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0 14:42:03

강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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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 백두진 이갑성 백한성
김도연 최규하 박충훈 남덕우 유창순
김상협 진의종 신병현 노신영 이한기
김정렬 이현재 강영훈 노재봉 정원식
김종필 이헌재 이한동 장상 전윤철
장대환 전윤철 김석수 이헌재 한덕수
권오규 윤증현 최경환 유일호 홍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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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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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강영훈
제2대

김성수
제3대

한승헌
제4대

김용준
제5대

이세중
제6대

윤병철
제7대

이동건
제8대

허동수
제9대

예종석
제10대

조흥식
제11대

김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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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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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적십자사 총재 대한적십자회 회장
초대
의양군
제2대
의친왕
제3대
의양군
초대
이희경
제2대
손정도
조선적십자사 총재
초대
김규식
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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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적십자사 총재
초대
양주삼
제2대
윤보선
제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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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훈
제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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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적십자사 회장
제29대
박경서
제30대
신희영
제31대
김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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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국 대사관 겸 주 국제해사기구 대표부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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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용우
제2대
김유택
제3대
김용식
제4대
이형근
제5대
배의환
제6대
최경록
제7대
김용식
제8대
한표욱
제9대
강영훈
제10대
김영주
제11대
오재희
제12대
이홍구
제13대
노창희
제14대
최동진
제15대
최성홍
제16대
라종일
제17대
이태식
제18대
조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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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영우
제20대
추규호
제21대
박석환
제22대
임성남
제23대
황준국
제24대
박은하
제25대
김건
제26대
윤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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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연하구
제2대
신응균
제3대
윤석헌
제4대
최완복
제5대
한유동
제6대
연하구
제7대
정일영
제8대
장위돈
제9대
강영훈
제10대
노재원
제11대
이상옥
제12대
박근
제13대
오재희
제14대
박쌍용
제15대
신동원
제16대
임동원
제17대
공로명
제18대
박수길
제19대
이정빈
제20대
김석규
제21대
박상식
제22대
이승곤
제23대
정태익
제24대
김항경
제25대
신성오
제26대
최영진
제27대
한태규
제28대
조중표
제29대
이주흠
제30대
이순천
제31대
이준규
제32대
김병국
제33대
윤덕민
제34대
조병제
제35대
조세영
제36대
김준형
제37대
홍현익
제38대
박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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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중장.svg
초대
이형근
2대
원용덕
3대
정일권
4대
송호성
5대
김백일
6대
최덕신
7대
김홍일
8대
이준식
9대
안춘생
10대
김종오
11대
박병권
12대
장창국
13대
백남권
14대
이한림
15대
강영훈
16대
김용배
17대
박중윤
18대
정래혁
19대
이세호
20대
김희덕
21대
심흥선
22대
최세인
23대
최우근
24대
정승화
25대
백석주
26대
차규헌
27대
김복동
28대
최연식
29대
황인수
30대
지일환
31대
최문규
32대
장준익
33대
민병돈
34대
이필섭
35대
임인조
36대
김정헌
37대
장성
38대
김정남
39대
장창규
40대
한승의
41대
오남영
42대
박준근
43대
김충배
44대
김선홍
45대
임충빈
46대
김현석
47대
정승조
48대
이봉원
49대
박종선
50대
박남수
51대
고성균
52대
양종수
53대
최병로
54대
김완태
55대
정진경
56대
김정수
57대
강창구
58대
전성대
59대
권영호
※ 초대~13대, 17대, 19대, 51대, 58대 : 대령, 준장, 소장 / 14대~현임 : 중장
※ 관련 직위 둘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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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중장.svg
초대
이한림
2대
백인엽
3대
강영훈
4대
김웅수
5대
최홍희
6대
김계원
7대
정래혁
8대
한신
9대
김희덕
10대
이세호
11대
박원근
12대
이소동
13대
김용휴
14대
이재전
15대
신현수
16대
강영식
17대
김홍한
18대
안필준
19대
박명철
20대
나병선
21대
임인조
22대
김재창
23대
최경근
24대
이재관
25대
서경석
26대
김판규
27대
서종표
28대
김충배
29대
류우식
30대
송기석
31대
정두근
32대
이홍기
33대
서길원
34대
김학주
35대
이범수
36대
박종진
37대
김성진
38대
김성일
39대
박양동
40대
강건작
관련 직위 둘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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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최용덕
제2대

장경근
제3대

김일환
제4대

강영훈
제5대

이호
제6대

김용우
제7대

김종갑
제8대

최세항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808080> ||<-3><bgcolor=#000080> ||
제9대

이희봉
제10대(정무)

박병배
제10대(사무)

김업
제11대(정무)

우희창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000000> ||<-1><bgcolor=#808080> ||<-1><bgcolor=#808080> ||
제11대(사무)

신응균
제12대

이홍배

||<-4><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835b38> ||
제13대

강서룡
제14대

이경호
제15대

유근창

||<-3><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835b38> ||<bgcolor=#808080> ||
제16대

최광수
제17대

이민우
제18대

김용휴
제19대

조문환

||<-3><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004c97><color=#373a3c> ||
제20대

박찬긍
제21대

권영각
제22대

황인수

||<-4><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0A84E9> ||
제23대

신치구
제24대

임헌표
제25대

권영해

||<-4><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003990> ||
제26대

이수휴
제27대

정준호
제28대

이정린

||<-4><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00aa7f> ||
제29대

안병길
제30대

박용옥
제31대

문일섭
제32대

권영호

||<-4><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ffd918><color=#373a3c> ||
제33대

유보선
제34대

유효일
제35대

황규식
제36대

김영룡

||<-3><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008cd7> ||
제37대

김종천
제38대

장수만
제39대

이용걸

||<-2><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c01920> ||
제40대

백승주
제41대

황인무

||<-2><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004ea2> ||
제42대

서주석
제43대

박재민

||<tablewidth=100%><-2><tablebgcolor=#fff,#191919><bgcolor=#e61e2b> ||
제44대

신범철
제45대

김선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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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ieutenant General_white.png
초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소장.svg
강영훈
제2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소장.svg
김형일
제3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소장.svg
함병선
제4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소장.svg
김점곤
제5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소장.svg
황엽
제6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소장.svg
전부일
제7대

박경원
제8대

서종철
제9대

심흥선
제10대

유근창
제11대

김재명
제12대

박원근
제13대

이병형
제14대

류병현
제15대

이재전
제16대

문홍구
제17대

김영선
제18대

신현수
제19대

강영식
제20대

이상훈
제21대

정진권
제22대

박희모
제23대

한철수
제24대

최웅
제25대

류승국
제26대

임헌표
제27대

권병식
제28대

송응섭
제29대1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대장.svg
송응섭
제29대2

간용태
제29대3

이양호
제30대1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대장.svg
김재창
제30대2

김성득
제31대1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대장.svg
편장원
제31대2

강덕동
제32대

강덕동
제33대

임태섭
제34대

이지두
제35대

장정길
제36대

박성국
제37대

주창성
제38대

오승렬
제39대

파일:대한민국 공군 대장.svg
김명립
제40대

파일:대한민국 해군 대장.svg
박인용
제41대

이계훈
제42대

김중련
제43대

김정두
제44대

원태호
제45대

이영만
제46대

박신규
제47대

김현집
제48대

김유근
제49대

신원식
제50대

엄현성
제51대

이범림
제52대

이종섭
제53대

원인철
제54대

최현국
제55대

윤의철
제56대

박정환
제57대

박웅
제58대

황유성
<rowcolor=#fff> 직책 변천 : 연합참모본부장(제1-5대) ▸ 연합참모국장(제5-6대) ▸
합동참모본부장(제7-28대) ▸ 합동참모본부 제1·2·3차장(제29대) ▸
합동참모본부 제1·2차장(제30-31대) ▸ 합동참모차장(제32대~현재)
<rowcolor=#fff> 계급 변천 : 소장(제1-6대) ▸ 중장(제7-28대) ▸
대장(제29-31대 합참1차장) / 중장(제29-31대 합참2·3차장) ▸
중장(제32-38대) ▸ 대장(제39-40대) ▸ 중장(제41대~현재)
<rowcolor=#fff> ※ 관련 직위 둘러보기
}}}}}}}}}}}} ||

파일:무궁화장 약장.png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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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1960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교육가· 독립운동가
1969
이인
법조인· 독립운동가
1969
닐 암스트롱 · 마이클 콜린스 · 버즈 올드린
우주비행사
1969
이종순
제헌국회의원
1969
조동식
교육인
1970
김수환
추기경
1970
백낙준
교육인
1970
이상백
-
1971
유일한
기업인
1976
박일경
교육인
1980
권승렬
독립운동가, 법조인
1982
권영대
교육인
1982
김상만
언론인
1985
이숙종
교육인
1987
이병철
기업인
1989
이방자
교육인, 영친왕비
1991
강영훈
국무총리
1991
김병관
언론인
1994
김호길
교육인
1995
곽윤직
법학자
1996
장기려
의사
1998
고흥문
국회의원
1998
주영하
교육인
2000
이건희
기업인
2002
김재준
종교인
2002
문창모
의학자
2006
김희수
의학자, 교육인
2006
이종욱
의사, WHO 사무총장
2006
정재헌
법조인
2007
권영우
교육인
2007
장훈
체육인
2008
진창현
바이올린 제작자
2009
김정수
정치인
2010
이영덕
국무총리
2010
조용기
종교인
2010
황장엽
북한정치인, 탈북자
2011
이태석
종교인, 의사
2011
김준엽
독립운동가, 교육인
2012
헬렌 펄 매킨지(매혜란)
선교사
2012
김평우
법조인
2012
정몽구
기업인
2013
남덕우
국무총리
2015
권광중
법조인
2016
이근
의사
2017
박한철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2017
반기문
외교관, UN사무총장
2017
양승태
법조인, 대법원장
2018
김종필
국무총리
2018
노회찬
정치인
2018
박재갑
의사
2018
이석태
법조인
2018
조규광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2018
한승헌
법조인, 감사원장
2018
정세균
국회의장
2019
윤한덕
의사
2019
이국종
의사
2020
이이화
사학자
2020
전태일
노동운동가
2020
문희상
국회의장
2021
최종태
기업인
2022
박병석
국회의장
2023
송창근
기업인
2023
김박
기업인
2023
자승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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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1대 국무총리
강영훈
姜榮勳 | Kang Young-hoon
KBE
파일:PYH2016051010130001300_P2.jpg
<colbgcolor=#003478><colcolor=#c39335> 출생 1921년[1] 5월 30일
평안북도 창성군 청산면 청룡동[2]
(現 평안북도 동창군 청룡리) #
사망 2016년 5월 10일 (향년 94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3유공자묘역 11번
본관 진주 강씨
청농(靑儂)
재임기간 제4대 국방부차관
1953년 11월 9일 ~ 1953년 11월 18일
제21대 국무총리[3]
1988년 12월 16일 ~ 1990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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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78><colcolor=#c39335> 부모 아버지 강병헌, 어머니 이병희
형제자매 4남 2녀 중 장남
배우자 김효수
자녀 아들 강성룡, 강효영
딸 강혜연
친인척 손윗처남 김웅수
학력 청산공립보통학교 (졸업)
영변고등농림학교 (전학)
히로시마 다케타 중고등학교 (졸업)
건국대학 (경제학과 / 학사)
뉴멕시코 대학교 (정치학 / 석사)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정치학 / 박사)
종교 불교 기독교 ( 천주교 | 세례명: 사도 요한)
신체 170cm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3
약력 국방부 관리국장
제4대 국방부 차관
외무부 본부 대사
제4대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제13대 국회의원 (전국구 / 민주정의당)
제21대 국무총리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군사 경력
임관 군사영어학교 (1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46년 ~ 1961년
최종 계급 중장 (대한민국 육군)
주요 보직 제3군단 부군단장
제6군단
제15대 육군사관학교장
참전 6.25 전쟁 }}}}}}}}}
1. 개요2. 생애
2.1. 총리 시절2.2. 총리 퇴임 이후
3. 선거 이력4. 여담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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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21대 국무총리.

2. 생애

1921년 평안북도 창성군 청산면 청룡동(현 동창군 청룡리)에서 아버지 강병헌(姜炳憲)과 어머니 이병희(李炳姬)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 청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영변농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영변농업학교를 다니다가 일본 유학을 선택, 히로시마 다카다(高田)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1941년 만주국 건국대학에 입학하였으나[4]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로 인해 1944년 1월 20일부로 봉천의 보병학교에 입교, 1945년 초 랴오양의 예비사관학교에 입교, 수료한 후 그해 7월 견습 사관으로 임관했다가 곧 해방을 맞았다. #

8.15 광복 직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귀국을 기다렸고 10월이 되어서야 고향 창성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 체제에 불만을 품고 월남하여 1946년 3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졸업했다.

1949년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장을 지냈다. 6.25 전쟁 때는 국방부 관리국 국장, 제3군단 부군단장을 지냈다. 1952년부터 1년간 주한 미국 대사관 부무관을 지냈고 1954년부터 2년간 연합참모본부장을 역임하였다.

파일:강영훈 총리.jpg
이후 사단장을 거쳐 1960년 경기도 포천에 있는 제6군단장 시절 4.19 혁명을 맞았다. 당시 4월 19일 성난 군중이 서대문의 저택으로 몰려오는 것에 겁을 먹은 이기붕이 겁을 먹고 제6군단으로 도피해오자 보호하기도 했다. 이 때 “전차중대를 출동시키라”고 명령이 내려왔으나 “탱크로 학생들을 깔아뭉개버리겠다는 얘기냐”며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제15대 육군사관학교장을 지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에는 반대하였다. 당시 그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위 동원에 반대하다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되어서, 서울형무소에 100여 일간 수감되었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당시 육사 교장이었던 강영훈은 졸업생 자격으로 육사에 들어와서 생도들을 자기 임의대로 끌고 나와서 박정희 지지 퍼레이드를 시키려고 했던 전두환 대위를 저지했는데 이에 전두환 대위는 이걸 박정희 소장에게 고자질했다. 이에 분노한 박정희 소장은 강영훈 중장을 전술한 바와 같이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해버렸다.

이후 군정 치하에서 반혁명죄로 숙청된 이한림, 장도영, 김웅수 등과 군부의 권유를 받아 미국 각 지역에 뿔뿔히 유학을 떠난다.1962년 뉴멕시코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이듬해인 1963년 USC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공산주의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채용되었다. 미국에서 한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70년부터 박정희 정권을 용납하게 된다. 그러나 후에도 계속 밝혔듯이 "5.16은 일어나서는 안 되었던 일"이란 것은 그의 평생의 신념이었다.

1976년말 15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당초에는 국민대학교 학장직을 제의받고 왔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다음해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1년 후 외무부 산하의 외교안보연구원(현 국립외교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0년 11월 3일, 주영대사에 임명되었다. 12월 9일, 영국 정부가 아그레망을 접수함에 따라 1981년 2월 25일에 부임하여 엘리자베스 2세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1983년 10월 4일, 대한민국과 아일랜드가 수교함에 따라 12월 22일부터 아일랜드 대사를 겸하였으며, 4월 11일, 아일랜드 대통령 패트릭 힐러리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1984년 12월에 귀국, 후임 대사로는 김영주가 부임하였으며 강영훈은 이후 주 로마 교황청 대사, 외무부 본부 대사를 지냈다.

1988년에는 제13대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부터 2년간 국무총리를 지냈다.[5]첫 남북총리회담과 남북기본합의서 등 국무총리로서의 업적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2.1. 총리 시절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이 국무총리실에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공직사회를 비평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에서 최고의 총리로 꼽기도 했다.

이 책에서 ‘총리의 권한과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한 사람’으로 강영훈 전 총리를 꼽았으며, 여러 인터뷰에서도 역대 총리 가운데 제대로 권한을 행사해서 자기 역할을 분명히 한 총리로 평가했다. 정두언의 증언에 의하면, 사표를 책상안에 넣어놓고 일을 했었다고 한다. 재임 중에 3번이나 사표를 냈었다고.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역시도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부의 행동반경은 크지 못한 상황에서, 노태우 정부가 강영훈 총리와 같은 신망 높은 인물을 중용해서 북방외교를 트고 변화하는 대외통상환경에 대응해서 경제체질을 강화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국무총리 시절 그는 서울과 수원을 시작으로 제주도와 마라도까지 전국 18곳을 순회하며 ‘국민과의 대화’ 를 가졌다.

1989년 일본 쇼와 덴노의 장례식에 조문을 하러 갔던 적이 있다. #(1:34:53)

파일:external/monthly.chosun.com/1512_326_11.jpg

특히 1990년 9월 분단 45년 만에 최초로 남북 총리회담을 성사시켜서 남북 화해의 새 장을 열었다. 당시 3차례에 걸친 남북고위급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남북협력 증진의 실질적인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해당 사진은 강영훈 국무총리가 1990년 12월 11일 저녁 제3차 남북총리회담에 참석한 북측 대표단을 위해 쉐라톤 호텔에서 베푼 만찬회장에서 북한 연형묵 총리와 회담 성공을 기원하는 건배를 하고 있는 사진이다.

파일:/image/001/2016/05/10/PYH2016051010610001300_P2_99_20160510155811.jpg
1990년 10월 18일 남북총리 회담차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한 장면. 뒤에 서있는 사람이 북한 연형묵 총리이다.

이 당시 국민 감정과 상호 존중을 모두 고려하여 '주석님'이라는 가벼운 존칭으로 부르려 했으나[6] 김일성이 인사말 도중 강영훈 총리 각하라는 더 높은 존칭으로 대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주석 각하로 격상시켜 호칭했다고.[7] 이 부분은 신문 지상에서 대거 보도되었으나 방송을 통해서는 KBS 뉴스 9에서만 보도되었고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주석 각하라고 부르는 부분이 생략되었는데,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사진으로조차 국내 언론에 나올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TV에 김일성의 실제 모습과 육성이 나온 것 자체만으로도 전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겼으며, 당연히 강영훈 총리가 주석 각하라고 부르는걸 그대로 내보내는게 어찌보면 시기상조였던 셈. 물론 당시의 KBS가 사실상 정부의 의중을 그대로 반영하는 국영방송이었음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 정도의 해프닝은 정부가 얼마든지 받아들일 정도로 남북 회담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또한 면담 도중 김일성이 “우리 민족이 6000만”이라고 하자 “6000만이 아니고 7000만 명입니다”고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고. 다만 당시 김일성의 나이가 78세로 팔순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 정도의 착각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또한 북측에서 강영훈 총리의 여동생을 찾아 만나게 해주었는데 동생은 계속 울먹이는 소리로 “위대한 수령님 밑에서 잘 살고 있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고 하며 북측에서 이를 언론에 흘리며 곤욕을 치뤘다.

국무총리에서 퇴임하고 난 뒤, 1991년 제18대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된 이후 7년간 민간의 대북 지원 사업을 주도했다. 또 북한 수재민 돕기(1995년) 등 대북 인도적 지원, 남북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제의(1997년) 등 남북 교류에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성수대교 붕괴사고(1994년), 서울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1995년) 등 대형 재난 발생시 긴급구호 활동도 전개했다. 이어 사할린 거주 해외 동포 영주 귀국 사업 등 인도주의 발전을 위해 큰 발자취를 남겼다.

대한적십자사 총재 역임시절 직원들에게 존경받는 총재였다는 후문이 있다.

2.2. 총리 퇴임 이후

1997년 이후 세종연구소 이사장직을 맡았다. 청렴하고 강직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그는 유엔 환경계획 한국위원회 총재, 인촌상 운영위원회 위원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초대 회장 등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후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운동에 나서는 등 사회원로로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 외교관의 영국이야기』,『소련견제이론』,『한국통일문제』,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등이 있다.

그는 총리에서 퇴임한 뒤 자주 대중교통을 이용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전직 총리가 버스를 타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사회”라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2016년 5월 10일 사망하였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6,670,494 (34.00%) 당선 (4번) 초선[8]

4. 여담

  •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 ‘ 벽창호’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 말은 평안북도 벽동군 창성군 사람 중에서 고집 센 사람을 일컫는 말로, 강 전 총리의 고향이 바로 평북 창성군이다. 압록강과 접한 국경지역으로 교통의 중심지였다. 벽창호의 고향답게 창성군과 벽동군에서 기르는 한우도 예로부터 힘이 좋고 동시에 말 안 듣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회고록 제목에 나온 ‘벽창우’는 여기서 따온 것이다.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동 주택가 골목에 살았다. 1953년 휴전 이후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 강남개발 등 부동산 광풍이 몇 차례 휩쓸었어도 꿈쩍 않고 동네를 지켰다. 그래서 ‘부동산의 대가’보다 한 수 위인 ‘부동의 대가’라고 불리기도 했다. 수십년간 찾는 단골 이발소가 있었는데, 이발사가 강 전 총리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발사의 회고에 따르면 이발사가 강 전 총리에게 더 이상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해서 실랑이를 벌였다는 일화가 있다.
  • 바티칸 대사 시절 바티칸을 찾은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에게 국정방향에 대해 쓴 소리를 했는데, 노태우가 이때부터 그를 마음속으로 존경하게 돼 후일 총리로 기용했다고 한다.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처음에는 민정당 당대표직을 제안받았으나 초선 의원이 대표를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고사했다. 그랬더니 노태우 대통령 국무총리직을 제안했다고 한다.
  • 노태우 전 대통령의 별명 물태우에 대해서는 “물은 세상의 근본이니 나쁜 뜻이 아니다"라고 했다. 노태우에 대해서는 전임 대통령과 비교해 유하게 정국을 이끌어서 그런 별명이 붙은 것 같은데 사실은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했다. 총리에게 맡긴 일은 일절 간섭하지 않았고, 자신 역시도 언제든지 그만둘 각오로 소신껏 일했다고 회고했다.
  • 총리 재임 시절 북한과의 회담에서 북한 측은 강영훈 총리가 자신들에게 의외로 강경하다고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강영훈 총리는 퇴임 후 인터뷰에서 북한은 정상국가가 아니라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임 후 한 인터뷰에서 인도적인 대북지원은 최대한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했다.
  • 17대 대통령 후보를 지낸 문국현이 인생의 사표라고 밝혔다. # 1995년 UNEP 한국위원회의 총재로 활동하였으며, 문국현과 함께 “북한에 나무를 심는 ‘평화의 숲’ 운동을 전개했다.
  • 군사반란을 막으려다 실패하고 반란세력에게 체포당한 점을 들어 장태완과 같은 유형의 장성이라 할 수 있으며 퍼스트 장태완이다. 그리고 둘다 같은사람과 연관이있다.
  • 히로시마 유학 시절 딸 하나를 둔 일본인 미망인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목욕물을 받으면 중학생이긴 하지만 남자인 강영훈이 먼저 목욕을 했다고. 당시 한반도가 아주 남성 중심적 사회였음에도 일본의 남성 우선 문화에 강영훈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 드라마 제2공화국에서 4.19 혁명 당일 제6군단 사령부로 피신해 온 이기붕 일가를 맞이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이후 군단 장교들 사이에 대화에서 "우리 군단장님은 가톨릭 신자여서 여지껏 자유당 눈 밖에 난 사람이다"라고 언급된다. 아마도 같은 가톨릭 신자인 장면을 의식한 발언으로 보인다.
  • 드라마 야인시대 122화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만 되었다. 3.15 부정선거를 획책한 부통령 후보 이기붕이 4.19 혁명의 여파로 서울의 자택을 떠나 어느 인적 드문 곳의 민가로 피한 상황에서 주인으로 추정되는 늙은 여성이 내온 아침밥을 먹고 있는 이기붕 일가에게 자신의 부하인 소령 한 명을 보내어 이승만 대통령이 오후에 사임을 한다는 비밀 정보를 전하는 동시에 이기붕 일가가 머무르는 민가의 안전을 더 이상 담보하지 못 한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떠나라는 말도 전했다. 이에 이기붕은 둘째 아들 이강욱의 설득과 자신의 상관인 이승만 대통령이 떠나기 전에 인사라도 할 목적으로 서울로 돌아가게 된다.

5. 둘러보기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전국구 제13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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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당
38석
채문식 <colbgcolor=#003990> 윤길중 <colbgcolor=#003990> 정석모 <colbgcolor=#0A84E9> 강영훈
이병용 박태준 김동인 이광노
이원조 김종곤 김인기
이동진 이도선 지연태
박철언 조경목 최창윤 최재욱
유기천 나창주 서상목 박승재
손주환 이상하 김장숙 양경자
이상회 홍세기 김길홍 강재섭
김정길 조남욱 이재황 이민규
신영순 도영심 심기섭 안찬희
최상진
평화민주당
16석
박영숙 송현섭 이동근 최봉구
김영도 이경재 김주호 이교성
이형배 허만기 김대중 문동환
최영근 조승형 정기영 조희철
통일민주당
13석
송두호 이행구 노흥준 유승번
황대봉 문준식 석준규 권헌성
최이호 박종률 김운환 김성룡
김남
신민주공화당
8석
김인곤 정시봉 연제원 이희일
김두윤 신진수 옥만호 신철균
권오석
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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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주정의당 심볼.svg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제13대 국회 전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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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문식 윤길중 정석모 강영훈[B] 이병용 박태준 김동인
이광노 이윤자 이원조 김종곤 김인기 이동진 이도선
김종기 지연태 박철언 조경목 최창윤[B] 유기천 나창주
서상목 박승재 손주환[B] 이상하 김장숙 양경자 이상회
홍세기 김길홍 강재섭 김정길 조남욱 이재황 이민규
신영순 도영심 심기섭 [C] 안찬희 [C] 최상진[C]

[B] 임기 중 사퇴. [B] 임기 중 사퇴. [B] 임기 중 사퇴. [C] 승계. [C] 승계. [C] 승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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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적상으로는 1922년생. [2] 인근의 금성동·송학동·용두동에 진주 강씨 집성촌이 있었다. [3] 정식 취임 전까지 국무총리 서리 수행(1988년 12월 5일 ~ 1988년 12월 15일) [4] 그는 당시 최남선이 교수로 있는 것을 보고 건국대학 입학을 결심했다. [5]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강영훈 의원에게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을 제시했고 강원용 목사를 총리로 내정하려고 후보에 올려두었으나 특정 종교의 성직자를 임명하기엔 무리가 있었던데다가 강영훈 의원이 초선에 당대표를 하기엔 무리라고 고사하면서 무산되었다. 같은 날 저녁, 다시 강영훈 의원에게 총리직을 제안했고 그는 고심끝에 이를 수락한다. [6] 당시에는 언론에서 김일성을 호칭할 때 그냥 이름만 부르는게 일반적이었고, 굳이 직무를 붙인다고 해도 '북한 주석 김일성은' 이런 식으로만 호칭할뿐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함부로 쓰지 않았던 것. 그런데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대면하는 이상 직무를 붙여서 호칭하는건 당연지사였고, 여기에 더해 '주석'이라고만 부르기도 뭣하니 최소한의 예의를 차려서 '님'을 붙이기로 했던 것. [7] 이 때 김일성은 남북 대화에 상당한 공을 들였으며 심지어는 김달현 부총리를 비롯한 일부 온건파가 자본주의 도입을 건의하자 일단 들어보자며 관심을 갖기도 했다. 이 정도로 자신이 공들인 남북 대화 덕분에 대한민국의 2인자나 다름없는 국무총리를 만났으니 각하라는 호칭까지 쓴건 어찌보면 그렇게 놀라울 일도 아닌 것. [8] 1988.12.20 의원직 사퇴 (국무총리직 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