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최고층 건물인 바흐리아 아이콘 빌딩 (우측)
독립 영웅 모하마드 진나 영묘와 시가지
옛 시청사인 자유의 전당
파키스탄의 도시 کراچی 카라치 | Karachi | ڪراچ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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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신드 | |
면적 | 3,527km² | |
인구 | 20,382,881 명(2023년) | |
인구밀도 | 5,779명/km² | |
웹사이트 |
카라치 무역관 (KOTRA) 주 카라치 대한민국 분관 (외교부) |
카라치의 위성사진. 왼쪽의 해안 사구로 이어진 섬과 같은 곳이 마노라 해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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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Karachi우르두어: کراچی
신디어: ڪراچي
파키스탄 신드 주에 있는 항만도시. 남해안의 최대 도시이자 옛 수도라는 점에서 미얀마의 양곤, 나이지리아의 라고스와 비슷하다. 파키스탄의 최대도시로 인구는 1998년 조사 시 900만 여 명이었는데 이게 매일 1000명 이상 증가하고 있다. 2023년 기준으로 면적 약 3,500㎢에 인구는 약 2,038만 명이다. 19세기 중반 이래 파키스탄의 최대 항구이자 경제 중심지로 1948~58년까지 10년 간 파키스탄의 첫 수도였다. 비록 라왈핀디에 이은 이슬라마바드로의 천도로 대사관들 역시 이전되었지만 대한민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여전히 카라치에 영사관을 두고 있다.
2. 역사
파일:카라치 파키스탄 6.jpg카라치와 동쪽 타타 사이에 있는 반보르 유적[1]
일대는 고대 인더스 문명의 중심지로 기능했으며 기원 원년부터 서기 3세기까지 국제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 고대 로마에서는 카라치를 바르바리쿰이라고 불렸으며 인도의 물산이 로마 제국으로 수출되는 주요 거점 항구로 번영을 누렸다. 중세에는 데발이라 불렸고, 711년 우마이야 왕조의 무함마드 빈 카심이 점령하여 이슬람화되었다. 이후 작은 어촌으로 유지되다가 1728년에 본격적으로 도시가 세워져 콜라치라 불렸다. 1795년 일대를 장악한 탈푸르 왕조의 창건자 미르 파테흐 알리 칸은 1797년 마노라 해변에 성채를 세웠는데, 아랍에미리트의 라스알카이마와 샤르자의 왕가인 알 카심 가문에 대항한 것이라 하여 카심 성채라 불린다. 또한 그는 1800년경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상관 설립을 허가했으나 1802년 철회했다.
2.1. 영국 지배기
마노라 해변과 18세기에 세워진 카심 성채
1839년 2월 3일 HMS 웨슬리가 마노라 섬의 카심 성채를 포격해 파괴한 후, 존 킨이 이끄는 영국군이 카라치를 점령했다. 당시 인구는 1만 정도였다. 영국군은 시가지 동쪽에 군사 기지를 세웠고, 같은해 발발한 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전쟁 당시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1843년 영국은 미아니 전투에서 탈푸르 조를 격파하고 하이데라바드를 점령, 신드를 평정했다. 신드 주의 중심이 된 카라치는 1846년 콜레라를 겪었으나 1851년 장관으로 부임한 헨리 바틀 에드워드 프레이의 주도 하에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854년 근대적인 항구가 세워졌고, 활발한 물류로 인해 2년 후에는 인구가 5만 7천으로 불어났다. 1857년 세포이 항쟁 당시 카라치의 제21 원주민 부대가 영국에 반기를 들었으나 그해 9월 진압되었다.
2.1.1. 제2의 뭄바이
20세기 초의 카라치 시가지 | 1906년 영국 국왕 조지 5세 방문 기념 구조물 |
1861년 남북 전쟁이 터지자 목화값이 상승하며 카라치는 인도산 목화의 수출항이 되어 크게 번영했다. 1864년에는 런던과의 직통 케이블이 개설되어 영국-인도간 첫 전보가 발송되었고, 1865년 자유의 전당과 같은 공공 건물들이 세워졌다. 1869년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유럽과의 항해 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되며 카라치는 더욱 번영하게 되었다. 동시에 구자라트 등지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유입되었고, 그러한 가문들 중에서 1876년 파키스탄의 국부 모하마드 알리 진나가 탄생했다. 1878년에는 철도가 놓였고, 1887년에는 항구까지 연장되며 무역항의 여건이 더욱 개선되었다. 1889년에는 여왕 마켓이 세워졌고, 인구는 10만에 육박했다. 목화 외에도 1900년 무렵 카라치는 아시아 최대의 밀 수출항이었다.
무슬림, 힌두, 기독교, 시크교도 외에 유대인들 역시 유입되어 1893년에는 시나고그도 세워졌다. 1899년 카라치는 재차 콜레라를 겪었으나 인구는 여전히 불어나 교통 체증까지 발생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00년에 트램이 놓일 정도였다. 1911년부터 1921년까지 시장을 역임한 현지 힌두교도 세트 하르찬드라이 비샨다스는 영국 당국이 괄시하던 구도심을 정비하여 '근대 카라치의 아버지'란 찬사를 받았다. 한편 20세기 들어 신드 지방의 관개 시설이 정비되며 카라치는 세계 최대의 농산물 수출항이 되었고, 1921년 기준 절반의 주민들이 외부 출신일 정도로 인구의 왕래가 잦았다. 마침내 독립한 1947년 당시 카라치는 이미 인구 40만의 대도시였다. 비록 1948년 인도-파키스탄 분할로 주민의 절반을 차지하던 힌두교도 대부분이 인도로 떠났지만 별다른 폭력 사태는 없었고 그들의 빈자리는 인도에서 이주한 47만의 무슬림들로 메워졌다. 후자는 특히 하이데라바드 출신이 많았다.
2.2. 독립 이후
1932년에 세워진 시청사
인구 교환의 결과 카라치의 무슬림 비율은 1941년 42%에서 1951년 96%로 급증했고, 힌두교도는 50%에서 2%로 급감했다. 동시에 주요 언어 역시 신드어에서 우르두어로 바뀌었다. 1948년 파키스탄 성립 당시 카라치는 그 수도였다가 10년 후인 1958년 라왈핀디로 옮겨졌다. 한편 1960년대 카라치는 아시아에서 경제적 롤모델이었고, 하빕 은행 플라자는 1963-68년간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한국의 서울 역시 카라치에서 행했던 5개년 계획을 도입할 정도였다. 다만 70년대 들어 급증한 인구로 인한 주택난과 노동 운동이 일자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는 사회 분위기의 쇄신을 꾀한다며 카라치의 클럽과 술집을 철폐하여 밤문화가 근절되었다.
한편 80년대에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한 백만의 파슈툰 난민들과 이란 혁명을 반대한 일단의 이란인들이 유입되며 인구 분포가 달라졌다. 동시에 아프간 등지에서 무기가 유입되며 치안이 불안해졌고 신드, 펀자브, 파슈툰, 인도계 간의 민족 갈등 역시 있었다. 1992년부터 2년간 파키스탄 정부는 인도계 우르두어 사용자들의 정당인 MQM을 탄압했고, 같은해 인도의 바브리 모스크 파괴에서 촉발된 반힌두 봉기도 있었다. 2014년 세계에서 6번째로 범죄에 취약한 도시로 평가되며 정점을 찍었던 카라치의 혼란은 파키스탄 정부의 '범죄와의 전쟁'을 거친 후 2020년 그 순위가 93위로 내려가는 등 점차 안정되고 있다. 현재까지도 정치 중심인 이슬라마바드와 함께 경제 중심으로써 파키스탄의 양대 도시로 이어진다.
3. 행정 구역
구 | 면적(km²) | 인구(명)[2] | 명/km² | |
카라치 사우스 | کراچی جنوبی | 122 | 2,329,764 | 19,096 |
카라치 이스트 | کراچی شرقی | 139 | 3,950,031 | 28,417 |
카라치 웨스트 | کراچی غربی | 370 | 2,679,380 | 7,242 |
카라치 센트럴 | کراچی وسطی | 69 | 3,822,325 | 55,396 |
코랑기 | کورنگی | 108 | 3,128,971 | 28,972 |
말리르 | ملیر | 2,160 | 2,403,959 | 1,113 |
케마리 | کیماڑی | 559 | 2,068,451 | 3,700 |
카라치 | 3,527 | 20,382,881 | 5,779 |
카라치의 행정구역은 카라치 사우스, 카라치 이스트, 카라치 웨스트, 카라치 센트럴, 코랑기, 말리르, 케마리의 7개 구로 이루어져 있다 #.
4. 경제
카라치 항구
파키스탄 최대의 무역항이자 증권거래소[3]가 있는 경제 중심지로 파키스탄의 세입의 25%가 이곳에서 걷힌다.
5. 사회문제
급속한 인구 증가를 인프라나 공공 서비스가 따라가지 못해 도로와 상하수도, 학교, 병원, 경찰들이 부족해 도시 문제가 되고 있다. 정당 간 갈등이 유혈사태로 번지는 일이 잦고 테러 위험이 매우 크므로 이 도시를 방문할 때는 주의를 요한다. 이슬라마바드가 정치를 담당하고 라호르와 페이살라바드가 공업을 담당한다면, 카라치는 증권거래소, 각종 은행의 본점 등이 있는 등 금융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런 항구도시의 특성상 밀수 범죄가 유명한데 파키스탄 마피아 중에 카라치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꽤 많다.6. 정치 성향
정치적으로 세속주의 정당 지지가 강한 곳이다. 신드를 기반으로 하는 파키스탄 인민당의 집권기에 줄피카르 알리 부토, 그의 딸 베나지르 부토가 총리를 지냈고 현재도 이들 부녀의 자손인 빌라왈 부토가 인민당의 원내대표이자 의장을 맡고 있다. 2013년 총선에서 카라치에는 20개 의석이 주어졌는데, 이 중 세속주의 정당인 통일국민운동(MQM)이 17석을, 그리고 인민당(PPP)이 1석을 가져갔다.하지만 지나치게 부토 가문의 명성에 기대기도 하고, 부토 가문의 장기 집권에 불만을 품은데다 인구 교환이 잦은 카라치 특성상 정치 변동이 빠른 편으로 2018년 총선에서는 임란 칸이 이끄는 PTI가 14석을 가져갔으며, MQM과 PPP는 각각 4석과 2석을 얻는데 그쳤다. 2020년 6월 29일에 카라치의 증권거래소가 무장괴한의 공격을 받아 민간인이 최소 2명 사망하고 괴한들은 4명 전부 사살됐다. #
7. 교통
한때 남아시아의 허브 공항이던 진나 국제공항
1960~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카라치의 진나 국제공항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항공편의 경유지로 곧잘 쓰이는 허브 공항이었으며, 영국항공 같이 장거리 노선을 운항하는 세계 유수의 항공사들이 취항하곤 했다. 그러나 장거리 항공기의 개발, 두바이 국제공항의 부상, 그리고 파키스탄의 정치 혼란으로 인해 현재는 중동 항공사( 에미레이트 항공, 에티하드 항공, 카타르 항공. 사우디아 항공), 타이항공, 터키항공 등을 제외하고는 취항하는 항공사가 없는 상태이다. 항공과 함께 철도 교통이 발달하여 국제적으로 인도의 조드푸르와 이어지는 타르 급행 열차가 다닌다. 그외에 2개의 기차역이 있고, 메트로 버스가 거의 완성되었다. 또한 1975년에 폐지되었던 트램 운행이 재개될 예정이다.
8. 각종 매체에서
8.1. 만화 및 애니메이션
8.1.1. 죠죠의 기묘한 모험
3부 주인공 일행이 이집트로 가던 중간에 경유한 장소로 등장한다. 여기서 주인공 일행은 스틸리 댄의 계략에 의해 곤욕을 겪었다.8.2. 영화, 드라마
8.2.1. 레이더스(영화)
네팔에서 인디아나 존스가 마리온과 함께 비행기로 카이로로 가는 과정에서 바그다드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잠시 머문다. 실제 도시는 등장하지 않고, 지도에서만 표시된다.8.2.2. 미즈 마블(드라마)
주인공인 카말라 칸이 카라치에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가서 증조할머니인 아이샤와 만나고 자신의 할머니의 어린시절인 사나를 구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아이샤의 과거이야기 씬으로 사나를 낳고 살다가 하산(아이샤의 남편, 사나의 아버지, 카말라의 증조할아버지)과 함께 탈출하려고 카라치역에서 기차를 타려고 했으나 헤어지는 등 미즈마블 5화에서 주로 나온 지역이다.
8.3. 게임
8.3.1. 도미네이션즈
부두 원정 목적지 중 하나로 등장한다.자세한 내용은 카라치(도미네이션즈) 문서 참고하십시오.
8.3.2. 마르코 폴로의 발자취
여행 가능한 도시 중 하나로 등장한다.
8.3.3. 메달 오브 아너: 워파이터
트레일러에서부터 대놓고 등장, 플레이어가 도심 한복판에서 질주를 하는 충공깽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정식 발매되고 나니 항구에서 ISI가 대놓고 사람을 저격해 죽이고, 플레이어가 그 ISI 측 저격수를 잡기위해 거리 곳곳을 누비며 깽판을 쳐놓는 개막장 도시로 그려졌다. 덕분에 해당 게임은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2와 함께 파키스탄에서 발매 금지 크리를 받았다.
8.3.4. 슈퍼로봇대전 OG 문 드웰러즈
두번째 분기로 가게 되는 장소로, 데브데다비데가 라마리스 수집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알 반 랑크스와 칼비나 크란쥬가 숙명의 대결을 벌이는 장소이기도 하다.8.3.5.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2
맵 중 하나로 등장한다.
8.4. 소설
8.4.1. 제3인류
1권에서 지구가 일으킨
쓰나미의 피해를 받은 도시다.
9. 갤러리
랜드마크 주 하나인 모하마드 진나 영묘 (마자르 에 카이드)
뱅크 플라자
바흐리아 아이콘 빌딩과 뱅크 플라자 |
하이데라바드 이주민들이 고향의 랜드마크인 차르 미나르를 재현한 복제품과 돌멘 쌍둥이 빌딩 |
- [카라치 기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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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치의 수호 성인인 8세기의 수피 학자 압둘라 샤 가지의 성소
밀레니엄 몰
뱅크 플라자
현대 미술이 가미된 투바 모스크
스카이 라인
9.1. 식민 시기 건물군
1864년에 세워진 카라치 시역
1865년에 세워진 자유의 전당
구 파키스탄 국립 은행. 현재는 국립 은행 박물관
1881년에 세워진 세인트 패트릭 교회
1887년에 세워진 다야람 제마탈 신드 주립 과학대
1889년에 세워진 엠프레스 마켓
1892년에 세워진 메이워더 시계탑 | 1935년 조지 5세를 기리며 시청사에 더해진 시계탑 |
1898년 완공된 카라치 차우니 역
1906년 도서관 등 다목적 회관으로 세워진 칼리크 디나 홀
1912년에 세워진 카라치 항구 트러스트 건물
1925년에 세워진 힌두 짐카나
1927년에 세워진 모흐타나 궁전
1934년 세워진 상인회관
[1]
고대부터 13세기까지 번영하다 인더스 강의 경로 변경으로 버려졌다
[2]
2023년 인구조사
[3]
거래소와 객장은 카라치에 있지만, 본사는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에, 예탁과 전산 부서는 라호르에 있다. 원래 파키스탄에는 카라치증권거래소, 라호르증권거래소, 이슬라마바드증권거래소 세 곳이 있었으나, 2016년 경영합리화 조치로 세 거래소가 파키스탄증권거래소로 통폐합되면서, 거래소와 본사 소재지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