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흐라와르디 수피 성인 루큰-에-알람 샤 영묘 (14세기 초)
루큰-에-알람 샤의 조부인 바하웃딘 자카리야의 영묘 (13세기 중)
신도심의 시계탑 일대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펀자브주의 도시 | ||
물탄 UR : ملتان EN : Mult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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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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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행정구역 | 물탄 지구 | |
면적 | 3,721 km² | |
인구 | 1,827,001 명 (2017년) | |
공용어 | 사라이키어, 펀자브어 | |
종교 | 이슬람교 99.9% | |
시간대 | UTC +5 (PKT) | |
지역번호 | 061 | |
우편번호 | 60650 | |
웹사이트 | 물탄 지구정부 홈페이지 |
1. 개요
파키스탄 펀자브주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3천년 역사를 지닌 유서깊은 곳이다. 어원은 산스크리트어로 뿌리의 땅이라는 뜻의 물라스탄이다. 과거 힌두교의 주요 성지가 있던 도시였으나, 체납 강에 라비 강이 합류하는 곳이라 토질이 비옥할 뿐만 아니라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여 북인도를 공략하는 이슬람 왕조들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중세 델리 술탄국 시절 몽골에 맞서는 핵심 거점이었고, 15세기 란가 술탄국의 수도가 되어 크게 번영했다. 다만 18세기 무굴 제국의 쇠락 후 아프간 (파슈툰), 마라타, 시크, 영국 등 다양한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며 쇠퇴하였다. 20세기 초까지 힌두-시크 주민이 40%가 넘었으나, 인도-파키스탄 분리 후 무슬림 비중이 99%가 되었다.
현재 인구는 180만여 명으로, 파키스탄 제7의 도시이다. 시가지는 중심부의 구도심과 동부의 신도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북쪽에는 물탄 국제공항이 있다. 겨울 평균 기온은 10도 전후에 불과하고, 여름에는 40도가 넘는 날이 많다. 구도심에는 수십여 수피 성인들의 영묘가 남아있고, 파키스탄 무슬림들에게 '성인의 도시'로 여겨진다. 고도답게 로마, 시안, 간자, 콘야 등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2. 역사
현지 전설에 따르면 노아의 증손자가 세운 도시라 한다. 동시에 힌두교 전승에서는 힌두 성인 카샤파가 세운 도시로, 마하바라타 시기 카토크 왕조가 다스리는 트리갸르타 왕국의 수도였다고 한다. 또한 인도의 대표 축제인 홀리의 기원지로도 여겨진다.2.1. 고대
고고학적으로는 인더스 문명기인 기원전 3천년 경부터 마을이 형성되었고, 아리아 민족의 유입 후 그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기원전 500년경 아케메네스 제국의 다리우스 1세가 일대를 정복할 무렵, 당시 지명은 카샤푸라였다. 아케메네스 제국 하에서 일대는 아라코시아 사트라프에 편성되었고, 몇몇 그리스 인들이 방문하여 기록을 남겼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는 카스파투로스로 나온다.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 3세의 5만 원정군이 다가올 무렵 일대에는 말리 (물루) 족이 살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인 말리 원정에서 9만의 말리족 군대는 맹렬히 저항했다. 당시 라비 강의 하중도에 입지했던 카샤푸라는 말리족의 최대 도시였고, 공성전 도중 알렉산드로스는 과감히 성벽을 넘었다가 가슴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이에 마케도니아 군은 성을 함락한 후, 남녀노소 모두 학살하였다. 그후 말리족은 항복했고, 인도 사트라프에 편성되었다.
헬레니즘기 일대의 중심지는 남쪽 인더스의 알렉산드리아 (현 우치)로 이전되었다. 다만 카샤푸라 역시 재건되어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카스페이라로 기록되었다. 그후 마우리아 왕조, 인도-그리스 왕국, 인도-스키타이 왕국, 쿠샨 왕조, 굽타 왕조를 거쳐 5세기 중반에는 에프탈 유목민들이 펀자브 남부를 침공했다. 토라마나의 에프탈 군은 격전 끝에 카샤푸라를 함락했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철수한다.
2.2. 중세
도시 남서쪽 외곽의 공터로 남아있는 옛 태양신 신전 (수라즈 쿤드)
시간이 지나며 도시의 이름은 말리 족의 땅이란 뜻인 말리스탄 혹은 물라스타나푸라로 바뀌었고, 축약되어 '물탄'이 되었다. 바르다나 왕조를 거쳐 7세기 중반, 신드의 아로르에 기반한 브라흐민 왕조의 차크가 일대를 정복했다. 차크는 아타쿠르를 물탄 총독으로 봉하여 북방 왕조들에 대한 군사 거점으로 삼았다. 641년 물탄을 방문한 구법승 현장은 화려한 태양신 사원[1]에 5천축 모두에서 순례객이 와서 보배를 바친다고 기록했다.[2] 한편, 우마이야 왕조의 시스탄 태수인 무할라브 이븐 아비 수프라는 664년부터 종종 펀자브로 침투하여 많은 포로와 함께 귀환했다. 이는 이슬람과 힌두 문명 간의 첫 충돌이었다.
711년 신드를 정복한 우마이야 조의 무함마드 이븐 알카심은 712년, 라자 다히르 치하의 물탄을 포위했으나 강한 저항에 부딪혀 포위는 장기화되었다. 원정군이 물자가 바닥나 철수가 논의될 무렵, 미상의 주민 하나가 접근하여 도시의 보급로인 지하 수로의 존재를 알려주며 이곳을 막아버린다면 물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무함마드는 그대로 행하였고, 식량이 바닥나자 물탄의 유력자들이 협상에 나서 항복하였다. 수비대는 전부 처형되고 그 처자식은 노예로 팔렸으나, 나머지 주민들은 인두세를 내는 조건 하에 기존 삶을 영위했다.[3] 동시에 태양신 신전은 수입의 1/3을 바쳐야 했다.[4]
2.2.1. 물탄 공국 (바누 무납비흐)
서기 900년 무렵 인더스 유역의 합바리 왕조와 물탄 공국
물탄에는 수천의 아랍인들이 정착했고, 이곳을 거점으로 카슈미르 및 라자스탄 등지로 원정했으나 정복하지는 못하였다.[5] 한세기 이상 이슬람 제국의 지배가 이루어지던 9세기 중반, 압바스 왕조가 약화되자 신드 주 역시 지방 분권이 이루어졌다. 남부의 아로르에 합바리 왕조가 들어선 것처럼, 물탄에는 쿠라이쉬 가문의 후예를 자처하는 무납비흐 부족이 855년부터 총독위를 세습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물탄은 아랍어로 '전방의 황금 저택'이란 뜻의 파라즈 베이트 앗-다합이라 불렸다.[6]
912년경 발행된 무나비흐 1세의 동전. 브라흐미, 아랍 문자 병기
915년 인더스 유역을 답사한 아랍 역사가 알 마수디는 그의 저서 '황금 들판들'에서 물탄이 이슬람 변경 도시들 중 가장 강력하며 인근에 12만개의 도시가 있으며 호라산에서 인도로 가는 이슬람 상인들의 집합지라고 기록하였다. 비슷한 시기 이란인 지리가 에스타크리는 물탄이 만수라의 절반 크기지만 인구는 더 많다고 기록하였다. 만수라와 물탄 모두 아랍어와 페르시아어가 통용되었고, 후자는 호라산과의 잦은 교류 덕이었다. 이러한 다양성 덕에 물탄 상인들은 이슬람권 각지에 진출할 수 있었다. 힌두교와 이슬림의 공존도 계속되어 아미르들은 수입의 원천이자 힌두 군주들의 침공을 피할 구실인 태양신 사원을 유지시켰다.[7]
'세상의 경계' 서적에 따르면 10세기 중엽, 물탄의 무납비흐 아미르는 일시적으로 라호르도 점령하며 펀잡의 패권을 잡았으나 곧 카슈미르의 힌두 샤히에게 빼앗겼다. 당시 무납비흐 왕공들은 물탄 시내 대신 외곽의 궁성인 잔드라와르에 거주하며 일주일에 한번 금요 예배 때만 코끼리를 타고 시내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던 959년, 순니 압바스 칼리파를 인정하던 무납비흐 공국은 서아시아에서 축출된 쉬아 카르마트파의 공국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이스마일파 신도였던 지항 (Jhang) 태수 우마르 빈 하프스의 영향으로 일대에 쉬아 교리가 퍼지고, 파티마 왕조가 후원자로 나서며 가능했다.
2.2.2. 물탄 공국 ( 이스마일파)
1150년대에 건립된 샤 유수프 가르데지의 영묘
파티마 칼리파 알 무이즈가 파견한 다이 (선교사) 잘람 빈 샤이반은 이슬람과 힌두를 혼합하던 기존의 다이를 대체하고 물탄을 장악했다. 혹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카타라 라지푸트 왕공을 옹립했다고도 한다. 한편, 이슬람 정복 후 2세기 이상이 흐른 10세기 중반 까지도 물탄과 우치는 창조의 신 비슈누와 태양신 수리야를 따르는 힌두교도들의 순례지로 이어졌다. 힌두 순례자들의 방문을 불쾌하게 여겼던 잘람은 965년경 알 무이지의 서신을 받은 후, 태양신 사원과 아디트야 신상을 파괴하고 사제들을 죽였다.[8] 동시에 순니 금요 사원도 파괴되었고, 둘의 폐허 위에 쉬아 금요 사원이 세워졌다.[9] 985년 잘람이 사망하자 아랍계로 추정되는 바누 라위의 셰이크 하미드 로디가 집권했다. 991년 가즈니 왕조의 사북티긴이 물탄을 침공했으나 곧 휴전을 맺고 철수했다. 물탄은 가즈니 조와 프라티하라 왕조 간의 완충지였다.
그러던 1005년, 사북티긴의 아들 술탄 마흐무드가 남하하자 997년 조부 하미드를 계승한 아미르 아불 파테흐 다우드는 힌두 샤히의 마하라자 아난다팔라와 연합하여 맞섰다. 하지만 힌두 샤히 군이 패배하자 마흐무드는 물탄을 포위, 7일만에 함락하였다. 그후 많은 이스마일파 신도가 살해되었고, 아미르 다우드는 20만 디르함 금화의 연공 납부 및 순니로 개종하는 조건 하에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마흐무드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힌두 샤히의 왕자 니와사 칸을 물탄 총독으로 봉하고 회군했는데, 후자가 다우드와 함께 공모하여 자립하려 하자 1007년 재침하여 응징하였다. 파티마 칼리파 알 하킴은 마흐무드에 친서를 보내 화친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1010년, 마흐무드는 3번째로 물탄을 공격해 다우드를 폐위한 후 감금하였다.[10] 이로써 물탄을 완전히 정복한 그는 무함마드 이븐 알카심이 세웠던 순니 금요 사원을 복구하였다.[11]
11세기의 학자 아부 만수르 알 바그다디에 의하면 가즈니 지배기에도 물탄에는 이스마일파 공동체가 유지되었다. 다만 마흐무드의 침공 직후 내분이 일어나 그중 일부가 드루즈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한편 알 비루니에 의하면 가즈니 조의 치하에서 기존에 번영하던 물탄의 경제력은 쇠퇴했고, 1030년 마흐무드의 사후 물탄은 제국에서 분리되어 재차 이스마일파 공국이 들어섰다. 파티마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는 살해된 이들을 대체할 신규 다이들을 파견했다. 그리고 1088년 아프간에서 이주해 온 수피 성인 샤 가르데즈는 도시를 복구하고 많은 이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켰다. 재차 번영하게 된 물탄에 대해 12세기의 아랍 지리가 알 이드리시는 해자로 둘러진 성채 (시타델)를 지닌 큰 도시로 묘사했다. 그 무렵 물탄 출신의 시인 압둘라흐만은 현존하는 유일한 이슬람 관련 아파브람사어 (중세 힌디어) 작품인 산데쉬 라사크를 집필하였다.
2.2.3. 내전과 대몽 항쟁
카바차 대신 일투트미쉬를 지지하여 우대받은 펀자브 출신 수흐라와르디 수피 성인 바하웃딘 자카리야의 영묘. 1260년대에 세워졌다.
1175년, 고말 고개를 넘어 펀잡에 진입한 구르 왕조의 술탄 무함마드 고리는 펀잡을 점령하며 2세기에 걸친 이스마일파 지배를 종식시켰다. 그 직후 이스마일파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고, 1178년 무함마드 고리는 물탄을 거점 삼아 구자라트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13세기 초엽, 구르 왕조가 붕괴된 후 물탄은 델리 술탄국 하의 주가 되었다. 1210년 첫 델리 술탄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의 사후 벌어진 내전에서 물탄은 나시룻딘 카바차의 펀잡 왕국에 속하였다. 1217년, 델리 술탄 일투트미쉬에게 라호르를 상실한 카바차는 물탄을 수도로 삼고 신드 및 마크란에 대한 지배를 이어갔다.
그러던 1221년 호라즘 제국의 술탄 잘랄 웃 딘 밍부르누가 몽골군을 피해 펀자브를 침공, 코카르와 동맹한 후 카바차를 격파하였다. 이에 카바차는 그에게 복속했다가 이듬해 반기를 들어 물탄을 회복했다. 1224년, 몽골군이 물탄을 포위하자 잘랄웃딘은 북인도를 떠났다. 몽골군은 40일간 포위에도 도시가 함락되지 않고, 카바차가 우치와 바쿠르 ( 수쿠르)에서 원군을 대려오자 역시 철수하였다. 한편, 1225년 벵골을 정복하며 자신감을 얻은 일투트미쉬는 호라즘과 몽골의 연이은 침공으로 약해진 카바차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손쉽게 라호르를 접수한 그는 부관 아이테무르에게 물탄 공격을 맡기고, 자신은 3개월의 포위전 끝에 우치를 점령했다. (1228년 5월) 물탄을 버리고 바쿠르로 도주한 카바차는 아들 바흐람을 보내 평화 협상을 청했으나, 무조건의 항복이 요구되자 인더스에 투신해 자살하였다. 이로써 물탄은 공고히 델리 술탄국령이 되었다.
몽골의 침공으로 도래한 혼란기를 틈타, 호라즘 술탄 알라 웃 딘 무함마드가 구르 왕조의 잔당을 토벌하고자 중앙아시아에서 아프간 중부로 이주시킨 카를루크 튀르크 부족이 자립하여 카를루그 왕조를 세워다. 몽골군이 파괴한 바미안과 가즈니에 기반한 카를루그는 1236년 물탄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고, 그후 몽골 제국에 복속하였다. 1241년에는 라호르를 함락한 몽골군이 재차 물탄을 포위했으나, 역시 격퇴되었다. 1246년, 살리 바하두르 노얀 휘하의 몽골군은 마침내 물탄을 함락하고 나아가 우치를 포위했으나 술탄 기야스 웃 딘 발반에게 격퇴되었다. 1249년에는 나시룻딘 무함마드 휘하의 카를루그가 물탄을 점령했으나, 셰르 칸의 델리 군대가 수복하였다.
1254년에는 물탄 및 신드의 총독 이즈웃딘 발반 쿠슐루 칸이 반란을 일으켜 자립했다가, 1257년 술탄 발반에게 진압되었다.[12] 이라크의 훌레구에게로 도주한 이즈웃딘은 1258년 초엽, 살리 바하두르 노얀의 몽골군과 함께 돌아와 물탄을 함락하고 성벽을 허물었으나 시리아 및 이집트 침공을 우선시 하던 훌레구는 술탄 발반과 협상한 후 원정군을 철수시켰다. 이후 술탄 발반은 라호르 ~ 물탄 ~ 우치에 이르는 라비 강에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고, 1279년에 무려 5번째로 물탄을 침공한 몽골군은 대패하였다. 이후 델리로 직행하던 몽골의 침공 루트는 1304년과 1305년 물탄으로 돌아왔지만, 총독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가 격퇴하였다. 물탄에 대한 몽골의 마지막 침공은 1327년이었다. 이후 차가타이 칸국이 쇠퇴하며 침공은 멈췄다.
2.2.4. 할지 & 투글루크 왕조
1320-24년에 세워진 수흐라와르디 수피 성인 루큰-에-알람 샤 (루큰 웃딘 압둘 파테흐) 영묘. 본래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가 자신의 영묘로 건설했다가, 술탄 등극 후 양도했다.[13]
1296년 7월, 델리 술탄 잘랄 웃 딘 할지는 아와드 총독인 자신의 조카 겸 사위 겸 양자 알라 웃 딘 할지에 의해 시해되었다. 잘랄웃딘의 황후 (말카-이-자한)는 막내 루큰웃딘 이브라힘과 함께 델리를 탈출하여, 장남 아르칼리 칸이 총독으로 있는 물탄으로 피신하였다. 그해 11월, 어느정도 정권을 안정시킨 알라웃딘은 후환을 덜고자 물탄 원정에 나섰다. 혹시 모를 변고에 대응하기 위해 수도에 남기로 한 그는, 동생 울루그 칸과 현지 출신의 자파르 칸에게 지휘를 맡겼다. 한편, 공격을 예상한 아르칼리 칸은 최대한 수비를 강화해 두었다. 그러나 3-4만의 원정군이 성을 완벽히 봉쇄하고 2개월이 흐르자, 가망이 없다고 여긴 코트왈 (수비대장)과 몇몇 성내 유력자들이 이탈하여 델리 진영에 가담하였다. 궁지에 몰린 아르칼리 칸은 명망 높은 수피 성인 루큰-에-알람 샤 (셰이크 루큰웃딘)에게 양측의 중재를 청하였다.
셰이크는 휴전을 성사시켜 아르칼리 칸과 루큰웃딘을 울루그 칸의 군영으로 데려갔고, 울루그 칸은 예를 갖춰 맞이하며 셰이크의 청에 따라 제장들과 포로들을 해하지 않기로 서약했다. 물탄을 접수한 울루그 칸은 다른 잘랄웃딘의 가족과 주요 지지자들을 체포하여 델리로 회군했고, 알라웃딘은 반대로 포로들에 대한 처벌 지시와 함께 누스라트 칸을 물탄 방면으로 파견했다. 둘은 아보하르에서 조우했고, 아르칼리 칸과 루큰웃딘은 실명되어 한시에 감금되었다. 아르칼리 칸의 아들들은 처형되었고, 끝까지 전향하지 않은 장군 말리크 울르구와 말리크 아흐마드 차프도 실명되었다. 후자는 전 환후 등의 하렘과 함께 델리로 이송되어 누스라트 칸의 저택에 연금되었다.
그후 알라 웃 딘은 누스라트 칸을 와지르 (재상)에, 자파르 칸을 물탄 총독에 봉하여 논공행상을 하였다. 울루그 칸은 이미 제국의 2인자였다. 알라웃딘의 안정적인 통치 하에 도시는 재차 번영할 수 있었다. 14세기 초엽, 페르시아어 및 힌디어로 작문한 수피 작가 아미르 쿠스라우 (호스로)는 물탄 총독 칸 무함마드의 초청으로 도시를 방문해 시조를 남겼다.[14] 당시 물탄은 인도의 관문이자 펀자비 지역 학문의 중심지였고, 서아시아에서 델리로 향하는 카라반과 학자들이 모두 거쳐가는 사통팔달의 도시였다. 1310년대 알라웃딘의 장남 쿠트브 웃 딘 무바라크 샤가 기존의 생필품에 대한 가격 통제를 풀자, 지정학적 우위를 지닌 물탄 상인들이 곡물 등을 독점해 물가가 크게 오르기도 했다.
1330년에 세워진, 13세기 물탄의 이란계 수피 & 이스마일파 성인 샴스웃딘 사브제바리의 영묘 |
1305년,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활약한 데팔푸르 출신의 장군 기야스 웃딘 투글루크는 인근 물탄 총독에 봉해졌다. 그는 금요 사원에 자신이 타타르 (몽골)에 대해 28번 승리했다는 무용담을 새겼다.[15] 이후 데팔푸르 총독으로 전임한 기야스 웃딘은, 1320년 술탄 무바라크 샤가 힌두 출신의 쿠스라우 칸에게 시해되자 거병하였다. 그는 각지의 총독들에게 합류를 청하는 격문을 보냈는데, 물탄 총독 무글라티는 거부했다가 기야스 웃딘의 친구 바흐람 시라즈가 봉기하려 하자 도주하다가 (기야스 웃딘 시기에 세워진) 수로에 빠져 사로잡힌 후 처형되었다. 다만 물탄 주둔군은 끝내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과거 기야스 웃딘과 함께 활약했던 물탄 출신의 장군 아이눌 물트는 그의 편지를 받고 쿠스라우 칸의 군대에서 이탈해 은둔했다.[16]
힘겨운 전투 끝에 기야스 웃딘은 쿠스라우 칸을 죽이고 투글루크 왕조를 개창했고, 내란을 틈타 세력을 확장한 신드의 이스마일파 국가인 숨라 왕조를 견제하기 위해 타즈웃딘 말리크를 물탄 총독으로 봉하였다. 1326년 기야스 웃딘이 사망하자, 그의 물탄 재임기에 태어난 아들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가 계승했다. 다만 그의 치세에 물탄 인근 농촌은 지나친 과세로 피폐해졌고, 1328년 물탄 총독 키슐루 칸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기도 하였다. 14세기 중엽, 니자리파 다이 (선교사) 피르 사드렛딘 샤하데브는 힌두 로하나 카스트를 개종시키며, 이스마일파 교리에 힌두교가 가미된 사트판드 신앙을 창안하기도 하였다.[17] 그 무렵 물탄을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킵차크 스텝에서 수입된 말들이 거래된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물탄은 노예 무역의 거점이었고, 이는 14세기 후반 피루즈 샤의 노예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1388년 피루즈 샤의 사후 투글루크 왕조는 쇠퇴했다.
2.3. 란가 왕조의 수도
14-15세기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 세워진 물타니 카라반사라이
1397년 말엽, 티무르의 손자 피르 무함마드가 물탄을 포위하였다. 피루즈 샤가 임명한 파테푸르 출신의 총독 키즈르 칸은 6개월간 버티다 이듬해 항복하였고, 총독위를 유지한 채로 티무르의 델리 함락을 도왔다. 1400년경 키즈르 칸은 직접 사마르칸트로 향하여 티무르에게서 델리 술탄으로 책봉받았고, 1414년 무주공산의 델리를 점령하여 사이드 왕조를 세웠다.[18] 술탄 등극 후 그는 동료 압둘라흐만을 물탄과 파테푸르의 총독으로 봉하였다. 다만 1430년대 무함마드 샤 사이드의 치세에 델리 술탄국이 재차 크게 약화되자, 물탄의 주민들은 수피 성인 바하웃딘 자카리야의 후손인 셰이크 유수프 쿠라이쉬를 군주로 선출했다. (1438년) 다만 펀잡 남부의 토착 란가 부족의 지도자 라이 사흐라가 1445년, 밤중에 물탄을 기습 점령하여 유수프를 사로잡고 술탄을 칭하였다. 이로써 물탄을 수도로 한세기 가량 이어진 란가 술탄국이 세워졌다.
1469년 ~ 1498년에 이르는 술탄 후사인 1세의 안정기 동안 물탄은 다시 번영하였다. 그는 타타르 칸과 바르바크 칸이 이끈 델리 군대의 침공을 격퇴했고, 델리 측에 망명한 유수프의 복위 시도를 차단하였다. 또한 발루치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데라자트[19] 및 물탄으로 대거 이주시켰고, 결국 델리의 시칸다르 칸 로디와 인질을 교환하며 휴전을 맺었다. 이어진 평화 시기에 물탄은 칸다하르와 델리 간의 교역 도시로 상인들이 왕래했고, 물탄 상인들이 이슬람권 각지에서 활약한 결과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도 물타니 카라반사라이가 세워질 정도였다. 1550년대 우즈벡의 부하라에도 물타니 상인들이 정착해 토지를 보유했다. 1500년 기준 란가 왕조의 영토는 미래의 파이살라바드에 이르렀다.
다만 후사인 1세의 후계자인 술탄 마흐무드 1세 시기부터 란가 왕조의 솨퇴가 시작되었다. 그의 와지르 (재상)가 반란을 일으켜 소르코트에서 자립했고, 1520년대 들어서는 무굴 제국의 압력 하에 놓였다. 1528년 (혹은 1525년), 바부르의 사주를 받은 신드의 아르군 왕조가 물탄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아르군 조의 샤 후세인은 아들 미르자 아스카리를 총독으로 봉하며 기존 귀족 중 란가르 칸에게 보좌하게 하였다. 다만 샤 후세인이 떠나자마자 정변이 일어나 미르자 아스카리는 축출되었고, 술탄 마흐무드 2세가 복위되었다. 그렇게 물탄은 재차 독립하여 무굴 제국에 복속했다가, 1541년 파슈툰 장군 셰르 샤에게 점령되어 수르 제국에 병합되었다. 얼마 후, 셰르 샤에 패배하여 재기를 노리던 무굴 제국의 후마윤이 도시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1543년, 파테흐 칸 미라니 휘하의 발루치 인들이 물탄에서 봉기해 일시적으로 도시를 장악했으나 결국 셰르 샤에게 패하여 축출되었다.
2.4. 무굴 제국기
1585년에 세워진 샴스웃딘 사브제바리의 후손인 이스마일파 성직자 샤 알리 아크바르의 영묘
4년도 안되는 시기 동안 셰르 샤는 기존의 물탄 ~ 델리 도로를 정비했고, 물탄 ~ 라호르 도로를 신설하여 북인도를 관통하는 대(大)화물로 교통망에 연결시켰다. 다만 1545년 셰르 샤의 사후 수르 제국은 쇠퇴하였고, 물탄은 잠깐 자치를 누리다가 1557년에 악바르 대제가 보낸 바이람 칸에게 점령되며 무굴 제국령이 되었다. 악바르 대제는 물탄 수바흐 (주)를 신설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신드까지 정복하여 인더스 유역을 석권했다.[20] 물탄 수바흐는 면적으로나 인구로나 제국의 최대 행정구역 중 하나였고, 1세기 이상 이어진 안정 덕에 다르 알 아만 (평화의 땅)이라 불렸다. 무굴 시기 물탄은 상업 외에도 목화 재배 및 면직물 생산이 주요 산업으로 부상하였다. 동시에 화폐 주조 및 타일 생산으로도 유명했다.
1735년에 세워진 샤히 이드가 모스크
1627년, 샤 자한의 아들 무라드 박쉬의 명으로 시가지에 성벽이 둘러졌다. 1648년에는 발흐 원정에서 돌아온 아우랑제브가 물탄 및 신드 총독으로 봉해져 1652년까지 역임했다. 그는 10세기 이후 재건되었던 태양신 신전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한다. 한편, 17세기 중반 무렵 체납 강의 퇴적으로 인해 선박 왕래가 불가해지며 물탄은 인더스를 통해 아라비아 해로 이어지는 해상 교역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18세기 초엽 무굴 제국의 쇠퇴와 함께 물탄은 고난의 시기를 겪게 된다. 1738년, 델리 원정에 나선 아프샤르 왕조의 나디르 샤가 점령했다. 이후 나와브 (총독)에 봉해진 파슈툰계 자히드 칸은 1747년 나디르 샤의 죽음을 틈타 반격에 나선 무굴 제국에 맞서다가, 1749년 무굴 최후의 명군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에게 패해 전사하였다. 이로써 물탄은 재차 무굴 령이 되었으나, 1752년 두라니 제국의 창건자이자 물탄 출신으로도 알려진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점령하였다.
2.5. 근대 혼란기
두라니 지배기 까지만 해도 물탄은 서북 인도에서의 경제적 패권을 유지했지만, 점차 쇠퇴했다. 1756년 나와브 알리 모하마드 칸 카크와니는 나디르 샤가 허문 물탄의 성벽을 재건하였고, 이듬해에는 알리 무함마드 칸 모스크를 세웠다. 1758년, 마라타 제국의 락후나트라오가 일시적으로 물탄을 점령했으나 1760년 아흐마드 샤가 수복한 후 옛 나와브 자히드 칸의 아들 슈자 칸[21]을 나와브로 봉하였다. 다만 물탄은 이미 펀잡의 대부분을 장악해가던 시크교도들의 지속적인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시크교도들에게 물탄은 창시자 구루 나나크가 자주 방문한 곳으로, 의미가 컸다.2.5.1. 시크 VS 두라니 전쟁
1780 ~ 1818년간 물탄을 통치한 무자파르 칸 사도자이 | 란지트 싱 하의 힌두교도 대장군 미스르 디완 찬드 |
1766년, 시크 공국들 중 최강국인 라호르와 암리차르에 기반한 방기 미슬의 잔다 싱 딜론이 물탄을 침공했다. 결과는 무승부였고 슈자 칸의 아들 무자파르 칸이 나아가 휴전을 맺었다. 1772년, 아흐마드 샤의 사망 직후 물탄에서는 총독위를 두고 슈자 칸과 샤리프 칸, 샤리프 베그 타클루가 대립하였다. 그중 후자는 잔다 싱에게 도움을 청했고, 후자는 슈자 칸을 격파하고 도시를 접수했다. (1772년 12월) 성채에 있던 샤리드 베그는 시크 측과 협상하여 가족 및 재산응 챙겨 툴람바로 도주했고, 잔다 싱은 레흐라 싱과 물탄을 분할하였다. 남쪽의 슈자바드로 철수한 슈자 칸은 1775년 2월, 물탄을 포위했으나 탈환에 실패한 후 상심하여 사망했다. 그리고 물탄에서 출생한 18세의 장남 무자파르 칸이 계승하여 복수를 준비했다.
얼마 후, 물탄의 시크 영주 디완 싱이 슈자바드를 침공하자 무자파르 칸은 강력히 저항하여 격퇴해내었다. 다만 시크 군대가 회군하며 인근 농촌을 초토화시키자, 무자파르 칸은 바하왈푸르의 나와브 및 주군 티무르 샤 두라니에게 지원을 청하였다. 그중 바하왈푸루의 나와브가 호응하자, 무자파르 칸은 그와 함께 북상하야 물탄을 포위했다. 아프간 군은 라주라는 한 과부가 성벽을 열어준 덕에 도시를 점령했고, 시크 수비대는 성채로 피신했다. 다만 아프간 군대가 약탈에 치중한 틈에, 며칠 전 암리차르에서 출병한 방기 미슬의 간다 싱[22] 이끄는 구원병이 당도하였다. 격전 끝에 아프간은 패배했고, 무자파르 칸은 슈자바드로 철수했다. 한편, 티무르 샤는 심복 하즈 알리 칸은 사절로 보내 물탄을 평화적으로 복속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하즈 알리 칸은 예의 있게 처신하라는 샤의 지시와 달리 항복 혹은 전쟁이라며 엄포를 놓았다가 나무에 묶여 총살당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티무르 샤는 바하루 칸을 물탄으로 보내 포위했으나, 그 사이 다른 전쟁에 휘말린 샤는 회군을 명하였다. (1778년) 그리고 이듬해, 다시 물탄을 노린 티무흐 샤는 잔기 칸 휘하 1만 8천 병력을 로타스로 파병하고 자신도 후발대와 뒤따랐다. 잘 알려지지 않은 길을 통해 진군하여, 시크 군을 불시에 기습하라는 샤의 명령에 따라 잔기 칸은 펀잡 북부 로타스의 시크 진영에서 25km 거리에서 멈추고 로타스로 향하는 행인들을 전부 구금해 자신들의 존재를 숨겼다. 밤중에 합류한 티무르 샤는 5천의 유수프자이 병력과 중앙을 구성했고, 아침이 밝자 총공격을 가하였다.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시크 군은 대패하여 3천이 전사하고 5백여가 젤룸 강을 건너 도주하다 익사했다. 오직 2천여 만이 강 건너로 피신할 수 있었다. (1779년 12월)
티무르 샤는 그 여세를 몰아 1780년 1월, 물탄을 포위했다. 비록 수비대는 7천에 불과했지만, 성의 규모를 보고 1만 8천 병력은 부족하다 여긴 티무르 샤는 소수의 병력과 함께 바하왈푸르로 향하여 원군을 요구했다. 기존에 샤를 무시하던 나와브 바하왈 칸은 그가 직접 나타나자 공물을 바치며 1만 2천의 병력을 내어주었다. 동시에 시크 연맹 측에서도 자사 싱, 구자르 싱, 하키카트 싱, 라흐나 싱, 반가 싱 등의 1만 5천 구원 병력이 라호르에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시크 군대는 물탄 남쪽의 슈자바드를 함락해 교두보로 삼고자 남하했고, 티무르 샤는 슈자바드의 무바라크 칸과 합류해 맞섰다. 그해 2월, 전투가 막 개시될 무렵 모래 폭풍이 밀려온 틈에 시크 군대에서 군령을 전달하는 북지기가 사로잡혔다. 무바라크 칸은 그를 살려주는 대신 곧바로 진군을 알리는 북을 치게 했고, 그렇게 시크 군은 모래 폭풍 속에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채로 진군했다.
무자파르 칸은 군대를 양분하여 하나가 시크 병사를 붙잡고 다른 하나가 사살하게 하였고, 시크 군대는 앞이 흐린 상태에서 하나 둘씩 병사를 잃어갔다. 그렇게 천여명이 어이없이 전사한 후, 사태를 파악한 자사 싱은 후퇴를 명하였다. 시크 군대가 라호르로 패주하자 티무르 샤는 2만의 병력으로 그들을 추격, 라호르 서쪽의 후자라 무킴 칸에서 따라잡아 추가 피해를 준 후 물탄 포위망으로 돌아왔다. 기습적으로 성을 함락한 티무르 샤는 대대적인 학살을 벌였고, 남은 시크 수비대는 성채로 피신했다. 일주일 가량 버티던 수비대는, 점점 물자가 떨어져 가자, 협상을 통해 목숨을 부지한 채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조건 하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물탄은 다시 두라니 제국령이 되었고, 티무르 샤는 무바라크 칸을 나와브에 봉함과 동싱 시크 군에서 전향한 무슬림 장군 압둘 카림 칸 바바르가 나입 (부관)으로 두었다. 또한 2만 아프간 기병을 배치하여 방어를 강화했다.[23]
그후 20여년간 일대는 간만에 평화를 구가했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물탄은 시크 왕국의 란지트 싱에게 7차례 공격을 당했다. 1802년의 1차 침공 후 자파르 칸은 공물을 바치며, 연공 납부를 조건으로 복속하였다. 1805년, 란지트 싱이 재침하자 그는 진귀한 물품과 7만 루피를 바쳤다. 1807년에는 저번 침공 당시 지항으로 피신했던 아흐마드 칸 시알이 란지트 싱의 관심이 마라타 방면에 쏠려 있는 틈에 반격하자고 설득하자, 무자파르 칸이 동의하며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란지트 싱이 또다시 물탄을 포위했으나 무자파르 칸이 연공을 일부 바치고 말 5필을 선물하자 철수했다. 1810년, 무자파르 칸이 연공 납부를 거부하자 란지트 싱은 4번째로 출병하여 물탄을 함락하고 성채를 포위했다. 2달 간의 공방전 끝에 무자파르 칸은 배상금 18만 루피, 말 20필을 바치고 연공을 지속하는 조건 하에 다시 복속했다.
1818년의 물탄 공방전 당시 성벽을 포격한 잠자마 대포. 1757년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제작해 시크 왕국까지 활용된 5m 길이의 거포로, 현재는 라호르 박물관 앞 뜰에 전시 중이다.
1812년 5차 침공은 초기처럼 협상을 통해 마무리되었다. 1815년의 6차 침공은 연공이 늦어져 벌어졌고, 시크 군이 성벽을 허물자 무자파르 칸은 또다시 복속하고 20만 루피를 납부했다. 1816년에도 무자파르 칸은 연공을 거부하다가 시크 군대가 다가오자 납부했다. 1817년 8월, 연공을 마련하기 위한 과세로 인한 민중의 원망이 라호르에까지 들릴 지경이었음에도 란지트 싱은 디완 비와니 다스 하의 병력을 보내 기어코 받아내었다. 계속된 수탈에 실증이 난 무바라크 칸은 제대로 된 저항에 나서기로 결심하여 성채를 강화, 총포를 배치하고 보급품을 비축했다. 수비대는 4만에 이르렀다. 1818년 초, 미스르 디완 찬드의 2만 5천 시크 군대가 남쪽 국경에 집결했다. 라호르에서 강들을 통해 보급선이 오갔고, 군수 사령관에 봉해진 마흐라니 (황후) 라니 라즈 다타르 카우르 (마이 낙카인)는 곡물과 군마 및 탄약 등을 라호르 ~ 물탄의 중간 지점인 코트 카말리아에 비축하였다.
2.5.2. 물탄 공방전 (1848-49년)
1819 ~ 1844년간 물탄을 통치한 데완 사완 말 초프라 | 1849년, 영국군에 사로잡힌 데완 물라즈 초프라 |
1819년 란지트 싱이 물탄 총독으로 임명한 디완 사완 말 초프라는 25년간 안정적으로 통치했다. 비록 경제적으로 쇠퇴했지만, 시내에는 향료와 비단 등 사치품을 파는 대형 상점이 있었고 인구는 1827년 4만에서 1831년 6만이 되는 등 급증했다. 그는 또한 세율을 낮춰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1834년에는 남쪽의 마자리 발루치 부족과 휴전을 맺었다. 1839년 주군 란지트 싱이 사망한 후 사완 말은 시크 왕국이 내전에 돌입하자 라호르에 보내던 세폐를 끊으며 자립했다. 하지만 그는 1844년 암살당했고, 뒤를 이은 아들 디완 물라즈 초프라는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1845년, 1차 영국-시크 전쟁 후 물라즈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 명목상 복속한 채로 자치를 누렸다. 그러나 1848년 초엽, 펀자브의 신임 판무관으로 부임한 프레데릭 커리에 경은 과거 란지트 싱의 치세에 조정 (두르바르)에 납부하던 연공을 동인도 회사에 낼 것을 요구했다. 이를 물탄의 완전한 병합으로 간주한 물라즈는 아들에게 양위하여 상황을 모면하려 했지만, 커리에는 고분고분한 사르다르 칸 싱을 물탄 왕공으로 옹립하려 하였다.
그해 4월 18일, 반스 애그뉴와 동인도회사 봄베이 군의 앤더슨 소령은 소수의 구르카 호위대와 물탄에 당도했다. 다음날 물라즈는 칸 싱과 영국 사절들을 성채로 불러 순순히 열쇠를 넘겼다. 다만 축하연 후 영국인들이 말 타고 성채 밖으로 나갈 때에 한 시크 병사가 애그뉴를 공격했고, 이어 군중이 몰려와 구타했다.[25] 부상당한 영국인들은 칸 싱과 시내 밖 모스크로 피신했고, S.O.S 전단이 라호르의 커리에에게 전해졌다. 밤중에 호위대가 대부분 떠났고, 아침이 되자 군중은 칸 싱을 밀쳐낸 후 영국인들을 때려죽였다. 물라즈는 놀랐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다고 여겨 애그뉴의 수급을 칸 싱에게 주며 커리에에게 돌아가라 엄포를 놓았다. 소식을 접한 인근의 영국 정치 요원들은 곧바로 보복에 나설 것을 주장했지만 커리에는 무더위 및 몬순 기간을 피하자고 제안했다. 벵골 주둔 영국군 역시 그에 동의했다. 한편 물라즈는 다른 시크 도시들에서 원군을 받았고, 기존에 파묻었던 화기들을 발굴하거나 병력을 모으는 등 방어력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물탄 성을 공격하는 영국군
1848년 6월 초엽, 에드와르데스의 1만 2천의 영국군이 체납 강을 건너 물탄에 접근했다. 물라즈가 배치해 둔 선발대는 포격 후 보병과 기병을 전진시켰으나, 마침 영국측이 반 콜트란츠의 인도-영국 혼성군이 화력을 앞세우며 등장하자 전세가 역전되었다. 폭격으로 이미 큰 피핼 입은 물탄 군대는 영국측 파슈툰 기병대가 돌격해오자, 5백여 전사자와 대포 6문을 상실하고 철수했다. 승전 소식에 커리에는 동인도회사 벵골군을 보내 물탄을 포위하게 했고, 시크 장군 셰르 싱 아타리왈라에게 돕도록 했다. 셰르 싱의 부친 차타르 싱이 반란을 준비 중이라는 정치 요원들의 경고에도 커리에는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차타르 싱의 부관 준디알 싱에게도 포위를 돕게 했다. 뱅골군 (8천 보병, 공성포 32문, 기병포 12문)과 보조병 (기병 4천, 보병 8천), 바하왈푸르 지원군 (2천 기병, 5500 보병), 시크 지원군[26] (3천 기병, 1천 보병) 등 2만 6천여 병력이 물탄을 포위했다.
그러나 그해 9월, 우려대로 셰르 싱은 공개적으로 동인도회사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써 본격적으로 2차 영국-시크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군은 물탄의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27] 한편, 물라즈와 셰르 싱은 물탄 외곽의 모스크에서 회동하여 후자가 시크 다수 지역은 펀잡 북부로 진격하기로 합의하였다. 셰르 싱이 펀잡을 휩쓸던 11월 말, 날씨가 서늘해지자 3만 2천 (그중 1만 7천은 현지인)[28] 동인도회사 봄베이-벵골군은 재차 물탄을 포위하였다. 벵골군보다 상대적으로 카스트가 낮았던 봄베이군은 참호 파기 등 작업에 더 능숙했다. 영국군은 150문이나 대포를 배치하고, 신드에서 인근까지 증기선으로 보급품을 나르는 등 공성전을 준비했다. 성내의 물라즈에게는 1만 2천의 수비대와 66문의 대포가 있었다. 12월 말, 영국군은 도시 외곽에서 진격했고 수비군은 성내로 후퇴했다. 영국군은 성벽에서 500 야드 거리에 장거리 포대를 설치하고, 그 엄호 하에 80 야드 거리에 박격포를 두어 성벽을 타격했다.
시가지의 큰 피해와 함께 두 군데에서 성벽에 균열이 생겼고, 수비측 최대인 180톤의 화약을 저장한 성내 모스크에 박격포탄이 명중해 폭발하며 800여명이 한꺼번에 사망했다.[29] 그럼에도 물라즈는 적군에 서신을 보내어 아직 1년을 버틸 화약이 있다고 밝혔다. 그해 마지막 날, 물라즈는 기병대와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격퇴되었다. 1849년 1월 2일, 영국군은 총공세에 나섰다. 성벽의 균열이 커져 일부가 무너지자, 영국군이 돌격해 시가전으로 이어졌다. 집 하나하나 전투가 벌어졌고, 군인과 민간인이 무차별적으로 죽어나갔다. 한편, 바하웃딘 자카리야 성지의 사자다 나쉰은 영국 편에 섰다. 영국군 지휘관 휘시는 민간인들을 중앙 광장에 모아 피해를 줄이려 했지만, 그러는 과정에서도 다수가 희생되었다.
영국인 사절들이 매장된 곳이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동북면 성벽의 피의 성탑 (칸즈 부르즈).
며칠 간의 격전 끝에 결국 시가지는 전부 장악되었고, 물라즈와 잔존 수비대는 성채로 물러나 농성하였다. 성채는 비록 여러군데 부서진 상태였지만, 수비대는 집중 포격 하에서도 2주 넘게 계속 버텼다. 1월 18일, 영국군 공병들이 3개의 지뢰를 폭발시키자 성벽의 상당 부분이 무너지고 수비대 상당수가 그에 휘말려 죽었다. 이에 물라즈는 목숨 보장을 조건으로 한 항복을 제안했지만, 영국군 서령관 휘시는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결국 1월 22일, 물라즈는 550명의 잔존 병력과 함께 항복했다.
산더미 같은 시체가 시내 곳곳에 쌓여 있었고, 각지에 덜 타다 남은 신체 부위가 들개의 먹잇감이 되어 있었다. 도시는 수백만 마리의 파리로 들끓었다.
ㅡ 당시 영국 측에 참전한 상병의 회고
ㅡ 당시 영국 측에 참전한 상병의 회고
물탄 함락 후 영국군은 엄청난 전리품을 얻었다. 물라즈의 보물만 해도 당시 가치로 300만 파운드 (영국 한해 예산의 4%)에 달했고, 영국 및 인도 병사들의 약탈도 엄청났다. 한편 휘시 장군의 본대는 포병대와 함께 휴 구그 경의 펀잡 전선에 합류, 셰르 싱과 차타르 싱을 완패시킨 구즈라트 전투에서 맹활약하여 시크 왕국을 멸망시키고 펀잡을 완전 병합하는데 공헌하였다. 항복한 물라즈는 재판에 넘겨져 비록 사절단의 살해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범인들을 치하하고 범행을 반란의 촉매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유죄로 판명되어 사형이 내려졌다가 후일 영구 추방으로 감형되었다.[30] 1849년 8월, 인더스와 체납 강이 범람하여 물탄 성채를 덮쳤다. 이로써 격전의 흔적이 쓸려 내려가고, 대신 도시는 진흙 범벅이 되어 새 시대로 접어들었다.
2.6. 근현대
1888년에 세워진 시청사
1898년에 세워진 물탄역
중세와 근세 내내 국제적인 상업 도시로 번영했던 물탄은 18-19세기 반복된 전란으로 상인들이 신드의 쉬카르푸르로 떠난 후 일개 지방 도시로 전락했다.[31] 1848년, 8만이던 인구는 영국군의 파괴 후 반감한 후 반세기가 지나서야 회복되었다.[32] 영국의 인도 지배가 공고해질수록 물탄의 중요성은 하락했다.
1890년대 ~ 1920년대에 걸쳐 물탄을 비롯한 펀자브 남부에는 관개 수로가 복잡하게 세워졌고, 많은 '운하 마을'들이 들어섰다. 수로 건설 후부터 인구는 빠르게 늘어 1921년 8만 5천에서 1931년 12만, 1941년 14만으로 늘었다. 1946년부터는 인도-파키스탄 분리에 따라 힌두 및 시크 주민들이 인도로 떠났고, 인도령 편잡 등지의 무슬림들이 이주해 와 그 자리를 채웠다.
파키스탄 성립 후 물탄은 대도시긴 했지만 카라치, 라왈핀디에 밀려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했다. 남부 펀잡 (물타니) 정체성은 무시되었고, 엣 성채는 방치되어 초목만 무성했다. 시내 도로도 비포장이 많았고, 상하수도 역시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물탄의 인구는 1951년 19만, 1972년 54만, 1998년 120만으로 계속 늘었다. 21세기 들어서는 현대 도시로 나아가고 있다.
3. 종교
영국 지배기에 세워진 버진 메리 성당
물탄은 1946년까지 종교적 다양성이 큰 도시였다. 1891년 통계에서 종교 구성은 이슬람 53%, 힌두교 43%, 기독교 2.4%, 시크교 1.3%에 소수의 자이나교 및 조로아스터교도가 있었다. 1941년 통계에선 이슬람 57%, 힌두교 40%, 기독교 0.5%, 시크교 2%, 저이나교 0.4%였다. 하지만 인도와의 인구 교환 후 현재는 이슬람 99%, 기독교 0.9%, 힌두교 0.1%, 그리고 소수의 아흐마디야가 집계된다. 1992년, 인도에서 바브리 모스크가 파괴된 것에 대한 반발로 무슬림 군중이 물탄 최대의 힌두 사원인 프라흘라드푸리 신전을 파괴했다.[33]
4. 문화유적
전근대 시기의 상징인 내성의 루큰웃딘 영묘 일대 | 근대 시기의 상징인 간타 가르 |
오랜 역사 덕에 물탄 구도심에는 옛 유적이 다수 남아있다. 비록 모스크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적들이 제대로 관리가 되어 있지 않지만, 최근 성채 일대는 잘 정비가 되어 둘러보기 편하다.
4.1. 프라흘라드푸리 사원
파괴 되기 전의 사원
파괴된 후의 사원
성채 내부 바하웃딘 자카리야 영묘 근처의 힌두 사원. 힌두 아수라 신화 속 왕자의 이름을 딴 사원으로, 비슈누 신의 화신인 나라심하를 모신다. 전설에 따르면 먼 옛날 왕궁의 기둥에서 비슈누의 현신이 나타나 폭군을 벌했다 하며, 그에 따라 여러 기둥들로 듈러진 신전이 세워졌다. 구전 전승에 따르면 기둥과 돔은 모두 도금 혹은 금이었다 한다. 전통적으로 프라흘라드푸리 사원은 현지 홀리카 다한 축제 행렬의 시발점이었고, 매년 나라심하의 출현일 기념 행사가 경내에서 열렸다.
1540년경 수르 제국의 셰르 샤가 모스크 건설을 위해 허물기도 했지만, 무굴 제국 들어 재건되었다. 시크 왕국기인 1810년에는 사원이 더 높게 증축되어 무슬림 주민들의 불안을 사기도 했다. 1831년 알렉산더 번즈는 신전이 저층 건물이고, 목조 기둥으로 지탱되며 정문에 하누만과 가네샤가 수호신으로 서 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힌두교도만이 출입이 가능했다 한다. 1848-49년 영국군의 포위 당시 성채 내의 화약고에 포탄이 떨어져 대폭발이 일어났고, 이때 사원의 지붕이 날아갔다. 물탄 함락 후 영국군은 성채 전역을 점거하다가 1852년 7월에야 사원을 현지 힌두 공동체에 돌려주었다. 이듬달, 영국 당국은 사원 보수를 허가하는 대신 영묘를 경유한 접근을 금하였다.
4.1.1. 힌두 VS 무슬림 분쟁
허물어진 프라흘라드푸리 사원과 배경의 루큰웃딘 영묘
1854년 알렉산더 커닝햄은 사원이 지붕이 없지만, 섬세한 목각 장식 기둥이 있으며 수라즈 쿤드와 함께 물탄의 둘 뿐인 힌두 성지라고 기록하였다. 1859년 물탄의 무슬림 및 힌두 공동체는 성채 내의 사원 및 영묘 모두에 대한 두드러진 신축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1861년, 사원의 제사장 (마한트) 바바 람 다스는 사원 복원을 위해 공공 모금으로 1만 1천 루피를 모아 지붕을 복구했다. 1870년대 초엽, 후임 제사장 바바 나라얀 다스는 사원 첨탑의 높이를 영묘보다 높은 14m로 높이려 하였다. 이에 무슬림 공동체가 1859년 협정의 위반이라며 반발했고, 험악한 분위기의 논쟁이 오갔다. 법정까지 간 끝에 1876년 6월, 무슬림 측이 승소하여 첨탑 높이는 10m로 제한되었다. 하지만 힌두 축은 불복 여론이 강했다.
1880년 8월, 사원의 제사장은 민정 및 군정 당국 모두에서 14m 첨탑 건설을 허가받았다. 3개월간 공사가 진행되던 와중에 영묘의 마흐둠이 물탄 민정관 콜데리에게 명령 취소를 청하였다. 콜데리는 조사 후 에거톤 소령에 보고했고, 후자는 1876년 판결로 환원하며 우물 등 알부 부지를 무슬림 측에 양도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힌두 측은 리폰 총독에게 제소했고, 1881년 8월 무슬림과 힌두 양측에서 각각 6인씩 선발된 위원회가 발족해 첨탑 증축을 허가하되 우물 등 부지를 무슬림 측에 양도하는 합의안을 도출했다. 비슷한 시기 아리야 사마즈의 소 보호 운동과 함께 펀잡 전역에서는 힌두-무슬림 간의 갈등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합의안이 집행되기 이전 물탄의 대립 구도를 심화시켰다.
물탄에서도 소고기의 유통과 판매는 논쟁 거리가 되었고, 그해 9월 2일 간의 폭동이 벌어져 5만 루피의 재산 손실이 났다. 힌두 폭도들은 바자르의 모스크에 방화하고, 왈리 모하메디 모스크를 공격했으며 쿠란을 불태웠다. 무슬림 폭도들은 대응으로 프라흘라드푸리 사원에 방화했다. 폭동 직후 사원은 복원되었고, 펀자브 정부는 현지인들의 선택권을 박탈하며 첨탑을 아예 없애거나 합의안을 따를 것을 명했다. 힌두 측은 후자를 수용했고, 사원 옆에 새로 우물을 팠다. 1912년 11월의 어느 새벽, 도둑들이 신상의 왕관을 훔치고 락슈미 성화를 인근 우물에 버렸다. 힌두 측에선 현지 무슬림들의 소행으로 단정지어 규탄하였다. 이듬해에는 사원의 제사장을 탄핵하는 과정에서 긴 소송이 벌어지기도 했다.
파키스탄 독립 후, 힌두교도 대부분이 인도로 이주하고 소수만이 물탄에 남았다. 비록 그들이 최대한 사원을 관리하긴 했지만, 70년대에 나라심하 성화가 하리드와르의 신전으로 옮겨졌고 사원 부지를 관리하게 된 이주민 재산 신용 재단 (ETPB)은 사원을 사실상 방치하였다. 80년대에는 사원 내에 이슬람 학교인 마드라사가 들어섰다. 다만 이때까지도 물탄의 주요 명소이자 다람샬라가 있는 등 사원의 기능은 이어졌다. 하지만 1992년, 인도의 힌두교도들이 아요디야의 바브리 모스크를 파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라흘라드푸리 사원 및 다람샬라를 파괴하고 힌두교도들을 공격했다.
이후 사원은 외벽만 남은 채 폐허로 남았고, 2000년을 전후로 하여 불법 점거 주택이 들어서며 쓰레기장이 되었다. 2009년 폐허가 붕괴 위험이 있다는 정부측 조사 보고서가 나왔지만 별 조치가 없었고, 2015년에는 복원 계획과 함께 5백만 루피의 예산도 편성되었지만 이슬람주의자들의 반발을 우려한 주정부가 집행을 안했다. 2021년 2월, 대법원 결정에 따라 결성된 위원회는 사원의 복원 및 관광객을 위한 숙박 시설 건설을 권고했다. 이에 주정부와 ETPB가 임박한 홀리 축제 전까지 정비를 맡기로 했고, 현지 시민 사회 및 울라마 역시 종교적 화합을 위한 평화 위원회를 구성해 복원 계획을 밝혔다.
4.2. 물탄 성벽
1873년 알렉산더 커닝햄 경이 그린 물탄 시가지
내성, 즉 시타델 일대의 지도
기원전 1000년경 트리갸르타 (캉그라) 왕국의 요새가 있었다가 파괴되고, 기원전후 무렵 란가르 부족이 라비 강변의 언덕에 성을 쌓았다. 다만 현재의 성벽은 무굴 제국기 성을 1756년 증축한 것이다. 6개 성문 (로하리, 보하르, 하람, 파크, 델리, 돌라트 문) 1849년 영국군은 하람 문과 그 주변 성벽을 허물고 진입했다.
외성의 델리 성문
내성의 데문 일대
파크와 델리 성문 사이, 피의 성탑은 1848년 영국인 사절들이 피살 후 묻힌 곳이었다. 공성전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함락 후 사절들의 무덤은 성채 언덕으로 옮겨졌다.
성채 일대. 꼭 예루살렘 성전산 같다
성채의 벽 높이는 21m에 달하고 2km 둘레이다. 4개의 성문 (데, 시키, 하레리, 키즈리 문)의 양옆에 있는 성탑을 포함, 46개의 성탑이 있다. 해자는 깊이 7m, 너비 12m에 달한고 5.5m의 제방도 있다. 성채 내에는 30개의 성탑을 지닌 시타델이 있고, 그 안에 모스크와 힌두 사원 및 칸 궁전이 있다. 1849년 당시 영국군은 포격으로 성채를 크게 파괴했다. 그러다 파키스탄 독립 후 물탄 성벽 도시 사업으로 재건되었다.
4.3. 샤히 이드가 모스크
무굴 제국 말엽인 1735년에 나와브 압둘 사마드 칸의 후원으로 시가지 동북쪽에 세워진 모스크. 1818년 시크 군이 점령한 후 병영 및 화약고로 쓰였고, 1848년 이곳으로 피신했던 영국인 사절들이 모스크를 둘러싼 2천의 시크 군인들에게 살해당한 곳이기도 했다. 뒤이은 공성전 중 4만 파운드의 화약을 지니고 있다가 영국군 포탄에 맞아 폭발해 크게 파괴되었다. 이후 잔존 건물은 영국 지배기에 법원으로 쓰이다가, 1891년 부행정관 H.C. 쿡손의 주장으로 복원되어 다시 모스크가 되었다. 파키스탄 독립 후 증축되었다.
4.4. 간타 가르
영국령 인도 시기 시청으로 세워진 건물로, 본래 시계탑을 뜻하나 사실상 시청 그 자체였다. 1883년 행정법의 통과 후 시정부 설립이 필요해지자 1884년 2월에 과거 포위 당시 완잔히 파괴되었던 아흐마드 칸 사도자이 저택 자리에 착공하였다. 시청사 자체는 당시 총독 리폰의 이름을 따 리폰 홀, 시계탑은 인도 부왕 노스브룩의 이름을 따 노스브룩 타워라 불렸다. 1888년 관공서가 이주했다. 1947년 파키스탄 독립 후에는 국부 모하마드 진나의 이름을 따 진나 홀로 개칭되었고, 민간에 개방되어 문화 행사장 및 물탄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관공서는 차츰 현대식 신축 건물로 이전했다. 1985년, 시계탑의 바늘이 멈췄지만 2011년 재가동되었다.
5. 여담
알무스타파 자미아 모스크
쿳다카 모스크
구시아 하미다 모스크
물탄의 모스크는 다른 이슬람권에서 찾아보기 힘든, 다양하고 독특한 양식을 자랑한다. 인도, 인도네시아, 이란 등의 건축법이 적절히 섞여 있다.
[1]
힌두 군주 지바윈이 세웠다 한다. 돔 밑에, 목재 권좌 위에 놓인 신상의 눈에는 루비가 박혀 있었다고.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손은 전법륜인과 유사한 기안 무드라를 취했다 한다
[2]
금빛 신상 앞에서 여인들은 음악을 연주, 불을 밝히며 꽃과 향을 바친다. 자선의 집에서는 빈자와 병자에게 식음과 약을 제공하고, 항상 수천의 예배자가 있다. 신전의 4면에는 꽃이 가득한 정원이 있어 누구나 거닐 수 있다
[3]
전설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신상이 너무 생생하여 사람으로 착각한 후) 신전에서 330개의 궤짝에 담긴 20톤 혹은 133톤의 보물을 찾아 데발에서 바스라로 옮겼고, 관례대로 원정을 후원해준 상관인 알핫자즈 빈 유수프에게 전리품의 1/5를 보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성인 남성은 다 죽이고 이이들과 사제들 6천을 포로로 잡았다고도 한다.
[4]
참배객들은 형편에 따라 100 ~ 10000 디르함을 낸다. 그중 1/3은 무슬림들 (혹은 빈자들)에게, 다른 1/3은 공공시설 유지비, 나머지 1/3이 사제들에게 돌아갔다. 무함마드는 태양신의 신상이 부의 원천인 것을 알고 파괴하는 대신, 그 목덜미에 (힌두교에서 신성시하는) 소고기 살점을 걸어 모욕하고 금을 압수하는 것으로 그쳤다 한다.
[5]
사실 구자라트, 라자스탄, 카슈미르 등지의 복속을 받았으나 715년 무함마드 이븐 알카심이 본국으로 소환되어 처형된 후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6]
이는 14세기까지 이어졌는데, 무함마드 이븐 알카심이 발견한 엄청난 금과 금빛 신상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7]
당시 신전은 160m 높이였고 철제 신상은 6m 높이였다 한다. 또한 (정복 직후에 비해) 갈 수록 신전 수입 중 군주가 가져가는 비중이 늘어났다
[8]
다만 우치에서는 좀더 관용적인 분위기의 공존이 이어졌다
[9]
다망 다른 기록에서는 신전을 파괴한건 술틴 마흐무드였다고 한다
[10]
가즈니에 유페되어 결국 옥사했다
[11]
이스마일파를 극도로 경계한 그는 1032년, 재상 하사나크가 파티마 칼리파의 예복을 받자 배신했다며 처형하기도 하였다
[12]
한편 라호르에서는 잘랄웃딘 마수드 샤가 거의 자립하는 등 13세기 델리 술탄국의 중앙 집권력은 약하였다.
[13]
정확히는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가 양도, 1335년 루큰 웃딘 사후 안장된다.
[14]
대충 자신의 지혜로 물탄의 강물을 빛나게 했다는 애용이다
[15]
민중은 그에게 '가지 울 물크' 칭호를 주었다
[16]
술탄 등극 후 기야스 웃딘은 아이눌 물크를 재차 장군으로 채용한다
[17]
1336년까지 남쪽 신드에 이스마일파 숨라 왕조가 잔존했기에 물탄에도 이스마일파가 남아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8]
키즈르 칸은 무함마드의 후손, 즉 사이드를 자처했다
[19]
펀잡과 발루치스탄 경계점. 예를 들어 1470년경 데라 이스마일 칸을 사르다르 말리크 소흐랍 도다이에 주고 자기르디르로 봉했다.
[20]
인근 주로는 카불, 타타, 라호르, 아즈메르, 칸다하르 등이 있었고 사파비 조와도 접했다
[21]
1750년 물탄 남쪽의 슈자바드를 세워 웅거해 있었다
[22]
1774년 잔다 싱을 계승했다
[23]
승전한 티무르 샤는
페샤와르를 거쳐
카불로 돌아가 승리를 축하했다. 하지만 얼마 후, 바하왈푸르의 바하왈 칸이 재차 자립을 선포하자 분노한 티무르 샤는 재차 친정에 나섰다. 그는 바하왈푸르를 불태우고, 오랜 포위 끝에 성채를 함락했다. 다만 바하왈 칸이 먼저 항복했기에 그대로 나와브를 맡아 시크교도들을 견제하게 했다.
[24]
그 후임 총독은 샴 싱 페샤우리야.
[25]
다른 시크 병사들은 방관 혹은 동조했다. 물라즈 초프라에 충성하는 시크 열성파 군인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26]
시크 왕국의 카슈미르 총독 이맘웃딘 등이 참전
[27]
보조군과 바하왈푸르 군대는 흩어져 귀가했다
[28]
1만 5천의 영국인 중에서도 절반 가까이는 아일랜드인
[29]
이는 20세기 이전 최대의 화약 폭발로 여겨진다
[30]
그는 캘커타로 유배되어 1851년 병사한다.
[31]
일부는 중앙아시아로도 갔다.
[32]
1881년에도 6만대였다
[33]
다만 바브리 사원과는 달리 기본 골격은 남아있고, 복원 계획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