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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라마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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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밤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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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디 하드라마우트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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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항구 도시 무칼라 풍경

1. 개요2. 상세3. 기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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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حَضْرَمُوتُ
영어 Hadhramaut

남아라비아의 옛 지명. 현지인은 하드라미라 부른다. 현재의 예멘 동부 (하드라마우트 주)와 오만 서부 ( 도파르)로 구성되어 있다. 크게 와디 하드라마우트라 불리는 내륙의 협곡 분지와 해안 도시들 구성되어 있다. 전자에는 시밤, 세이윤, 타림, 와디 다완 등의 오아시스 도시가 있고 후자에는 무칼라, 쉬흐르, 살랄라 등의 항구 도시들이 있다. 더위로 유명한 아라비아 반도 중에서도 남쪽에 위치하지만 생각보다 덥지는 않다. 내륙의 경우 해발 1000m 이상의 고원에 도시들이 자리하고, 해안의 경우 하드라마우트 산지에 인도양의 비구름이 부딪히는 푄 현상으로 다량의 강수량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살랄라의 경우 여름 장마철이면 폭우를 경험하려는 걸프 아랍인 관광객들이 방문하기도 한다.

과거 하드라마우트는 종교 의례에 필수품인 유향 몰약의 독점적인 생산지로써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과 바다를 건너는 함대가 분주히 오가던 교류의 땅이다. 15세기 들어 카티리 술탄국, 마흐라 술탄국 등의 현지 왕조들이 형성되었고 19세기 1차 사우디 국가의 침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후 많은 이주민들이 인도와 동남아로 이주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현재 타림과 세이윤 등지에 남아있는 거대한 궁전들은 이러한 자본가 계층이 세운 궁전들이다. 문화적으로는 이슬람과 부족 전통이 혼합되어 예멘에서 가장 종교적인 지방으로 여겨지고, 현재까지도 부족주의적인 경향이 크다. 농업에 있어 유향 외에도 밀, 대추야자, 수수, 카카오, 커피 등이 생산되고 양과 염소 목축이 행해진다.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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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향나무에서 유향을 채취하는 오만인

하드라마우트는 아랍어로 존재 혹은 당도라는 의미인 하드르와 죽음을 뜻하는 마우트가 합쳐진 말로, '죽음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 그만큼 척박한 지역이 많고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와디 하드라마우트에는 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하였고, 도파르-마하르-하드라마우트-샤브와-히자즈-레반트로 이어지는 육상 교역로와 인도양 전역으로 뻗은 해상 교역로를 통해 외부와 교류하였다. 현재는 중요도가 감소하긴 했지만 고대에는 종교 의례의 필수품이던 유향을 독점적으로 생산했기에, 그를 수출하는 대상 교역으로 번영하였다. 지금도 시밤, 세이윤 등 교역로 상에 있던 도시들을 가보면 수백년이 넘은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여 감탄을 자아낸다. 해안의 도시들 현재 도시 규모에 비해 웅장한 유적들이 많다. 기원전 12세기부터 하드라마우트 왕국이 있었으나 서기 3세기 힘야르 왕국에게 멸망하였다. 와디 하드라마우트 서쪽 끝에 그 수도였던 셰브와 유적이 남아있다.

힘야르 왕국 이후 6-7세기에는 악숨 왕국 사산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던 631년 하드라미 대표단이 메디나로 향하여 무함마드를 접견하고 온 후 주민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이슬람 제국군에 합세하여 마그레브 안달루스 정복 당시 활약하였다. 중세 이슬람 시기 하드라마우트는 홍해를 통해 근동 지방과 인도 및 이란, 또한 동아프리카 ( 스와힐리)를 이어주는 해상 교역의 거점으로 번영하였다. 동시에 외진 위치 덕에 카와리지 세력의 거점으로 수차례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고, 9세기 들어 현지 부족들이 사실상 자립하였다. 11세기 들어 하드라마우트는 아덴을 기반으로 한 주라이 왕조에 복속하였고, 이후로도 대부분의 경우 아덴을 장악한 세력의 영향을 받았다. 다만 아이유브 왕조, 라술 왕조, 타히르 왕조 등 예멘을 통일한 왕조들도 교통의 한계로 하드라마우트까지 직접 지배하지는 못하였고 점차 하드라마우트에는 자체 왕조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14세기 세이윤을 중심으로 세워진 카티리 술탄국과 15세기 쉬흐르를 중심으로 세워진 마흐라 술탄국, 발하프를 중심으로 세워진 와히디 술탄국 등이 그것이다. 본래 카티리 술탄국은 내륙, 마흐라 술탄국은 해안을 다스렸다. 다만 후자는 타히르 왕조와 싸우며 약해졌고, 결국 카티리 왕조에게 수도 쉬흐르를 내주고 동쪽 변방으로 밀려났다. 16세기 포르투갈의 침공마저 격퇴해낸 카티리 왕조는 도파르까지 점령하며 하드라마우트를 거의 통일하였다. 비록 17세기 들어 내분을 겪다가 1654년 예멘 주요부를 장악하던 자이드파 카심 왕조에게 복속하였으나, 1680년대에 그 총독을 축출하고 재차 자립하였다. 오만 제국에게 도파르를 잃긴 했지만 카티리 왕조의 패권은 여전하였다. 하지만 1809년 와하비즘으로 무장한 사우디 군대가 와디 하드라마우트를 잔혹히 공격하는 바람에 쇠퇴하였고, 점차 권력의 중심은 해안의 항구들로 이전되었다.

한편 사우디 군대의 습격은 많은 난민들을 양산하였고, 그중 상당수가 인도의 하이데라바드로 향하였다. 그중 예멘계 용병대를 지휘하며 경험을 쌓은 쿠아이티 가문의 압둘라, 아와드 형제가 시밤을 거점으로 자립한 후 1867년 카티리 조로부터 쉬흐르를 점령였다. 그리고 1881년 영국 당국의 협조로 당시 신흥 항구로 성장하던 무칼라마저 얻으며 하드라마우트의 패권을 장악한 쿠아이티 술탄국은 이듬해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960년대 당시 하드라마우트에는 다음과 같이 세 술탄국이 있었다.
1960년대 영국이 예멘에서 물러나자 쿠아이티 술탄은 독립을 원했지만, 남예멘 사안에 대한 유엔 회의 전에 공산주의 계열 군부가 술탄을 폐위시키고 카티리 술탄국, 마흐라 술탄국을 포함한 하드라마우트 전체를 남예멘에 병합하였다. ( 1967년) 그후 일대는 남예멘과 통일 이후 예멘 공화국의 하드라마우트 주로 편성되었다. 인구는 250만으로, 주도는 무칼라이다. 20세기 말부터 이어지는 예멘 내전의 와중에도 하드라마우트는 해안 일대가 알카에다에게 점령되었던 것 외에는 대체적으로 안정이 유지되는 편이다.

3. 기타

파일:예멘 하즈란 성채.png
와디 하드라마우트의 하즈란
파일:타림 사원 예멘.png
타림의 무다리 모스크, 예멘에서 가장 높은 미나렛으로 유명하다.

대부분 힘야르 계통의 남부 아랍인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하드라마우트에는 더 체구가 크고 직모인 킨다 부족도 공존한다. 여러 부족들 중 마나힐, 하뭄, 마흐라 부족은 아직도 대부분 유목 생활을 하고 있다. 전통적인 이슬람 학문을 배운 사이드 계층은 지금까지도 종교는 물론 세속적인 사안에 있어 존중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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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 오아시스에 즐비한 궁전들 중 하나

고층의 진흙 건축물을 즐겨 세우는 예멘 중에서도 하드라마우트에는 특히 고층 건물이 많다. 이는 시가지 면적을 좁히고 높은 곳에서 적을 관찰하고 일종의 성탑으로 활용하여 수비를 용이하게 하고, 대가족을 수용하려는 목적이다. 외진 곳의 특성상 주민들은 좁은 면적에 한데 모여 살아야 외적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따라서 하드라마우트는 중세 지역들 중 가장 평균 건물 높이가 높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