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의 30제곱을 뜻하는 SI 접두어에 대한 내용은 퀘타(접두어)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
파슈토어 کوټه발루치어 کویته [1]
우르두어 کوئٹہ
영어 Quetta
파키스탄 서부 발루치스탄 주의 중심도시. 아프가니스탄 국경과 가까우며, 칸다하르는 서북쪽으로 240km 떨어져 있다. 현재 인구는 110만명 정도로, 발루치스탄 북부에 많이 거주하는 파슈툰족과 발루치족, 브라후이족 등이 섞여서 거주하고 있다. 어원은 파슈토어로 요새를 뜻하는 "콰트콧"에서 왔다.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14km 정도 가면 퀘타 국제공항이 나온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잇는 요충지로서 19세기 말 하자라족 난민 유입부터 시작해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아프가니스탄 내전 및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아프가니스탄인 난민들이 정착한 곳이기도 하다. 아프간-인더스 무역로에 위치하여 바자르가 열린다. 본래 다양한 종교와 민족을 지닌 도시였으나 1940년대 인구 교환 후 파슈툰, 발루치, 하자라, 펀자브계 무슬림 다수 도시가 되었다.
2. 지리
평균 고도는 해발 1,680미터에 달하며 파키스탄의 주요 도시 중 스리나가르와 함께 유일하게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별명은 파키스탄의 과수원으로 과일 생산량이 많다.고산 지대에 위치한 이유로 파키스탄 다른 지역에 비해 날씨가 서늘한 편이고 파키스탄 내에서는 나름 관광지로 유명하다. 파키스탄 자치령의 초대 총독이었던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퀘타에서 휴양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었다고 한다.
3. 역사
두라니 제국기에 세워진 미리 킬라 성채
이란과 인도를 잇는 입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그리 깊지 않다. 11세기에 가즈니의 마흐무드의 침공 시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16세기에 무굴제국의 후마윤이 수르 제국에 의해 북인도에서 축출되자 사파비 왕조에 의탁하였는데, 그의 아들인 악바르가 퀘타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1543년) 따라서 무굴제국 시기에 도시화가 되었다.
18세기에는 호타키 왕조와 아프샤르 왕조를 거쳐 1747년에 두라니 제국령이 되었다. 1828년 이 지역을 방문한 유럽인들에 따르면 당시 퀘타는 약 300여채의 흙벽돌 집으로 이루어진 소도시였다고 한다. 1878년, 영국-아프간 전쟁의 결과로 퀘타는 영국령 인도 제국에 병합되었고, 따라서 현재의 파키스탄으로 이어졌다. 영국은 퀘타의 군사적 이점을 중시 여겼고 발루치스탄 중심 도시로 만들었다. 19세기 말 아프가니스탄에서 탈주한 난민 출신 하자라족들이 현재도 많이 거주한다. 1935년의 대지진으로 흙벽돌집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던 시가지가 파괴되면서 약 4만여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본래 주민들의 종교 분포는 1941년까지 무슬림 43%, 힌두교도 36%, 시크교도 11%, 기독교도 8% 등으로 다양했으나 인근의 시비와 달리 비무슬림 인구는 인도로 이주되어 현재는 무슬림이 97%를 차지하고 기독교도 1.5%, 힌두교도 0.5% 정도로 집계된다.
파키스탄 건국 이후에는 근처에 크롬 광산이 개발되고 근처 과수원에서 생산되는 대추야자 등 말린 과일들을 운수하는 중심지가 되면서 도시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기간동안 탈레반의 실질적인 수도이자 작전 기지 역할을 맡았다. # 아프간 주둔 미군 장성들이나 발루치스탄 국민당 측에서는 퀘타 인근 지역이 걸프만 지역의 지하드 자금과 카이베르파크툰크와의 지하디스트 자본을 연결하는 탈레반의 중심지라고 주장해왔다. 파키스탄군 측에서는 2009년에야 이 지역이 탈레반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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