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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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전쟁·전투 | 교전국 |
<colbgcolor=#405486,#000031>
독립운동 1920~1945 |
일본 제국 | |
서부전선 교전 1948 |
북한 | |
개성 인근 교전 1949 |
북한 | |
개성 송악산 전투 1949 |
북한 | |
포천 전투 1949 |
북한 | |
옹진-은파산 전투 1949 |
북한 | |
양양 돌입 사건 1949 |
북한 | |
춘천 682고지 전투 1949 |
북한 | |
6.25 전쟁 1950 ~ 1953 |
북한 소련 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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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공비 토벌전 1951 ~ 1954 |
북한 조선인민유격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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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상보안청의 평화선 침범 사건 1952 ~ 1965 |
일본 | |
일본 해상보안청의 독도 무단침범 및 점령시도 사건 1953 ~ 1956 |
일본 | |
독도 대첩 1954 |
일본 | |
진주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6 |
북한 | |
한반도 비무장지대 분쟁 1966 ~ 1969 |
북한 | |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1967 |
북한 | |
1.21 사태 1968 |
북한 | |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8 |
북한 | |
베트남 전쟁 1965 ~ 1973 |
북베트남 베트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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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완전작전 1973 |
북한 | |
대한민국 해경 경비정 제863호 침몰 사건 1974 |
북한 | |
3.23 완전작전 1980 |
북한 | |
판문점 총격사건 1984 |
북한 | |
걸프 전쟁 1990 ~ 1991 |
이라크 | |
5.22 완전작전 1992 |
북한 | |
부여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5 |
북한 | |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6 |
북한 | |
여수 반잠수정 격침사건 1998 |
북한 | |
제1연평해전 1999 |
북한 | |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 ~ 2007 |
탈레반 정권 | |
제2연평해전 2002 |
북한 | |
이라크 전쟁 2003 ~ 2011 |
이라크 알 카에다 및 저항 세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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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적 자유 작전 2009 ~ |
소말리아 해적 | |
대청해전 2009 |
북한 | |
천안함 피격 사건 2010 |
북한 | |
연평도 포격전 2010 |
북한 | |
아덴만 여명 작전 2011 |
소말리아 해적 | |
연천 대북전단 발원지 격파사격 2014 |
북한 | |
서부전선 포격 사건 2015 |
북한 | |
대 IS 군사 개입 2015 ~ |
ISIL | |
2020년 5월 GP 총격 사건 2020 |
북한 | |
2022년 북한 무인기 영공 침범 사건 2022 |
북한 |
1. 개요
한반도 비무장지대 분쟁은 1966년 10월 5일부터 1969년 12월 3일까지 한미 연합군과 북한군 특수부대 간 임진강 일대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분쟁이다. 흔히 2차 한국전쟁, 혹은 조용한 전쟁(The Quiet War)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1966년 50건에 달하던 정전협정 위반사례가 1967년 566건, 1968년 761건으로 급증하며 치열하게 교전이 벌어졌고, 1969년 99건으로 다시 사그라드는 모습을 보였다.2. 배경
1960년대 북한은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한다. 1956년 김일성의 8월 종파 사건에 대한 중국과 소련의 내정간섭을 민족의 자주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며, 자주 노선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다. 곧이어 1960년대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주의 정책 및 서방과의 평화공존 추구에 따라 중소 간의 이념 갈등이 심화되며 양국간의 균형 외교를 취하지만, 소련의 경제적, 기술적 지원을 필요로 하면서도 이념적 기조에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중소 양국과 차례로 외교적 마찰을 빚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방의 자주를 추구하며 북한이 제시한 것이 국방-경제 병진노선과 4대 군사노선으로, 1962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국방비 증가와 군사력 증강이 이루어졌다.비슷한 시기, 대한민국의 국력과 국제사회에서의 입지는 계속해서 강화되고 있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의 관계가 정상화되었고, 대한민국은 이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여러 경제적/기술적 원조를 받으며 경제 성장에 집중하였다. 1966년에는 박정희의 주도 하에 서울에서 아시아태평양이사회가 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을 국가승인국으로 인정한 국가가 두 배로 증가하였다. 또한, 베트남 전쟁으로의 파병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한미행정협정을 이끌어 내며 주한미군의 주둔을 공고히 하였으며 여러 대한 원조를 약속 받으며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파병을 기회로 보았다. 비록 베트남에서의 전투 경험과 미국과의 협정은 북한에 있어 큰 위협임을 사실이나, 당장 일부 한국군이 파병으로 인해 한반도를 떠나 있으며 미국의 시선이 베트남에 쏠려 있는 현재를 대남 혁명의 적기로 판단한 것이다. 또한 김일성은 예로부터 호치민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북베트남을 돕기 위해 전투병을 지원하는 대신 유엔군의 전선을 확대하기 위해 한반도에 안보 위기를 이끌어내기로 결정하였다.
위의 상황과 맞물려, 김일성은 1970년도를 적화통일의 목표 시기로 잡은 채 1967년을 남한의 지하당 조직과 유격활동에 대한 가능성을 시험하는 해로 삼았다. 1966년 10월 5일 제2차 노동당 대표자회의 강연에서 김일성은 남한에서의 폭력투쟁에 대해 강조하며 비정규적 무력도발의 필요성을 시사하였고, 당시 유엔군사령관이자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찰스 H. 본스틸 3세 대장은 이를 2차 한국전쟁에 대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