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9 03:37:10

김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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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金朱烈 | Kim Juyeol
파일:external/sstatic.naver.net/201403031854012131.jpg
출생 1944년[1] 10월 7일
일본 제국령 조선 전라북도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
(現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사망 1960년 3월 15일 (향년 15세)
대한민국 경상남도 마산시 중앙동3가 2-52 남선전기[2] 마산지점 앞
(現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대로 243) #
시신 발견 1960년 4월 11일 (실종 27일째)[3]
경상남도 마산시 신포동1가 459 중앙부두 앞바다[4]
사인 3.15 의거 최루탄 피격에 의한 사망
학력 용정국민학교[5] (졸업)
금지중학교 (졸업)
마산상업고등학교[6] (명예졸업 / 37회)[7]
비고 4.19 혁명의 주요 인물
가족 할아버지 김태종 (1879 ~ 1951) | 할머니 밀양 박씨 (1882 ~ 1958)
아버지 김재계 (1922 ~ 1965) | 어머니 권찬주 (1920 ~ 1989)
큰누나 김영자 (1936 ~ ) | 작은누나 김경자 (1941 ~ 1987)
형 김광열 (1942 ~ 1985) | 남동생 김택열 (1954 ~ 1991),김길열 (1955 ~ )

1. 개요2. 생애3. 기타

[clearfix]

1. 개요

행악이 사직을 흔들어도 말없이 견뎌온 백성
가슴가슴 터지는 분노 천둥하는 우뢰인데
돌아갈 하늘도 없는가 파도 푸른 목숨이여
시조 시인 이영도, 《고 김주열군 영전에》(1960)
김주열 군의 주검에

보기 위한 동공대신
생각키 위한 슬기로운 두뇌 대신
포탄이 들어박힌 중량을 아시는가?
비인간과 올가니즘(Organism)이 빛은
이위일체의
이 기괴한 신
청마 유치환, 《안공(眼孔, 눈구멍)에 포탄을 꽂은 꽃》(1960)
대한민국의 학생 민주화운동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인물.

2. 생애

전라북도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에서 아버지 김재계와 어머니 권찬주 사이의 4남 2녀 중 차남(넷째)으로 1944년 10월 7일에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태종은 해방 직후 면장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조합장을 지낸 천석꾼 부잣집이었다.

김주열이 어린 나이에 죽었으면서도 비교적 많은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은 그 시절에 이미 사진기와 전축을 가진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어머니 권씨는 경상남도 함양군 사람으로 ‘함양댁’이라 불렸으며 이는 김주열의 PK 지방과의 인연을 암시하고 있다. 1956년 금지동초등학교, 1959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했고 이어 진주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반대해 남원용성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몇 달 동안 다니다 그만두고 집에서 재수를 시작했다.

1년 후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져 가세가 서서히 기울자 김주열은 서울로 올라가 학비가 별로 들지 않는 철도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지만 실패하고 서울고등학교에 원서를 냈다. 그러나 형 김광렬의 친구이며 형같이 따르던 하용웅의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면 은행원을 하는 것이 지름길이다."라는 권유를 받고 마산용마고등학교(당시 마산상업고등학교)에 다시 원서를 냈다.

마산용마고등학교 입시를 치르고 돌아와 1960년 3월 14일로 예정된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형 김광렬과 함께 창원시 마산합포구로 갔지만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군중이 모이는 것을 극도로 꺼린 교육청에서 합격자 발표의 연기를 종용해서 3월 16일로 연기되어 있었다. 그래도 하용웅 선배의 담임 선생님을 통해 합격했음을 확인하였지만 당시에는 마산에서 남원까지 꼬박 하루가 걸려서[8] 첫 차를 타지 못하면 도중에서 유숙해야 했기 때문에 곧장 남원으로 귀향하지 못했다.

당시 김주열의 이모할머니는 열렬한 민주당 당원이었는데 자유당 부정선거로 인해 투표 통지표가 전달되지 않아 종일 울분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산에서의 부정선거가 들통났고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서 시위를 하자 이를 목격한 이모할머니가 집으로 와서 두 형제에게 시내에 나가보라고 한다. 이에 형제는 시위에 합류하게 되었지만 김주열은 돌아오지 않았다.

[ (시신 포함) 사진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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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 시신이 발견된 장소[9] 당시 시신의 모습


아들의 행방불명 소식을 들은 어머니 권씨는 마산으로 달려가 아들을 계속 찾아 헤맸다. 20일 넘게 아들을 찾아 거리를 헤매는 어머니로 인해 마산에서 김주열의 사연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될 정도였다. 그러나 끝내 아들을 찾지 못하고 4월 11일 남원으로 돌아왔다. 이 와중에 별별 소문이 다 났는데, 이름 모를 경찰관이 어머니에게 찾아와서 "나도 김주열 군 또래 아우가 있답니다. 주열 군이 사라진 게 남의 일 같지 않네요. 자세히 알면 확실히 가르쳐 드리는데 저도 모르겠고 소문으로 듣자하니 주열 군이 시위 도중 살해되어 시체가 경남도청 앞 호수에 버려졌다는 소문이 있더군요."라는 말을 하고 서둘러 사라진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권씨가 이걸 크게 외치면서 시위대가 경남도청 앞 연못과 물탱크를 경찰들과 같이 샅샅이 찾아봐도 끝내 찾을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

끝내 아들을 찾지 못한 권씨는 남편이 위중하다는 편지를 받고 남원으로 돌아가는데, 그런데 바로 그날 11시경 마산의 중앙 부두에서 홍합 낚시를 하던 어부 김기돈의 갈고리에 걸려 최루탄이 눈에 박힌 시신으로 떠올랐다. 사망한 지 1달 가량 지났지만 당시 바닷물이 굉장히 차가워서 거의 냉동 상태였기 때문에 김주열의 시신은 부패되지 않았다. 링크 참조(시신 사진이니 주의)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고, 김주열의 시신 사진은 당시 부산일보 기자 허종(1924 ~ 2008)이 찍어 특종으로 보도되었으며 시신이 김주열로 확인되자 '용공 분자의 난동과 좌익 폭동'으로 내몰린 창원 시민들의 울분이 다시 터져 올랐다.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고 이후 전개는 4.19 혁명/진행을 참조.

시신이 발견된 후에도 경찰은 사건을 덮는 데 급급했다. 화가 난 어머니가 '주열이 시신을 이기붕 집 마당으로 가져가 묻겠다'고 하자, 경찰이 시신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은 채 도립마산병원(현 마산의료원)에서 몰래 빼내 남원 선산으로 가져와 장례도 없이 매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10] 경찰이 에워싼 채 매장해 가족들이 보지도 못했다.

한 달 뒤인 1960년 5월 8일 권씨는 마산 시민에게 "자식 하나 바쳐서 민주주의를 찾는 데 조그만 도움이라도 됐다면 남은 삼형제 다 바친들 아까울 게 있겠습니까"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면서 "존경하는 이 나라 어머니 여러분. 그리고 마산시민 여러분의 그 거룩한 뜻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3. 기타

  • 김주열의 시신을 유기한 범인 박종표(朴鍾杓)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경찰 일을 한 헌병보(補) 출신이다. 당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으로, 3월 15일 선거 당일 밤 1차 시위 때 마산시청 앞에서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발포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시위 현장에서 즉사한 김주열의 시신을 발견하고 손석래 당시 경찰서장의 지시를 받고 다음날 새벽 지프차에 싣고 가 돌을 매달아 마산 앞바다에 유기한다. <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박종표는 이후 4.19혁명재판소에서 최루탄을 발사하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유기한 사실을 자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나중에 다시 시신 유기만 인정하고 최루탄 발사는 부인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고 한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다. 출처
  •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는 김주열의 시신이 자연사라고 발표하라며 안 그러면 빨갱이로 몰아 쏴죽인다느니 의사들에게 협박하던 강력반 형사도 있었다고 묘사된다. 나레이션에 따르면 이 형사는 4.19 이후에 권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했다고.
  • 김주열의 묘지는 3곳에 조성되어 있다. 실제 묘는 고향인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금지면에 있으며 서울 4.19 민주 묘지와 마산 3.15 민주 묘지에 각각 가묘(假墓)가 있다.
  • 어머니 권찬주는 국밥집을 하면서 조용히 살았으나 생전 3·15 의거나 4·19 혁명 행사가 열린다고 하면 마산이든 서울 수유리든 어디든 꼭 참석했다. 1989년 사망했다. 권찬주 여사 생전인 85년, 한 여성지에서 인터뷰할 때 학생운동이 연이어 일어나던 당시에도 "20년도 지났음에도 여전하다"면서 운동권 학생들에게 국밥이라도 더 주고 싶다며 죽은 아들을 잊지 못했다. 김주열에 대해 "제일 똑똑하고 착한 아들이었다"는 얘기를 빼놓지 않았다. 가슴 아파하면서도 항상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3·15 의거 62년째인 2022년 말에야 시위 참여자로 공식 인정을 받았다. 막내아들 김길열은 최근 국가보훈처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국가유공자로 등록해달라고 신청했다.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는 것이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다가 희생된 형의 뜻을 온전히 기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는 3·15 의거가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역할을 했다고 본다.
  • 아버지는 김주열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술에 매달렸고 결국 5년 만에 43살로 요절했다. 씁쓸하게도 큰형 김광열도 시위 도중 주열의 손을 놓쳐 잃어버린 것에 대해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다가 병에 걸려 아버지와 같은 43세의 나이로 어머니보다 4년 먼저 사망했다. 어머니와 같은 해인 2022년에 비로소 3·15 의거 시위자로 인정되었다. 김주열에게 마산상고를 권유한 그의 친구 하용웅도 같은 시기에 인정받았다.
  • 김주열이 죽을 당시 5살이던 막내아우인 김길열이 회고하길, 불과 1년 뒤에 군사독재 시대가 시작되면서 박정희 정권~전두환 정권 내내 집안이 빨갱이로 몰려 상시 감시를 받으며 고생했다고 한다.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박정희 정권 들어 경찰 감시가 심해지자 고향 남원을 떠나 자식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김길열씨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였다. 서울 현저동에서 어머니가 하숙을 쳐서 자식들을 가르치다 감시를 피해보려고 연희동으로 이사 갔지만 소용없었다. 자그마치 26년이 지나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야 그 짓거리가 멈추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 둘째 누나 김경자도 요절했다고. 김길열과 큰 누나 김영자만 살아있다.
  • 1987년 똑같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열사 이한열 열사가 있다. 각각 4.19 혁명 6.10 민주 항쟁의 원인이 된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나 이한열 열사는 머리 뒤쪽에 최루탄을 맞고 사망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 최루탄을 맞고 즉사한 김주열 열사와는 다르게 이한열 열사는 즉사하지 않았다는 점 또한 다르다.
  • 그를 다룬 창작물로는 문서 상단 위에 인용된 시 외에도 고은의 <김주열>이 있다. '하나의 죽음이/혁명의 꼭지에 솟아올랐다'고 묘사하는데, 만인보 21권에 수록된 작품이다. 만인보 21~23권에는 이 시를 포함해 총 416편에 달하는 4.19혁명 관련 시가 실려있다. 만인보만의 특징은 김주열 본인만이 아니라 그 관련자들도 다룬 작품이 있다는 것이다. 형을 다룬 <김광렬>[11], 어머니를 다룬 <권찬주 여사>[12], 그외에 <어떤 낚시질>처럼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던 모습을 묘사한 시도 있으며[13], 사체유기범을 다룬 <박종표>나, <어부 김기돈>[14]처럼 시신 발견자를 다룬 시도 있다. 출처


[1] 1943년생으로 기재된 곳도 여럿 존재하지만 실제 출생년도는 1944년이다. [2] 줄여서 흔히 남전이라 불렸다. 김주열 사망 이듬해인 1961년 7월 한국전력으로 통합되었다. [3] 시신 발견 소식이 알려지자 2차 마산의거(4월 11일)가 일어나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4]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안대로 220 ( 신포동1가) 창원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 카카오맵 로드뷰 [5] 現 금지동초등학교. [6] 마산용마고등학교. [7] 입학하기 전 사망(당시에는 입학식이 4월초였다). 1995년 37회 졸업생으로 명예졸업장 추서. [8] 당시 경전선은 마산항제1부두선 구간을 통해 마산합포구(구 마산) 시내까지 한참 들어왔다가 스위치백으로 마산 밖으로 나가는 구조였으며 진주역에서 순천 방면으로는 아직 미완공 상태였다. 진주-순천 구간은 1968년에야 완공되었고 마산역이 마산 시내에서 지금 위치로 옮겨진 건 1970년대 이후다. [9] 현재는 창원시 및 김주열 기념 재단측에서 인양장소 안내비, 추모공원, 동상까지 건립하여 번듯한 추모공간이 되었다. [10] 민주화 시대 이전에 민주열사들 시신이 이런 식으로 처리되는 건 대단히 자주 있는 일이었다. [11] 시 내용 일부: "경찰의 총사격이 이어졌다/뒷산으로 흩어졌다/주열은 없고, 광열은 있다" [12] 시 내용 일부: "그 뒤 죽은 아들이 바다 밑 홍합 대신 떠올랐다/그 어머니에게/죽은 아들도 산 아들이었다" [13] 시 내용 일부: "김주열의 시체였다/경찰이 던져버린 시체가 27일만에 밀려왔다/ 27일만에 떠올랐다/쇳조각이 박혀 있었다" [14] 시 내용 일부: "그러다가 덜렁 무거운 것/잡아당겼다/시체/흰 메리야스/잿빛 반지/눈두덩에 5센티 최루탄이 박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