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9:52:35

호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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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27대, 29대 샤한샤
𐭧𐭥𐭮𐭫𐭥𐭣𐭩 |호스로 2세
파일:호스로 2세.jpg
제호 한국어 호스로 2세
중기 페르시아어 𐭧𐭥𐭮𐭫𐭥𐭣𐭩
영어 Khosrow II
존호 샤한샤
생몰 년도 ? ~ 628년
재위 기간 590년, 591년 ~ 628년

1. 개요2. 생애
2.1. 즉위 이전의 행적2.2. 동로마 제국으로의 도주와 복위(590~591)2.3. 재위 초기(591~602)2.4. 동로마 제국을 멸망 직전으로 내몰다(602 ~ 622)2.5. 이라클리오스의 대반격과 몰락(622~628)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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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의 제27, 29대 샤한샤.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연이어 승리하며 아케메네스 왕조의 부활을 목전에 두었으나, 이라클리오스의 반격과 본인의 연이은 실책으로 몰락했다.

2. 생애

2.1. 즉위 이전의 행적

호르미즈드 4세와 이스파부단 가문에 속한 성명 미상의 황후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이르면 570년대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로마 제국의 사료에는 590년에 제국에 망명한 그를 소년 또는 젊은이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580년, 이베리아 왕국의 군주 바쿠리우스 3세가 사망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지만 모두 어렸다. 호르미즈드 4세는 이를 틈타 이베리아의 왕정을 폐지하고, 아들 호스로를 캅카스 이베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이베리아 귀족인 에리스타비스와 협상을 시작했고, 유인을 제공하고 세습 권리를 보장했다. 바쿠리우스의 두 아들에게도 일정한 영지를 나눠줘서 일생을 부족함 없이 지내도록 하였다.

몇년 후 튀르크가 제국의 동방 영토에 쳐들어오고 동로마 제국과 연합할 기미를 보이자, 호르미즈드 4세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호스로를 크테시폰으로 소환하였다. 이 위기는 588년에 종식되었다. 동로마군은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급료 삭감 조치에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튀르크는 바흐람 추빈의 대활약으로 축출되었다. 그러나 호르미즈드와 바흐람 추빈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더 심각한 위기가 닥쳤다. 호르미즈드는 그가 전리품을 독차지했다는 모함을 믿고 심히 불신하였고, 바흐람 추빈 역시 자신을 박대하는 샤한샤에게 불만이 많았다.

589년, 바흐람 추빈은 이베리아의 아라스 강둑에서 로마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패배했다. 호르미즈드는 이 소식을 듣고 쇠사슬과 굴대, 그리고 여성의 의복을 바흐람 추빈에게 보냈다. 그 의미는 "나는 네놈을 여자 노예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바흐람 추빈은 격노하였고, 군대를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고원의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이란을 가로질러 행진했고, 로마의 지원을 받은 이베리아인들의 공격을 물리쳤다. 이후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토벌군을 모조리 격파하여 티그리스 강변까지 이르렀다.

호르미즈드는 티그리스 강의 다리를 파괴하고, 라흠 왕국의 수도인 알 히라에 안식처를 마련하고자 보물을 그쪽으로 보냈다. 그러나 미처 빠져나가기도 전에 처남 비스탐과 빈두이가 사병들을 이끌고 궁정에 난입하여 그를 붙잡아 붉게 달아오른 바늘로 두 눈을 찔러 시력을 잃게 만들었다. 이들은 호르미즈드의 아들 호스로를 새 샤한샤로 옹립했다.

2.2. 동로마 제국으로의 도주와 복위(590~591)

궁정 쿠데타를 일으킨 귀족들에 의해 샤한샤가 된 호스로는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7세기 동로마 제국 역사가 테오필락트에 따르면, 호스로 2세가 부친을 처형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반면에 9세기 무슬림 역사가 아부 하니파 디나와라는 현재는 실전한 중세 페르시아 저서 <바흐람 추빈서>를 근거로 부친 살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당대부터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횡행했던 듯하다. 바흐람 추빈은 부친을 살해한 패륜아를 몰아내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크테시폰으로 진격했다.

호스로는 바흐람에게 서신을 보내 "모두의 증오를 받은 폭군은 시력을 잃었다. 그대는 이란을 구한 영웅이나, 나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왕좌를 차지했다. 그대를 후히 대접할 테니, 자신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숙고하라."고 알렸다. 그러나 그는 이를 무시하고 크테시폰에 이르렀고, 몇 차례의 전투 끝에 호스로의 군대를 격파했다. 호스로는 아내와 비스탐, 빈두이, 그리고 30명의 귀족들과 함께 동로마 제국으로 도주했고, 크테시폰은 바흐람 추빈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호스로는 마우리키우스 황제에게 자신이 복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아미다, 카르에, 다라, 마티로폴리스, 이베리아, 아르메니아, 라지스탄 등의 지배권을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이 호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자신의 딸인 마리아를 주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다.

591년, 호스로의 부하 빈두이는 동로마 제국 사령관 미스타콘과 함께 아두르바디간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얼마 후, 호스로는 동로마의 또다른 장군 코멘티올로스와 함께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했다. 니시비스와 마티로폴리스는 즉각 호스로에게 귀순했고, 바흐람 추빈이 파견한 자츠파람은 전투에서 패한 뒤 곧 죽었다. 또다른 지휘관 브리자키우스는 모실에서 사로잡힌 뒤 코와 귀가 잘린 채 호스로에게 끌려와 처형되었다. 호스로와 동로마 장군 나르세스는 다라를 공략한 뒤 여세를 몰아 마르딘을 점령했다. 그 후 호스로는 마흐부드를 크테시폰으로 파견했고, 바흐람 추빈은 더 버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튀르크로 망명했다. 호스로는 바흐람 추빈이 살아있는 한 안심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았고, 자객을 보내 그를 처단하였다.

2.3. 재위 초기(591~602)

파일:Roman-Persian_Frontier_in_Late_Antiquity.svg

호스로는 제위에 복귀한 뒤 동로마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어 앞서 했던 약속을 지켰다. 이리하여 로마는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를 할양받았으며, 정기적으로 지급하던 공물을 중단하였다. 그 후 호스로는 11년간 동로마 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쿠제스탄 출신의 기독교인인 시린은 그의 아내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메소포타미아의 기독교인들에게 왕실의 호의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크테시폰에 있는 궁전과 가까운 곳에 교회와 수도원을 건설하고 성직자들의 봉급과 그들의 예복을 위한 재원을 재정에서 분배하는 일을 맡았다. 그동안 다신교를 믿던 라흠 왕국 역시 사산 왕조의 동의를 받고 네스토리우스파로 개종했다. 아르메니아의 수도 드빈에 거주하는 네스토리우스파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한편, 테오도시오폴리스에 칼케돈파 성당을 세우는 걸 허용했다. 이를 통해 네스토리우스파의 지지를 받는 한편 로마에게도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그와 마우리키우스와의 좋은 관계는 아르메니아의 민감한 문제를 다루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590년대에 동로마 제국이 발칸 전쟁에 투입하고자 아르메니아인들을 징집하려 하자, 많은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페르시아로 망명하였다. 호스로는 이들을 수용하였지만, 595년 그들이 튀르크인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킬 기미를 보이자 로마와 연합하여 협공을 가해 이들을 굴복시켰다. 아르메니아 귀족들은 크테시폰으로 끌려갔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스파한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한편, 호스로는 아버지를 실명시킨 뒤 자신을 옹립한 비스탐과 빈두이가 권세를 누리며 왕권을 저해하는 꼴을 더 두고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595년, 그는 두 사람을 소환한 뒤 먼저 도착한 빈두이를 처단하고, 뒤이어 아버지를 살해하는 데 관여한 귀족들을 처형했다. 비스탐은 소환장을 받고 크테시폰으로 이동하던 중 소식을 접하자 길렌으로 도주한 뒤, 그곳에서 세력을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바흐람 추빈의 잔당이 이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바흐람의 누이 고르디야는 비스탐과 결혼하였고, 바흐람의 장남 샤푸르 역시 반란에 가담했다. 비스탐은 596년 레이 주변의 개방지를 통과한 후 메디아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호스로는 신속하게 토벌군을 파견했고, 레이 인근의 평원에서 반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비스탐은 길렌의 산악지대로 패주한 뒤 토벌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여 번번이 격퇴하면서 세력을 끌어모았다. 600년경, 그는 알보르츠 산맥의 가장자리에서 4개의 속주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호스로는 아르메니아 장군인 스바트 바그라투니를 파견하여 이들을 토벌하게 했고, 바그라투니는 비스탐을 격파하여 산골짜기로 몰아냈다. 비스탐은 동방의 두 통치자를 설득하여 이란 내륙으로 쳐들어오도록 유도했지만, 그 중 한 명이 호스로에게 투항하고 나머지는 부하들에게 살해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601년, 스바트는 쿠미스 인근에서 비스탐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고, 비스탐은 사로잡힌 후 호스로의 재촉으로 처형되었다. 하지만 반란군은 추격군을 격퇴한 뒤 길렌 산맥에서 계속 농성하였고, 스바트는 602년 또 다시 원정을 단행하여 이들을 토벌했다. 이리하여 호스로는 사산 왕조의 유일무이한 지배자로서 입지를 굳혔다.

600년, 호스로는 라흠 왕국의 18대 왕 누아만 3세를 처형했다. 아랍 왕이 그의 딸 알-슈르카를 결혼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페르시아 여성들을 모욕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사산조 기록에서는 코끼리로 깔아뭉게 처형했지만, 시리아의 전승에는 연회에 초대했다가 독살했다는, 접대의 관습을 어겼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이후 사산 왕조는 서부의 사막 국경 지역을 직접 통치했고, 라흠 왕조 백성들은 왕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자신들의 자치권을 박탈한 조치에 분노하였다. 이로 인해 훗날 무슬림이 제국을 침략했을 때, 라흠 왕국에 소속되었던 아랍인들이 대거 가담하는 결과를 야기했다.

2.4. 동로마 제국을 멸망 직전으로 내몰다(602 ~ 622)

602년 11월 27일,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포카스의 반란으로 다섯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호스로는 이 소식을 듣자 마우리키우스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로마와의 전쟁을 단행했다. 그는 자신을 마우리키우스의 장남 테오도시우스라고 사칭한 자를 전면에 내세우며, 찬탈자를 몰아내고 은인의 아들을 복위시키기 위한 성전이니 로마인들은 적대하지 말라고 선전했다. 물론 실제 의도는 591년 제위를 되찾았을때 로마 제국에 할양해야 했던 영토를 되찾으려는 것이었다.

사산 왕조군은 타우루스 산맥의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로마를 공격하였고, 로마의 동방 사령관 나르세스는 포카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뒤 사산 왕조와 연합했다. 호스로는 다라 요새를 포위하였고, 별동대를 파견해 에데사에서 토벌군에게 포위된 나르세스를 돕게 하였다. 사산 왕조군은 에데사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였고, 나르세스는 가짜 테오도시우스를 에데사에서 보호받게 하였다. 포카스는 도나우 강 건너편의 아바르족과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나르세스-사산 연합군을 상대로 반격하였으나 패배했다.

이에 포카스는 나르세스에게 신변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평화협정을 맺자고 제의했다. 나르세스는 이를 받아들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다가 오히려 포카스한테 체포된 후 산 채로 타죽었다. 포카스는 뒤이어 여러 유능한 장군들을 반역을 일으킬 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체포해 처형하거나 감옥에 가두었다. 사산 왕조군은 동로마군이 포카스의 이같은 조치로 인해 약해진 틈을 타 맹공을 퍼부었고, 그 결과 604년 다라 요새를 함락시켰고 591년 이전의 옛 영토를 모두 회복하였다.

이후 간간히 습격대를 보내서 적을 피로하게 만들면서 숨을 고르다가, 607년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했다. 당시 동로마군 사령관 도멘치올루스는 포카스의 동생으로, 전투 경험이 없고 유능하지도 않은 인물이었다. 사산 왕조군은 그를 상대로 연전연승하여 메소포타미아 서부와 시리아, 아르메니아,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 갈라티아 등지를 모조리 휩쓸었고, 608년엔 사산 별동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빤히 바라다보이는 칼케돈까지 이르러 무력시위를 한 뒤 돌아갔다. 여기에 테오도시오폴리스가 가짜 테오도시오스를 영접한 뒤 사산 왕조에 귀순하였고, 609년 에데사도 함락되었다.

610년 이라클리오스가 포카스를 몰아내고 새 황제에 즉위했지만, 사산 왕조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611년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로마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카파도키아의 북부의 가이사랴를 공략했으며, 612년 안티오키아를 함락시키고 지중해 연안에 도달했다. 613년 이라클리오스가 친정에 나서 이집트 총독 니키타스와 함께 안티오키아 인근에서 사산 왕조군과 격돌했지만, 샤힌 바흐마자데간에게 패배하면서 시리아마저 상실했다. 614년 니키타스가 에메사 인근에서 사산 왕조군을 격파했지만 대세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동로마 제국의 최고 성유물 성십자가가 크테시폰으로 압송되었다. 617년, 호스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건너편의 칼케돈에 도달하여 겨울 숙영지를 건설했다.

618년 샤흐르바라즈가 이집트로 쳐들어가서 니키타스의 격렬한 저항을 격퇴하여 알렉산드리아를 공략했고, 621년경엔 나일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이집트를 대부분 장악했다. 622년 로도스 섬마저 사산 해군에게 공략되었다. 여기에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이 이 때를 틈타 도나우 강을 건너 일리리쿰으로 쳐들어가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을 궤멸시켰다. 그동안 사산 왕조의 공세에 영토를 계속 빼앗기면서도 야전군을 끌어모아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일리리쿰에서 야전군이 궤멸되면서 그마저도 무산될 지경에 몰렸다. 호스로는 이제 소아시아로 진군하여 앙카라까지 공략하고, 장차 아바르족과 연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협공하여 동로마를 멸망시킬 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연이은 승리에 도취하여 이라클리오스에게 서신을 보냈다.
가장 고귀한 신이며, 이 세상의 왕과 주인이며, 위대한 호르미즈드 호스로의 아들이 천하고 무지한 노예 이라클리오스에게 고하노라.
너는 우리의 지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군주라고 칭하고 있다. 너는 우리의 보물을 빼앗고 우리의 하인들을 속이고 있다. 도적 떼 같은 군대로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 내 어찌 너희 그리스인들을 멸하지 않으리? 너는 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신은 어이하여 내 손에서 카이사레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를 빼앗아 가지 않느냐? 내가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파괴하지 못할 줄로 아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고, 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이리로 오면, 내가 너희의 잘못을 용서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땅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을 주고, 너희를 인자한 마음으로 바라볼 것이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인에게서 자신을 구하지 못한 그리스도에게 헛된 희망을 품지 마라. 너희가 바다 깊은 곳으로 피신하더라도, 너희가 원하든 아니든 내가 손을 내밀어 너희를 잡겠다.

호스로 2세가 622년경에 이라클리오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1]

이때까지만 해도, 사산 왕조가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부활시키는 건 기정사실로 보였고, 호스로는 사산 제국 역사상 최고의 샤한샤이자 정복자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후, 운명은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2.5. 이라클리오스의 대반격과 몰락(622~628)

622년, 이라클리오스는 교회와 시민으로부터 많은 기부를 받고 아야 소피아의 금까지도 벗겨가며 군비를 충당하여 군대를 재편했다. 그는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에게 많은 조공을 바쳐서 평화 협정을 맺은 뒤, 군대를 함대에 싣고 칼케돈에 주둔한 사산 왕조군을 회피하여 이오니아 해안에 상륙했다. 그곳에서 고된 훈련을 실시한 뒤, 가을에 북상하여 카파도키아 고원에서 샤흐르바라즈의 사산 왕조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시리아의 많은 영토를 회복했다. 623년 초에는 아르메니아로 진군하여 샤흐르바라즈를 상대로 다시 한 번 큰 승리를 거두었다.

아바르족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자, 그는 일단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간 뒤 공물을 늘리고 인질을 바침으로써 잠잠하게 하였다. 이후 재차 적의 추격을 회피해 타프수스 산맥을 돌파하여 메소포티마아로 진격했다. 당시 사산 왕조군은 새로 장악한 거대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사방에 분산시켜서, 정작 본토를 지킬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다. 또한 이라클리오스가 설마 점령지를 되찾으려 노력하지 않고 소규모 병력만 이끌고 메소포타미아로 곧장 쳐들어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다. 이라클리오스는 바로 이 점을 노려 적의 의표를 찌른 것이다.

그는 간자크에서 페르시아 궁전을 파괴하였고, 주변의 도시들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이후 크테시폰까지 진격하려 했지만, 샤흐르바라즈가 보급로를 차단하자 카스피 해의 서쪽 해안으로 철수했다. 그는 624년 반 호수를 돌아서 아르사니아스 강을 따라 약 320km를 내려가 마티로폴리스와 아미다를 점령했다. 그리고 625년 다시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하다가, 아다나 북쪽에서 페르시아군과 맞붙었다. 처음에는 페르시아군이 동로마군의 선봉대를 섬멸하면서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자 이라클리오스는 직접 날아오는 화살을 무릅쓰고 말을 몰아 유프라테스 강을 도하한 후 적군을 도륙했고, 이에 사기가 오른 장병들의 맹돌격으로 페르시아군을 무너뜨린 뒤, 트레비존드로 후퇴했다.

상황이 이렇듯 꼬이자, 호스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서두르기로 했다. 626년, 그는 아바르족과 연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한 공세를 감행했다(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이에 이라클리오스는 부대를 세 개로 나눠서 한 부대를 수도로 보내고, 동생 테오도로스에겐 페르시아 장군 샤힌이 지휘하는 5만 가량의 징집병과 상대하게 했다. 그리고 남은 한 부대를 직접 이끌고 아르메니아와 캅카스를 거쳐 페르시아로 쳐들어갔다. 테오도로스는 샤힌의 징집병들을 섬멸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비군과 시민들도 아바르족의 맹공을 잘 막아냈으며, 동로마 함대는 페르시아 함대를 섬멸하여 그들이 바다를 건너 수도에 이르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 아바르족은 거듭된 패전에 지쳐 돌아갔고, 사산 왕조군 역시 본토가 위험에 처하자 퇴각했다.

627년 이라클리오스가 튀르크 족장 지벨에게 딸 에피파니아를 시집보내고 받아낸 기병대를 인솔하여 메소포타미아로 쳐들어오자, 호스로는 소아시아에 주둔한 샤흐르바라즈에게 당장 복귀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전하고자 전령을 보냈다. 그러나 전령은 도중에 이라클리오스의 경기병에 붙잡혔다. 이라클리오스는 서신의 내용을 "거기서 계속 머물고 있어라"라는 내용으로 위조한 뒤, 다른 전령을 샤흐르바라즈에게 보냈다. 샤흐르바라즈는 이를 믿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리하여 이라클리오스는 별 훼방을 받지 않고 니네베까지 진격했다. 12월 12일 니네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지휘관 라흐자드는 전사했고, 사산군은 패퇴했다. 이후 며칠간 후속 군대의 합류를 기다린 이라클리오스는 12월 21일 대 자브 강을 건넜다. 호스로는 이 소식을 접하자 방어시설이 잘 갖춰진 디스타게르드에서 농성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 멀리 달아났다. 사흘 뒤 디스타게르드에 도착한 로마군은 궁전을 철저히 파괴하고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인 성화 사원을 파괴했다.

호스로는 거듭된 패전에 격분해 전쟁에 참전한 귀족 및 장군과 병사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노예들을 대거 징집해 크테시폰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려 했다. 그러나 그의 무모한 전쟁에 질색한 모든 신하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고, 오히려 그를 축출하기 위한 쿠데타가 계획되었다. 628년 6월 23일에서 24일 밤, 음모자들은 궁전에 난입하여 궁궐 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카바드 2세를 구출하고 샤한샤로 선포했다. 궁전을 지키던 경비병들 대부분이 이 소식을 접하자 싸우지 않고 오히려 반란에 가담했다. 호스로는 잠을 청하던 중 고함과 트럼펫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그는 궁전을 빠져나와 옆집 정원에 몸을 숨겼지만, 얼마 안가서 반란군에게 발각되어 체포된 뒤 궁전으로 끌려갔다.

쿠데타를 일으킨 카바드 2세와 귀족들은 포박되어 온 그에게 부친 호르미즈드 4세를 시해한 혐의, 로마 제국과의 무익한 전쟁으로 나라를 패망 직전으로 몰고 간 혐의, 정당한 후계자 카바드를 박대하고 첩의 자식인 마르단샤를 후계자로 삼으려 해 신민들의 분노를 산 혐의 등을 말하며 심문했다. 호스로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감옥으로 쓰이는 요새에 갇혀서 나흘간 빵과 물로 연명하면서 가장 사랑했던 아들 마르단샤를 포함한 가족들이 눈앞에서 처형되는 걸 지켜봐야 했다. 결국 6월 28일, 호스로 역시 카바드 2세의 지시를 받은 미르 호르미즈드의 손에 처형되었다. 이로써 즉위 이래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며 한때 동로마 제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샤한샤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제국은 심각한 내전( 사산 공위시대)에 휘말리며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3. 여담

아버지와 함께 호프 다이아몬드와 연관이 있다는 설도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1] 다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호스로가 이 편지를 실제로 보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