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22:45:45

페르시아 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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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하위 그룹
2. 초기 역사3. 중세4. 근세5. 근현대6. 현재

1. 개요

페르시아 유대인(יהודים פרסים / Yehudím Parsím, Persian Jews) 또는 이란 유대인(یهودیان ایرانی / Yahudiān-e-Irāni, Iranian Jews)은 이란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던 미즈라히 유대인 및 그 후손을 일컫는다. 1993년 통계 기준으로 이스라엘에 7만 5천여 명이 있다. 해외에는 미국에 6만에서 8만명, 이란에 만여 명의 인구가 있다.

미즈라힘을 동방 유대인으로 정의할 경우 혹은 전례나 예법을 기준으로 분류할 경우 이들도 미즈라힘으로 분류할 수 있으나 미즈라힘들이 주로 아랍어/아람어를 사용하던 것과 다르게 이들은 이란계 언어를 사용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다니엘, 에스델, 에즈라, 하박국, 하깨 등등의 인물로 페르시아 영내에 거주한 적이 있지만 이들이 모국어로 고대 페르시아어(아베스타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므로[1] 구약성서 예언서에 나오는 인물들은 따로 페르시아 유대인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1.1. 하위 그룹

러시아의 체첸, 인구셰티야, 카라차예보체르케시야, 카바르디노발카리야, 다게스탄 및 이란 근처의 아제르바이잔 캅카스 일대의 유대인들을 이른바 산악 유대인(유대타트인)으로 부르며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의 유대인들은 부하라 유대인이라고 부른다.[2]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유대이란어군에 속하는 주후리(Juhuri)[3]와 지디(Dzhidi)가 있는데 주후리는 아제르바이잔 산악 유대인들이, 지히디는 이란에 사는 유대인들이 사용한다.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대인은 부하라어(Bukharian)[4]를 사용한다.

아랍어/아람어권 유대인과 페르시아 유대인의 경계에 있는 훌라울라 유대인들도 있는데 이란 쿠르디스탄에 거주하며 모어가 페르시아어 계열이 아니라 아람어 계열이라[5] 속지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페르시아 유대인이지만 언어학적 관점에서 보면 페르시아 유대인으로 볼 수 없다.

2. 초기 역사

바빌론 유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노예로 잡혀서 메소포타미아 일대로 끌려갔는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키루스 2세는 이들을 해방시키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때 귀환하지 않고 그대로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페르시아 유대인들의 직계 조상이다. 유프라테스 강 서안의 도시들 중 수라 시와 품베디타 시는 주민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는데 이들은 예시바(Yeshiva)라는 학교를 바탕으로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편찬해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근세 유대 학문의 중심지가 빌뉴스, 나바흐루다크, 크라쿠프였다면 고대 유대인들의 지적 중심지는 수라와 품베디타로, 바빌로니아 탈무드와 할라카는 아슈케나짐, 세파르딤 전례와 교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바빌로니아의 유대인들은 여타 유대인 공동체들, 이를테면 부하라 유대인 및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남인도 해안지대의 소규모 유대인 공동체 구성원들의 직계 조상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사산조 페르시아 황제의 상당수는 후궁으로 유대인을 선호하였다 한다. 페르시아 샤한샤 중 야즈데게르드 1세는 모친 슈산두흐트가 유대계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스파한에 유대인 구역(예후디예) 건설을 지원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샤한샤 개인 취향마다 달랐고 유대인을 무시하고 기독교인을 후원하거나 아르메니아인 후궁의 요청으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후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대인들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나날이 페르시아에서 교세가 늘어나자 이에 자신들도 동로마 제국의 동포들처럼 다수가 기독교도인 사회 안에서 탄압받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기독교 교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중동에서 이름났다고 한다.

사산 왕조가 망하고 페르시아를 점령한 아랍인들은 이스파한 예후디예의 유대인들이 나중에 적그리스도를 추종할 것이라는 예언[6]을 믿고 이 지역의 유대인들을 전부 죽이거나 추방한 것으로 추정되며 중세 이스파한 시가지는 예후디예를 파괴한 폐허 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약 천 년 후에는 페르시아 유대인들의 숙적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스파한 근교로 대규모로 강제이주된 후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세우면서 번영하였다.

3. 중세

몽골 제국이 이란 전역을 정복한 후 당시 인구의 절대다수였던 무슬림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 칸국에서는 유대인들을 관료로 중용하였다. 몽골 제국의 역사를 기록한 일 칸국의 역사가 라시드 앗 딘 하마다니는 유대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공식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나 라시드 앗 딘이 죽자 그를 싫어하던 사람들이 유대인이 죽었으니 지옥에나 떨어질 거라고 저주하며 축하하던 사례가 있던 기록을 보면 유대인 출신이 페르시아인 사이에서 핸디캡으로 남았던 듯하다. 일 칸국의 적지 않은 유대인들은 중국의 원나라로도 이주하여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카이펑 유대인 문서 참고. 물론 일 칸국이 몰락하고 사파비 왕조가 등장한 후에는 후술하듯 다시 몰락했다.

4. 근세

페르시아 유대인들은 중세 이후에는 페르시아의 아르메니아인 상인에게 밀려서 기세를 그렇게 펴지 못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확보하게 위해서 무슬림 혹은 조로아스터교도 권력자들에게 선물공세로 일관하여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권리를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상권을 장악하다시피 했지만 유대인은 그런 거 없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유대인들이 통역으로 맹활약했던 것과 다르게 사파비 왕조 카자르 왕조의 유대인들은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다. 당시 이란의 유대인들이 주로 입에 풀칠하던 분야는 의료 분야였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무슬림이 이슬람 율법을 공부하는 대신에 의학을 공부하는 것은 신앙심이 부족해서이다."라는 인식이 중세 후기부터 널리 퍼지면서 무슬림들이 의학을 공부하는 것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정작 중세 의학 기술이 이븐 시나를 비롯한 무슬림들에 의해서 집성되고 발전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7]

5. 근현대

고대와 중세에 강성했던 페르시아가 근현대에 황폐하고 가난한 지역으로 전락하면서 페르시아 유대인 공동체도 몰락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시골 지역의 유대인들은 가난하고 고립된 상황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경우가 계속 늘어났고 도회지에 사는 유대인들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생활 기반을 잠식당하면서 경제적인 곤경을 겪었다. 적지 않은 페르시아 유대인들은 16~18세기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없는 중앙아시아 부하라시를 중심으로 이주하였다. 부하라시의 유대인 공동체들은 튀르크계 지배자들의 눈치 때문에 이슬람을 믿는 척 하면서 집에서는 몰래 유대교를 믿는 이중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부하라 유대인 소련의 개방과 붕괴 이후 대량 이민으로 인해 오늘날 부하라에는 단 150명 정도만 남아 있고 우즈베키스탄에 남아있는 부하라 유대인들의 수도 천 명 안팎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에는 대략 10~12만명이 살고 있고 미국으로 이민간 부하라 유대인들은 뉴욕시 퀸스를 중심으로 5만명 정도가 모여 산다고 한다.

19세기부터 캅카스 지역이 조금씩 러시아 제국에 점령되기 시작하면서 이 일대의 유대인들은 러시아인들과 조우하며 서구화되었다. 특히 교역 요충지 중 하나였던 중세부터 트빌리시 조지아 유대인들의 주요 터전 중의 하나였다. 이들은 예루살렘 기준으로 동방에 있다는 이유로 미즈라힘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이민 온 아슈케나짐들의 영향도 받았다.

남아제르바이잔 우르미아 호 인근에는 페르시아어 계열 언어 대신 고대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인구가 잔류하던 마을들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영어 위키백과 우르미아 유대 신아람어 방언 문서 참조. 이 지역이 이란과 오스만 제국의 전쟁터가 되면서 우르미아 유대인 상당수가 조지아 트빌리시로 이주하면서 인구가 대폭 감소하였다고 한다. 조지아 트빌리시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잊어버리고 상술한 것처럼 러시아의 아슈케나짐들과 상당 부분 동화되기에 이른다.

페르시아 유대인에게는 러시아의 캅카스 점령 이외에도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더 있었는데 바로 이스라엘의 건국과 이란 혁명이다. 시오니즘에 동조하는 세력은 이스라엘로 넘어가기도 하였지만 급속히 붕괴한 아랍권 유대인 공동체와는 달리 존속하였다. 이란의 팔라비 왕조는 한 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로부터 '이스라엘의 개'라는 놀림을 받을 정도로 친유대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동안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빼았겼던 경제적 이권을 되찼고 신나는 상황이었다. 결정적으로 팔라비 왕조는 중동전쟁을 아랍인-유대인의 대결로 보았기 때문에 중동전쟁의 포화에 이란은 없었다. 팔라비 왕조 말기 유대인의 80%가 중산층, 10%가 상류층이었고 10%만이 하류층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란에서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180도 변해 버렸다. 호메이니와 그의 지지자들은 국제사회의 눈치 때문에 유대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 행위는 자제하였지만 팔라비 왕조 시절 페르시아 유대인들이 누렸던 특권을 대폭 제한하고 아르메니아인들은 패자부활전에 성공하면서 페르시아 유대인들은 다시금 몰락했다. 인구 절대수 자체도 미국, 이스라엘을 비롯한 해외로 탈출하면서 1976년 62,258명 → 2006년 9,252명으로 대폭 줄어 버렸다. 타지키스탄 등지에서도 독재나 유대인 탄압 등으로 인해 정치적 이유로 미국과 이스라엘 등으로 망명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8]

6. 현재

이란 혁명 이전에는 8만여 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이란에 거주했지만 오늘날에는 미국 등으로 이주하는 인구가 늘면서 1만여 명 정도만 남아 있다. 이들은 이란 국민과 같은 의무를 지는데 심지어 군대에도 같이 징집되고 이란-이라크 전쟁에도 참전했으며 사상자도 나왔다. 이슬람 혁명 이후 반유대주의가 확산되었지만 이들에게는 이란 국회 의석 중 한 자리가 여전히 보장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이란이 미수교 상태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방문도 가능하다. 다만 이란 본국의 허락뿐만 아니라 제3국(주로 튀르키예)을 거쳐서 이스라엘 비자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절차상으로는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이스라엘과 미국 등지에도 페르시아 유대인으로 정체성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수십만명에 달한다. 한동안 이란은 이스라엘 빼곤 중동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사는 나라였다.

이란에서의 인식은 전직 대통령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답이 잘 보여준다고 볼 수 있는데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딸이 만약 유대인과 결혼한다면 무작정 반대가 아니라 그 사람 그 자체를 보겠다고 답했다.[9] 이는 곧 유대인은 페르시아 역사에 수많은 획을 놓은 소중한 유산이며 "이스라엘=유대인"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이슬람 혁명 이후 그냥 전반적으로 억압적으로 변한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탄압당한 사람들도 있지만 이란 당국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사망한 유대인 병사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도 만드는 등 의도적으로 '우리는 이스라엘과 적대해도 인종차별적으로 유대인들을 박해하는건 아니다. 아랍, 유럽과는 다르다'는 메세지를 주기적으로 보내곤 한다.

현재의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건국한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우리는 유대인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싫어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테헤란의 한 랍비: "우린 여기서 아무런 문제도 없고, 존중받고 있다. 다른 곳들의 시나고그와는 달리 무장 경호원도 필요 없다.


[1] 당시 에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공용어는 히브리어와 같은 아프리카아시아어족 계열 아람어였다. [2] 그러나 타지키스탄은 이란계 국가임으로 이쪽 유대인들을 페르시아 유대인으로 분류할 것인가 부하라 유대인으로 분류할 것인가 논쟁이 있었다고.. [3] 유대타트어(Judeo-Tat)로도 부른다. [4] 유대부하라어(Judeo-Bukharic)라고도 부르며 튀르크어족이 아닌 인도유럽어족의 타지크어 방언에 해당하는 언어다. [5] 자세한 내용은 영어 위키백과 문서 참조 [6] # [7] 하지만 이븐 시나도 주류 무슬림은 아니고 시아파 중에서도 이단 취급받는 이스마일파 신도였다. [8] 그러나 유대교를 믿던 이들의 특성상 소련에서 무신론을 권장하고 종교를 탄압하는 와중에 많은 가정에서 유대교 교리를 아예 통째로 까먹은 관계로 그냥 러시아계로 귀화해서 조용히 입 닫고 묻혀가려고 하는 경향이 크다. 한편 구 소련권은 아니지만 근처의 아프가니스탄에는 몽골 제국의 침략 전까지 유대인 공동체가 번영하였고 러시아 혁명 당시 망명한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내전의 영향으로 소련 등 다른 주변 국가로 난민으로 망명하거나 극소수만 남아 있다. 2021년에 아프간의 마지막 유대인이 떠났다고 한다. [9] 아마디네자드 본인이 유대계라는 의혹이 있다. 물론 전세계의 유대인 공동체가 그랬듯 페르시아 유대인도 페르시아인과 외관상 차이가 없고 알게 모르게 유대인 혈통이 흐르는 페르시아인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