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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말기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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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말기 왕조
Late Dynastic Period of Egy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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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중왕의 군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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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말기 왕조의 강역[2]
기원전 664년 ~ 기원전 332년
위치 이집트
수도 사이스
멘데스
세베니토스[3]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제정일치
국가 원수 파라오[4]
주요 파라오 캄비세스 2세
다리우스 1세
넥타네보 2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다리우스 3세
언어 고대 이집트어
종교 고대 이집트 종교
주요 사건 기원전 664년 이집트 제26왕조 시작
기원전 525년 1차 페르시아 침략, 이집트 제27왕조 시작
기원전 404년 이집트 제28왕조로 독립
기원전 398년 이집트 제29왕조 시작
기원전 380년 이집트 제30왕조 시작
기원전 343년 2차 페르시아 침략으로 이집트 제31왕조 시작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성립 이전 제3중간기
멸망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clearfix]

1. 개요

네가 믿는 이집트는 부러진 갈대에 불과하다. 그것을 지팡이처럼 믿는다마는 그것을 잡았다가는 도리어 손만 베일 것이다. 이집트 왕 파라오는 자기를 믿는 모든 자들을 그렇게 대한다.[5]
BC 701년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 유다 임금 히즈키야에게. (열왕기하 18장 20-21절, 공동번역)
기원전 664년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지속된 고대 이집트의 시대 구분. 제26왕조부터 제31왕조까지가 이집트 말기 왕조에 해당한다.

신왕국이 멸망한 이후, 혼란기인 제3중간기가 찾아왔다. 결국 중동의 강대국 아시리아 제국이 분열된 이집트를 침공하고 봉신 국가인 제26왕조를 세우면서 외세의 간섭기인 제26왕조가 시작된다. 그러나 아시리아도 아슈르바니팔 왕 사후 무너지기 시작했고, 제26왕조 시기의 이집트는 아시리아의 잔재를 흡수한 신바빌로니아, 그 다음에는 아케메네스 왕조와 연달아 싸워야만 했다. 결국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샤한샤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침공하여 파라오 프삼티크 3세를 쳐내고 이집트를 정복했다. 이 페르시아의 제1차 통치기를 제27왕조라 부르며, 이 시대의 파라오들은 곧 페르시아의 황제들과 동일한 의미였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왕이 바뀔 때마다 계승 분쟁이 일어나면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이질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어 페르시아에 도저히 동화되기가 힘들었던 이집트에서는 계속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시대에 이집트인들은 제28왕조를 세워 독립해 나가는 데 성공했다.

페르시아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어낸 제28왕조였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바로 제29왕조로 교체되었다. 제29왕조는 최대 적국인 페르시아를 끝없이 견제하며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다. 페르시아가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을 치르며 국력이 약화되자 이집트는 기회를 노려 그리스와 동맹을 맺는 등 페르시아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고, 사사건건 페르시아가 하는 일에 딴지를 걸며 신경을 긁었다. 제29왕조를 쫒아내고 들어선 제30왕조 역시 페르시아를 싫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제30왕조의 파라오 테오스가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다가 국민들의 원성을 사 쫒겨나고 최후의 토착인 파라오 넥타네보 2세가 즉위했다. 넥타네보 2세는 필사적으로 페르시아와 맞서 싸웠으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압도적인 물량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펠루시움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쫒겨났다. 이로써 제30왕조가 멸망하고 페르시아의 제2차 점령기인 제31왕조가 다시 들어섰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로 들어오면서 제31왕조는 11년 만에 끝났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요절하자 그의 제국은 휘하 장군들에게 분할되었고, 그중 이집트 지방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획득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건국하면서 이집트 말기 왕조도 종식되었다.

2. 역사

2.1. 이집트 제26왕조(사이스 왕조)

이집트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던 신왕국의 멸망 이후, 수많은 군벌 세력들이 난립한 제3중간기가 도래했다. 누비아 쿠시 왕국 출신의 제25왕조가 일시적으로 혼란스러운 이집트를 통합했으나, 얼마 가지 못해 중동의 강대국 신 아시리아 제국이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제25왕조는 멸망했다. 이집트를 정복한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 왕은 이집트를 직접적으로 통치할 생각은 없었고, 대신 부유한 이집트 도시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선에 만족했다. 결국 아슈르바니팔은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서 나고 자란 프삼티크 1세를 자신의 대리인이자 이집트의 파라오로 내세워 이집트를 봉신국으로 만드니, 이것이 바로 제26왕조의 시작이다. 제26왕조가 사이스를 수도로 삼았기에 학계에서는 사이스 왕조, 혹은 상인 왕조라고도 부른다. 어찌되었든 프삼티크 1세는 아시리아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 전역을 다스리는 파라오가 되어 아시리아를 충실히 섬겼다. 프삼티크 1세는 즉위 후 약 2년 정도는 아시리아의 권위를 빌어 나름 이집트를 제어할 수 있었으나, 2년 후에 각지에서 대거 반란이 일어나면서 멤피스를 빼앗기는 등 위기를 맞게 되었다. 프삼티크 1세는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에 위치한 리디아 왕국의 왕 기게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시리아는 자신들이 요청했던 동맹 요청을 기게스가 거절했기에 그와 프삼티크 1세의 동맹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별다른 제지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프삼티크 1세는 기게스가 보낸 리디아군의 도움을 받아 반란 세력들을 평정하고 다시 이집트를 수복했다. 그는 기게스에 대한 보답으로 리디아 상인들에게 나일 강 삼각주와 누비아쪽의 무역권 및 통행권을 보장하면서 특권을 부여했고, 기게스의 군사 원조는 기원전 658년까지 계속되었다. 재위 9년에는 상이집트 지방의 테베에 사신을 보내 제25왕조의 개창자인 피이의 딸이자 당시 아문의 대신녀였던 셰페누페트 2세에게 자신의 딸 니토크리스 1세를 양녀로 맞아들일 것을 권유했다. 후계가 없었던 셰페누페트 2세는 이를 받아들였고, 테베의 귀족들도 이를 수락하면서 프삼티크 1세는 마침내 오랜 갈등을 봉합하고 상•하 이집트 전체를 통합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프삼티크 1세는 리비아의 유목민들과 전쟁을 벌이고 요새를 세우는 등 막 혼란에서 벗어난 이집트를 재건하는 작업에 몰두했고, 이집트 왕국은 덕분에 제3중간기 시절의 전란에서 탈출했다. 프삼티크 1세의 재위 중후반기에 아시리아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아슈르바니팔 왕이 사망하자 아시리아는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시리아가 쇠락하자 스키타이인들이 레반트와 중동에서 활개를 쳤고, 바빌로니아 지방에서는 다시 반란의 징조가 보였다. 충실한 아시리아의 신하였던 프삼티크 1세는 아시리아와의 신의를 지켜 원군을 파병하는 등 끝까지 아시리아의 충복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집트 바로 코앞까지 온 스키타이인들에게 화평을 제안하고 다시 돌려보내는 등 유연한 외교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기원전 610년에 프삼티크 1세가 사망하자 네카우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제26왕조의 제2대 파라오로 즉위했다. 네카우 2세가 즉위할 당시 중동의 정세는 굉장히 혼란스러웠는데, 오랫동안 지역의 패권을 지켜온 아시리아가 몰락하면서 권력의 공백이 생겨나게 되었고, 온갖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때 킴메르인, 스키타이인, 신바빌로니아 등이 득세하며 서로 다투었다. 아시리아의 잔여 세력은 하란을 수도로 삼고 저항했으나 이미 한 줌에 불과했고, 아시리아는 완전히 일대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렸다. 네카우 2세는 즉위하자마자 아시리아에게 원군을 보내기도 했으나 곧바로 반란군들에게 제압당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아시리아가 하란마저 잃어버리며 진짜로 멸망할 것 같자 기원전 609년 봄, 네카우 2세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 일대로 건너갔다. 그는 이스라엘 부근에서 요시야 왕이 이끈 이스라엘 군대 및 신바빌로니아 군대와 전투를 벌여 요시야 왕을 죽이는 등 군공을 세웠고,[6] 얼마 지나지 않아 카데시를 점령한 뒤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우발리트와 합류하여 하란을 공성했다. 그러나 네카우 2세와 아슈르-우발리트의 하란 공성전은 실패했고, 네카우 2세는 이집트로 회군했다. 하란 공성전 실패 이후의 아슈르-우발리트에 대한 기록은 아예 없다.

네카우 2세는 이집트로 회군하는 길 도중 요시야 왕이 죽고 그 후계로 여호아하즈가 즉위한 것을 발견하고서 그를 쫒아내고 대신 여호야김을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 열왕기>에 의하면 네카우 2세는 폐위된 여호아하즈를 이집트로 데려왔고, 여호아하즈는 이집트에서 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이 시점에도 이집트군 일부가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신바빌로니아의 초대 국왕 나보폴라사르가 쿠무크 지방을 점령하며 이집트 군대의 회군로를 차단하자 네카우 2세는 4개월에 걸친 쿠무크 공성전을 벌였다. 결국 쿠무크는 다시 이집트의 손에 떨어졌다. 나보폴라사르는 다시 군대를 모았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바빌론으로 후퇴했고, 기원전 606년 이집트는 리더가 없던 신바빌로니아를 공격해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승전보가 연달아 날아들자 네카우 2세는 옛 이집트 신왕국 시절의 광대한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시리아, 팔레스타인, 레반트 일대를 상대로 공세를 벌였다. 그러나 나보폴라사르의 후계자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이집트 군대를 몰아내고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장악하면서 파라오의 꿈은 무참히 깨지고야 말았다. 네카우 2세는 신왕국의 영토 수복에 실패했고, 이후 홍해 지중해를 잇는 거대한 운하 건설을 시도하거나 페니키아로 함대를 파견하는 등 이집트 통치에 만족하다가 기원전 595년에 사망했다.

네카우 2세의 후계자 프삼티크 2세는 6년간 재위했다. 프삼티크 2세는 짧은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다시 세력을 키운 쿠시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누비아로 원정을 떠나 쿠시 군대를 격파하여 누비아인들에게 다시 이집트를 정복해보겠다는 야망을 산산조각내버렸다. 이집트 군대는 쿠시 왕국의 수도 나파타를 치열한 싸움 끝에 함락했고, 파라오는 나파타를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이 약탈이 워낙에 철저했기에 쿠시 왕국은 완전히 짓밟혔고 다시는 이전의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누비아를 정복한 프삼티크 2세는 누비아를 통치할 마음은 없었기에 다시 이집트로 돌아갔고, 이집트와 누비아 사이의 국경은 이전과 똑같은 나일 강의 제1폭포 부근으로 유지되었다. 프삼티크 2세는 정복 활동 외에도 많은 수의 신전들을 세웠는데, 제26왕조 시절 지어진 신전들 중 대다수가 이때 지어진 것이다. 그는 헬리오폴리스에 21.79m에 달하는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짓는가 하면 필레 섬에 필레 신전을 짓기도 했다.[7] 프삼티크 2세 시절 건립된 건물들 중 유난히 현대까지 보존된 것들이 많아 이집트의 고대 건축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군주이기도 하다. 기원전 589년에 프삼티크 2세가 사망하자 와히브레가 제4대 파라오로 즉위했다. 약 19년 간 재위한 와히브레는 군사적으로 처참한 성적을 보였던 왕이었다. 신바빌로니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8] 누비아에 그리스계 도리아인들이 침입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군대 내에서는 항명이 일어나 내분이 발생했고, 결국 군사령관 아흐모세 2세가 새로운 파라오로 즉위했다.

와히브레가 연달아 패전하면서 이미 이집트 군대 내에서는 파라오에 대한 반감이 만연한 상태였다. 게다가 군대 내부에서는 외국계 용병들과 이집트 군인들이 갈등을 일으키며 분란이 일어났다. 결국 반란이 일어나 아흐모세 2세가 스스로를 파라오로 부르며 즉위했고, 군권을 빼앗긴 와히브레는 국외로 도망가 신바빌로니아의 힘을 빌어 왕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아흐모세 2세와의 전투 도중 전사했다.[9] 아흐모세 2세는 페르시아에 의한 이집트 정복 이전의 마지막 위대한 파라오로 여겨진다. 와히브레를 꺾으며 기반을 확고히 한 아흐모세 2세는 군사적으로는 위대한 군주였으나, 한편으로는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침공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했다고도 알려져 있다.[10]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11]가 아흐모세 2세에게 유능한 의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아흐모세 2세는 의사 한 명을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가족을 이집트에 두고 홀로 페르시아로 보내진 의사는 아흐모세 2세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고, 아흐모세 2세가 딸을 지극히 아낀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의사는 캄비세스 2세와 친해진 뒤 그에게 아흐모세 2세의 딸을 왕비로 맞으라고 살살 꼬드겼다. 캄비세스 2세는 의사의 말에 넘어가 아흐모세 2세에게 동맹 강화를 위한 결혼 요청을 했다. 딸이 포로로 잡힐 것을 우려한 아흐모세 2세는 일부러 전대 파라오인 와히브레의 딸을 자신의 딸로 위장시켜 보냈다. 그러나 와히브레의 딸이 캄비세스 2세에게 자신의 정체를 폭로했고, 당연히 격노한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침공했다는 것이다.

군사적으로는 분명 능력이 뛰어났던 아흐모세 2세였기에 그의 재위기간 이집트 왕국은 키프로스 섬과 북아프리카의 키레네, 리비아 일대를 포함해 지중해 너머의 그리스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특히 아흐모세 2세는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들과 교류를 촉진했고, 그리스와의 활발한 대지중해 무역으로 이집트의 부는 급속도로 불어났다. 이집트인들은 지중해 곳곳에 식민 교류지를 설치하고 무역을 진행했으며 덕분에 당대 이집트를 방문했던 그리스인들이 이집트의 부에 대해 찬사를 남길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아흐모세 2세의 시대에 이집트가 풍요를 누리고 있었던 반면, 시나이 반도 너머의 중동 지방에서는 또다시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 시대 이래로 패권국이었던 신바빌로니아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 키루스 2세에 의해 멸망하면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대폭 성장했다. 키루스 2세의 탁월한 군사적 능력 덕분에 페르시아의 힘은 날로 강해졌고, 리디아와 신바빌로니아 등 중동에서 그나마 페르시아에 맞설 만한 적수들이 모조리 사라지자 페르시아의 다음 타겟은 자연스레 이집트로 향했다. 아흐모세 2세의 말년 이집트는 점차 커져만 오는 페르시아의 위협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 이때 이집트가 누린 평화와 부는 사실상 페르시아가 침략해 들어오기 직전 폭풍전야의 고요였던 셈이었다.

2.2. 이집트 제27왕조 ( 아케메네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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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모세 2세가 사망하자 프삼티크 3세가 왕위를 이었으나 그는 겨우 6개월 밖에 재위하지 못했다. 프삼티크 3세가 파라오가 되자마자 아케메네스 왕조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프삼티크 3세가 즉위한 직후 남부의 테베 지방에 막대한 양의 비가 내렸는데 이는 굉장히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집트인들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가 들어오면서 그 예언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페르시아인들은 기원전 525년 아랍인의 도움을 받아 사막을 건너 이집트를 침략했다. 전투 도중 신하의 배반으로 대패한 프삼티크 3세는 멤피스로 도망쳤으나, 기나긴 공성전 끝에 멤피스가 함락되면서 프삼티크 3세는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멤피스를 함락하고 이집트를 정복한 캄비세스 2세는 2,000여 명에 달하는 귀족들을 처형하고 파라오의 아들과 딸을 비롯한 왕족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프삼티크 3세 본인은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필사적으로 거지 행세를 하면서 살아남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미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목숨을 건진 프삼티크 3세는 은밀히 반란을 기획해 캄비세스 2세를 살해하려 시도했으나 이 음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들통나고야 말았다. 파라오는 사슬에 묶인 채로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로 끌려갔고, 그 곳에서 결국 자살했다. 이로 인해 제26왕조가 비참하게 끝나고, 이후 이집트에는 페르시아의 지배가 이어졌다. 프삼티크 3세 이후 들어선 페르시아의 샤한샤(황제)들이 스스로 파라오를 자칭했기에 페르시아의 통치기를 제27왕조라 부른다.

페르시아의 통치기인 제27왕조는 기원전 525년부터 기원전 404년까지 약 120 여년 간 이어졌다. 이 시대의 파라오들은 곧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샤한샤들과 동일하다. 프삼티크 3세를 꺾어버린 캄비세스 2세는 기원전 525년 여름 이집트에서 대관식을 올리며 파라오로 즉위했다. 이후 이집트는 키프로스, 페니키아 등과 함께 페르시아 제국의 한 지방으로 전락했고 아리얀데스가 제1대 사트라프가 되었다. 캄비세스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에서는 옛 종교들이 탄압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멤피스 테베, 그리고 헬리오폴리스 등의 대신전들이 무너져내렸고, 옛 신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중지되었으며 매년 열리던 축제도 멈추었다. 캄비세스 2세는 약 3년 정도 이집트에 머무르다가 기원전 522년 페르시아로 귀환했다. 캄비세스 2세가 귀환 도중 길에서 객사하자 그의 형제였던 바르디야가 새로운 페르시아의 황제가 되었다.[12] 그러나 바르디야의 신원을 의심한 다리우스 1세가 바로 쿠데타를 일으켜 바르디야를 몰아내고 황좌를 거머쥐었고, 그해 9월 페르시아의 샤한샤이자 동시에 이집트의 파라오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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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1세 이집트를 정복한 캄비세스 2세[13]
기원전 522년 후반 즈음에 왕족 출신의 한 남자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를 페디바스테트 3세로 부르며 파라오를 자칭했다. 페르시아의 혹독한 세율에 신음하던 이집트인들의 호응으로, 이 반란은 지역 총독 선에서 정리할 수 있는 단계를 벗어나게 된다. 상황의 심각성을 직감한 다리우스 1세는 세율을 낮추고 이집트의 옛 종교를 존중할 것을 천명하며 이집트에 페르시아 군대를 이끌고 들어왔다. 이에 이집트인들이 순응하면서 반란은 자연스럽게 소멸했다.

다리우스 1세는 선왕 캄비세스 2세보다 훨씬 이집트의 내정에 관심이 많았다. 이집트에 법전을 만드는가 하면 홍해와 내륙의 호수를 잇는 운하를 완공하여 통행을 자유롭게 만들었고, 이집트의 기술자들을 데려다가 페르시아의 왕궁을 건축하는 데 써먹기도 했다.[14] 다리우스 1세는 이집트 총독 아리얀데스를 부정부패 혐의로 처형하는 등 기강을 잡으며 이집트인들의 신망을 얻었고,[15]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 전통 신앙을 탄압했던 것과는 달리 이집트 종교에 대해 거의 탄압을 가하지 않으면서 이집트를 안정적으로 통치했다. 나름 명군이었던 다리우스 1세는 약 36년 간 이집트를 다스렸고, 그가 기원전 486년에 사망하자 크세르크세스 1세가 새로운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었다.

샤한샤 교체기에 이집트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문화가 이질적이었던 페르시아가 완전히 이집트를 흡수하는 것은 무리였다는 의미였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반란군들을 무너뜨렸다. 이후 페르시아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군비가 필요해지자 크세르크세스 1세는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던 이집트에서 엄청난 양의 황금을 끌어다 썼다. 세율은 크게 올라갔고 페르시아가 본국으로 가져가는 금의 양은 이전과 비교하기가 힘들 정도로 증가했다. 게다가 크세르크세스 1세는 이집트의 전통 신앙을 존중하는 일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는데, 때문에 그의 재위기에는 신전 건축에 지원금을 주지도 않았으며 페르시아의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가 기존의 이집트 만신전보다 우월하다고 포교하는 등 본격적인 종교 탄압 정책이 이루어졌다. 한편 크세르크세스 1세가 이집트를 비롯해 수많은 속주들로부터 금을 끌어모아 그리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그의 마음같이 흘러가지 않았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군에게 패배를 거듭했고, 결국 샤한샤가 아르타바누스에게 암살당하면서 크세르크세스 1세의 이집트 통치 역시 함께 막을 내렸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암살당하고 페르시아가 혼란에 빠지자 이집트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리비아의 추장 출신인 이나로스 2세가 반란을 일으켜 대도시 멤피스를 장악하고 페르시아 총독을 살해하면서 이집트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게다가 이나로스 2세는 한창 페르시아를 이겨 기세등등하던 아테네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에 판세는 막상막하로 보였다. 그러나 내분을 수습하고 새로운 샤한샤로 즉위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바로 메가비주스 장군을 이집트에 파견했고, 그가 기원전 454년경에 이나로스 2세와 반란군을 꺾으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메가비주스는 이나로스 2세에게 만일 항복한다면 죄를 묻지 않고 목숨도 보장할 것이라고 회유했다. 이나로스 2세는 이를 믿고 페르시아군에 항복했으나, 후환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결국 이나로스 2세를 처형했다.

기원전 424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사망한 후 즉위한 크세르크세스 2세는 고작 45일 밖에 재위하지 못했다. 크세르크세스 2세를 암살한 소그디아누스 역시 그의 형제이자 훗날 다리우스 2세로 즉위하는 오쿠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다리우스 2세는 기원전 424년부터 기원전 404년까지 약 20년 정도 이집트의 파라오로 재위했다. 그러나 이미 연속된 황족간 내분으로 페르시아의 이집트 장악력은 확연히 떨어져 있었고, 기원전 405년경 크레타의 도움을 받은 아미르타이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파라오를 칭하고 제28왕조를 열면서 제27왕조가 끝이 났다.[16]

2.3. 28, 29, 30왕조

아미르타이우스가 페르시아를 내쫒고 제28왕조를 세우면서 이집트는 다시 독립기를 맞이했다. 이집트는 기원전 404년부터 기원전 343년까지 대략 60년 정도 짧은 독립기를 누렸는데, 이 기간 동안 이집트 출신의 파라오들로 구성된 제28왕조, 제29왕조, 제30왕조가 연달아 등장했다. 페르시아의 총독을 추방하고 새로운 파라오로 즉위한 제28왕조의 아미르타이우스는 다른 이름으로 프삼티크 5세라고도 불린다. 사이스에서 태어난 아미르타이우스는 기원전 411년부터 다리우스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게릴라 전술로 페르시아 군대를 괴롭혀온 인물로, 다리우스 2세가 죽으면서 페르시아 제국이 본격적으로 흔들리자 바로 대관식을 치르고 파라오를 자칭했다. 파라오가 다시 등장했다는 소문에 화들짝 놀란 다리우스 2세의 후계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바로 진압군을 편성해 이집트로 보내려 했으나, 그의 동생이었던 소(小) 키루스와의 정치적인 갈등으로 인해 내분을 빚으면서 이집트 원정을 취소할 수 밖에 없었다. 페르시아 군대가 남아있던 남부 상이집트에서는 여전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이집트의 파라오로 인정받았으나 나일 강 삼각주를 포함한 부유한 북부 하이집트 일대는 모조리 아미르타이우스가 장악했다. 그러나 아미르타이우스의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가지 않아 내전이 발발해 멘데스 출신의 네파루드 1세가 왕위를 찬탈했고, 아미르타이우스는 기원전 399년 10월에 멤피스에서 처형당했다.

아미르타이우스를 꺾고 새로운 파라오가 된 네파루드 1세제29왕조의 시작으로 친다. 아미르타이우스 처형 직후 파라오로 즉위한 네파루드 1세는 수도를 사이스에서 그의 고향 멘데스로 천도했다. 네파루드 1세는 6년이라는 짧은 세월 밖에 재위하지 못했으나 상이집트 일대까지 진출하고, 오랜 세월 방치된 테베의 카르나크 대신전을 일부 복구하는 등 건축물들을 지으며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알리려고 애썼다. 또한 최대의 적국이었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를 견제하는 데 아주 열심이었는데, 한창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스파르타 아게실라오스 2세에게 원조를 해주거나 곡물들을 퍼주는 등 막대한 도움을 주기도 했다. 네파루드 1세는 스파르타에 대한 원조의 일환으로 스파르타가 한창 페르시아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던 로도스 섬에 50만 갤런에 해당하는 밀을 함대에 실어보냈다. 그러나 이집트 보급함대가 도착하기 바로 직전 로도스가 페르시아의 손에 떨어졌고, 이집트 함대가 가지고 있었던 밀은 주위에 있었던 아테네 함대가 유유히 실어갔다고 전해진다. 네파루드 1세는 기원전 393년 겨울에 사망했다.

네파루드 1세가 죽자 아들 하코르가 왕위에 올랐으나 1년 만에 프삼무테스에 의해 쫒겨났다. 그러나 하코르는 바로 직후 전열을 재정비하고 찬탈자 프삼무테스를 몰아냈으며, 왕좌를 회복한 이후에는 자신의 재위 원년을 그대로 표기하면서 마치 프삼무테스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했다. 왕좌에 다시 오른 하코르는 짧디짧은 제29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이었다. 그는 13년 정도 재위했는데, 이는 단명한 제29왕조가 존속한 세월의 절반이 넘는 기간이었다. 그는 카르나크에 아문 라에게 바치는 신전을 추가하는가 하면 사카라, 테베 등 상이집트 일대에도 건축물들을 연이어 건설했다. 특히 그는 아직도 상이집트 지방에 남아있었던 페르시아의 잔존 세력들을 싸그리 몰아내고 통일 이집트를 이룩하는 업적을 남겼다. 외교적으로는 전임자 네파루드 1세의 정책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여 페르시아를 견제하고 그리스 원조를 계속했다. 하코르는 키프로스 섬의 이바고라스 1세의 반란을 도와주면서 페르시아의 신경을 긁었고, 이에 그리스와 소강 상태에 들어간 페르시아는 후방에서 시시건건 거슬리던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페르시아는 약 기원전 385년경에 이집트에 공세를 펼쳤으나 곧 격퇴당했다. 이후 페르시아는 그리스, 이집트에서 손을 떼고 제일 약한 키프로스를 집중 공격했다. 대제국의 공세를 버틸 수 없었던 키프로스는 이바고라스 1세가 직접 이집트에 방문하면서까지 원조를 구걸했으나 결국 거절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에 정복당했다. 하코르는 키프로스 함락 이후에도 아테네 등과 동맹을 맺으며 페르시아를 견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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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네보 1세 넥타네보 2세
기원전 379년에 하코르가 세상을 떠났다. 하코르의 아들 네파루드 2세가 제29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즉위했으나 4개월 만에 넥타네보 1세의 반란으로 쫒겨났다.[17] 넥타네보 1세는 제29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인 제30왕조를 세우니, 이 제30왕조가 바로 최후의 고대 이집트계 토착 왕조였다. 장군 출신이었던 넥타네보 1세는 탁월한 건설자이자 군주였다. 그는 지난 몇 백년 간 이집트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규모로 복구 작업을 실시했고, 덕분에 이집트는 몇 세기만에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그는 아스완 근처의 필레 섬에 신전을 지었으며 덴데라에도 조그만 장례 신전을 개축했다. 또한 살아있는 동물들을 신의 화신으로 숭배하는 풍습과 동물들을 미라로 만드는 관행 역시 그의 재위 시기에 대대적으로 행해졌다. 넥타네보 1세는 사제들에게 대단히 관대한 군주였는데, 나중에는 사이스와 그 일대에서 걷은 세금의 10% 이상을 신전에 기부할 정도로 신관들에게 돈을 퍼주었다고 전한다. 기원전 374년에는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또다시 이집트를 침공했다. 그러나 재위 직후부터 6년 넘게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해온 이집트인들은 결국 200,000명에 달하는 페르시아의 대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고, 페르시아의 야욕은 또다시 무위로 돌아갔다.[18]

페르시아의 대침공을 막아내고 이집트를 복구한 넥타네보 1세는 기원전 361년 재위 19년 만에 사망했다. 이미 넥타네보 1세 시기에 공동 파라오로 즉위하며 예비 왕위계승자로 지명되어 있었던 테오스가 그의 뒤를 이어 새로운 파라오가 되었다. 전임자인 넥타네보 1세가 나일 강 유역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격퇴한 것에 고무되어 있었던 테오스는 페르시아가 소아시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틈을 타 옛 영토인 팔레스타인 시리아 일대를 노렸다. 그는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 2세와 아테네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내전과 페르시아의 식민 지배에서 아직 완벽히 회복하지 못한 이집트가 곧바로 대원정을 하는 것은 무리였기에 테오스는 원정을 위해 곳곳에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다. 심지어 넥타네보 1세가 신전에 바쳤던 공물과 보물들마저 다시 뜯어냈는데, 이는 신관과 귀족 계급들을 포함해 국민들의 엄청난 원성을 샀고, 테오스의 지지는 땅에 떨어졌다. 테오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스에 꾸려진 원정대에 합류하기 위해 자신의 혈족인 동생 차하피무와 조카에게 내정을 맡기고 출국했다. 그러나 차하피무 왕자는 지나친 징세로 인해 이집트 내부에서 불만이 굉장히 많다는 걸 알고 있었고 사제 계급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의 아들에게 파라오에 즉위할 것을 권유했다. 이 결과 즉위한 파라오가 넥타네보 2세로 고대 이집트 혈통의 마지막 군주이자 파라오다.

쿠데타를 일으켜 해외에 잇는 테오스를 부정하고 파라오로 즉위한 넥타네보 2세는 테오스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혹시나 테오스가 세력을 불려 돌아올 것을 두려워한 넥타네보 2세는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 2세에게 공문을 보내 테오스를 송환해줄 것을 요구했는데, 아게실라오스 2세는 한창 원정대의 주도권을 두고 테오스와 내부적으로 싸우고 있던 와중이라 흔쾌히 승낙했다. 아게실라오스 2세마저 자신을 버리자 끈이 떨어져버린 테오스는 결국 갈곳없이 헤매다가 페르시아로 망명했다. 그러나 넥타네보 2세가 테오스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하자 페르시아는 별 말없이 테오스를 그대로 사슬에 묶어 이집트로 송환시켰고, 테오스는 이집트에서 처형당했으며 넥타네보 2세가 완전히 정당한 파라오로 등극했다. 넥타네보 2세의 20년 정도의 재위 기간 동안 이집트는 나름대로 안정적인 세월을 보냈다. 넥타네보 2세는 즉위하자마자 테오스 시절 이반한 신관들의 환심을 되돌리기 위해 신전들에 막대한 지원을 해주었다. 외적으로는 끊임없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와 충돌했는데, 선대 파라오인 테오스가 무리한 해외 원정을 계획했다가 자신에게 정권을 내줬다는 걸 반면교사로 삼아 직접적인 원정 대신 레반트 일대의 도시국가들과 스마트하게 밀당을 하는 외교전을 벌였다.

결국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기원전 344년 그리스에 사절단을 보내 이집트를 공격할 연합군을 구성할 군대를 요청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사절단을 예를 갖추어 맞았으나 군대 파병에는 부정적이었고, 그나마 테베 정도가 1,000명, 아르고스가 300명의 중장보병을 파견했다. 페르시아-그리스 연합 대군은 기원전 343년 이집트로 진군했는데, 1차전에서 페르시아를 격퇴했었기에 이번에도 8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수비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집트군에는 약점이 있었는데 경험많은 지휘관들이 부족했고 토착 이집트인, 그리스인, 누비아인 등 여러 민족에 섞여있었다. 페르시아의 지휘관인 로도스의 멘토르가 이 점을 이용해 불화를 일으키는 방법을 쓰자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기원전 342년 겨울 멤피스에 입성했고 넥타네보 2세는 상이집트를 거쳐 누비아로 도망쳤다. 그의 이후 행보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19] 이렇게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다시 이집트를 재정복하면서 아케메네스 왕조의 두 번째 지배기가 시작되었다.

2.4. 이집트 제31왕조 ( 아케메네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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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루시움 전투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최후의 토착 파라오이자 제30왕조의 넥타네보 2세를 패배시키고 다시 이집트를 페르시아의 영향권하에 편입시키면서 이집트의 짧은 독립기간은 끝이 났다. 이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다시 이집트를 지배하게 되는데, 이 시기의 이집트를 제31왕조라고 부른다. 즉 제31왕조와 앞의 제27왕조는 같은 아케메네스 왕조로, 이 시기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샤한샤가 곧 이집트의 파라오였다. 다만 120년 넘게 지속되었던 제27왕조와는 달리 제31왕조, 즉 아케메네스 왕조의 두 번째 점령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기원전 343년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밖에 지속되지 않았던 것이다. 기원전 343년에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330,000명의 페르시아 병사, 14,000여 명의 그리스 파견군, 로도스에서 온 4,000명의 병사들로 구성된 엄청난 대군을 거느리고 이집트를 침략했다. 넥타네보 2세 역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침략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기에 착실히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해오고는 있었지만, 압도적인 물량과 공세로 승부하는 페르시아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특히 그리스의 노련한 노장들이 즐비했던 페르시아 군대와는 달리 이집트에는 상대적으로 숙련된 장군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넥타네보 2세는 펠루시움 전투에서 대패하고 멤피스로 달아났다.

당시 이집트의 도시와 성들을 방어하던 병사들은 그리스인들과 이집트인들이 섞여 있었다. 당연히 다른 민족들이 어거지로 섞여 있었으니 불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고, 이를 간파한 페르시아군 장교들이 이 불화를 이용하면서 이집트의 요새 도시들은 빠르게 페르시아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페르시아 군대는 각자 수많은 도시들을 격파하고 천천히 멤피스로 진군했다. 더이상 승기가 보이지 않자 넥타네보 2세는 최후의 결단을 내려 이집트를 포기하고 에티오피아 지방으로 달아나기로 결심했다. 페르시아 군대는 나일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철저하게 이집트를 약탈했고, 넥타네보 2세의 도망으로 구심점을 잃어버린 이집트는 얼마 가지 않아 모두 페르시아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이집트 점령 이후 확실한 보복에 나섰다. 이집트의 모든 성벽들을 헐어 버렸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끌고 갔고 신전이든 왕궁이든 할 것 없이 모조리 약탈하며 막대한 양의 재화를 훔쳐갔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다시는 이집트가 반란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짓밟아주어야 한다고 여겼기에 이집트에 초고세율의 세금을 때리고 신성한 경전이나 옛 파라오의 왕릉들을 불태우고 파헤쳤다. 그는 약탈이 끝나고 페렌다레스를 이집트의 총독으로 세웠고, 약탈한 금으로 용병들에게 봉급을 지급한 다음 이집트를 떠났다.

그러나 페렌다레스를 포함한 이집트 총독들의 통치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기원전 338년에 사망한 이후 페르시아는 다시 내분에 휩싸였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의 2년 정도의 짧은 재위 이후 페르시아에서는 기원전 336년에 다리우스 3세가 새로운 샤한샤가 되었다. 다리우스 3세가 임명한 사바체스 총독이 이수스 지방에서 반란군과 싸우다 전사하자 마자체스가 후임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다리우스 3세는 즉위 4년 만에 한창 발흥하던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대패하여 비참하게 생을 마쳤고, 샤한샤가 사망하자 이집트 총독 마자체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저항없이 이집트를 넘겨주었다. 이로 인해 11년에 걸친 제31왕조가 끝나고 이집트에는 그리스에서 유래한 헬레니즘 제국이 들어섰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33세의 젊은 나이에 바빌론에서 병사하자 그의 휘하 장군들이 알렉산드로스 3세의 제국을 분할해서 나누어 가졌다. 이집트 지방을 차지한 사람은 알렉산드로스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 1세였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개창하면서 이집트 말기 왕조가 종결되었다.

3. 관련글


[1] 크세노폰에 따르면 대제 키루스 2세 때부터 날개를 펼친 수리를 왕중왕의 군기로 썼다. 위 그림의 문양은 페르세폴리스에서 발견된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타일 유물에서 따온 것이고, 색상은 다리우스 3세가 붉은 바탕에 황금색 수리가 그려진 군기를 썼다는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의 기록과 폼페이의 '알렉산더 모자이크' 유물의 색상을 따른 것이다. [2]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 이후 오리엔트 제국가들의 모습. 보라색 영토가 이집트 말기 왕조의 땅이다. [3] 현재의 사만누드 지방 [4] 제27왕조와 제31왕조 시대에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황제, 즉 왕중왕이 겸임. [5] 말기 왕조 시대가 시작하기 직전의 초라해진 이집트 국력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썩은 동아줄에 불과한 이집트를 믿고 나대지 말라는 소리. 실제로 바로 얼마 안가서 아시리아의 봉신 왕조인 26왕조가 이집트에 들어선다. [6] 당시 왜 요시야 왕이 굳이 이집트 군대 앞을 막아섰는지에 대해서는 이유가 불분명하다. 네카우 2세도 그 이유를 몰랐던지, 전투 시작 직전 '유다의 왕이여 왜 나의 앞을 가로막는가? 나는 그대를 보러 온 것이 아니노라'라는 내용의 친서를 보내기까지 했다. [7] 이 필레 신전은 아직도 남아있으며 고대 이집트 시절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신전들 중 하나로 평가받아 그 고고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8] 이로 인해 유대인들이 단체로 바빌로니아로 끌려가는 바빌론 유수가 일어났다. [9] 아흐모세 2세는 파라오의 예를 갖추어 와히브레를 매장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무덤은 사이스에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10] 해당 내용은 모두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기술한 내용이다. [11] 키루스 대왕이라는 말도 있다. [12] 동시대의 학자들은 새 황제로 즉위한 인물이 바르디야가 아니라 비왕족 출신인 가우마타라고 주장했다. 가우마타가 이미 죽은 바르디야를 참칭하며 제위를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13] 프삼티크 3세를 포로로 잡은 페르시아 샤한샤의 모습 [14] 그러나 이로 인해 엄청난 수의 기술자들이 국외로 유출되면서 이집트의 기술력은 이전보다 한참 낮아지고야 말았다. [15] 실제 이유는 아리얀데스가 독자적으로 동전과 화폐를 발행했기 때문이었다. 고대 세계에서 이름과 얼굴이 들어간 화폐를 찍어낸다는 것은 곧 왕권과 직결된 일이었고, 총독에 불과한 아리얀데스가 이 짓을 했다는 것은 충분히 반역죄가 성립될 만한 일이었다. [16] 다리우스 2세의 후계자였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당연히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내부적으로 형제 간에 내전이 일어나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처했기에 이집트 수복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미온적인 대처로 이집트는 페르시아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17] 이미 하코르의 재위 말년에 이집트 곳곳에서 반란이 터져나오고 있던 시점이었다. [18] 당시 페르시아 군대는 아테네의 장군 이피크라테스와 페르시아 출신의 파르나바주스가 동시에 이끌고 있었다. 당연히 지휘계통이 이원화되었기에 지휘도 명령도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19] 넥타네보 2세는 독립적인 이집트 최후의 토착 파라오라는 점 때문에 이집트인들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군주였다. 훗날 이집트에서는 넥타네보 2세가 누비아가 아니라 마케도니아 왕국으로 향했고, 그 곳에서 올림피아스 왕비와 동침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낳았다는 설화가 생겨날 정도였다. 즉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대제국을 세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넥타네보 2세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