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6 09:35:08

나바테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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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역대 군주

1. 개요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106년까지 존재했던 나바테아인의 왕국.

2. 역사

파일:나바테아 터키.jpg 파일:터키 나바테아.png
전성기인 아레타스 3세 시절 강역의 상세 지도 기원전 200년경 서아시아 형세

나바테아인 유프라테스 강에서 홍해에 이르는 광대한 사막 지대에 흩어져 살면서 정착민들을 상대로 약탈하거나 교역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유대인들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바빌론으로 끌려가자, 에돔인들이 이때를 틈타 유대 지방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요르단강 동쪽 지역의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나바테아인들은 그곳으로 이주하여 초기에는 주요 도시에서 인접한 산악지대에 천막을 치고 살면서, 도시민들과 교류하며 상업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에돔인들을 완전히 대체해 그 지역의 주인이 되었다. 나바테아인들은 지중해 동부 해안과 아라비아 최남단 사이의 육로 무역을 중개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거두었고, 이를 토대로 독자적인 문명을 이룩하고 여러 도시를 건설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도시를 레켐 또는 레크무라고 불렀다. 나바테아인들의 막대한 부에 눈독을 들였던 안티고노스 1세는 기원전 312년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에게 그들을 기습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데메트리오스 1세는 나바테아인과 화해한 뒤 부친에게 돌아갔다. 그 후 그들은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아라비아 최대의 도시인 페트라를 재건하고 중심지로 삼은 뒤 최고 통치자를 선출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나바테아 왕국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나바테아인들이 왕국의 역사에 관한 자체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국왕들의 전반적인 계보를 완전히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대신 왕의 업적을 기린 비문 수천 개가 그들의 영토 내에서 세워졌는데, 학자들은 이를 통해 이 나라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비문에 따르면, 기원전 168년경 아레타스 1세가 왕국을 통치했다고 한다. 마카베오기 2서는 그를 "아랍의 왕자"라고 지칭했으며, 친 헬레니즘 성향의 유대인들을 잠시 지지하여 유대인 대제사장 이아손의 쿠데타를 지원했지만, 이아손의 반대 세력인 유다 마카베오와 형제 요나단이 집권하자 그들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고 서술한다.

그 다음으로 확인 가능한 군주는 아레타스 2세다. 기원전 120년 또는 110년에서 기원전 96년까지 재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인물은 셀레우코스 제국에 공동 대응하고자 하스몬 왕조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기원전 100년, 유대 왕 알렉산드로스 야나이는 나바테아와 동맹을 맺었던 가자를 공략했다. 가자 시민들은 아레타스가 자신들을 도우러 오기를 기대했지만, 그는 도움을 주지 않았다. 나바테아인들은 가자를 잃은 후 다른 무역로를 찾기 위해 북상했지만, 모압의 마다바에서 하스몬 왕조군의 급습을 받아 패배하고 북부의 엘루사를 포함한 12개의 도시를 상실했다. 한편, 그는 나바테아 동전을 최초로 주조한 군주이기도 하다.

기원전 96년 왕위에 오른 오보다스 1세는 자국을 배신한 하스몬 왕조를 상대로 전쟁을 단행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93년 게네사렛 호수 동쪽의 가다라에서 알렉산드로스 야나이의 유대군을 격파하고 깊은 계곡으로 몰아가 낙타 발굽으로 짓밟았다. 그 후 유대 왕국을 압박한 끝에 야나이로부터 에돔과 모압의 영토를 할양받고 매년 공물을 바치게 했다고 한다. 그는 기원전 85년 사망한 뒤 아브다트에 안장되었고 신격화되었으며, 그를 기리는 신전이 세워졌다. 오보다스 1세 사후 형제 라벨 1세가 즉위했지만 1년만에 사망했고, 뒤이어 오보다스 1세의 아들 아레타스 3세가 왕위에 올랐다.

아레타스 3세는 나바테아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는 아버지의 확장 정책을 이어갔고, 페트라에서 엘리아트로 이어지는 경로 중간에 아바루 시를 건설했다. 또한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무력 충돌을 벌였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 안티오코스 12세는 변경지대를 지속적으로 침략하는 나바테아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에 착수했다. 형제 필리포스 1세는 그가 원정을 떠나느라 다마스쿠스를 비운 틈을 타 쳐들어갔는데, 도시 총독 밀레시우스가 성문을 열어준 덕분에 공략에 성공했다. 그러나 밀레시우스는 새 주인으로부터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자 반기를 들어 필리포스 1세를 다마스쿠스로부터 몰아냈다. 안티오코스 12세는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다마스쿠스로 돌아왔다. 필리포스 1세는 이후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지만, 안티오코스 12세는 필리포스 1세가 다스리던 시리아 북부를 공략하려 하지 않았다.

이듬해, 안티오코스 12세는 나바테아 원정을 재차 감행했다. 그는 적이 국경 지대 방비를 강화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사해를 거슬러 내려가서 나바테아 왕국의 배후를 급습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 왕 알렉산드로스 야나이는 안티오코스 12세가 유대를 정복하려고 쳐들어오는 걸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야나이 방어선'을 건설했다고 한다. 방어선은 카파사바에서 요파 인근까지 28km에 달했다고 하지만, 안티오코스 12세는 방어선을 뚫고 계속 행진했다고 한다. 이후 셀레우코스군과 나바테아군은 카나 마을 인근에서 격돌했다. 카나 마을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학자들은 사해의 남서쪽일 거라고 추정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나바테아군은 위장 퇴각했다가 추격하는 적을 향해 맹렬히 반격했다. 안티오코스 12세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공격을 견뎌냈지만, 최전선에서 적과 싸우다가 그만 전사했다고 한다. 왕의 전사에 전의를 상실한 셀레우코스군은 붕괴되었다. 그는 여세를 몰아 다마스쿠스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한 뒤 귀환했다. 이후 다마스쿠스 등 시리아 남부 일대는 나바테아 왕국의 소유가 되었고, 안티오키아 등 시리아 북부는 아르메니아 왕국 티그라네스 2세에게 복속되었다. 그는 현지 그리스인들을 회유하고자 셀레우코스 왕조의 표준을 사용하여 새로운 청동화를 주조했다. 이때 자신의 이름과 더불어 필헬렌(Philhellen: 그리스인의 친구)이라는 별명을 주화에 새겼다. 그러나 기원전 72년 또는 71년에 다마스쿠스가 티그라네스 2세에게 귀순하면서, 나바테아 왕국은 시리아 남부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렇듯 셀레우코스 제국을 사실상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뒤, 그는 유대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야나이와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였다. 한때 아디다 전투에서 유대군을 격파하여 지중해의 남동부 해안 영토를 빼앗았지만, 야나니가 얼마 후 반격을 가하여 되찾았다. 그는 야나니의 숙청을 피해 망명해온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함으로써 유대 왕국의 내분을 유도했다. 기원전 76년 야나니가 사망한 뒤 여왕으로 등극한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리면서 계획이 틀어지는 듯했지만, 기원전 67년 살로메 알렉산드라 사후 두 아들 요한 히르카노스 2세 아리스토불로스 2세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면서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내전에서 패한 뒤 권좌에서 밀려났던 요한 히르카노스 2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요한으로부터 일이 성공하면 지난날 야나니가 나바테아인들로부터 빼앗았던 모압의 12개 도시를 헌납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후 5만 대군을 일으켜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여 아리스토불로스 2세를 격파하고 예루살렘에 가둬놓고 기원전 65년부터 공성전을 벌였다. 바로 이때,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치르고 있던 폼페이우스가 파견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가 시리아에 도착했다. 아리스토불루스는 즉시 스카우루스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고 구원을 호소했다. 스카우루스는 즉시 그에게 사절을 보내 예루살렘 포위를 해제하지 않으면 로마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위협했다.

지중해 세계 최강국인 로마와 전쟁을 치를 각오가 되지 않았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후퇴하는 나바테아인들을 추격해 요르단 계곡의 파피론에서 격파했다. 그 후 시리아 초대 총독이 된 스카우루스는 나바테아 왕국으로 쳐들어가서 여러 지역을 황폐화시켰지만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 페트라를 공략하지 못했다. 스카우루스는 에돔인 안티파트로스를 그에게 보내 협상했고, 그는 안티파트로스에게 딸 시피로스를 시집보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안티파트로스는 스카우루스의 빚을 갚아준다면 포위가 풀릴 거라고 설득했다. 그는 이에 따랐고, 스카우루스는 곧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로마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기원전 61년 무렵에 사망하고 오보다스 2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2년 정도 재위하면서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고, 말리코스 1세가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4대 군주 아레타스 3세가 기원전 63년 로마의 시리아 총독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의 침공에 굴복하여 공물을 바친 이래 로마의 봉신이 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고, 장차 로마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다. 기원전 55년, 그는 로마에 더 이상 공물을 바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시리아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침공하여 나바테아군을 격파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로마의 봉신이 되기로 했다. 기원전 4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기병대를 지원했다.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으로 시리아,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일부 지역이 파르티아의 수중으로 넘어가자, 그는 파르티아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 시기에 유대의 권력자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헤로데가 나바테아에 망명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는 아버지가 나바테아인들에게 많은 돈을 빌려줬으니 자신을 보호해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와 나바테아 귀족들은 빚을 갚기를 원하지 않았고, 로마의 앞잡이 노릇하는 그에게 반감을 품기도 했기에 그를 잡아 죽이려 했다. 헤로데는 추격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집트로 피신했다.

기원전 38년,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는 파르티아군을 섬멸하고 동방 속주를 탈환한 뒤, 그가 로마를 배신하고 파르티아인들을 도왔다고 비난하며 배상금을 지불하게 했다. 기원전 34년 아르메니아 왕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나바테아 왕국의 상당 부분을 넘겨줬다. 그는 그 영토를 실제로 다스렸지만, 매년 200달란트를 클레오파트라에게 바쳐야 했다. 이 공물은 유대 왕 헤로데가 징수했는데,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해전을 치르기 직전에 그가 공물 지불을 중단했다. 안토니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헤로데에게 유대군을 이끌고 나바테아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헤로데는 디오스폴리스로 진군하여 나바테아군을 격파했지만, 카나에서 패배했다. 이에 헤로데는 공개 전투를 피하고 여러 지역을 습격한 뒤 적이 오기 전에 피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여 그를 괴롭게 했다. 그러던 중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잘 보이기로 마음먹고 수에즈 항구에서 육로로 운송되던 이집트 선박을 불태워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타격을 입혔다.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에 당도했을 때 정식으로 충성을 맹세했다.

기원전 30년, 헤로데 왕은 바빌론에서 유대로 돌아온 요한 히르카노스 2세가 그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히르카노스를 처형했다. 그는 이즈음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들 오보다스 3세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26년, 이집트 총독 가이우스 아일리우스 갈루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지금의 오만, 예멘에 해당하는 '아라비아 펠릭스(Arabia Felix)'를 공략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다.( 갈루스의 아라비아 원정) 오보다스 3세는 로마군이 나바테아 영토를 통과하는 걸 용인하고 1,000명의 나바테아 보조병을 보냈으며, 살라에우스라는 인물을 안내원으로 삼게 했다. 그러나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갈루스는 원정 실패 책임을 살라에우스에게 떠넘겨 처형당하게 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를 모방하여 월계관으로 장식된 자신의 이미지를 동전에 새겼다. 현재까지 확인된 이 새로운 양식의 동전은 기원전 14/13년부터 주조되었다. 또한 수도 페트라에 콰스르 알-빈트(Qasr el-Bint) 사원을 건설했는데, 이곳은 나바테아 왕들의 성역이 되었다. 그러나 고대 작가들은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그를 "무능하고 냉담한 사람이었으며 모든 일을 신하에게 맡겼다"라고 평했고, 스트라보는 "오보다스 왕은 공무와 군사에 근면하지 않았고, 실라에우스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라고 밝혔다.

나바테아 왕국의 실권자 실라에우스는 헤로데 대왕의 여동생 살로메와 사랑에 빠졌다. 그가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청하자, 헤로데는 유대교로 개종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그렇게 했다간 아랍인들에게 돌로 맞을 거라며 거절했고, 헤로데는 개종하지 않으면 결혼은 없다고 못박았다. 이에 분노한 실라에우스는 헤로데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트라코니티스 주민들을 지원했다. 헤로데는 반란을 진압했지만, 40명 가량이 실라에우스에게 망명했다. 그는 이들을 훈련시켜 유대와 코엘레 시리아를 약탈하게 했다. 이에 헤로데는 나바테아로 망명한 이들의 가족을 살해했다.

이렇듯 양자 사이에 무력 충돌이 번번이 일어나자, 로마의 시리아 사령관 사투르니누스에게 반란군을 처벌하고 오보다스 3세에게 빌려준 60달란트를 돌려받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실라에우스는 나바테아엔 반란군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부인하고 빚은 나중에 갚겠다고 밝혔다. 사투르니누스는 30일 이내에 헤로데에게 돈을 돌려주고 도망자들을 유대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실라에우스가 거부하자, 헤로데는 사투르니누스로부터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냈다. 헤로데는 반란군이 포로를 수용하고 있던 렙타 요새를 공략하고 귀환하던 중 나케브가 이끄는 나바테아인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가볍게 격파했다.

실라에우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헤로데가 제멋대로 왕국을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고 항의했다. 이에 황제는 헤로데를 질책했다. 헤로데는 황제의 총애를 잃을 것을 우려해 두 아들을 로마에 인질로 보냈다. 그러던 기원전 9년, 오보다스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헤로데는 아레타스 4세의 사절들과 동맹을 맺고, 아우구스투스에게 자신이 나바테아 왕국을 공격했던 건 시리아 총독의 허락을 받았던 것이니 정당하다고 밝혔고, 실라에우스가 오보다스 3세를 암살했다고 고발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마음을 바꿔 헤로데를 신임했고, 아레타스 4세를 새 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아레타스 4세는 귀국 후 실라에우스를 추방하고 왕위에 올랐다. 실라에우스는 몇년 후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로마에서 처형되었다.

아레타스 4세는 왕위에 오른 뒤 아내 훌두를 공동 여왕으로 세워서 나라를 함께 다스렸다. 당시 주조된 주화에는 왕과 여왕의 형상이 함께 새겨졌으며, 왕은 월계관을 착용하고 여왕은 이시스의 왕관을 착용했다. 일부 주화에서는 그는 자신을 나바테아의 위대한 신, 왕조의 수호자, 백성의 친구로 묘사하는 비문을 잇따라 세웠고, 일부 주화에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레타스(Caius Julius Aretas)라는 문구를 새겨, 자신이 로마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걸 과시했다. 16년부터는 두번째 아내 샤킬랏 1세가 공동 여왕이 되었고, 동전에 그와 함께 새겨졌다.

그는 헤로데 대왕과의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 자신의 딸 파사엘리스를 헤로데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헤로데 안티파스는 서기 35년에 파사엘리스를 내쫓고 이복 형제 헤로데 2세의 부인인 헤로디아와 결혼했다. 이에 분노한 그는 에데사와 손을 잡고 지원군을 받아낸 뒤 서기 37년 헤로데 안티파스를 공격했다. 안티파스는 전투에서 패배한 뒤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고, 티베리우스 황제는 시리아 총독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를 파견하여 안티파스를 돕게 했다. 그러나 비텔리우스는 굳이 안티파스를 위해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고 보고 진압을 성의없이 하다가 그나마도 티베리우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에 들렀다. 그는 나중에 비텔리우스의 중재에 따라 군대를 철수시켰다. 고린도후서 11장 32~33절에 따르면, 사도 바울 다마스쿠스에서 개심하고 예수에 대해 전파하자 이에 분노한 유대인들의 의뢰를 받고 부하를 보내 바울을 잡으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아레타스 4세가 40년에 사망한 뒤 아들 말리코스 2세와 딸 샤킬랏 2세가 결혼하고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 66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했을 때 로마군에 병력을 제공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67년 베스파시아누스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때 1,000명의 기병과 5,000명의 보병을 보냈다고 한다. 타키투스는 70년 초 예루살렘을 포위한 티투스의 군대에서 나바테아인들도 함께 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말리코스 2세의 통치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사무드 족과 사파타 족 등 여러 유목민족의 침략으로 트란스 요르단 북쪽 지역과 네가브 사막의 여러 도시를 상실했다. 이로 인해 가자를 통한 육로 무역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국력이 쇠진해졌다.

말리코스 2세가 70년에 사망한 뒤, 어린 아들 라벨 2세가 샤킬랏 2세의 섭정하에 왕위에 올랐다. 성년이 되어 실권을 잡은 뒤 아내 가밀랏을 공동 통치자로 삼고 주화에 아내의 이미지를 자신과 함께 새겼으며, 가밀랏이 사망한 뒤 하가루와 재혼하고 역시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 그는 자신을 소테르(Soter, 구원자)라고 칭하며 이를 비문에 새겼는데, 이는 선왕 시절에 유목민족의 침략으로 파괴된 도시들을 재건하고 남부 팔레스타인에서 권력을 회복한 공적을 과시하는 목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모종의 시기에 수도를 페트라에서 보스라로 옮겼다.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바테아 귀족들의 권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보스라에서 헬레니즘이 강하게 물든 나바테아 종교를 거부하고 두샤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아랍 판테온을 전면에 내세웠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로마의 영향을 최대한 배제하고 나바테아인의 정체성을 확립해 장차 로마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노렸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라벨 2세는 첫번째 아내 가밀랏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 하르타트와 페사엘을 낳았고 두번째 아내 하가루로부터 딸 훌다를 두었다. 그러나 그가 106년에 사망한 뒤, 나바테아 왕국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명령을 받은 시리아 총독 코르넬리우스 팔마에 의해 로마 제국에 병합되었다. 팔마는 나바테아 일대를 아라비아 페트라에아(Arabia Petraea) 속주로 편성하고 보스라를 수도로 삼았으며, 페트라에 메트로폴리스라는 칭호를 내렸다. 트라야누스가 이같은 조치를 내린 건 나바테아인들이 로마로부터 독립할 기미를 보인 것을 경계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리하여 나바테아 왕국은 멸망했다.

3.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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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킬랏 1세
말리코스 2세
샤킬랏 2세
라벨 2세
가밀랏
하가루
- }}}}}}}}}

특이하게도 후기 왕들은 부부가 공동 통치를 했다.


[1] 불확실하다. [2] 라벨 2세의 재위 초기에 섭정을 맡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