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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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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수결3. 시문집
3.1. 도문대작3.2. 성소부부고3.3. 을병조천록3.4. 한정록3.5. 국조시산
4. 소설
4.1. 남궁선생전4.2. 손곡산인전4.3. 엄처사전4.4. 장산인전4.5. 장생전4.6. 홍길동전
5. 타인의 명의로 발표한 작품
5.1. 난설시한5.2. 조선시선5.3. 난설헌시집5.4. 이 통제사 공신록권5.5. 사명대사 석장비명5.6. 손곡집

[clearfix]

1. 개요

허균의 작품을 다루는 문서이다.

허균의 문장력 하나만큼은 자타 공인의 괴수라서 허균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실록마저도 허균의 문재에 대해서는 '문장의 화려함이 근래에 견줄 만한 자가 없다', '문재가 뛰어나 붓만 들면 수천 마디의 말을 써내려간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상상력도 아주 뛰어나서 '망상이 심하고 허구의 이야기를 잘 꾸며낸다'라는 기록도 있었다. 조선시대 산문 관련한 교양서적들에서도 허균의 문장은 꼭 포함된다.

허균의 작품은 역적의 작품이라 모두 불태워질 뻔하다가 허균이 처형되기 직전 전처의 장녀의 남편이자 사위 이사성의 아들이며 허균에게는 외손자가 되는 이필진(李必進)에게 자신의 작품의 일부를 남겨서 문집 <성소부부고>로 편찬될 수 있었다. 이필진은 발문에서 허균 사후 50년이 지난 1668년에 "겨우 주변 사람들에게 공개했다"고 말했다. <을병조천록>, <국조시산> 등 허균의 다른 작품들은 허균 사후 다른 문인들에 의해 전해졌으며, 이후 허균의 작품은 비밀리에 읽혀졌다. #

2. 수결

파일:허균 서명.jpg

허균의 수결.

고려미술연구소가 찾은 교산 허균의 수결이며, 수결은 1616년 작품 <豊川任氏家 任就正 成文(풍천임씨가 임취정의 성문)>에 있다. #

3. 시문집

3.1. 도문대작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도문대작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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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년 허균이 조선 팔도의 토산품과 변미를 소개한 책 <도문대작(屠門大嚼)>을 간행했다.

책에 의하면 상당한 미식가였던 모양. 허균이 쓴 성소부부고에서는 자신에게 미식가 기질이 있는 것에 대한 글이 있으며, 도문대작에서 전국의 유명한 토산품과 별미를 소개했다. 도문대작(屠門大嚼)이란 고기가 먹고 싶어서 도축장의 문이나 바라보다가 입만 씹어본다는 뜻이며, 서문에서는 "죄를 짓고 귀양살이를 하다 보니 이전에 먹었던 음식 생각이 난다. 그래서 이에 대해 글을 써보며 대신 즐겨보려고 한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3.2. 성소부부고

허균의 시, 문장, 편지, 소설 등을 수록한 문집이다. 1611년 허균이 초고를 썼으며 이후 외손자 이필진(李必進)이 발문을 쓰고 편찬했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의 성소(惺所)는 허균의 또다른 호이고, 부부고(覆瓿藁)는 '장독 뚜껑이나 덮을 만한 보잘것 없는 원고'이라는 의미다. 본래 ' 장독 뚜껑'이라는 표현은 쓸모없는 책을 비유할 때 사용하던 전통 표현이다. 김부식 삼국사기를 완성한 뒤 인종에게 올린 글인 진삼국사기표에서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현대 감각으로는 작가들이 장난 삼아서 "제 책은 냄비받침으로나 쓰세요"라고 너스레를 떠는 것과 비슷한 느낌의 제목이다.

원작이 공간되진 않았고 허균의 외손자 이필진(李必進)이 발문을 쓰고 편찬했다.

고등학교 / 대치동 중학교에서 배우는 <유재론>이나 <호민론>은 성소부부고에서 나왔다.

3.3. 을병조천록

1615년과 1616년 사이 허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이란 책을 썼다.

<을병조천록>은 2005년 번역본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출판하기 전까지 <성소부부고>의 출판자이자 허균의 외손자 이필진의 발문을 통해 책의 제목만 알려지고 내용을 찾을 수 없었는데 허균의 동복 형 허봉의 책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 2권의 하책으로 묶여 있는 것을 발견해서 2005년에 출판될 수 있었다.

허균이 명나라에서 있었던 일, 당시 쓴 시를 모아서 편찬했으며, 탁오 이지의 분서에 대한 시 <이씨의 분서를 읽음>이 수록되어 있다.

3.4. 한정록

1618년 허균이 옥사로 죽기 전에 명나라에서 은둔과 한적 등 도교 사상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서 <한정록(閑情錄)>이란 책을 썼다.

3.5. 국조시산

허균이 초고를 쓴 정도전에서부터 권필에 이르는 35가(家)의 각체시 877수를 수록한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이다. 허균 생전 간행되지 못했으며 1695년 숙종 시기 문인 박태순이 허균의 재능을 칭찬하면서 서문을 쓰고 간행했다. #

4. 소설

4.1. 남궁선생전

허균이 만난 나이 80에 도교를 믿고 득도했다고 알려진 남궁두(南宮斗)라는 인물과 교류하면서 쓴 소설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이다. 허균은 소설에서 "도(道)에 통달하면 신선이고 도에 몽매하면 범인이다."라고 말하면서 도교를 믿으면 도를 깨우칠 수 있다고 말했다. #

4.2. 손곡산인전

허균이 스승 이달을 주인공으로 한 한문소설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은 적이 있다. 이달이 작품 내 등장인물로 등장하며, 작가의 시점으로 주인공 이달의 생애를 관찰하며 묘사했다. # #

4.3. 엄처사전

허균이 쓴 소설 <엄처사전(嚴處士傳)>이다.

강릉 출신 선비 엄충정(嚴忠貞) 혹은 엄처사가 부친이 죽고 나서 모친을 위해 효도를 하는 이야기이다. 엄충정은 과거 합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지만 초야에서 모친을 위해 땔감과 음식을 준비하고 강릉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남은 일생을 보냈다. 이후 78세로 엄충정이 죽자 강릉 사람들과 사대부 모두 엄처사를 조문했다. #

4.4. 장산인전

허균이 쓴 소설 <장산인전(張山人傳)>이다.

한미한 가문 출신 장산인이 부친이 남긴 <옥추경(玉樞經)>이란 책들을 수만번 읽고 귀신을 희롱할 수 있게 되었고 지리산에서 이인(異人)이라는 인물에게 도술을 배워서 두 승려와 함께 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꾸짖어서 호랑이의 등에 타고 절에 갔으며, 서울 동대문 밖 흉가의 뱀을 죽이고 죽은 물고기를 살렸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칼에 맞았으나 쓰러지지 않고 흰 기름과 같은 피를 흘려서 왜적들이 두려워했다. 그 뒤 죽어서 승려들이 시신을 화장했으나 부활해서 강화에 사는 친구를 만나고 금강산에 갔다. #

홍길동전과 비슷하게 등장인물이 도술을 부릴 줄 알고 있으며, 허균이 장산인전을 썼을 때 도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5. 장생전

허균이 쓴 소설 <장생전(蔣生傳)>이다.

등장인물은 장생이며, 술에 취하면 다른 인물의 흉내를 낼 수 있었다. 어느날 장생이 술에 취해서 수표다리 위에서 죽었는데 시신이 썩어서 벌레로 변해서 날아갔다. 이후 장생의 친구 홍세희(洪世熹)가 부활한 장생을 조령에서 만났는데 사실 자신은 죽은 것이 아니라 바다 동쪽으로 향하여 이상적인 섬나라를 찾으러 간다고 말했다. 장생은 홍세희에게 "병화(兵禍)가 있으면 높은 곳의 숲으로 향해 가고, 물에는 들어가지 마시오. 정유년에는 삼가고 남쪽으로는 오지는 마시오. 혹 공사(公事)의 주관한 일이 있더라도 산성(山城)으로 오르진 마시오."라는 예언을 남겼으며, 이 예언은 모두 현실로 나타났다. # #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율도국을 이상향으로 본 것처럼 장생전의 장생도 이상적인 섬나라를 이상향으로 보았다.

4.6. 홍길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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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을 연구한 학자들인 허경진과 이이화에 의하면 허균이 계축옥사 1년전인 1612년에 홍길동전을 지었다.[출처1]

현존하는 <홍길동전>이 정말로 허균의 작품인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는 논란이 있다. 논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홍길동전 문서 참조.

일단 <홍길동전>은 한글소설로 전해지고 있는데, 허균은 어찌 되었건 한문에 능한 문장가였고 이 작품 외에는 후술할 명나라 학자 오명제의 <조선시선>에 실린 한글 시를 제외하면 한글로 글을 남긴 것이 없다.

택당 이식이 허균을 비판하면서 <홍길동전>과 같은 작품을 지어 나라를 어지럽혔다고 한 것이 허균 작가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인데,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이 그저 현전하는 작품과 이름만 같을 가능성도 있는 것. 하지만 현재로서는 딱히 이식의 이 분명한 언급을 부정할 만한 근거도 없는 상황이다. 허균이 현존 작품 그대로 쓰지는 않았더라도, 그가 지은 작품이 한글로 번역되고 수정이 가해져셔 내려왔을 가능성도 높다. 애초에 저자가 역모로 죽은 상황인데 작품이 있는 그대로 전해져 왔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실제로 허균이 죽은 이후 허균이 직접 썼다고 전해지는 저서들은 사실상 소실되었기 때문.

5. 타인의 명의로 발표한 작품

5.1. 난설시한

1597년 허균이 처음 간행한 허난설헌 시집. 순천향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현규 교수에 의하면 허균의 성명과 인장이 있으므로 자료출처가 명확하고 신뢰성이 매우 높다 한다. # 현재 중국 천진도서관장 관정분 친필고본 <대청서옥잡초>에 수록되어 있으며, 허난설헌의 시 16편이 있다.

5.2. 조선시선

파일:송오참군자어대형환천조 1.jpg 파일:송오참군자어대형환천조 2.jpg
<조선시선>에 실린 허균의 한글 시 <송오참군자어대형환천조> #[2]
1598년 명나라의 문인 오명제가 조선의 시들을 소개한 시선집 <조선시선(朝鮮詩選)>을 간행했다.

이 시선집에서 허균은 한글로 쓴 시 <송오참군자어대형환천조(𨓵吴叅軍子魚大兄還天朝)>를 실었다. 즉 허균이 생전에 한글로 쓴 시를 명나라의 시선집에 직접 실은 적이 있으니 홍길동전을 한국어로 썼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시선의 원본은 국립중앙도서관 웹사이트에서 열람할 수 있으며, 허균의 한글 시는 80쪽과 81쪽에서 확인할 수 있다. #

5.3. 난설헌시집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난설헌시집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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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 허난설헌의 명의로 발표된 < 난설헌집>은 허균이 허난설헌의 시를 수록한 시집이다. 간행자는 허균이다.

허난설헌이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태우면서, 허균이 기억을 바탕으로 복원했다고 알려져서 허난설헌의 현재 평가를 만들어낸 책인데... 문제는 표절 논란이 조선 시대 이래로 꾸준히 일고 있는 책이란 것이다. 그것도 시 전체에서 단어 몇 개만 바꿔놓은 수준인 시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로 문집이 발표된 직후부터 현대까지 한국과 중국에서 끊임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난설헌집의 시들은 당나라 시인들의 시들을 거의 대놓고 배낀거 투성이라고 지적해도 이상하게 대중적 인식이 바뀌지 않았다. 현재 허난설헌의 시 중에서 표절 논란도 없고, 허난설헌 본인이 쓴 것이 분명해보이는 시는 정말 몇 수 안되는 상황이다.

이 상황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이는 최유력 후보자가 바로 허균이다. 허균이 평범한 문인이어도 의심쩍은데, 하필이면 허균의 문장력은 당대 최고 수준이라서 충분히 '창작'을 하고도 남을 상황이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허난설헌이 썼다고 알려진 규원가의 경우는 저자가 허균의 첩인 소쌍이라고 홍대용이 기록하고 있다.

5.4. 이 통제사 공신록권

1605년 음력 7월 허균이 실지 이춘영(李春英)을 대신해서 간행한 이순신의 공신록권인 <이 통제사 공신록권(李統制使 功臣錄券)>이다. #

5.5. 사명대사 석장비명

1612년 음력 12월 허균이 스승 사명당의 일대기를 홍제암 비석 <사명대사 석장비명(泗溟大師 石藏碑銘)>에 새겼으며, 현재 네이버 블로그에 비석의 내용이 번역되었다. #

5.6. 손곡집

1618년 허균이 허균의 스승 손곡 이달의 시를 수록해서 간행한 시집. 허균의 스승의 명의로 되어있지만 간행자는 허균이다. 스승 이달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 <손곡산인전>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1] 허경진의 '허균평전' (2002)과 이이화의 '허균의 생각' (2014) [2] 허균의 한자 이름 "許筠"이 있으므로 허균의 시인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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