데, 로렌스의 제안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
[53]
1512년~1517년에 개최. 교회 개혁 시도했으나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고 끝내
종교개혁이라는 거센 바람을 막지 못했다.
[출처15]
[55]
중세시대는 기독교 사상이 지배한 시대이기에,
천국을 가지 못한다는 건 엄청난 비난과 같다.
[56]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media)을 보면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당시 중세인들의 인식이 등장한다. 신곡에는 사후 세계로 지옥(inferno), 연옥(Purgatorio), 천국(Paradiso)을 묘사하고 있는데 7번째 지옥을 묘사하는 지옥편 17절을 보면 제일 바깥쪽에는 남과 남의 재산에 폭력을 행사한 자들이, 중간에는 자살한 자들이, 제일 안쪽에는 하느님과 자연에 폭력을 행사한 자들이 있다. 여기서 "하느님과 자연에 폭력을 행사한 자"는 신성 모독자,
동성애자, 그리고 고리대금업자들로 끊임없이 떨어지는 불덩이에 고통에 몸부림 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57]
독일어 Kapitalgeber
[58]
독일어 Unte- rnehmer
[59]
투자자가 자본의 ⅔를 제공하고
여행상인이 ⅓을 부담하는 것으로, 수익금은 투자가와 여행상인이 5:5로 분배되었다.
[60]
투자자가 100% 투자를 하는 대신, 수익금은 투자가가 ¾, 여행상인이 ¼를 가져갔다.
[61]
참고로 푸거가문은 이 때문에 폭망하게 된다. 이유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빚이 너무 큰 나머지 "아 몰라 배째!"를 선언하며 푸거 가문에게 고스란히 떠넘겼기 때문. 결국 1560년대를 끝으로 푸거가문은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진다. 다만 이는 상인 가문으로서 한정이며, 이후 빛을 어찌해서 청산은 했지만 다시는 상업 및 금융업에는 예전만 못하게 되나 그 이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과 에스파냐 왕국의 귀족 작위를 수여 받았기에 귀족 가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62]
아직은 추론이며 정확한 것은 아니다.
[A]
중세도시들은 영주로부터 도시의 법적 존립 근거인 특허장을 받아서 운영했다. 이 특허장에는 도시민의 3대 특권( ① 도시 설립 당시의 시민과 도시에서 1년 이상 거주한 사람은 누구나 자유민으로 인정 된다. ② 개별 도시민은 화폐지대 외에 봉건적 의무를 지지 않는다. ③ 도시민의 재산권은 영주의 자의적 침해를 받지 않는다.)을 비롯한 도시 규정들이 들어있는 일종의
헌법과 같은 역할을 했다.
두산 백과 - 도시특허장.
[출처12]
[65]
원래는 함께 운영되었으나 12세기 후반들어 수공업자들이 떨어져나가 독자적인 길드를 형성했다.
[출처12]
[67]
바르디 상사, 페루치 상사. 이 두 상회는 14세기 유럽에서 가장 큰 상회로 프랑스
필리프 6세의 재산이 78만 6,000 피오리노였는데, 바르디 상사는 약 87만 4,061 피오리노, 페루치 상사는 약 51만 2,150 피오리노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여담으로 1피오리노는 환율 1,200원을 기준으로 약 45~50만원 정도 되었다. 중세 물가는 현재보다 더 저렴했기 때문에 실제 체감은 현재의 100만 원을 넘었을 것이다.
[68]
당시
잉글랜드만 해도 이런 행위가 발각되면
사형을 선고 받았다.
[69]
돌기를 새기는 행위를 밀링(milling) 또는 리딩(reeding)이라고 부른다.
[70]
단 땀내기는 동전을
구리로 제작할때까지 이어졌다.
[출처4]
[72]
문명 5에서도 나오는
포토시 언덕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은광.또한 이 시기에 들어온 수많은 귀금속 때문에 귀금속의 가치가 휘청거릴 수준이었다고 한다.
[출처4]
[74]
이런 막가파식 정책을 펼쳤는데도
알렉시오스 1세가 명군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일단 이 주조차익 실현이 사리사욕 추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폭증하는 군사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이뤄진 것이었고, 이런 악화 주조 정책 자체가 알렉시오스 1세가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니라 전전대
미하일 7세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었으며, 무엇보다 알렉시오스 1세는 이런 막가파식 악화 발행으로 단기간에 제국의 국고를 다시 채워 군사력을 재건하고 의미있는 군사적 승리를 일궈내었으며, 외교적으로도 동맹세력을 확보하여 이슬람 세력에 대한 역습을 성공시키고 상실한 영토의 상당부분(특히 풍요로운
소아시아의 해안지대)를 탈환했을 뿐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상공업을 육성하여 세수를 증진시키는 데 성공한 뒤 다시 양화를 주조하여 유통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즉, 결과적으로 보자면 막가파식 주조차익 실현을 비상사태 극복을 위한 일종의 비상수단이었다고 해명할 수 있게 된 것.
[75]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전세계가
지폐를 주로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폐는 그 만든 재료 자체는 가치가 그렇게 크지 않기에 위에 나왔던 방법들을 써봐야 큰 이득은 없고 때문에 현대의 위조지폐는 진짜 지폐와 비슷하도록 정교하게 만드는 것이지 지폐의 재질을 속이거나 지폐의 면적을 줄이는 등의 방법이 아니다.
[76]
작중에서 언급되는 화폐만해도 23종류. 2권에서
로렌스가
호로에게 각종 화폐를 가르쳐주다가 도저히 못 외우겠다며 포기하는 호로의 모습도 등장한다.
[77]
늑대와 향신료의 작품 속에서도 이와 같은 역할을 하는 화폐가 등장하는데 바로 뤼미오네 금화.
[출처4]
[79]
試金石. 귀금속의 순도(純度)를 판정하는 데 쓰이는, 검은빛의 현무암이나 규질(硅質)의 암석. 조흔색(條痕色)을 표본의 것과 비교하여 금·은의 순도를 시험함.
[80]
우리나라에서도
함경도 일대와 강원·경상도 산간 지방에 여진족이나 호랑이와 같은 맹수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집의 구조가 중세 유럽처럼 사람과 가축이 한공간에서 같이 사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려 올라간다,
[출처10]
『시계와 문명』
[82]
참고로 가정용 시계가 보급된 것은 17세기 무렵이었다.
[83]
중세시대 들어서면서
고대 로마 시대의
도로는 폐허가 되었고, 국가 단위의 거래가 도시 간의 소규모로 이루어지는 등 내수에 치중하는 등 오히려 과거보다 후퇴한 모습을 보여준다. 상거래가 점점 발달하고 도시의 규모가 커지자 각 국가는 교역 루트 확보에 나서게 되는데 이 때가 12세기였다.
[출처6]
SK 에너지 블로그.
[85]
18권에서 로렌스의 마차가 진흙 길에 빠져 고생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모티브가 바로 라스푸티차다
[출처7]
『테스』
[87]
여담으로 당시 길이 좁다 보니 지나가는 상인들이 마주하는 경우가 있는데,
독일에서는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결투를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13세기 독일에서는 "짐을 적게 실은 자가 먼저 비켜주라"는 법이 제정되면서 차차 변화되기 시작했다.
[88]
이런 도로 사정이 나아진 건 존 매키덤(John Loudon McAdam)이라는 사람이 아스팔트와 자갈을 이용한 매키덤 공법으로 도로를 건설하는 데 성공하면서부터였다. 이 때가 바로 1815년.
[89]
이는 현재에도 일부 관습처럼 남아있다.
[출처3]
[출처9]
[92]
건국 초기
미국에서는 곰과 사슴의 기름을 사용한 기록도 남아있다.
[93]
오늘날도
가톨릭
사제를 양성하는
신학대학에서는
라틴어를 필수로 가르친다.
[94]
다만 작중에서 프리드는 자신의 애양(愛羊)을 타고 달려왔고 로렌스는 선채로 프리드가 달려오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에 마상창시합은 아니다. 마상창시합이 가진 기사간의 결투라는 의미를 차용한 것에 가깝다.
[출처14]
아내를 닮은 도시: 걸어본다 04 류블랴나
[96]
유럽에도
온돌과 비슷한 형태의 난방 기구가 존재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로마식
온돌인 하이포코스트(Hypocaust)가 존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세시대로 넘어오면서 사라졌으며 일부 지역에만 흡사한 형태의 난방기구가 남게 되었다.
[97]
카지노(Casino)는
이탈리아어로 집을 뜻하는 "까사(Casa)"와 작다, 귀엽다를 뜻하는 "이노(Ino)"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 진 단어로 중세 귀족들이 소유한 사교 오락용 별관을 의미한다. 이것이 이후 현대의 도박장을 뜻하는 카지노라는 단어가 되었다.
[98]
현재
영국 귀족들이 즐기는
스포츠인
여우사냥도 몰이사냥의 일종이다.
[출처16]
박영수, 유행 속에 숨어 있는 역사의 비밀.
[100]
Coryat's Crudities. 1611년.
[101]
이탈리아 있을 때만 아니라
독일에서,
영국에서도 종종, 집으로 돌아와서부터 내 포크를 사용하는데, 언제 한번 잘 아는 내 친구인 어느 정도 배운 귀족인 로렌스 위태커 경에 의해서 놀림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유머스럽게 식탁에서 나를 푸시퍼(Furcifer)라고 불렀는데, 다른 이유가 아니라 먹을 때 포크를 쓴다고 그렇게 부른 것이다.”
출처.
[102]
영어로는 Trencher.
[출처8]
[104]
다만 점점 인구의 증가와 맞물리며 경작지의 수가 줄어들었고 이 때문에 가축의 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 때문에 17세기 유럽의 경우 고기를 보는 경우가 굉장히 드물었다고 한다.
[105]
대표적으로 17권 호로와 로렌스의
임신사실을 모두에게 알린 이후 장면을 묘사한 특전 일러스트에는 남녀노소 할거없이 온천탕에 모두 들어가 웃고 떠들고 있는 모습이 등장한다.
[출처9]
[107]
길거리 장사꾼들을 말하는
독일어. 당시 길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은 물건 판매뿐 아니라, 정부에서 내려온 시행령 등을 거리에서 소리치는 등 언론의 역할도 일정부분 수행하기도 했다.
[출처9]
[109]
참고로 장미물은 현재도
화장품의 주 재료중 하나다.
[110]
전희(轉義), 또는 수사적 어구를 뜻하는 단어.
[111]
작중 묘사로는 그냥 "철갑옷"이나 삽화는 영락없는
플레이트 아머다.
[출처9]
[113]
다만 이때 로렌스는 실을 살 돈으로 콜에게 더 나은 외투를 사줄 수 있었으나, 콜이 마을을 떠날 때 가져온 추억의 물건이 수선용 실보다 싸다는 것에 마음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여 그냥 실을 사줬다
[114]
종이가 본격적으로 민간에 보급된 시기는 15세기부터였다.
[출처1]
[116]
이렇게 불을 붙이기 용이하게 만든 촉매재를 "부시깃"이라고 부른다.
[출처2]
[118]
물론 형식적으로는 이들 도시 국가의 주권은
동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
교황령이 나눠 가졌다. 다만 실효가 없었다.
[A]
[120]
"Stadtluft macht frei". 이 문구는 15권 92p에서 "모든 시민에게 자유 있으라."라는 말로 패러디되어 등장한다.
[출처3]
[출처2]
[123]
우니베르시타스가 현재
영어에서
대학(University)를 뜻하는 단어로 발전했다. 다만 이때의 대학은 교사조합, 학생조합이 중심이 된 이익집단이었다.
[124]
뤼빈하이겐은 제외.
[125]
대표적으로
다뉴브강 강가에 위치한
빈,
브라티슬라바,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다뉴브 강 지류에 위치한
뮌헨,
잘츠부르크,
자그레브,
부쿠레슈티,
라인 강가에 위치한 도시
뒤셀도르프,
쾰른,
마인츠 등이 있다.
[출처2]
[출처3]
[128]
라틴어로 "처녀의 수로."
[출처18]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130]
5권에선 리콜로 데클리라는 인물이 "50인 회의"라는 시운영회의의 서기로 등장하고, 16권에서 등장하는
장 밀리케는 스베르넬의 영주이자 시참사회 의장이다.
[A]
[출처12]
[133]
일반적으로는
도시국가들에서 상업길드가 시참사회에 이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134]
독일의 전통 과자로, 얇고 납작하게 구은 비스킷.
[135] 중세시대 밤은 위험성이 컸었다. 현재 영어로 좋은 밤을 뜻하는 Good Night라는 단어가 중세시대 안녕을 기원하는 "God give you good night(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좋은 밤을 주시기를)"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만 보더라도 중세 야간 치안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수가 있다. 출처 -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우리가 외면한 또 하나의 문화사』 [출처9] [출처3] 『도시, 역사를 바꾸다』 [138] 샴페인의 도시로 유명하다. 애초에 샴페인이라는 말이 이 도시의 영어 이름에서 따온 것. [139] 유럽에서 가문의 장자 우선 승계는 1050년 부터 자리잡기 시작했다. [출처17]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상) -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 [141] 현대 한국에서 이런 역할은 정신병원이 대신하고 있다(…) 가족끼리의 재산 다툼으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는 경우가 뉴스에서 종종 나오기도 한다. [출처9] [출처13] 『이야기 세계사』 [144] 가난(淸貧), 정결(貞潔), 순명(順命)을 말하며 가톨릭의 성직자/ 수도자는 성품성사/수도서원 때 이 3가지를 서약한다. 다만 청빈 외에 정결과 순명은, 성직자와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가톨릭 신자가 지켜야 한다. 가톨릭 신자는 부부관계 외의 혼외 성관계, 자위행위, 포르노 시청 등의 성적 음행을 해서는 안 되고, 교도권에 순명해야지 본인이 제멋대로 교리를 해석하여 믿으면 안 된다. [145] "붉은 매"를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다만 늑대와 향신료에선 주인공들과 관련 없는 부분의 설정은 거의 없다시피해 어느 지역의 언어인지, 알파벳이 어떻게 쓰는 건지 등은 알수가 없다. [146] 대부분의 군대에는 외국용병이 포함돼 있었음. [147] 눈을 부릅뜨고 서있는 인물은 오디세우스다. [148] 여우가 높은 곳에 열린 포도를 찾아내서 그것을 먹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았다. 하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자, 결국 그 자리를 떠나면서 "저 포도는 분명히 시어서 먹을 수가 없는 포도야."라고 욕설을 퍼붓고 떠난다는 이야기. [149] 백부장의 이명이 백인부장(百人夫長)이다. [150] 생몰년 1807년 2월 27일 ~ 1882년 3월 24일. 『인생찬가』, 『 에반젤린』을 선보였으며, 단테의 『 신곡』을 미국에 처음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151] 여담이지만 비틀즈가 1964년 3월 16일에 발표한 곡중에도 이와 비슷한 ‘사랑은 돈으로 살수는 없어( Can't Buy Me Love)’가 있다. [152] 작중에 등장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지만, 호로가 언급한건 수백년 전 자신이 동료들과 함께 돌아다니던 시절(최소 600년 이전)이라고 했기 때문. 근데 이건 이 세계관에선 감자가 구대륙에도 자생한다고 설정하면 끝인 문제라 뭐... [153] 다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이힐은 귀족들의 전유물로 개발 의도는 키가 커 보이게 하려고 제작된 신발이다. 귀족들이 도시의 길거리를 지나간다면 마차를 타고 가지, 내려서 걸어가는 경우는 없었기에 위와 같은 이유로 굽 높은 신발을 신을 이유가 없었다. [154] 독일 바이에른 주 뷔르츠부르크 주에 위치한 소도시. [155] 참고로 후속작인 늑대와 양피지에서 이 부분을 언급한다. [출처9] [출처9] [158] (실제 출신지는 아니지만) 리비아의 게롤트, 벤거버그의 예니퍼 같은 경우를 떠올리면 쉽다. [159] 정확히 말하면 전치사+지역명 형태의 성은 유럽 문화권에서 널리 쓰이는 것이긴 한데, 이것도 영어로 치면 'from xxx'와 'of xxx'를 구별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자신이 태어난 영지에서 평생 살던 이들(농노등의 예속민이나 자유민이라 해도 여행할 이유가 없던 이들)은 직업이나 개인적 특징에 따른 별명등으로 동명이인을 구별했다. 예컨데 어떤 영지에 '제임스'가 여러 명 있다 하더라도 제임스①은 '농사꾼 제임스', 제임스②는 '대장장이 제임스', 근데 제임스③도 농사를 짓는다면? 그러면 신체적 특징을 따서 '키다리 제임스'나 '대머리 제임스', 아니면 사는 위치에 따라 '아랫골짜기 제임스'가 되는 식이다. 직업과 거주지가 세습되는 경향이 강하던 중~근세를 거치며 이런 호칭들 역시 많은 성씨의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을 방문하거나 이주할 일이 많은 이라면 그를 구별하기에 가장 편한 기호는 '어디 사람', 즉 그의 출신지이다. '용인'에서 온 사람이라면 '용인 사람 필립' 이라고 부름으로써 다른 필립과 그를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of와 from을 구별해야 한다. '필립 from 용인'은 '용인에서 온 필립', 또는 '용인 사람 필립을 의미하는데 비해 '필립 of 용인'은 '용인의 필립', 즉 '용인을 다스리는 필립'(용인의 영주 필립)을 의미하는 호칭이며, 따라서 이것은 귀족의 성이다. 이런 성씨의 작명 원리를 잘 모르는 이들은 지역명 앞에(또는 지역명도 아니고 그냥 성 앞에) 전치사가 들어가면 무조건 귀족의 성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양판소등에서 그런 설정을 써먹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나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에는 분명 전치사가 들어가지만, 귀족 출신임을 나타내는 성이 아니다. (또 유럽의 잘나가는 왕가중에서도 특히 유서깊던 카롤루스, 카페, 류리크, 피아스트, 아르파드 왕조등을 보더라도 흔히 생각하는 전치사+지역명 형태의 성이 아니다. 이들의 경우 말 그대로 '나는 누구의 후손이오' 라고 하면 누구나 알아볼 전설적인 인물의 후손인만큼 그 선조의 이름을 자신들을 구별하는 기호로 삼은 것이다.) 또 '프랑스의 왕 루이'면 당연히 '루이 드 프랑스'(프랑스의 루이)인데 같은 이름을 가진 왕이 많다면? 당연히 1~18까지 번호를 매겨가며 구별해주는 것이다. 일부 유럽계 문화권에서 O세 라는 호칭이 자주 쓰이는 것 역시 자녀의 이름을 아버지나 할아버지등 가까운 친족의 이름에서 따서 지어주는 전통이 있을 경우 그 가계의 많은 동명이인중에서 누구인가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 (같은 가계이니 당연히 성으로는 구별이 안 된다.) 이처럼 '성씨'란 결국 그 개인을 구별하는 기호(특히 다른 동명이인과 구별하는 기호)로 사용되는 것임을 이해하면 성씨의 탄생 원리를 이해하는 것도 간단하다. [160] 여담으로 작가의 또 다른 세계관이자 중세를 모티브로 삼은 막달라에서 잠들라의 경우엔 7권에 화약의 존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135] 중세시대 밤은 위험성이 컸었다. 현재 영어로 좋은 밤을 뜻하는 Good Night라는 단어가 중세시대 안녕을 기원하는 "God give you good night(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좋은 밤을 주시기를)"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만 보더라도 중세 야간 치안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수가 있다. 출처 -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우리가 외면한 또 하나의 문화사』 [출처9] [출처3] 『도시, 역사를 바꾸다』 [138] 샴페인의 도시로 유명하다. 애초에 샴페인이라는 말이 이 도시의 영어 이름에서 따온 것. [139] 유럽에서 가문의 장자 우선 승계는 1050년 부터 자리잡기 시작했다. [출처17]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상) -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 [141] 현대 한국에서 이런 역할은 정신병원이 대신하고 있다(…) 가족끼리의 재산 다툼으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는 경우가 뉴스에서 종종 나오기도 한다. [출처9] [출처13] 『이야기 세계사』 [144] 가난(淸貧), 정결(貞潔), 순명(順命)을 말하며 가톨릭의 성직자/ 수도자는 성품성사/수도서원 때 이 3가지를 서약한다. 다만 청빈 외에 정결과 순명은, 성직자와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가톨릭 신자가 지켜야 한다. 가톨릭 신자는 부부관계 외의 혼외 성관계, 자위행위, 포르노 시청 등의 성적 음행을 해서는 안 되고, 교도권에 순명해야지 본인이 제멋대로 교리를 해석하여 믿으면 안 된다. [145] "붉은 매"를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다만 늑대와 향신료에선 주인공들과 관련 없는 부분의 설정은 거의 없다시피해 어느 지역의 언어인지, 알파벳이 어떻게 쓰는 건지 등은 알수가 없다. [146] 대부분의 군대에는 외국용병이 포함돼 있었음. [147] 눈을 부릅뜨고 서있는 인물은 오디세우스다. [148] 여우가 높은 곳에 열린 포도를 찾아내서 그것을 먹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았다. 하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자, 결국 그 자리를 떠나면서 "저 포도는 분명히 시어서 먹을 수가 없는 포도야."라고 욕설을 퍼붓고 떠난다는 이야기. [149] 백부장의 이명이 백인부장(百人夫長)이다. [150] 생몰년 1807년 2월 27일 ~ 1882년 3월 24일. 『인생찬가』, 『 에반젤린』을 선보였으며, 단테의 『 신곡』을 미국에 처음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151] 여담이지만 비틀즈가 1964년 3월 16일에 발표한 곡중에도 이와 비슷한 ‘사랑은 돈으로 살수는 없어( Can't Buy Me Love)’가 있다. [152] 작중에 등장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지만, 호로가 언급한건 수백년 전 자신이 동료들과 함께 돌아다니던 시절(최소 600년 이전)이라고 했기 때문. 근데 이건 이 세계관에선 감자가 구대륙에도 자생한다고 설정하면 끝인 문제라 뭐... [153] 다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이힐은 귀족들의 전유물로 개발 의도는 키가 커 보이게 하려고 제작된 신발이다. 귀족들이 도시의 길거리를 지나간다면 마차를 타고 가지, 내려서 걸어가는 경우는 없었기에 위와 같은 이유로 굽 높은 신발을 신을 이유가 없었다. [154] 독일 바이에른 주 뷔르츠부르크 주에 위치한 소도시. [155] 참고로 후속작인 늑대와 양피지에서 이 부분을 언급한다. [출처9] [출처9] [158] (실제 출신지는 아니지만) 리비아의 게롤트, 벤거버그의 예니퍼 같은 경우를 떠올리면 쉽다. [159] 정확히 말하면 전치사+지역명 형태의 성은 유럽 문화권에서 널리 쓰이는 것이긴 한데, 이것도 영어로 치면 'from xxx'와 'of xxx'를 구별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자신이 태어난 영지에서 평생 살던 이들(농노등의 예속민이나 자유민이라 해도 여행할 이유가 없던 이들)은 직업이나 개인적 특징에 따른 별명등으로 동명이인을 구별했다. 예컨데 어떤 영지에 '제임스'가 여러 명 있다 하더라도 제임스①은 '농사꾼 제임스', 제임스②는 '대장장이 제임스', 근데 제임스③도 농사를 짓는다면? 그러면 신체적 특징을 따서 '키다리 제임스'나 '대머리 제임스', 아니면 사는 위치에 따라 '아랫골짜기 제임스'가 되는 식이다. 직업과 거주지가 세습되는 경향이 강하던 중~근세를 거치며 이런 호칭들 역시 많은 성씨의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을 방문하거나 이주할 일이 많은 이라면 그를 구별하기에 가장 편한 기호는 '어디 사람', 즉 그의 출신지이다. '용인'에서 온 사람이라면 '용인 사람 필립' 이라고 부름으로써 다른 필립과 그를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of와 from을 구별해야 한다. '필립 from 용인'은 '용인에서 온 필립', 또는 '용인 사람 필립을 의미하는데 비해 '필립 of 용인'은 '용인의 필립', 즉 '용인을 다스리는 필립'(용인의 영주 필립)을 의미하는 호칭이며, 따라서 이것은 귀족의 성이다. 이런 성씨의 작명 원리를 잘 모르는 이들은 지역명 앞에(또는 지역명도 아니고 그냥 성 앞에) 전치사가 들어가면 무조건 귀족의 성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양판소등에서 그런 설정을 써먹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나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에는 분명 전치사가 들어가지만, 귀족 출신임을 나타내는 성이 아니다. (또 유럽의 잘나가는 왕가중에서도 특히 유서깊던 카롤루스, 카페, 류리크, 피아스트, 아르파드 왕조등을 보더라도 흔히 생각하는 전치사+지역명 형태의 성이 아니다. 이들의 경우 말 그대로 '나는 누구의 후손이오' 라고 하면 누구나 알아볼 전설적인 인물의 후손인만큼 그 선조의 이름을 자신들을 구별하는 기호로 삼은 것이다.) 또 '프랑스의 왕 루이'면 당연히 '루이 드 프랑스'(프랑스의 루이)인데 같은 이름을 가진 왕이 많다면? 당연히 1~18까지 번호를 매겨가며 구별해주는 것이다. 일부 유럽계 문화권에서 O세 라는 호칭이 자주 쓰이는 것 역시 자녀의 이름을 아버지나 할아버지등 가까운 친족의 이름에서 따서 지어주는 전통이 있을 경우 그 가계의 많은 동명이인중에서 누구인가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 (같은 가계이니 당연히 성으로는 구별이 안 된다.) 이처럼 '성씨'란 결국 그 개인을 구별하는 기호(특히 다른 동명이인과 구별하는 기호)로 사용되는 것임을 이해하면 성씨의 탄생 원리를 이해하는 것도 간단하다. [160] 여담으로 작가의 또 다른 세계관이자 중세를 모티브로 삼은 막달라에서 잠들라의 경우엔 7권에 화약의 존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