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01:16:36

노예무역

1. 개요2. 역사
2.1. 대서양의 노예무역2.2. 이슬람의 노예무역2.3. 일본의 노예무역
3. 영향4. 외부 링크

1. 개요

노예무역( 貿)은 노예를 상품으로써 사고파는 행위를 말한다.

2. 역사

노예무역의 시작은 이미 그 역사를 정확히 알기 힘들 정도로 오래 되었다. 인류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라고 하는데, 전쟁이라는 사회적 힘의 불균형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계층이며 노예다.

2.1. 대서양의 노예무역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노예무역은 ' 대서양 노예무역'일 것이다. 이는 서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노예무역이 근대 이전까지 이루어진 가장 최근의 사례인 데다, 가장 거대한 규모였기 때문이다.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인한 아프리카 흑인의 강제 이주는 인류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으며[1],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인한 부정적인 여파는 현대에도 지속되고 있다.

아프리카 흑인이 아메리카 대륙 개척을 위한 노예가 된 이유는 바야돌리드 논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직접적으로 얽혀있다. 1550년에 벌어진 이 논쟁에서 " 아메리카 원주민은 이성과 문화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노예로 삼거나 가혹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결론이 내려졌고, 그 대신 사람이 아니라고 간주한 아프리카 흑인을 아메리카 대륙 개척을 위한 노예로 부리기로 했다.

당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특히 서아프리카 지역은 농노제와 유사한 방식의 노예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한편 당시 유럽은 기독교에서 같은 기독교인을 노예로 삼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에 노예제가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었다. 대신 농노제가 있었다. 물론 잉글랜드인이 아일랜드인을 노예로 만들고 매매하기도 하는 등 같은 기독교인끼리 서로 노예로 삼는 행위가 대놓고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금지였다.

그러다 포르투갈인이 아프리카를 통해 대대적인 노예무역을 시작한다. 아프리카 부족 중에는 포르투갈과의 교류를 통해 머스킷과 같은 을 얻은 곳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들의 세력 확장 및 유지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고, 이들 아프리카의 여러 세력은 무기를 얻기 위해 농노 및 포로를 노예로 제공하였다.

이후 포르투갈인은 아프리카에 본격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아프리카의 식민지화와 노예무역으로 인한 인력 손실 등으로 인하여 아프리카의 토착 세력의 힘이 약해지며 노예무역은 더욱 가속화되게 된다. 때문에 ‘무역’이 힘들어지고 사고 파는 구조가 흐릿해지자, 본격적인 납치를 시작하여 총기로 무장한 용병을 이용해 아프리카 부족들을 위협하여 노예선에 실었다. 당연히 노예선이 어디로 가는지는 말을 안 했고 노예들을 태운 배들은 바다 너머로 홀연히 사라진지라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는 “백인들은 식인종이라 우리를 먹기 위해 잡아간다”, “그들이 신고 있는 검은 가죽 신발은 사람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주로 중노동에 써먹기 위해 조달한 노예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노예의 성별도 남성이 압도적이었고 여성도 적으나마 꽤 있었다. 그래서 노예를 싣고 가는 화물선의 기항지 인근의 아프리카 지역은 여초 현상이 심각했다. 1519년부터 1860년대 말까지 950만명의 흑인 노예가 아메리카로 이동당했다. 중간 항로의 사망률은 15%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를 통해 1,100만 여명의 인구가 아프리카를 떠났음을 의미한다.

초창기 포르투갈인과 아프리카인의 노예무역은 대등한 관계였고, 아프리카인들이 수에서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인들이 함부로 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점점 더 많은 노예가 필요하게 되자 결국 이 두 세력 간의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포르투갈인들은 안정적인 노예공급을 위해 이들을 정벌하기도 했고, 새로운 정복지를 개척해 통치하는 것으로 해결한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앙골라다. 중계상에서 완전한 공급자로 변신한 것이다.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노예무역은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1526년부터 1867년까지 약 1,250만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아프리카를 떠났고 약 1,070만명이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아메리카 대륙 이외에도 다른 곳으로 팔려갔지만, 항해 도중 죽임을 당하거나 죽은 노예들이 많다. 아래 사진은 노예선이 노예들을 어떻게 실어 날랐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대소변도 묶여있는 그 자리에서 그냥 보게 하는 것이었다 한다.(그래서 위에 있을수록 '그나마' 좋은 환경이었다 한다. 아래로 갈수록 위쪽의 배설물을 뒤집어썼다.) 이렇게 위생환경이 열악했고 영양도 충분히 공급되지 못했으니 전염병이 돌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노예선의 경우 질병이 퍼지기 쉬워 노예선 선원들의 사망률도 다른 선박보다 높았다. 어떤 경우에는 배에 실은 노예 중에서 절반 정도만 살아 대서양을 건넜으며, 그래도 노예상인 입장에서는 이득이었다고. 서울대학교 주경철 교수의 '테이레시아스의 역사'에 당시의 노예무역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파일:attachment/Transatlantic-slave-trade-of-Africans.jpg

다만 저런 상태로 한 달 내내 실려있었던 것은 아니고 낮 동안에는 갑판에 보내 바닷물로 씻게 하고 그동안 선원이 노예가 묶여있던 자리의 대소변들을 청소해야 했다. 16세기 기준 대서양을 이동하는 노예의 사망률은 20~30%였다면 19세기에는 6~10% 정도로 기존의 1/3 수준으로 사망률이 감소하는데 19세기 기준으로는 장기간 항해하는 사람들에게 괴혈병을 예방할 목적으로 레몬과 식초가 지급되었기 때문이다.

노예무역 자체의 수익률이 50~100%이기는 하지만 아프리카의 노예 자체가 매우 싸기에 그로인한 수익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노예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설탕의 수익이 매우 컸다. 18세기 플랜테이션에서 걷어들이는 설탕과 같은 작물의 가치는 매우 높은데 면적이 불과 28,000m²인 아이티에서의 수익이 당시 프랑스 예산의 70%를 차지했었다. 프랑스가 아이티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정글까지 다 없애면서 사탕수수 농장을 확보했으며 아이티가 독립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에는 무려 70만명이나 되는 흑인 노예가 있었다.

가장 전형적인 흑인 노예제 이미지는 남북 전쟁 전의 미국 남부의 흑인 노예제이겠지만, 생도맹그나 브라질의 노예제는 그 열악한 상황과 노동 강도가 훨씬 악랄하여 노예를 정기적으로 새로 구입해야 하는 소모성 자원처럼 관리되었다. 또한 카리브해나 남미에서는 노예의 식사를 한가지만 제공해서 많은 노예들이 필수 영양소 결핍으로 잦은 질병에 시달렸기에 강제노동과 영양실조로 인해 노예들의 평균 생존 기간은 매우 짧았다. 브라질이나 프랑스령 생도맹그, 바베이도스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노예는 과도한 노동과 질병으로 7~8년이면 사망했다.[2]

18~19세기 아메리카 대륙으로 수입된 흑인 노예의 최소 10~20%는 무슬림이었다.[3] 흑인 노예 중에 무슬림들은 종종 봉기를 일으키는 경우[4]가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수요처에 도착하는 즉시 개신교나 가톨릭으로 개종되었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기 때문에, 식민지 농장에서 포르투갈어나 스페인어 등을 가르친 후 마름 일 등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종종 운이 좋아서 해방된 경우도 세대가 지나면서 결국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2.2. 이슬람의 노예무역

피부색에 상관없이 백인 노예도 매우 많았다.

흔히 노예무역하면 대항해시대 때 흑인 노예를 사고팔던 대서양 노예 무역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중세 국제적인 노예 무역은 무슬림 세계를 중심으로 돌아갔으며 근세 대서양 노예무역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크림 칸국[5]의 노예 무역은 유례가 없이 악질적이었다. 이슬람교에서는 무슬림이 같은 무슬림을 노예화하는 것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중세부터 노예 무역이 번창했다. 또한 아라비아 반도 바로 아래에 아프리카의 뿔이 있고, 서아프리카 및 중앙아프리카나 북아프리카 남부는 사헬 지대와 접해 있기 때문에 대서양 노예무역처럼 수입해오기 좋았다. 무슬림들이 직접 약탈한 지역에서 납치해 온 노예들도 많았지만, 중세 초에는 하자르인들이나 노르드인들이 사로잡은 노예들을 수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그마치 900년에 걸쳐 이어진 아랍인들의 노예무역 과정에서 사망한 노예들의 수는 적게는 400만에서 많게는 1800만에 이른다 추정된다.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예로 부려먹을 흑인을 수입해 간 유럽이나 아메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아랍 국가들은 주로 노예 군인 맘루크 하렘에서의 성노예로 쓰기 위해 노예들을 끌고 갔다. 이 때문에 대서양 노예무역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비가 2대1이라고 하나, 이슬람권 노예무역에서는 그 반대이다.

일례로서 메소포타미아와 남부의 습지를 개간하는 일이 모기 때문에 지장을 받자, 압바스 왕조에서는 아프리카에서 수입해온 흑인 노예들을 투입해 이 지역에 개간 사업을 진행했다. 무덥고 건조한 환경에 모기가 전파한 전염병 때문에 많은 노예들이 과로로 죽자 결국 이들은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잔즈 반란을 일으켰다.

아랍 노예무역의 희생자 중에는 흑인보다는 백인이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흑인 노예보다는 백인 노예가 더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근세 오스만 왕조 기록을 보면 크림 타타르인들이 사로잡은 체르케스인 여성 노예는 500 파운드 스털링[6]거래되었으나, 흑인 여성의 경우 20파운드 스털링에 거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슬람 율법에서는 같은 무슬림을 노예로 잡는 것을 금지하였고,[7] 이는 이슬람권에서 노예 무역이 번창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근세 크림 타타르인들의 경우 이를 무시하고 체르케스인들을 노예로 납치하였던 경우, 레반트 지역의 베두인들이 농촌에서 부녀자들을 납치해서 노예로 판매한 사례 등등 예외도 넘쳐났다.[8]

중세 초 유럽의 전쟁 포로들 중 기독교인이 아닌 다신교를 믿는 부족[9]이 포로로 잡히면 대부분 노예 수요가 많았던 이슬람 국가들로 수출되었으며, 노르만인들 역시 해적 행위와 약탈 과정에서 사로잡은 노예들을 대부분 이슬람 국가들에 수출했다. 961년 후우마이야 왕조 코르도바 궁정에는 1만 3000명의 슬라브인 노예가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이들은 오늘날 프랑스 동북부에 위치한 베르됭에서 유대인 상인들에 의해 후우마이야 왕조 치하의 알 안달루스로 팔려왔다. 후우마이야 왕조가 붕괴되자 슬라브인 군인 노예들은 군벌을 이루고 스페인 각지에 이슬람 타이파 국가들을 세웠다. 중세 아랍어에서 내시를 뜻하는 '시끌라비(صقلبي)'는 슬라브인 노예를 의미하는 '사깔리바(صقالبة)'란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사깔리바라는 단어 역시 고대 슬라브족의 일파 스클라베니족에서 기원한 어휘이다. 프라하 역시 중세 초에는 이슬람 국가들에게 노예를 수출하는 거점으로 유명한 도시였다고 한다.[10]

중세 초에는 카프카스 근방의 쿠만족과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족을 비롯해서 텡그리를 신앙하는 튀르크계 유목민들이 다른 튀르크계 부족과 싸우다 패배해 포로로 잡히면 군사 노예 맘루크로 매매되었는데, 이들이 아랍인 군인들과 유혈 충돌을 일으키면서 튀르크인 부대와 아랍인 부대를 따로 분리한 것을 시점으로 군사력을 장악하고 군벌화되었다. 이들 튀르크계 군인 노예들은 11세기 이슬람으로 개종한 셀주크 튀르크인 동포들을 끌어들이고 아랍인들을 밀어냈으며, 그 결과 중동의 패권은 아랍인에게서 튀르크인들로 넘어간다. 심지어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는 아랍인들이 갑옷을 입을 권리와 말을 타고 다닐 권리를 박탈하기도 했다.

중세 말 흑사병의 유행으로 이탈리아 북부의 부유한 도시 국가들이 인구가 감소하며 타격을 받자 14세기 말을 기점으로 제노바 공화국에서 흑해의 무슬림 타타르인들로부터 슬라브인[11][12] 노예를 수입했다. 한 때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의 중산층들이 집집마다 노예를 한두명씩 둘 정도였으나,[13] 오스만 제국의 등장으로 제노바의 흑해 식민지들이 함락되면서 이탈리아 노예 시장의 주 공급처는 아프리카 서부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포르투갈의 대서양 항로 개발을 촉진시키며, 상술된 대서양 노예 무역의 시발점이 되었다. 원칙적으로 무슬림이 다른 무슬림을 노예로 잡는 행위는 이슬람 율법에서 금지된 행위였으나 크림 타타르인들은 이웃한 체르케스인들이 15~16세기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습격하여 이탈리아나 오스만 제국으로 인신매매하였다. #

마그레브 지역의 이슬람 해적( 바르바리 해적)들은 중세 초부터 해적 행위와 약탈로 유명했지만 오스만 제국 정부의 영향권 속에서 자치를 누리며 지중해 지역의 기독교 신자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납치해서 노예로 팔았는데, 이는 19세기까지 유럽 국가들의 주요 골칫거리 중 하나였기에 수많은 서구 국가들이 이들의 해적질을 근절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이슬람 해적들은 전성기에는 교황을 공격하고(교황은 한밤중에 말타고 혼자 튀어서 겨우 살았다), 사보이아 공작 일가를 사로잡고, 아일랜드와 북미까지 약탈하는 등 악명을 떨쳤다. 현재 가톨릭 봉사단체로 활동하고 있는 구호기사단의 경우 이 당시에는 휘하 병력을 동원해 바르바리 해적들을 공격하고 기독교도 노예들을 해방하는 일이 주 업무였으며,[14] 대서양 너머 위치한 미국 또한 자국 선원들이 나포된 것을 계기로 수군을 보내어 리비아 지역의 해적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이라는 강대국을 후견인으로 둔 이 해적들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데에는 실패했다. 근세 오스만 제국 크레타 섬 하니아에서 나온 기록에 따르면 노예의 평균 시세는 65에서 150 쿠루스였는데 1717년 12살에 정신지체 장애를 앓는 소년이 27쿠루스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27 쿠루스는 당시 시세 기준으로 양고기 462kg, 혹은 빵 933kg 아니면 우유 1,385리터를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1671년에 거래된 노예 처녀는 350쿠루스에 거래되었는데 당시 2층짜리 건물 하나의 가격이 300쿠루스였다.

그들의 납치 행각은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환자라 불릴 정도로 약화되고, 나폴레옹 전쟁 종전으로 한숨 돌리게 된 유럽 국가들이 압도적으로 강대해진 해군력을 바탕으로 토벌전을 벌인 이후에야 사라졌다. 특히 프랑스가 1830년에 북아프리카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프랑스령 알제리로 만들면서 바르바리 해적들의 노예무역도 끝났다.

한편 오스만 제국 북쪽에는 몽골 제국의 후계 국가들이 존재했는데, 카잔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크림 칸국 등이었다. 이들은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을 침공해 엄청난 숫자의 노예들을 사로잡고 마구잡이로 노예를 매매하여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이들 칸국에 대한 원한이 강했으며 러시아의 동방 국경은 늘 위험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를 집어던지고 국력을 강화하자, 칸국의 노예 사냥은 정당한 전쟁 명분이 되어 이반 뇌제의 치세에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은 러시아에 정복당하고 만다. 당시 이반 뇌제가 카잔을 함락했을 때, 10만의 러시아인 노예를 해방시켰다고 하니 당시 슬라브인 노예 사냥과 매매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크림 칸국만은 오스만 제국과의 굳건한 동맹 때문인지 18세기 말까지 존속했다. 우크라이나 남부와 크림 반도 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이 유목민 국가는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으며 동유럽 지역의 기독교도 신자들을 잡아 노예로 팔아버리는 것을 주된 수입원으로 삼았다. 그들의 활동 범위는 매우 넓어, 한때는 발트 해와 인접한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마저 위협했을 정도였다. 그들은 젊은 여성은 잡아다가 성노예로 팔았고, 아이는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말로 밟아 죽였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남부 드네프르 강 일대는 비옥한 지역( 체르노젬 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살지 않아 황량한 평원으로 남게 되었다.[15]

또한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러시아를 위시한 동유럽 지역에 농노제와 억압적인 분위기가 고착화된 주된 이유이기도 했다. 주민들이 노예로 팔리느니 차라리 지주와 미르[16]에 예속되어 농노로 남겠다는 선택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주 밑에서 살기를 거부한 일부 루스인들은 남부 황무지로 들어가 군사적 공동체를 만들고 크림 칸국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다. 이들이 바로 그 유명한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코사크다. 크림 칸국의 노예 무역은 강대해진 러시아가 18세기 말에 크림 반도를 합병하면서 끝났다.[17]

또한 오스만의 직간접 지배지였던 헝가리, 세르비아 등의 동유럽 지역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갔고, 이는 남슬라브족들의 분열을 가속화해 20세기 말까지 이어지는 발칸의 민족문제를 만들어냈다. 카프카스 지역 또한 중동 이슬람권에 바로 인접한 특성상 중세 한동안은 자연 증가하는 인구 대부분이 노예로 인신매매되었다.

일례로 사파비 왕조는 순니파 무슬림들을 쉬아파로 개종시키는 과정에서 순니파들의 봉기하자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기독교도들을 납치하여 쉬아 이슬람으로 개종시킨 후 각지에 주둔시켜 봉기를 제압하였고 이를 계기로 카프카스 출신 노예병을 주력으로 삼았다. 왕실과 귀족들의 후궁 대다수 역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인 노예로 충당했다 한다. 카프카스 역시 러시아 제국이 이 지역에 남하하여 카자르 왕조를 몰아내고 패권을 다짐으로서 노예 납치 및 무역이 근절되었다. 노예 무역을 금지되면서 노예 공급 및 수요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카프카스의 여러 부족들이 경제적 피해를 입게 되어서 러시아 제국과 대립하기도 했다.

근대에 가장 유명한 노예 무역 국가는 오만 제국으로, 탄자니아 앞바다의 잔지바르 섬에 본부를 두고 아라비아 해 서쪽의 제해권을 장악한 뒤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잡은 흑인들을 이슬람 세계에 노예로 팔아먹는 강대한 식민제국이었다. 심지어 모리타니나 수단 같은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아랍 국가들은 20세기 초까지 흑인들을 노예로 부렸다. 그런 오늘날 아랍 국가들에서는 걸프 국가들을 제외하면 미국이나 브라질이나 쿠바 등과 달리 흑인들을 보기가 어려운데, 왜냐하면 남성 노예들은 웬만하면 거세당했고, 여성 노예들은 출산하면 그 아이는 그 즉시 살해되어서 씨를 못 남겼기 때문이다.[18] 경우에 따라서 씨가 아주 끊어진 것은 아니라서 인도, 파키스탄의 사이디처럼 흑인 노예의 후예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비율이 적다. 오스만 제국의 흑인 환관이 특히 유명했다. 여성 흑인 노예들은 대게 하렘에서 심부름꾼을 하거나 부유한 무슬림 가정에서 가사 노동에 동원되었다.

백인 여성 노예가 출산한 자녀를 살해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지만, 백인 남성 노예의 경우에도 노잡이나 군인 노예로 쓰는 경우가 아니면 대게 거세가 행해졌다. 참고로 무슬림이 거세 시술을 담당하는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인 기술자에게 맡겨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예외가 없는것은 아니기는 했지만 중동권에서 기독교인들은 사회주류만 아닐뿐 어느정도 비율은 차지했기 때문에 굳이 기술없는 무슬림에게 맡길 이유가 없기는 했다. 19세기 이집트의 케디브 왕조가 수단을 정복하자 하르툼에 상당수의 콥트교도 거세 시술자들이 정착하여 노예 거세를 맡았는데, 후에 하르툼을 장악한 마흐디 신국에서도 이를 박해하였지만 거세 시술을 대체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죽이지는 못했다.

후에 오만 제국에서 독립한 잔지바르 술탄국도 노예무역으로 유명했다. 이 국가는 탄자니아 앞바다 잔지바르 섬과 맞은편 육지의 다르에스살람을 근거지로 해서 아프리카 내륙으로 진출하며 흑인들을 잡아다가 아랍 상인들에게 팔았다. 세력 범위는 탄자니아나 케냐뿐만 아니라 열대우림에 덮인 콩고민주공화국 동부 지역까지 미쳐 중앙아프리카 내륙의 많은 술탄국들이 잔지바르의 지원을 받았다. 공급이 얼마나 많았는지 군마 한마리 가격이 노예 20~50명 시세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한다.

그리고 이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가 콩고 지역에 진출하는 명분이 되었다. 이 이후 잔지바르와 그 봉신국들은 레오폴드의 콩고 자유국 식민[19] 정책의 최대 적수로서, 콩고 동부 지역 교역소들을 파괴하고 벨기에인들이 부리는 흑인들을 잡아갔을 뿐만 아니라 콩고 식민지의 주 산업이었던 상아 채취 산업에도 경쟁자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결국 1890년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식민지를 확장하던 영국과 독일 제국의 진출로 영향력이 위축되었고, 1894년에는 벨기에와의 경쟁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1896년 영국-잔지바르 전쟁에서도 개전 38만에 패배하며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형식상의 노예제는 폐지되었고, 술탄정 자체는 잔지바르가 독립한 직후인 1964년까지 이어졌지만 1964년 잔지바르 혁명으로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 인도인이 살해당하거나 추방당하면서 흑인 공화국이 성립되었고 그해 중순에 탕가니카와 통합하면서 탄자니아가 성립되었다.

근대 중앙아시아에서도 준가르 칸국에서 카자흐인과 키르기스인 포로들을 데려다 오아시스에 라티푼디움과 흡사한 시스템의 노예 농장을 경영한 이래 노예 무역이 부흥했다. 티베트 불교가 국교였던 준가르 칸국이 청제국 강희제의 침략으로 멸망한 이후에도 우즈베크족이 건국한 코칸트 칸국이 자국의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오늘날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지역을 꾸준히 습격하여 이 지역의 한족 상인 대부분을 살해하거나 노예로 납치했으며, 이 와중에 이슬람을 믿는 회족들도 종종 한족으로 오인받아 납치당했다. 이렇게 사로 접힌 한족 노예들은 주로 농업 개간에 투입되었다.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제정 러시아의 남부 지역을 히바 칸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민족인 투르크멘인들이 약탈하기도 했다. 한 번은 러시아의 카자크 탐험대 전체가 실종된 적도 있는데 아마 전부 투르크멘의 공격으로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린 경우로 추정된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수천이 넘는 러시아인들이 노예로 잡혀 시장에서 거래되어 각지로 팔려나갔고, 이는 제정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토벌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던 영국은 러시아의 '응징 전쟁'이 일어날까봐 매우 두려웠고, 실제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러시아인 노예 사냥에 원한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여러 차례 토벌을 벌이기도 했다. 영국 정부는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토벌 명분을 없애기 위해서 러시아가 사마르칸트 토벌에 실패한 이후에 부하라 칸국과 교섭하여 수천의 러시아인 노예들을 러시아로 송환시키는데도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그러나 이러한 응징 전쟁으로도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러시아인들을 사냥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고, 1860 ~ 80년대에 제정 러시아가 카자흐스탄 전역, 투르크멘, 키르기즈, 우즈벡 전역을 차지한 뒤에야 중앙아시아 노예 무역은 소멸하기 시작한다.

이슬람권의 노예들은 꾸란에서 노예 해방을 선행으로 기록한 것도 있고 노예에 대한 인격적인 대우를 권하는 교리 덕분에 유럽 · 아메리카의 노예들보다는 훨씬 나은 대우를 받는 경우도 있었으나,[20] 기실 비인간적인 노예제에서 노동과 성을 착취받는 입장인 것은 매한가지였다.[21]

2.3. 일본의 노예무역

대항해시대 당시 유럽과 접촉한 전국시대 일본에서도 조총 화약을 최대한 많이, 빨리 갖추기 위해 서아프리카 국가들처럼 자국민을 수출하거나, 한반도에서 납치해 온 조선인들을 유럽인들에게 노예로 갖다 팔아버리는 경우가 매우 많았었는데 이는 당시 수출할 상품이 없던 일본이[* 이런 상황은 일본이 1853년 미국의 압력을 받아 막 나라의 문을 다른 나라들한테 열었던 19세기 중엽에도 마찬가지였다. 전국시대에 조선에[서 발명된 연은분리법을 배운 뒤에서야 수지타산이 맞춰진 세계 제2위 규모 이와미 은광의 광맥도 말라버린지 오래고. 당시만 해도 일본은 가난한 농업 국가였기 때문에 해외에 내다팔 상품이 별로 없었고, 일본은 한동안 외국들과의 교역에서 무역 적자를 보았다. 그러다 나온 해결책이 바로 일본의 가난한 농촌과 어촌 처녀들을 해외에 성노예로 팔아 외화를 버는 일이었는데, 그렇게 해서 1920년까지 무려 60년이 넘게 가라유키상이라는 이름으로 30만 명의 일본인 여성들이 해외 각국으로 성노예가 되어 팔려갔다. 일설에 의하면 이 가라유키상들이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여 벌어들이는 수익이 일본 정부 연간 수익의 10%나 되었다고 하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일본 정부가 사용했던 전비에도 이 가라유키상들이 벌어오는 돈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일본 정부는 이런 가라유키상들이 외화를 벌어오는 애국자라고 추켜세우기까지 했으며, 근대 일본의 지식인인 후쿠자와 유키치도 "매춘부의 해외 수출은 장려되어야 하며, 막아서는 안 된다."라고 긍정적으로 보기까지 했다.] 긴 전쟁 기간 동안 외국에 판 주력상품이 다름아닌 자국민 즉, 일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서부 다이묘들은 일본인 노예를 수출했고 워낙 많이 수출하니 히데요시가 1588년에 "중국, 남만, 조선에 더 이상 일본인 수출을 금한다"고 칙령을 내렸을 정도. 덴쇼 소년사절단도 선교사 따라 로마 교황 알현하러 가는 배가 정박하는 항구마다 일본인 노예가 보이더니, 이들을 거래하는 노예상보다는 애초에 이들을 수출해버린 같은 일본인들을 원망했다.
"남만 무역과 일본인: 50명이 화약 1통" 이후에는 조선에서 납치한 도공들이 창시한 아리타자기, 사쓰마자기, 하기자기 등을 수출해서 수익을 창출했다.

실제로 전국시대 당시 일본은 농민[22]들이나 전쟁포로같은 자국 일본인들을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마냥 해외에 노예로 팔아먹는 사례가 아주 많았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저술한 '일본사'에서도 16세기 규슈지방의 노예사냥 현장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다. 전국시대 전쟁이 터지면 아시가루 등 잡병들이 침략지의 농민들을 상대로 일명 란보도리(乱妨取り) 또는 란도리로 불리는 인간사냥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노예사냥을 해왔다. #

노예사냥과 인신매매는 전쟁에 참여하는 아시가루들의 궁극적인 목표였으며 이는 전국시대의 아시가루들은 부족한 급여의 대안으로서 적지에서의 약탈을 합법적으로 인정받아 자신들이 침략한 침략지의 주민들을 잡아서 노예로 팔아 먹는 것이 귀중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이다. 잡힌 주민은 여성들은 창녀로 팔려나갔고 노인과 어린이와 남자는 노동력이 부족한 마을에 노동 노예로 팔려나갔다. #1 #2 이러한 노예 판매는 일본이 통일되기 전에 세상을 하직한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등의 간토지방의 유력 가문들이 인신매매 1, 2위를 다투며 이들에 있어 노예 매매는 주요 수입원이기도 하였다.

노예가 존재한 만큼 전국시대에는 분쟁의 희생양으로 대신 처형당하는 해사인(解死人)이라는 슬픈 존재도 존재하였다. 전국시대에는 마을과 마을이 물싸움 등에서 무기를 들고 큰 분쟁을 빚기도 했다. 1592년, 셋츠국(摂津国)의 나루오 마을(鳴尾村)과 가와라바야시 마을(河原林村) 사이에 농업 용수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면서 치열한 전투로 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천하는 통일되었으므로 제멋대로 전투를 벌인 두 마을에 대해 히데요시는 격노해, 책임자를 불러내 책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을에서 처벌 대상으로 바친 사람은 쇼야(庄屋: 촌장)나 명주(名主)가 아니라 이때를 위해 마을이 돌보던 거지들이었다고 한다. 이런 존재를 해사인이라고 하는데, 거지나 떠돌이 같은 정규 마을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마을에서 몇 명 길러 두었다가 마을에서 큰일이 일어났을 때 책임자 대신 내놓아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이들의 존재 가치를 보았을때 일본내에서 노예로 팔린 사람들도 이 해사인들과 똑같이 제물로서 바쳐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전국시대의 악폐인 이런 노예 사냥으로 잡힌 일본인들은 일본 내에서만 판매되지 않았다. 16세기는 포르투갈 스페인의 선박들이 세계의 항구에 출현한 대항해시대였으므로, 일본인 노예는 노예 매매를 통해 유럽에도 판매되기에 이른다.[23] # # # #
「我が旅行の先々で、売られて奴隷の境涯に落ちた日本人を親しく見たときに は、こんな安い値で小家畜か駄獣かの様に(同胞の日本人を)手放す我が民族への激しい念に燃え立たざるを得なかった。」

"우리가 여행하는 곳마다 팔려나가 노예 신세가 된 일본인을 가까이 보았을 때는 이런 값싼 값에 작은 가축이나 짐승처럼 (동포인 일본인을) 놓아주는 우리 민족에 대한 격렬한 생각이 불타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全くだ。実際、我が民族中のあれ ほど多数の男女やら童男・童女が、世界中のあれほど様々な地域へあんなに安い値でさらっていって売りさばかれ、みじめな賤業に就くのを見て、憐憫の情を催 さない者があろうか。」

"사실 우리 민족의 저만큼 많은 남녀라든가 동남동녀가 세상의 저만치 여러 고을을을 그렇게 싼 값에 휩쓸려가서 팔아치우고 비참한 천업에 종사하는 것을 보고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덴쇼 소년사절단의 회화록 중에서 # #

이것은 1582년(덴쇼 10년) 덴쇼 소년사절단이 해외에서 직접 목격했던 일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 이러한 해외로의 일본인 노예 판매는 주로 서양인들과 교류가 잦은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일본인 노예들을 해외에 헐값에 팔아넘기고 그 대가로 조총 화약등을 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24] 실제로 포르투갈인들은 중국인과 일본인 같은 아시아인들에 대해서 지성과 근면 같은 좋은 자질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노예로서 선호하였다고 한다. # 이러한 측면에서 볼때 일본인 노예들은 유럽에 도착한 최초의 일본인들로 간주되고 있으며, 1555년 교회의 기록에 따르면 포르투갈은 다수의 일본인 노예 소녀들을 매입하여 성적인 목적에서 포르투갈 현지에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 # 그 당시 일본인 노예는 이러한 성적인 이유 탓인지 남자보다 여자가 더 선호되었으며 행선지는 고아(인도)를 중심으로 한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이지만, 포르투갈 본국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

가령 시마즈 가문의 팽창 당시 오오토모 가문이 자신들의 영지였던 붕고 지방을 빼앗기면서 붕고 지방의 농민들은 대규모 노예사냥의 희생양이 되었다. 붕고 지방의 농민들은 노예 상인들에 의해 헐값에 히고 지방으로 끌려갔으며, 이렇게 수많은 노예들을 싼 값에 확보한 노예상인들은 시마바라 반도(16세기 일본인 노예 수출의 전진기지였다)로 이동시켰다. 노예들은 바로 이 일대에서 캄보디아 상인, 태국 상인,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헐값에 인도, 필리핀, 마카오 같은 아시아 지역들 뿐만 아니라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 같은 중남미 지방에 이어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유럽 지역으로까지 전세계 각국으로 팔려나갔다. #
"일본인 수백명 남녀 불문하고 남만선(유럽인들의 배)에서 사들여, 짐승처럼 손발에 쇠사슬을 묶은 채 배 밑바닥으로 몰아넣었다. 지옥의 가책보다 심하다. 중략.. 게다가 우마(牛馬)를 사들여, 살아생전 껍질을 벗기고, 중(서양인 선교사를 가리킨다)도 제자도 손을 써서 먹고, 부모 형제도 무례한 법, 축생도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日本人が数百人、男女問わず南蛮船に買い取られ、獣のごとく手足に鎖を付けられたまま船底に追いやられた。地獄の呵責よりひどい。 ──中略── その上、牛馬を買い取り、生きながら皮を剝ぎ、坊主(宣教師を指す)も弟子も手を使って食し、親子兄弟も無礼の儀、畜生道の様子が眼下に広がっている……")
- 『규슈어동좌기(九州御動座記)』

이 당시 해외로 팔려나간 일본인 노예들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당시 히데요시의 측근이자 히데요시의 규슈 원정에까지 같이 동행하였던 오오무라 유키(大村由己)가 일본인 노예가 서양인들에 의해 나가사키항에서 노예 매매로 대량 연행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는 자신의 저서인 『규슈어동좌기(九州御動座記)』에서 위와같이 분개하여 쓴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배 한척 당 약 200명 정도로 실은 것으로 추정된다. # 추정치이기는 하지만 해외로 끌려간 일본인 노예는 포르투갈 출신 노예 상인들이 주도한 경우가 대부분으로, 그 피해자는 대략 5만명에 이른다고한다. 하지만 덴쇼 10년(1582년)에 로마에 파견 된 덴쇼 소년사절단 일행이 세계 각지의 가는 곳마다 일본의 젊은 여성들이 노예로 착취 당하고 있는 모습들을 목격한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5만명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일본인 노예들이 전세계로 팔려나간게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하는 견해 또한 존재한다. #

당연하지만 오오무라 유키는 자신이 목격한 서양인들에 의한 일본인 노예 매매의 끔찍한 참상을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고, 히데요시는 격노해, 즉시 포르투갈 출신으로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료(Gaspar Coelho)를 불러와 "왜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렇게 열심히 기독교 포교에 기를 쓰고, 그리고 일본인들을 사서 노예로 배에 끌고 가는가?(何故ポルトガル人はこんなにも熱心にキリスト教の布教に躍起になり、そして日本人を買って奴隷として船に連行するのか)"라고 왜 그런 심한 짓을 하느냐고 직접 추궁했다.

하지만 코엘료는 "파는 사람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코엘료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일본인 노예 매매에는 판매자 역할을 하던 일본인들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어떤 형태로든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이웃의 일본인이, 자식을 팔고 부모를 팔고 처자를 판다(近所の日本人が、子を売り親を売り妻子を売る)」라고 하는 막장 상황도 있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로 「규슈어동좌기(九州御動座記)」에 그러한 실상이 기록되어져 있다. #

이러한 일본인 노예 매매는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고수하는 원인이 되었다.[25] 비록 선교사들이 노예 무역에 부정적이었으며, 실제로 1598년에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 노예 무역을 파문으로 위협하여[26] 제재할 정도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긴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인과 서양인 교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던 선교사의 포지션이 히데요시의 입장에서 선교사를 의심할 동기를 준 것이다.[27] 결국 대항해시대가 막을 열었던 16세기 국제 노예시장의 네트워크에 일본도 포함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임진왜란때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 일부가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리기도 했다.[28] # # 이후 일본에서 이러한 노예무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서 제재를 받게 된다.
" 대당, 남방, 고려 일본인(日本人)을 매견(賣見: 팔아서 보내는것)하는 일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曲事(くせごと): 부정한 일 = 범죄)이며 덧붙여, 일본에 있는 사람을 매매하는 일을 정지시킨다. 굳게 정지하지 않으면 엄벌해야 할 자이다."

大唐、南蛮、高麗え日本仁(日本人)を売遣候事曲事(くせごと = 犯罪)。 付(つけたり)、日本におゐて人之売買停止之事。 右之条々、堅く停止せられおはんぬ、若違犯之族之あらば、忽厳科に処せらるべき者也。
(伊勢神宮文庫所蔵 「御朱印師職古格」)[29]

1587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러한 상황에 위기감을 느끼고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한 일본인의 노예매매를 금지시켰다. 동시에 히데요시는 전국의 다이묘들에 대해서도 노예매매를 금지하는 취지의 명령을 내렸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 정벌 이후 일본인 노예들의 국제 매매를 금지하면서 발령했던 행동지침 중에는 중국, 포르투갈, 조선 등에 일본인 노예 판매를 금지한다 라는 문구 또한 있었다. 일본을 통일한 사람으로서 자국민을 노예로 해외에 판매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히데요시의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조치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노예매매는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포르투갈 상인이 직접 일본인을 구입하지 않았더라도 국내에 노예들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노예매매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실제로 일본에 있었던 포르투갈인 선교사는 동포 상인의 일본인 노예매매를 매우 싫어하여 본국에 단속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당시 포르투갈의 국왕이었던 세바스티앙 1세(Sebastião I)는 1570년 9월 20일에 일본인 노예매매 금지령을 내렸으나 효과는 없었다고 한다. (세바스티앙 1세(Sebastião I)는 포르투갈의 노예 무역이 규모가 커져서 일본에서의 가톨릭 개종에도 그로인한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1571년에 일본인들을 대상으로한 노예 무역의 중단을 명령한 것이었다.[30][31]) 당시 이러한 현상을 한탄하며 포르투갈의 석학 안토니오 베이라는 이렇게 말하였을 정도였다. "법이란 것은 있어도 위반자는 끊이지 않는 법이다. 예를 들어 일본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이 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국내에는 다수의 일본인 노예가 존재하는 사실에 의해 이를 증명할 수 있다."[32] #

결국 1595년 포르투갈은 중국과 일본 출신 노예들의 매매를 완전히 금지하는 법을 통과 시켰지만 계약 및 계약 노동의 형태로 강제 노동이 지속되었으며,[33] 심지어 일본 노예 여성들은 1598년 문서에서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인 Luis Cerqueira가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에서 무역하는 포르투갈 선박에서 일하는 유럽인과 아시아인 또는 아프리카 선원들에게 성노예로 팔리는 경우마저도 있었다. # 노예매매 금지령은 그 후에도 종종 발령되어 에도시대에 들어서는 1626년에도 금지령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노동력이 필요한 수요가 있고, 인간을 노예로서 파는 데 이익이 되는 공급이 존재하는 이상 이 악폐를 뿌리뽑기는 어려웠다. 결국 노예매매가 사라지는 것은 쇄국에 의해 자유교역이 제한된 것과 전쟁이 끝나고 인구가 늘어나 노동력 부족이 대부분 해소되어 매매가 상업적으로 성립되지 않을 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

그런가 하면, 조선에서 일본인 노예를 사들이는 일도 꾸준히 있었다. # 왜인 노비를 사는 것을 금하다 도망갈 것을 우려하여 왜노(倭奴)를 궁벽한 곳에 옮겨 두게 하다 전주 판관 유서종이 왜인을 끌어들여 말썽을 일으키다 심지어 고려시대에는 일본(日本) 상인 100여인이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고려(高麗)로 들어갔다가 고려에서 그 재화를 모두 빼앗고(...) 원나라에 표문을 올려 일본인들을 전부 다 노비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한 경우도 있었다. 고려에서 표류한 일본상인을 노비로 삼기를 요청하다
"일본 정부는 인신매매와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마리아 루스 호가 쿨리들과 맺은 계약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창녀의 인신매매는 무엇입니까? 그녀들은 어릴 때 돈으로 팔려서 가혹한 조건 아래 홍등가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일본인 창녀의 매매가 합법이라면, 페루인 선장의 행위도 합법적인 것이 되지 않습니까."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당시 영국인 변호사 디킨스의 변론
"설사 창녀 매매에 의해 예증될 만한 노예제가 일본에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노예를 국외에 내보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청나라인 노동자를 요코하마에서 국외로 이송하려 한 페루인 선장의 행위는 위법이다."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당시 특명재판장 오오에 타쿠(大江卓)의 판결

이와별개로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요시와라 유곽에서 일하던 일본의 유녀들도 사실상 매매되는 성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는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당시 일본측의 판결문에서도 이들이 사실상 매매에 의해 예증될 만한 성노예임을 인정한것을 보면 일본내에서도 이들을 사실상의 매매로 인해 탄생한 성노예라고 판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근대화 시절인 19세기 메이지 유신 무렵부터 20세기인 1920년까지 일본에서는 가라유키상이라고 하여 규슈 지역의 가난한 여자들 30만 명을 해외에 성노예로 팔아넘기기도 했다. 링크1, 링크2, 링크3, 링크4 이와별개로 요시와라 유곽에서 일하던 일본의 유녀들도 사실상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는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당시 일본측의 판결문에서도 이들이 사실상 노예임을 인정한것을 보면 일본내에서도 이들을 노예라고 판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영향

동북아[34]를 제외한 전 세계의 정치, 사회, 역사적으로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만 노예제 자체가 인도주의적 문제 외에도 생산성과 효율성에 한계가 분명한 시스템이었고, 결국 19세기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으며, 이미 1807년 노예 매매를 금지한 영국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들은 노예 무역을 공식적으로 금지시켜 나아갔다.[35] 채찍질 당하기 싫어서 눈치 보면서 일하는 노예와 빚도 많고 돈이 필요한 노동자 중 누가 더 효율적으로 일을 열심히 할지는 자명하기 때문이다.

흑인 노예 무역이 근절되고 나서도 저임금 노동력의 필요했던 서구 열강들은 중국인 쿨리, 인도인 노동자들을 동남아, 아프리카, 태평양, 카리브해 등지의 식민지로 끌고가서 명목상 계약노동자, 실질적으로 노예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착취했는데, 나중에 이 인도인, 중국인 노동자의 후손들이 화교, 인교가 되어서 자신들이 팔려갔던 현지의 경제를 장악하게 된다.[36]

대서양 노예무역은 현대 대중음악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강제적이고 비인도적인 이주를 당한 아프리카인의 후손들은 블루스, 락앤롤, 재즈, 힙합, , 탱고, 보사노바, 레게 등의 음악 장르 탄생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하루하루 살기 힘든 가운데 그나마 버티게 해준 애환이 담긴 노동가가 이제는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것이다.

아메리카의 대륙의 인구 구성에도 아프리카계 인구 유입으로 인해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원주민, 백인 이주민, 흑인 이주민 사이에 혼혈이 꾸준히 진행된 브라질이나 도미니카 공화국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기생충의 분포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만손주혈흡충이나 회선사상충 등 원래 아프리카에 분포하고 중남미에는 분포하지 않던 기생충이 중남미에도 분포하게 되었다.

또한 아프리카에서는 주로 남성들이 노예로 끌려간 까닭에 성비 불균형이 심해졌는데, 덕분에 일부다처제가 확산되고 농업 노동의 상당 부분을 여성이 전담하게 되는 등 여성 인권이 이전보다 더욱 열악해졌다. 노예무역이 사라진 뒤에는 아프리카 현지에서 자급자족 농업 대신에 땅콩이나 카카오 등의 작물들을 노예들을 활용해 플랜테이션 농법으로 재배한 뒤 서양에 수출하고 동남아시아에서 수입한 을 대신 먹는 시스템이 생기게 됐고, 이 때문에 아프리카에서는 노예 노동이 이전보다 엄청 늘어났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는 몰라도 지금도 아프리카는 다른 대륙에 비해서 불법적으로 부려지는 노예들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 아무튼 노예 무역은 지금은 법적으로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수단, 모리타니에서는 무슬림 유목민이 토속신앙이나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을 납치해서 노예로 삼는등 아직도 꽤 막장이다.

이슬람권의 노예 무역은 무슬림 군대의 주력이 아랍인에서 투르크인 노예병으로 변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점점 병권을 상실한 아랍인들은 점점 이슬람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나고 투르크인들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칼리프조 시기 아랍인들이 병권과 정치 권력을 모두 장악했을 시기에는 무슬림 정권이 관료들에게 봉급을 주는 관료제로 운영되었다면, 중동의 투르크계 왕조들은 군인들에게 돈으로 봉급을 주는 대신에 토지의 수조권을 주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무슬림 사회의 화폐 경제와 기업적 농업 경영이 쇠퇴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4. 외부 링크


[1] 출처: 유엔 - 노예제를 기억하며 [2] 출처 : 하버드 C.H. 베크 세계사 1350~1750 한국어 번역판 1022p 참조 [3] 문헌에 따라서는 그 이상, 거의 30~40% 전후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유럽에 의해 흑인 노예 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6세기부터 이미 서아프리카 일대는 이슬람이 전파된 지 수 백년이 된 상태였으며 그 일대에 있던 무명의 부족들 중에서도 무슬림들이 흔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동시기 스페인이 필리핀에 처음 진출했을 때 이미 적지 않은 현지 원주민들이 이미 그 쪽에 진출했던 아랍 세력에 의해 이슬람으로 개종한 상태였다. [4] 실제로 브라질에서는 무슬림이 지도하는 흑인 노예 봉기가 있었으며, 생도맹그에서는 프랑수아 마캉달이라는 이름의 서아프리카 무슬림 출신 노예가 농장주 여럿을 독살하였다. [5] 크림 칸국에서는 약탈자들에게 군마를 빌려준 후에 약탈자들이 납치한 노예를 이자로 받는 비즈니스가 번성했었다 한다. 밑천을 '투자'하고 배당금을 받는 것. 출처: 우크라이나의 역사 /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허승철 역) [6] 영국 화폐로 당시 오스만 왕조 경제가 만신창이가 돼서 고액 거래에서 유럽산 화폐를 신용하는 편이었다. [7] 다른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채무를 갚지 못한 사람이 노비가 되는 경우가 흔해서 굳이 노예를 다른 지역에서 수입할 필요가 없었던 나라들이 많았다. [8] 노예무역의 사례와는 해당되지 않지만 중세 바그다드에서도 범죄 조직들이 고아들을 납치해서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앵벌이로 부려먹었던 역사가 있다. [9] 주로 동유럽의 슬라브족과 발트해 근방의 발트족, 핀족 동방식민운동 과정에서 포로가 된 경우 [10] 프라하 독일, 폴란드와 가까운 위치로 중세 초 독일 폴란드 사이에 살던 이교도 슬라브 부족 폴라비아인이 전쟁 포로로 사로잡히면 대개 프라하를 통해 중동으로 수출되었다. [11] 물론 다 슬라브인은 아니었고, 크림 반도의 그리스인과 고트족, 볼가 강 유역의 핀 우골 민족들이 포함되었다. [12] 반면 같은 타타르인들과 전쟁 와중에 사로잡힌 타타르 전쟁 포로나 산악 지대에 살며 기골이 장대한 체르케스인들은 이탈리아 대신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의 군인 노예로 더 비싼 가격에 수출되었다. 이탈리아의 중산층 사이에서는 가사 노동을 시킬 여성 노예의 수요가 많았던 반면 맘루크 왕조에서는 군인으로 쓸 노예가 주로 필요했던 것 [13] 오늘날 이탈리아어 인사말 Ciao는 본래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노예들이 주인에게 쓰던 인사말 Suo Schiavo(저는 당신의 노예입니다.)가 어원이라 한다. [14] 단 이들 또한 포로로 잡은 이슬람 신자들을 유럽 국가에 팔아치우는 행위를 많이 자행했다. 그들의 근거지 중 하나였던 로도스 섬이 주요 노예무역 기지였을 정도로, 이는 기사단의 거대한 사업이자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다. [15] 실제로 이 당시를 그린 지도를 보면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은 'Wild Fields(야생 벌판)'으로 표시되어 있다. [16] 마을 공동체. [17] 이후 칸국의 주요 민족으로서 동유럽 지역에서 노예 무역을 주도하던 크림 타타르는 러시아에 의해 핍박을 받으며 모진 삶을 살아야 했다. [18] 다만 흑인들이 완전히 대가 끊어졌다 할 수 없는 것이 현대 이집트인들과 같은 경우, DNA 검사에서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 사실 이상할 것도 없는것이 누비아(이집트 남부+수단 북부), 아프리카의 뿔 일대(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지부티, 에리트레아)와도 거래가 활발했었고 이 때문에 흑인 상인들이 이집트에 드나드는 경우는 많았기 때문에 흑인과의 혼혈이 광범위하게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아바스 왕조의 중심지였던 이라크에는 다른 아랍 지역에 비해 아프리카계 아랍인들이 가장 많다. [19] 다만 레오폴드 2세의 정책은 이들 아랍인들의 노예무역이 차라리 양반일 정도로 훨씬 더 악질적이었다. 그리고 편의상 식민지로 기술되긴 했으나 사실 콩고 자유국의 초창기 지위는 엄밀히는 식민지도 아니고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사유지에 훨씬 가까웠다. 나중에야 공식적으로 식민지가 된 것. [20] 출처 : 대항해시대(주경철) [21] 흔히들 종교에서 "우리 교리는 ~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낫다!" 라고 주장하는 일이 많은데 그건 어디까지나 교리에서만의 이야기고 실제로는 교리를 왜곡, 확대해석, 개악 등으로 해석하는 측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이용해먹는 일이 다반사다. 그래서 교리가 더 낫네 어쩌네는 결국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슬람 빼면 대부분 시대적 흐름에 맞추려고 하는 편이기에 충돌이 비교적 덜하지만(없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슬람은 그런 노력마저 근본주의 선교사들의 방해를 받기 때문에 이슬람교 내에서도 충돌이 잦지만 이슬람교 외의 그 어떤 것들과의 충돌도 매우 잦다. [22] 당시 일본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농노들이 노예처럼 의복 등에서 '노예상징'을 강요받는 등 노예에 가까운 취급을 받기도 했었다. # [23] 일본인을 유럽인들에게 노예로 수출하는 움직임은 포르투갈인들이 처음으로 타네가시마에 표착한 1540년대 후반 무렵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24] 화약 100kg = 노예 20명 같은 식으로 교환되었다고 한다. [25] 히데요시 초기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을 이어받아 천주교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꿔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는데, 추방령을 내린 동기로는 일본의 천하인으로서 일본의 전통 종교인 불교- 신토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생겼다는 것, 규슈 정벌 중에 구마모토현 아마쿠사 제도(熊本縣 天草諸島) 지방에서 일본 백성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의 행태를 목격한 사건이 주로 꼽힌다. [26] 역사스페셜 2012년 3월 8일 방영분. 31분20초-33분45초 [27]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S.I., 1539~1606)) 입장에서는 관백의 정치적인 태도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1587년의 첫 추방령은 더 큰 광풍에 대한 경고로 보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상인들의 행동도 선교사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아시아 거점지인 마카오와 일본을 오가며 비단과 무기 등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싣고 갔다가 은, 수공예품과 향신료를 싣고 왔는데 거기에는 일본인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관백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승리의 카드’인 포르투갈인들과의 무역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들과의 무역을 위해서는 신부들이 일본에 있어야 했다. 일본인들은 신부들이 없으면 포르투갈 상인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혜경. 〈왜란 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본과 조선 인식 -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 방문을 중심으로 -〉 [28] 베니스의 개성상인은 픽션이지만, 실제 조선인 포로 중 일부가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렸다는 것은 검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29] (이세신궁문고 소장 「어주인사직고격」) [30] Nelson, Thomas (Winter 2004). Monumenta Nipponica (Slavery in Medieval Japan) . Vol. 59 . Sophia University .. p. 463 [31] Jōchi Daigaku. Sophia University (2004). p. 463 [32] 『入門』百六十五頁 [33] 넓게 보자면 이건 일본인 노예 뿐만 아니라, 갑오개혁 이후에도 천민 출신들이 사실상의 머슴살이를 해야 했던 구한말 조선과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원주민 노예 문제 등 곳곳에서 일어나던 일이다. 가령 스페인 제국의 경우 무자비한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16세기에도 노예제가 불법이었으며, 19세기의 미국 남부처럼 법적으로 노예가 용인된 사회가 아니었으며, 다만 법적인 꼼수로 사실상의 노예제가 존속하는 사회였다. [34] 중세 이후부터 벼농사를 지어서 인구부양력이 높았던 데다가 감염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가 다른 지방에 비해 적어서 인구가 과밀한 편이었기 때문에 굳이 노예를 수입할 필요가 없었다. 자체생산이 가능하니 굳이 수입할 일이 없다. 거꾸로 아프리카와 동남아, 중남미 원주민과 같이 노예 주요 수출지역이 되어버렸다. [35] 비슷한 시기 러시아 제국에서는 농노 해방령이 내려졌다. [36] 같은 맥락에서 러시아 제국의 농노제는 과거 농노 출신들에게 해방의 대가로 토지 상환금 명목으로 과도한 부채를 씌워, 새로 건설된 공장과 광산 등에서 중노동을 강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