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1-21 23:17:04

카바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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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31대 샤한샤
𐭪𐭥𐭠𐭲 |카바드 2세
파일:카바드 2세.jpg
제호 한국어 카바드 2세
중기 페르시아어 𐭪𐭥𐭠𐭲
영어 Kavad II
존호 샤한샤
본명 셰로예(Shērōē)
생몰 년도 ? ~ 628년
재위 기간 628년 6월 28일 ~ 628년 9월 6일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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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의 제31대 샤한샤.

2. 생애

590년 바흐람 추빈에게 축출된 뒤 동로마 제국에 망명한 호스로 2세 마우리키우스 황제에게 자신을 복위시켜주면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를 포함한 여러 영토를 넘기고 공물을 받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마우리키우스는 그를 적극적으로 돕기로 하면서, 자신의 딸 마리아를 그와 결혼시켰다. 두 부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셰로예(Shērōē)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호스로는 쿠제스탄 출신의 기독교인 시린을 후처로 들인 뒤 시린이 낳은 막내아들 마르단샤를 애지중지했고, 그를 후계자로 삼기로 작정했다. 급기야 호스로는 셰로예를 모종의 이유로 체포하여 감옥에 가둬버렸다.

628년, 호스로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계속 패했고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로마군이 크테시폰 목전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그는 전쟁을 고집하며 패전한 장수와 장병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노예들을 대거 징집하여 크테시폰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려 들었다. 이에 귀족들은 더 놔두었다간 나라가 망하겠다고 판단하여 6월 23일에서 24일 밤 쿠데타를 일으켜 호스로를 체포하여 요새에 가두고, 그때까지 궁궐 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셰로예를 구출했다. 셰로예는 마르단샤를 비롯한 이복형제들을 모조리 처형하게 했고, 6월 28일 미르 호르미즈드를 시켜 호스로 2세를 처형했다. 하지만 정작 부황을 처형한 그를 "감히 샤한샤를 죽인 죄"를 적용해 처형했다. 그 후 그는 카바드 2세를 칭하며 샤한샤에 즉위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던 시린과 결혼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식을 열기 전에 남편의 무덤에 들어가 추모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해 허락을 받아낸 뒤, 남편의 시신이 들어있는 관 앞에서 독약을 삼켜 죽었다고 한다.

카바드 2세는 즉위 직후 네스토리우스파 주교들로 구성된 사절을 이라클리오스에게 보내 호스로 2세를 폐위하였으며 자신은 평화 협약을 맺기를 갈망한다고 알렸다. 이라클리오스는 배상금 지불, 모든 포로의 석방, 예루살렘에서 탈취한 성십자가 반환, 사산 왕조가 빼앗아간 모든 영토 양도, 수비대와 야전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그는 즉각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이라클리오스는 만족한 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아르메니아 역사가들은 샤한샤가 그동안 전란에 시달렸던 백성들을 위해 3년간 세금을 면제하겠다는 칙령을 발표했다고 기록했다. 네스토리우스파 작가가 쓴 세에트 연대기에 따르면, 샤한샤는 기독교를 공인했으며 심지어 그의 몸에 십자가를 달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후대 역사가들은 신뢰성이 지극히 떨어지는 기록이라고 간주한다. 그가 설령 기독교를 신봉했다고 해도, 제국에 별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재위 2개월여 만인 628년 9월 6일 메소포타미아 인구의 1/4 ~ 1/2를 죽음으로 내몬 쉬라와이흐 역병(Plague of Shirawayh)에 걸려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후 7살의 어린 아들 아르다시르 3세가 즉위하지만, 630년 샤흐르바라즈에게 피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