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4 01:16:04

호르미즈드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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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26대 샤한샤
𐭠𐭥𐭧𐭥𐭬𐭦𐭣 |호르미즈드 4세
파일:호르미즈드 4세.jpg
제호 한국어 호르미즈드 4세
중기 페르시아어 𐭠𐭥𐭧𐭥𐭬𐭦𐭣
영어 Hormizd IV
존호 샤한샤
생몰 년도 540년경 ~ 590년 6월
재위 기간 579년 ~ 590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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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의 제26대 샤한샤.

2. 생애

540년경 호스로 1세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튀르크 족장의 딸 카엔(Kayen)으로, 호스로가 에프탈을 공략하기 위해 튀르크와 연합하고자 결혼 동맹을 추진할 때 사산 왕조로 시집왔다. 샤나메는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호르미즈드를 '투르크의 아들'이라고 칭했다. 560년 에프탈은 사산 왕조와 튀르크의 연합 공격으로 붕괴되었고, 그들의 영역은 사산 왕조와 튀르크에게 분할되었다. 그러나 튀르크는 곧 사산 왕조의 동부 영역을 위협했고, 호스로는 호르미즈드를 동방의 총독으로 임명해 침략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579년, 호르미즈드는 부친의 뒤를 이어 샤한샤가 되었다. 아랍 역사가 알 타바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잘 배웠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 대해 호의를 베풀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는 모든 신민이 자유롭게 종교를 믿기를 바래서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이 기독교인을 박해해달라고 청원하는 걸 거부했다. 또한 대귀족들에 대항해 데칸(소지주) 계급과 빈농들의 권리를 지키고자 노력하였고, 말을 듣지 않는 귀족과 사제들을 가차없이 처단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대사제 마흐베드를 포함한 많은 사제들을 처형했으며, 부친 밑에서 고위 관료로서 활약한 보조그메르(Bozorgmehr), 호라산의 군 사령관 스파베드(spahbed), 바흐람 마하 아드하르 등 수많은 장군과 귀족들을 처형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아내의 아버지이자 이스파부단의 대귀족 샤푸르마저 처형했다. 다만 호르미즈드는 이스파부단의 새 지배자로 샤푸르의 아들 비스탐을 임명하였고, '사산인의 친척이자 동지'로 인정할 정도로 높은 지위를 계속 누리게 하였다.

귀족과 사제에 대한 이러한 박해 때문에, 그는 사산인들의 사료에서 잔인한 폭군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들 역시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호스로 1세는 말년에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전쟁을 종식하고자 했는데, 호르미즈드가 즉위한 뒤 평화협상을 중단하고 전쟁을 계속 이어갔기 때문이다. 동시대에 살았던 메난데르의 수도자는 "호스로가 삶을 떠나지 않았다면 로마와 페르시아가 평화를 이루었을 텐데, 악독한 아들 호르미즈드가 왕위에 오른 뒤 모든 게 끝장났다"라고 한탄하는 기록을 남겼다.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구이디 연대기는 호스모즈드가 귀족을 포함한 모든 백성에게 무거운 멍에를 씌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그를 좀더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테오도르 뇔데케는 호르미즈드가 귀족과 사제들을 억눌러서 하층 계급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선의의 군주였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전체적으로 정당했지만, 불행한 결과는 그가 그러한 목표를 달성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라며, 뜻은 좋았으나 능력과 환경이 따라주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호르미즈드가 즉위한 직후, 동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2세는 아르메니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로마가 점령한 아르제네르를 페르시아가 장악하고 있는 다라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호르미즈드는 아버지가 획득한 영토를 단 하나도 내줄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마우리키우스에게 전쟁을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580년 초, 사산 왕조의 속국인 라흠 왕국은 사산 별동대와 함께 가산 왕국에 쳐들어갔으나 가산 왕국의 군주 알문디르에게 참패했다. 같은 해, 동로마군은 쿠르디스탄을 침공하여 메디아까지 파괴했다. 이무렵 이베리아 왕국의 군주 바쿠리우스 3세가 사망하면서 미성년자인 두 아들을 남겼다. 호르미즈드는 이를 틈타 이베리아의 왕정을 폐지하고, 아들 호스로를 캅카스 이베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581년, 마우리키우스는 가산 왕국의 알문디르와 연합한 뒤 크테시폰을 목표로 야심찬 군사 작전을 벌였다. 연합군은 함대와 함께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아나타 요새를 공략한 뒤 메소포타미아 중부의 크테시폰 인근 벳 아라마예에 도착했다. 그런데 알문디르는 마우리키우스의 작전을 사전에 사산 왕조에 알렸다. 알문디르가 처음부터 사산 왕조와 내통했다는 설과 마우리키우스가 무리한 진격 계획을 세우자 알문디르가 이에 반발하여 그런 일을 벌였다는 설이 있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사산 왕조의 장군 아다르마한은 동로마군의 보급로를 위협하여 오슈톨로네를 급습하고 에데사를 공략했다. 이후 그는 유프라테스 강변의 칼리니쿰으로 진군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어쩔 수 없이 철수하였지만, 칼리니쿰에서 알문디르와 힘을 합쳐 아다르마한을 격파했다. 하지만 알문디르가 가산 왕국으로 돌아간 뒤, 마우리키우스는 홀로 철군하다가 국경 부근에 아다르마한에게 재차 공격당해 많은 병사를 잃고 패퇴했다.

582년, 사산 왕조의 장군 탐호스로는 아다르마한과 함께 시리아로 쳐들어가서 콘스탄티나로 진격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사전에 대비하고 있다가 그해 6월 콘스탄티나 외곽에서 회전을 벌였다. 사산 왕조군은 참패하였고, 탐호스로는 전사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2세의 병세가 악화되었기에, 마우리키우스는 즉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된 뒤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이때 마우리키우스는 알문디르가 자신을 배신하는 바람에 크테시폰을 향한 원정이 실패했다고 보고했고, 죽어가던 황제는 분노하여 알문디르를 체포하여 구금한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의 충실한 봉신이었던 가산 왕국은 붕괴되었다. 한편 그의 후임으로 동방 사령관이 된 요안니스 미스타콘은 님피우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만나는 지점에 침투했지만 카르다리칸에게 패배했다.

583년, 사산 왕조군은 578년 마우리키우스가 점령한 아푸몬 요새를 탈환하고자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적이 아푸몬 요새를 포위하고 있을 때 님피우스 강 동쪽에 새로 건설된 요새인 아크바스를 포위했다. 사산 왕조군은 아푸몬 요새 포위를 풀고 아크바스를 방어하러 갔으나 격퇴되었고, 그해 말 동로마군은 아크바스 요새를 함락한 뒤 철저히 파괴했다. 호르미즈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을 보내 평화 협상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양측의 입장차가 여전히 컸기에 이번에도 결렬되었다. 동로마군은 새 사령관 필리키피우스의 지휘하에 584년과 585년에 페르시아 영토를 습격하여 타격을 입혔다. 사산 왕조 역시 585년에 모노카티움과 마르티로폴리스롤 공격했다. 586년 초 호르미즈드는 다시 한 번 평화 협상을 벌이기 위해 미흐부드를 필리키우스에게 보냈다. 그러나 동로마 측은 막대한 금을 공물로 바치라는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며 이번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카르다리칸, 아프라에테스, 마흐부드가 이끄는 사산 왕조군은 솔라콘 전투에서 필리피키우스의 동로마군에게 참패했다. 필리피키우스는 코르뒤네와 아르바이스탄을 파괴한 뒤 클로모른을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아미다로 철수했다.

587년 필리피키우스가 중병에 걸려 꼼짝하지 못하자, 부관 대 헤라클리우스가 지휘권을 대행하여 테오도로스, 안드레아스와 함께 사산 왕조의 영내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하고 다라 인근의 요새 세곳을 점령했다. 588년 초 마우리키우스는 필리피키우스를 프리스쿠스로 대체했다. 그런데 마우리키우스는 병사들에게 지급할 급료를 4분의 1 삭감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병사들이 분노하여 프리스쿠스를 따르길 거부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마우리키우스는 명령을 취소하고 건강을 회복한 필리피키우스를 다시 동방의 지휘관으로 삼고 군심을 다잡게 하였다. 동로마군이 이로 인해 한동안 제 역할을 못하는 틈을 타, 사산 왕조군이 콘스탄티나를 공격했으나 패퇴하였고, 동로마군이 이에 대한 반격으로 아르잔느를 공격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589년 사산 왕조군은 마티로폴리스를 공격하여 한 로마 장교가 배신해준 덕분에 수월하게 공략했다. 필리피키우스가 요새를 탈환하러 달려왔으나, 두 차례의 전투에서 패퇴했다. 결국 그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시시우라논의 페르시아군을 격퇴했던 코멘티올로스가 그를 대신했다. 이후 로마군은 마르티로폴리스 탈환을 위해 진군하여, 양군은 요새를 사이에 둔채 대치했다. 사산 왕조가 이렇듯 동로마군과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는 동안, 튀르크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588년 투르크의 바가(Bagha) 카간이 옥소스 강을 건너 발흐에 주둔하고 있던 사산 왕조군을 격파하고 발흐를 정복했다. 이후 탈라칸, 바드기스, 헤라트를 점령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호르미즈드는 바흐람 추빈에게 튀르크인들을 격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바흐람 추빈은 12,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출격하였고, 588년 4월 히르카니안 산맥 전투에서 약탈을 마치고 귀환하던 튀르크군을 매복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589년, 그는 발흐에 입성한 뒤 튀르크의 보물과 카간의 황금 왕좌를 탈취했다. 뒤이어 옥소스 강을 건너 튀르크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고, 달아나는 바가 카간을 향해 화살을 쏴 사살했다. 이후 부하라 근교의 바이칸트까지 이르렀고, 바가 카간의 아들 비르무다의 역습을 물리치고 비르무다를 생포해 크테시폰으로 압송하였다. 호르미즈드는 비르무다를 성대하게 대접했고, 40일 후에 바흐람에게 비르무다를 돌려보내면서, 그가 트란스옥시아나로 돌아가서 튀르크의 카간이 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튀르크인들은 수년간 사산 왕조에 대적하지 않았다.

그러나 튀르크에게서 얻어낸 전리품 문제로 호르미즈드 4세와 바흐람 추빈의 사이가 벌어졌다. 호르미즈드의 고위관료 아젠 구슈나프는 바흐람이 전리품 중 가장 좋은 걸 취하고, 사소한 것만 호르미즈드에게 보냈다고 모함했다. 호르미즈드가 분노하여 사죄를 요구하자, 바흐람 추빈은 거절하는 답장을 보내면서 끝이 구부러진 단검을 같이 보냈다. 황제는 이 단검의 양끝을 잘라 되돌려 보냈다. 이후 바흐람 추빈은 카프카스로 보내져 하자르족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파하였고,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사산군의 사령관으로 부임해 조지아에서 동로마군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그러나 아라스 강둑에서 로마누스가 이끄는 적군에게 패배했다.

호르미즈드는 이 패배 소식을 듣고 쇠사슬과 굴대, 그리고 여성의 의복을 바흐람 추빈에게 보냈다. 그 의미는 "나는 네놈을 여자 노예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바흐람 추빈은 격노하였고, 군대를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호르미즈드는 사라메스에게 군대를 맡겨 이들을 격퇴하게 했지만, 사라메스는 전투 도중 코끼리에 짓밟혀 죽었다. 그 후 그는 아두르바다간에서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은 이베리아인들의 공격을 격퇴한 뒤 남쪽으로 진군하여 니시비스에 이르렀고, 니시비스 수비대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호르미즈드는 재차 진압군을 보냈지만, 그들 마저 바흐람의 위명에 겁을 집어먹고 뿔뿔이 흩어지거나 항복했다.

호르미즈드는 티그리스 강의 다리를 파괴하고, 라흠 왕국의 수도인 알 히라에 안식처를 마련하고자 보물을 그쪽으로 보냈다. 그러면서 파루칸 장군 휘하의 새로운 토벌대를 파견했다. 파루칸은 감옥에 갇혀있는 대귀족 자드스프람을 석방시켜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이를 따랐다. 파루칸과 바흐람 추빈의 군대는 상류 잽 강에서 대치했지만, 강을 섣불리 건너려다 큰 피해를 입을 걸 두려워해 어느쪽도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자드스프람이 부하들을 선동해 봉기를 일으켜 파루칸을 살해하고 바흐람 추빈에게 귀순했다. 그리하여 대세는 기울었고, 호르미즈드는 크테시폰에서 탈출하려 했으나 처남 비스탐과 빈두이가 사병들을 이끌고 궁정에 난입하는 바람에 사로잡혔다. 두 사람은 호르미즈드의 두 눈을 붉게 달아오른 바늘로 찔러 시력을 잃게 만들었고, 호스로 2세를 황위에 앉혔다.

590년 6월, 호르미즈드는 피살되었다. 7세기 동로마 제국 역사가 테오필락트에 따르면, 호스로 2세가 부친을 처형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반면에 9세기 무슬림 역사가 아부 하니파 디나와라는 현재는 실전한 중세 페르시아 저서 <바흐람 추빈서>를 근거로 호스로 2세는 부친 살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당대부터 호스로 2세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횡행했던 듯하다. 바흐람 추빈은 부친을 살해한 패륜아를 몰아내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크테시폰으로 진격해 호스로 2세를 축출하고 새 샤한샤로 즉위했다. 그 후 동로마 제국의 지원으로 바흐람 추빈을 몰아내고 샤한샤에 복귀한 호스로 2세는 비스탐과 빈두이를 포함해 부친 살해에 관여한 귀족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수십년 후, 그는 카바드 2세의 쿠데타로 실각한 뒤 호르미즈드 살해를 지시했다는 비난을 받고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