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10 22:41:58

4.19 혁명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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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제헌 및 정부 수립
1960년 이승만 정부 2.28 학생민주의거
경상북도 대구시(현.대구광역시)
3·8 대전민주의거
충청남도 대전시(현.대전광역시)
3.15 마산 의거
경상남도 마산시(현.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 일대)
4.19 혁명
전국
1964년 박정희 정부 6.3 항쟁
서울특별시
1964년 3선 개헌 반대운동
전국
1973년 유신헌법 반대운동
전국
1979년 부산·마산 민주 항쟁
부산시, 경상남도 마산시(현.부산광역시 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 일대)
위기관리정부
, 신군부 치하,
서울의 봄
서울특별시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전라남도 광주시(현.광주광역시)
1986년 전두환 정부 인천 5.3 운동
인천직할시(현.인천광역시)
10.28 건국대 항쟁
서울특별시
1987년 6.10 민주 항쟁
전국
6.29 선언
대한민국의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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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f0020275_4af4c6d42e8b7.jpg
4월 19일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 사진이 촬영된 지점은 현재의 서울광장 인근.[1]
파일:external/pds16.egloos.com/f0020275_4b002cb180049.jpg
무너지는 이승만 동상.[2]
" 민주주의의 나무는 국민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
- 『 사상계 1960년 5월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 대한민국 헌법 전문
4.19 혁명
四一九 革命
April Revolution
[3]
날짜 1960년 3월 15일[4] ~ 4월 26일
지역 대한민국 전역
원인 3.15 부정선거
김주열 열사의 사망
목적 이승만 하야
결과 이승만의 하야, 하와이로 망명
대한민국 제2공화국 출범
시위 당사자 대한민국 국민
민주당
자유당 정권
대한민국 경찰청
주요 인물 이승만
이기붕
장면
윤보선
참여 인원 10만명 이상
사상자 사망 186명[5]
부상 1,500여 명
1. 개요2. 배경: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2.1. 언론의 영향력2.2. 의외로 높은 교육수준2.3. 도시화와 매스 미디어의 보급2.4. 청년실업 문제2.5. 이승만의 정권 유지 능력 퇴보2.6. 소결
3. 혁명의 시작4. 혁명의 고조
4.1. 4월 11일, 제2차 마산의거4.2.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시위
5. 4.19 혁명
5.1. 4월 19일, 피의 화요일
5.1.1. 서울5.1.2. 광주5.1.3. 부산5.1.4. 영남권5.1.5. 경기권5.1.6. 호남권5.1.7. 강원/제주권
5.2. 학생의 주도적 역할
5.2.1. 고등학생5.2.2. 대학생
5.2.2.1. 서울대학교5.2.2.2. 동국대학교5.2.2.3. 중앙대학교
5.3. 계엄령과 계엄군의 태도
6. 자유당 몰락의 전주곡
6.1. 등을 돌리는 우방들6.2. 4월 25일, 다시 불붙은 시위
6.2.1. 교수들의 시위6.2.2. 어린이들까지 나선 시위6.2.3. 시위대와 계엄군이 하나 되다
7. 이승만의 하야
7.1.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7.2. 이 대통령의 최후의 몸부림7.3. 제2공화국의 출범
8. 그날 이후
8.1. 한계와 의의8.2. 4.19 세대8.3. 기타8.4. 관련 창작물
9. 관련 문서

1. 개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http://archives.kdemo.or.kr/contents/view/89)에서 제작한 소개 영상.
4.19 혁명은 이제 59주년이 되었다.

1960년 4월, 한국에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끝낸 민주주의 시민 혁명이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일어난 이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엄밀히 따지면 2.28 학생민주의거 3.15 부정선거로 인한 시위가 4.19의 서막이다.

2. 배경: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이 하위 문단의 서술은 『한국민주화운동사』 1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좀 더 학술적이고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해당 서적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한국전쟁이 휴전 협정으로 일시적으로 총성이 멎은 지 불과 7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1960년에는 이미 국민들 사이에 민주주의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민주화를 위한 요구는 적어도 5년 전부터 이미 있어 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1950년대는 기초적인 생계로 연명하는 매우 가난한 이들이 많은 시절이었는데 어떻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민주시위가 가능했다는 것이 의아할 수 있다. 이에는 다음과 같은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2.1. 언론의 영향력

1950년대 당시 언론인들은 최대의 지식인 계층에 속했다. 친정부적 성격을 띤 <서울신문>을 제외하고[6] 대부분의 논조는 이승만 정부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사회 참여적인 성격이 몹시 강했다. 각 언론사들의 주필들은 다양한 논설, 사설, 칼럼을 통해 민주적 가치를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초기의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을 버리고 탄압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의 언론 탄압 이력은 적어도 1955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어째 리스트가 좀 많긴 하지만 4.19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1955년 동아일보 " 괴뢰" 표기 오식사건
    • 편집상의 실수로 대통령을 암시하는 단어인 "고위층" 앞에 북한을 암시하는 "괴뢰" 단어를 붙여버렸다. 200여 부가 인쇄된 후 부랴부랴 회수 및 폐기 처분했지만 이것만으로도 평소 눈엣가시였던 동아일보 하나 쯤 보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발행인 및 편집인을 불구속 입건했다.
  • 1955년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 참고로 이 신문사는 같은 해 5월 20일에 " 견통령 오식사건''을 일으켜 이미 높으신 분들의 응징을 받은 적이 있다.
    • '백주대낮의 폭력은 테러가 아니다.' 황당하지만 실제로 당시 경찰 당국의 발언이다.[7] 정치깡패들은 소재불명으로 처리되고 정작 폭력 행위를 경찰에 신고한 주필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 1957년 (류근일) 필화사건
  • 1957년 동아일보 "고바우 영감" 경무대 똥통 사건 필화사건
  • 1958년 함석헌 필화사건
  • 1958년 2.4. 국가보안법 파동
    • 국가보안법의 3차 개정 과정에서 17조 5항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독소조항임을 발견, 이에 반발하는 야당 의원들을 무술 유단자들을 동원하여 한데 구겨넣어버리고 여당 의원들은 자기들끼리만 점심시간에 슬쩍 모여서 통과시켰다.
  • 1959년 경향신문 폐간사건
    • 이 사건은 미군정법령 88호 및 주한 미국 대사인 월터 다울링이 반대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한편 경향신문사는 행정처분의 가처분 신청이 수용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은 일이 이렇게 되자 폐간을 철회하고 그 대신 무기발행정지 처분으로 응수했다.
당시의 시대상이 이와 같았고 이미 언론에 대한 탄압과 정치깡패를 동원한 테러행위, 날조 및 공작행위는 곪을 대로 곪아서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중이었다. 그리고 이들 언론을 구독하는 국민들은 점차로 이승만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있었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는 현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2.2. 의외로 높은 교육수준

물론 오늘날의 교육수준에 비교할 수 없지만 당시의 교육열은 사실상 "붐" 에 가까운 것이었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이승만정부의 국가 총예산의 평균 10.5%는 교육 관련 지출이었다. 이 외에도 국민학교( 초등학교) 의무교육제가 채택되었으며 또한 빈민층일수록 학구열은 더욱 높았다. 그 이유는 교육을 통해 그 누구라도 신분이 상승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은 전통적으로 유교적 사고방식에 특히 고려 조선 내내 시행한 과거 제도의 영향으로 '배운 사람'에 대한 고평가나 존중의 분위기가 있어왔고, 입신양명 등 공부로 인한 성공을 장려 하는등 교육열이 꽤나 높은 국가였다. 하지만 이런 교육열은 식민지배 기간동안 일제의 철저한 통제로 억눌렸다. 일제는 이미 본국에서는 1900년대부터 실시해오던 초등교육에 대한 의무교육을 식민지 조선에서는 1945년 패망할때까지 실시하지 않았고, 학교인프라 확충이나 학비부담 경감과 같은 사안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 결과 조선의 초등교육기관 취학률은 일제강점기 말기에도 50%를 넘지 못했으며 전인구 문맹률은 80%에 육박하는 한심한 상황을 만들었다. 최고 교육기관인 대학은 경성제국대학 딱 하나만을 만들었고, 그마저도 입학생의 절반 이상이 일본인들이었다. 본국에는 수십개가 난립하던 사립대학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설립을 전부 불허하고 대학보다 한단계 낮은 전문학교의 지위만을 유지할수 있도록 통제하였다. 즉 해방 이후의 이런 상황은 30년 이상 억눌려왔던 교육열이 힘 풀린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폭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45년에서 1960년까지 학생 수는 3배로 증가했고, 문맹퇴치 5개년 사업을 통해 비 문해율은 1945년 78%에서 1958년 4.1%까지 떨어지게 된다.[8] 그와 함께 초등~중등 교육과정 중에는 민주주의의 정신과 이상에 대한 교육이 반복적이고도 일관성 있게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승만 정부의 원래 의도는 전혀 다른 것이긴 했다. 한국이 전제왕정 체제-식민통치 체제에서 갓 민주 공화정 체제로 접어든 상황이니만큼 당연히 이것에 대한 선전이 필요했다. 게다가 국제정치적으로는 스탈린주의가 좁게는 북한, 넓게는 소련에 이르러 세계를 양분해 첨예한 대립각을 형성하던 시대이다보니 반공의 도구로나마 민주주의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매우 강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많은 대학생들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오늘날에 비하면 결코 많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1945년 대학생 수는 7,819명[9]이었는데 1960년에는 97,819명으로 대학생만 무려 9만 명이 늘었다. 통계청 기록에 의하면 대학 재학생 수는 69,961명. 이는 한국과 국민소득이 비슷한 다른 제3세계 국가에 비해 엄청나게 높은 비율이였다.

이렇게 대학생의 수가 늘어난 것 또한 다름아닌 이승만의 교육정책 때문이었다. 당시 1공의 최우선 목표 중 하나가 문맹을 퇴치하고 교육제도를 개선하며 학생 엘리트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가 미국의 원조금으로 미국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학비를 대줬는데, 이에 대해 미국은 '한국은 우리가 밥 사 먹으라고 준 돈으로 뭐하냐'고 혀를 차기도 했다.

이승만은 국방비 다음으로 늘 교육비로 투자해 1945년 대비 대학생이 12배나 증가해 동시기 영국보다 대학입학률이 높았다 즉, 이승만은 자신을 타도하는 자산을 키운 셈이고 이러한 이유를 들어 이승만을 추앙하는 측에서는 독재자가 아니었고 자신을 타도할 수있는 조건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는 점을 높이사야 한다며 주장한다.

2.3. 도시화와 매스 미디어의 보급

6.25 전쟁 이후 수많은 탈북민들이 남한에 정착하고 인구 구조가 새롭게 재편되면서 열 개 남짓의 도시들이 수 배의 급격한 인구 성장을 보였다. 총인구 대 도시인구 비율은 1949년에 17.2%였는데 1960년에는 28%로 늘었다. 교육받고 계몽되고 깨어있는 국민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집중되면서 일종의 상승 효과가 나타났기 때문. 이들은 밤을 새워가며 시국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하고 개탄하였다.

당시의 교육 수준과 관련하여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1955년 전국 대학 중 85개 대학의 소재는 도시 내에 있거나 적어도 근교에 위치해 있었으며 특히 서울 소재 대학만 29개에 달했다. 이러다 보니 1960년 기준으로 전국에 있는 대학생들 두 명 중 한 명은 서울에서 사는 대학생이었다.

게다가 앞서도 말했듯이 당시 언론사들은 매우 활발하고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정작 이를 읽을 만한 식자층이 없었더라면 언론인들의 목소리는 곧 잊혀졌을 것이다. 그러나 1961년 <한국신문연감> 통계자료에 의하면 전국의 일간지 보급률은 100명당 2.96부에 그쳤으나 서울의 일간지 보급률은 100명당 무려 25.5부에 달했다! 참고로 당시 유네스코에서 정한 근대화 기준 보급률이 100명당 10부였다.

2.4. 청년실업 문제

문제는 이렇게 대학을 졸업한 훌륭한 인재들이 일할 만한 일자리가 없었다는 것. 물론 당시 한국의 경제는 대단히 낙후해서 실업률 자체가 높은 건 어쩔 수 없었으나,[10] 고등 교육을 받은 대학생조차 일하기 힘들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래서 "대학은 예비 실업자 양성소인가"라는 자조적인 조롱이 유행하기도 했으며 실업률은 2명에 1명 꼴인 50%에 달했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을 수가 없었던 분위기였다. 거기다 그 무렵 들어 미국도 점차 경제 원조를 삭감하고 있던 추세였다. 그래서 사회 전반, 전 세대에서 이승만 정부에 대한 지지를 조금씩 철회하고 있던 중이었다.

다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이 당시엔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이미 사회에서 '배운 사람' 축에 속했고, 이런 '배운 사람'은 (유교적 전통에 입각해서) 사회문제에 적극 뛰어들고 비판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유교적 전통에서는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사회를 이끌어야 하는 책임 역시 크다.

이 시대의 실업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들은 '배운 사람'으로서 사회에 뛰어들지 않거나 제대로 된 사람 구실을 못할 때 주어지는 비판으로, 오늘날의 청년실업 문제와는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비판의 형태가 본질적으로 다르던 시대임을 염두에 둬야 한다.

청년실업 문제를 이 자리에서 언급하는 것은 상당히 2000년대적 사고방식으로, 이런 '대학생이라면'이라는 태도는 20세기를 통틀어 대학가에 오랫동안 있어왔다. 게다가, 2000년대 이후와 1950년대의 대학생의 위상 자체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2.5. 이승만의 정권 유지 능력 퇴보

이승만 대통령은 실세 2인자의 출현을 막고 정권의 핵심인물들간에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심복이나 측근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정권을 유지하였는데, 나이가 80대에 접어들어 평소에 많이 접견하는 자유당의 고위인사들을 무조건 신임하게 되었으며 특히 대통령 경호를 책임지는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장은 "부부통령"이라는 별칭이 붙여질정도로 대통령의 신임을 마패로 삼아 각종 권력형 범죄를 저질러 물의를 일으켰고, 이는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가뜩이나 언론과 지식인, 대학생의 반정부가 높아지는 마당에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기폭제가 되었다.

2.6. 소결

종합해보면 국민들의 민주주의 의식 고취는 거의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코흘리개 어린 시절부터 아득바득 학교에 갔더니 민주주의라는 것을 지겹도록 가르친다.[11] 게다가 인구의 적지 않은 수가 의외로 가방끈이 길다. 검열과 탄압이 있지만 의외로 정부에 대한 언론의 비판기능은 매우 살아있으며 지식인들에게 영햐을 주고 있었으며 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민주주의 의식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쓴 사설과 기사들을 독자들이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다. 주위에는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전국 팔도 각 도시마다 집중되어있으니 조직적 시위를 도모하기도 쉽다. 게다가 이런 인재들이 일을 하지 못하고 놀고 있으니 "하아. 이것 참 나라꼴이 수상하다!"라는 여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4.19 혁명은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촉발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결국 이승만 정권 스스로 만든 셈이니 아이러니.

3. 혁명의 시작

3.1. 장기집권 음모와 조기 선거 실시

1950년대 중반이후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점점 더 높아져갔다. 하지만 이승만과 자유당은 국민들의 이런 여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들은 여전히 장기집권을 바라고 있었고 야당과 민주세력을 탄압하는데만 급급했다. 그러는 사이 1960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를 맞이하게 되었다. 자유당은 대통령 후보로 다시 나온 이승만과 부통령 후보로 나온 이기붕을 당선시키고자 했다.[12]

1959년 6월 29일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는 뜻밖에도 정부통령 후보지명대회가 되었다. 진행 도중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유시'가 있자, 돌연히 정회한 뒤 전당대회를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로 바꾸었다. 통상 5월에 선거가 치러지므로, 무려 10개월 또는 11개월 전에 후보를 지명한 것이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선거 실시 두 달 전에, 1952년에는 발췌개헌이 늦어서 17일 전에 후보를 정했었다. 또 다른 나라의 예를 보거나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예를 보더라도 이 같은 후보 지명은 너무나 조기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승만이 조기에 후보를 정하도록 한 것은 장관이나 자유당이 일찍부터 선거운동에 돌입하여 총력전을 펴라는 지시와 다름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최인규는 그해 11월부터 거의 매일 같이 경찰 간부와 군수, 시장, 구청장 등 공무원들을 안배해 불러서 만반의 대책을 세우도록 독려했다.

7월 31일,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 조봉암 진보당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상고심을 맡았던 대법원의 그 재판부에서 7월 30일 재심을 기각하여 변호인들이 다시 재심을 청구하려 했는데, 그 다음날 바로 처형된 것이었다. ' 신두영 국회 비망록'에 따르면, 이승만은 조봉암을 어떻게든 제거하라고 지시했다. #

이로써 이승만과 대통령 당선을 두고 경쟁할 사람은 이승만에 맞서 싸울 투지가 별로 없었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밖에 남지 않았다.[13] 자유당 전당대회에서의 후보지명보다 더 놀라운 사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이승만은 12월 11일 '반드시 농번기를 피해 조기선거를 해야 한다'고 피력한 이후 계속 그 주장을 했고, 다음 해 1월 27일에는 '농번기 전의 선거가 자신의 수 년 동안 지론'이라고 못 박듯이 말했다. 당시는 하지(양력 6월 21, 22일 경) 무렵에 모내기를 많이 했으므로 5월 초는 농번기가 아니었다.

발췌개헌으로 변칙적으로 치러진 1952년의 정부통령선거를 제외하면, 1948년 5.10 선거, 1950년 5.30 선거, 1954년 5.20 선거, 1956년 5.15 선거, 1958년 5.2 선거 등 정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가 모두 5월에 치러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 5.2 선거 때까지 이승만은 '농번기 때문에 안 된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돌연히 농번기를 피해 조기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

조기선거 실시에 대한 이승만의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된다. 하나는 조병옥의 건강에 관련된 문제였다. 조병옥이 중병을 앓고 있음은 1960년 1월 중순에 보도되었다. # 조병옥은 1월 29일 '조기선거는 등 뒤에다가 총을 쏘는 격'이라고 반대하면서 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야당과 언론은 하소연도 하고 비열한 짓이라고 비난도 퍼부었지만, 그러한 반대에도 아랑곳 없이 정부는 2월 3일에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를 실시한다고 공표했다. 조병옥은 이후 2월 15일 미육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언론과 야당에서 조기선거를 반대한 이유는 또 있었다. 대통령 취임이 8월 15일이어서, 만일 3월 15일에 야당 후보가 당선된다면 그간의 이승만 정권 행태로 미루어 볼 때 5개월 동안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있겠냐는 것이었다.

정부통령후보 등록 마감일인 2월 13일, 이승만은 국민을 상대로 무서운 발언을 했다. "1956년 선거에서처럼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가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오면,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응종치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 그가 다른 선거보다도 1960년에 치러질 정부통령선거에 더욱 큰 관심을 보이고 총기획자로서 역할을 한 것은 1956년의 정부통령선거 때문이었다. 8.5 정부통령선거가 치러진 1952년의 전시체제 상황도 아니고 1954년 5.20 총선이 치러진 준전시체제 상황도 아니어서, 유권자들이 조심스럽게라도 자신의 의사를 표출했던 1956년 선거에서 이승만은 자존심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유효표 721만여 표 중 이승만이 504만여 표, 조봉암이 216만여 표로 발표되었는데, 대부분이 신익희의 추모표인 무효표 185만여 표를 감안하면 이승만은 전체 투표자의 과반수를 약간 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항상 '민의를 따르겠다'면서 국민의 절대 다수가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고 과시했던 이승만으로서는 상당히 치욕적인 득표수였다. 더구나 부정 투, 개표가 적은 서울의 경우 이승만은 20만여 표밖에 얻지 못했고, 무효표가 28만여 표였다(조봉암은 11만여 표). 죽은 신익희보다 표가 훨씬 적게 나온 것이다. 사실 자유당은 서울 시민들에게 미움의 대상 그 자체였고, 선거 때마다 시민들로부터 심한 야유를 받았기 때문에 서울에서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다.

헌법 위에 군림해 헌법을 유린하는 발언을 또다시 공공연히 한 것이지만, 그의 담화는 단순히 국민을 협박한 것만이 아니었다. 이는 최인규나 자유당 간부들에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지시로 들릴 수 있었다. 최인규는 나중에 법정에서 2.13 담화가 자신에게 큰 압박을 가해왔음을 고백했다.[14] 실제로 당시 내무부장이었던 최인규는 이에 매우 적극적이어서 "공무원은 누구나 국가원수인 이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며, 차기 선거에서는 이 박사, 이 의장을 정부통령으로 꼭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라"고 말하거나, 경찰들에게 "선거운동을 한 공무원의 신분은 내가 보장하겠다."라며 불법행위를 독려하는 등 공공연하게(...) 선거 부정을 저지르고 다녔다.[15]

3.2. 2월 28일, 대구 학생 시위

시위의 시작은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장면 유세일이 일요일이었는데 당국에서는 학생들이 유세장에 갈 수 없게끔 '영화 관람' 이나 '추가시험' 등의 명목으로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하도록 지시했던 것. 이에 반발한 경북고 학생들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 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에 호응한 대구지역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은 27일 시위를 벌였다.[16] 구체적으로는 대구고, 경북고,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계성고 등 8개 학교 총 1,200여 명.

다음날인 28일, 당시 경북고 3학년인 학생회장 이대우는 "부정에 항의하고 신성한 권리를 지키는 것" 을 요지로 하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같은 경북고 3학년의 중퇴생이던 하청일이 초안을 작성한 결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류 역사 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 속에 끼어 있었던가.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백합같이 순결한 청춘이요, 학도이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치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처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하지만 당국에서는 이를 공산당 사주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 일축하면서 경찰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켰다. 당시 이강학 치안국장은 "학생들이 북한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허나 이런 그들의 주장과 무관하게 2.28 학생민주의거역사적인 4.19 혁명의 첫 도화선을 당기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선봉에 대구시가 있었다는 점과[17] 종래의 동원형 강제 궐기대회가 아닌 광복 이후 최초의 자발적 학생 반정부 시위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참고로 오늘날 대구에는 이 의거를 기념하는 시설물들이 존재한다. 2.28 기념탑이 경북고와 두류공원,[18] 그리고 경북대사대부고에 있으며 대구의 번화가 동성로 근처에는 2.28기념중앙공원이 있다. 그리고 명덕역 근처에는 2.28 민주운동기념회관이 있다.

다시 돌아와 이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확산되어 수많은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관제시위를 통해 맞불 작전에 돌입하였으며 "학생들은 자중하라, 학원으로 돌아가라"란 구호를 외치게 했다. 이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관치행정이 민주주의냐, 썩은 정치 갈아보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어떤 이들은 "대학생들은 어디 있는가? 왜 침묵하는가?" 라며 우회적으로 참여를 호소하기도 했다.

이후 선거 직전에도 대구를 이어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3월 1일에서는 서울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공명선거를 촉구하는 삐라가 각지에서 뿌러졌고, 3월 5일과 3월 13일에는 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했다. 학생들은 정권의 사주로 나온 어용시위대의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시위를 진행했다. 3월 10일에는 부산에서 삐라가 뿌려지고 12일에 고등학생 130여 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수원에서 3월 10일, 13일 두 차례에 걸쳐 고등학생들의 열띤 데모가 벌어졌다. 대전에서는 3월 8일에 고등학생 1000여 명이 집결해 격렬한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충돌하여 수십여 명이 연행되는 일이 생겼다.[19] 충주, 청주, 전주 등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선거 전날에 시위는 더욱 더 타올라 서울, 부산, 인천, 원주, 포항 등지에서 각 지역 고등학생 수십 또는 수백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학원의 자유'와 '공명선거 실시'를 외쳤다. 모두 3월 15일에 치뤄지는 선거가 올바른 공정선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2월 28일 '공명선거추진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부정선거를 배격할 것을 결의했다.

한편 2.28 의거 이후부터 3.15 선거까지 발생한 주요 시위와 참여학생들의 수는 다음과 같다.
  • 서울 1,000여명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균명고[20], 강문고[21], 중동고, 대동상고, 배재고, 수송고, 선린상고, 경기고, 보인고, 조양고[22], 중앙고, 대신고, 경동고 등
  • 부산 7,800여명 "우리가 민주제단을 지키자"
    • 동래고, 부산상고[23], 동성고, 혜화여고, 데레사여고, 항도고[24], 영남상고[25], 북부산고[26]
  • 기타 경기도 해동고 130여명, 대전시 대전고 1,000여명, 대전상고 300여명, 충청도 충주고 500여명, 청주고 100여명, 강원도 원주농고 100여명, 경상도 포항고 200여명 등

3.3. 부정선거 3월 15일, 광주 3.15 의거, 제1차 마산의거

이 문서의 본문은 3.15 부정선거 3.15 의거입니다.

3월 15일,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선거날에 발생한 폭력과 부정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먼저 경찰과 정부당국은 선거 전에 이미 투표함에 30~40%의 투표지를 미리 넣어놓았다. 물론 이 투표지는 죄다 이승만과 이기붕으로 기표된 표였다.[27] 대리투표는 기본이었고 물품을 뿌려 자유당 투표를 독려하는가 하면 투표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3인조나 5인조로 묶어서 투표를 시키기도 했다.[28] 심지어는 완장부대와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형성해 투표하는 시민들에게 위압감을 주었고, 야당 참관인에게는 위협, 폭행 등 무력을 가하거나 투표소 시계를 조작해서 선거가 종료되지도 않았는데 투표 끝났다며 선거장 밖으로 쫓아내기도 했다.[29]

선거 결과는 당연하게도 이승만과 이기붕의 압승이었다. 조작이 너무 완벽해서 양 후보의 득표율이 90%를 넘자 당황한 정부가 임의로 득표율을 낮춰 이승만이 전체의 88.7%, 이기붕은 전체의 79%의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자유당 간부의 증언에 따르면 장면의 압도적인 우세가 예상되었던 대구에서 이기붕 5000표에 장면 32표 라는 충공깽한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이 전개되자 투표권을 우롱당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당장 투표 당일인 1960년 3월 15일 오후 12시 45분에 광주 금남로에서 최초로 시위가 일어났으며(광주 3.15 의거),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곡(哭) 민주주의 장송'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시위를 벌이다 진압 과정에서 1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한편 마산에서는 아침부터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참관인이 투표함을 엎어버리자 그 투표함에서 미리 기표해 둔 용지가 우르르 쏟아지며 부정선거가 적발되었고 이에 민주당 도의원이던 정남규 등은 10시 30분경 '선거 포기'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뒤이어 부정선거에 폭발한 시민들이 오후 15시 42분부터 오동동 민주당 경남도당사와 불종거리 등에서 들고 일어났다가 경찰에게 강제 진압당했고, 투표가 종료된 그날 저녁에는 마산시청(현 마산세무서)와 자유당사가 있던 자산동 일대에 3000여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이에 경찰은 시위대에 총기 발포로 대응, 고등학생 등 8명(9명, 1명은 김주열 열사)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제1차 마산의거) 3.15 의거 항목 참조.

한편 김주열 열사의 경우 밤 10시 쯤 최루탄에 눈을 관통당하여 사망하였는데[30] 3월 15일 당시에는 실종자로 처리되었다가[31] 4월 11일 시신이 마산앞바다에 떠오르며 제2차 마산의거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이 4.11 의거는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4.19 혁명의 불씨가 된다.

4. 혁명의 고조

4.1. 4월 11일, 제2차 마산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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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 시신이 발견된 장소 당시 시신의 모습
한편 3.15 마산의거 이후 마산 시내 분위기는 계속 을씨년스러웠다. 멀리 전라북도 남원에서부터 마산상고(現 마산용마고등학교) 입학시험 결과를 확인하러 왔던 상고생 김주열 군이 행방불명된 상태였기 때문. 3월 15일 이후로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어머니인 권찬주씨는 한 달 가까이 마산 거리를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연히 시민들의 입에는 김주열이란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고 관심도 집중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당시 마산시청 뒤에 있었던 저수지의 물을 몽땅 퍼내고 시신 수색을 했을 정도.

그리고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신포동 부둣가(현 마산합포구 중앙동 대한통운 앞( 카카오맵 로드뷰))에 떠올랐다. 김주열은 3월 15일 형 김광렬과 함께 저녁시위에 참여했고 시청앞 발포 이후 경찰이 시신을 거두어들이던 중 오후 10시경 자산동 옛 한전 앞에서 최루탄을 맞고 죽은 상태로 발견됐다. 당시 김주열의 시신을 발견한 경찰은 손석래 서장에게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지 물었고 알아서 처리하라는 손서장의 명령을 듣고 한 사업가의 운전기사를 시켜 마산세무서에서 마산항으로 옮겨 바다에 버리게 했다. # 그의 시신 사진은 당시 부산일보 허종(1924~2008) 기자가 찍어 특종으로 보도되었다.

경찰 당국은 김주열의 시신을 도립병원(현 경상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마산의료원)으로 다시 옮기고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시내로 퍼졌다. 이에 흥분한 3천여 명의 시민들이 경찰의 저지를 뚫고 병원 안으로 밀려들어가 김주열의 사망을 확인했다. 그의 시신은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몰골이었으며 어머니 권찬주는 충격을 받아 시신의 인수를 거부했다.

나중에 국회 조사단이 조사한 결과 해당 종류의 최루탄은 벽을 뚫고 들어가는 고성능 최루탄이었으며, 심지어 그 최루탄에는 "군중을 향해 쏘지 말 것" 이라는 설명까지 적혀 있었다. 원래 최루탄은 군중을 향해 쏘는 게 아니라 공중에서 터뜨려서 최루가스로 시위대를 분산시키는 용도다. 그러나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는 경찰이 대놓고 직격으로 최루탄을 발사하고는 했다.[32]

시신은 도립마산병원에 안치되었고 소문은 빠르게 마산 시민들에게 전해져 소식을 들은 사람들로 병원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당시 사진 시신의 참혹한 몰골을 본 시민들은 당연히 분노가 폭발했고 학생들이 제일 먼저 대열을 이루어 "살인선거 물리치자" 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먼저 마산상고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와 불종거리를 거쳐 시청 쪽으로 향하며 마산고 학생들과 합류했다. 마고는 이미 1차 마산의거에서 김용실 군(1-C반 급장)과 김영준 군 등 다수의 희생자를 내었고, 이는 상고도 마찬가지였는데다 시신의 주인공 김주열 군은 상고 신입생이었기 때문. 3.15 의거 기념사업회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학생들 중 일부가 마산여고와 성지여고로 올라가서 시위에 참여하라고 교문 밖에서 독려시위를 진행했다. 처음에는 여고생들이 시위에 합류할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교사들이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하려고 신발을 전부 감춰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에는 안전을 이유로 마산여고 교장이 직접 학생들을 인솔하고 나오는 풍경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런 장면이 사진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었고, 이 사진은 전국판 신문에 실리며 타 지역의 시위 열기에 다시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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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시내를 가득 메운 학생 시위대[33] 고문경찰 처벌과 구속자 석방을 외치는 마산여고 학생들[34]

※ 제2차 마산의거 사망자 명단 : 보기 / 접기
|| 제2차 마산의거 사망자 명단 ||
김영길

4월 11일의 시위는 학생들만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이날 시위에는 중년 여성들도 많이 있었다. 이들은 "죽은 자식 살려내라!", "김주열을 살려내라!", "차라리 우리도 죽여달라!" 고 절규하며 시위대의 행진에 함께하였다. 또한 특이한 점으로서 해인대학교(現 경남대학교)학생 5,000~6,000명,[35]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도 시위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 정도면 시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시민들은 학생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고 시위 대열에도 합류했다. 이윽고 오후 6시경 성난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대대적인 봉기에 나섰다. 이날 마산시청와 마산경찰서가 시위대에 의해 습격당했다. 또한 남성동, 북마산, 오동동, 중앙동, 신마산파출소가 파괴되었으며, 자유당 소속 허윤수 의원의 집과 그가 경영하는 공장들도 시민들에 의해 부숴졌다. 또한 시민들은 마산경찰서 습격 당시 탈취한 수류탄 13개를 탈취하여 경찰서 건물에 던지기까지 했다. 이외에도 경찰서 앞 서장 지프차가 전소되기도 했다. 당시 파괴된 남성동파출소

그날 밤 9시 30분경 경찰은 또 발포를 했고 한 명[36]의 시민이 사망했다. 하지만 이는 마산 시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고 마산 시민들은 경찰들과 공방전을 벌이며 대치했다. 시위대는 자유당 마산시당, 서울신문[37] 마산지사, 국민회 사무실, 마상경찰서장 관서, 마산소방서, 마산시장 박영수의 집 등을 파괴하며 기세를 올리다 밤 12시경 해산했다.

시위는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이어졌고, 마산의 행정은 온통 마비되었다. 12일에는 시민들의 시위가 재차 일어나 학생 수백여 명을 포함한 수천여 명의 시위대가 마산 시내를 온통 휩쓸었고 노인들까지 시위에 동참하였다. 13일에는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해인대생[38] 수천여 명이 시위를 했다. 매번 시위 때마다 고등학생, 대학생을 비롯하여 학생과 시민 수천여 명이 모여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묻고 3.15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이 때도 정부는 공산당의 사주가 있다면서 여전히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려고만 했다. 정부에서는 2차 마산 시위를 공산당이 사주한 것이라고 몰아붙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날 난동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특별담화를 발표, 15일에도 공산당 선전 때문에 마산 "폭동" 이 일어났다는 담화를 발표했다.[39]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소위 "대공 3부 합동수사위원회"를 구성, " 적색분자들의 준동 혐의에 대해 과학적으로 수사하겠다" 고 하는 한편 "이번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 이라고도 하였다.

이 즈음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수는 다음과 같다.
  • 마산고, 마산상고, 청주공고, 청주상고, 청주고, 동래고, 총합 3,000여명.

4.2.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시위

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 문서 참조.

5. 4.19 혁명

※ 4.19 혁명 당시의 상황 요약 : 보기 / 접기
|| 날짜 || 시위 장소 || 시위 규모 || 비고 ||
4월 19일 서울, 부산, 인천, 대전, 광주, 대구, 전주, 청주 10~20만여 명[40] 서울, 부산, 광주에서 경찰이 발포
4월 20일 대구, 전주, 이리, 인천 5000~6000여 명 이승만 대통령 담화 발표, 자유당 견해 피력
4월 21일 인천 미상 장면 부통령 10개안 발표, 국무위원 전원 사표 제출
4월 22일 인천, 군산, 익산, 포항 미상 추가바람
4월 23일 인천, 군산 3000여 명 이기붕 '사퇴를 고려' 발언
4월 24일 전주, 마산, 인천 4500여 명 마산에서 노인 데모 발생, 이기붕 모든 공직 사퇴
4월 25일 서울, 마산, 춘천, 영주, 김해, 진주 8~10만여 명[41] 서울에서 대학교수단 시위 발생, 마산에서 할머니 데모 발생
4월 26일 전국 각지의 대도시 및 중소도시 수십만여 명 이승만 하야 성명 발표

4월 19일 화요일,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그날의 시위는 서울, 대구, 부산, 마산, 전주, 청주, 대전, 제주 등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그동안 미적거리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중 부산과 광주에서는 경찰의 발포가 있었다.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4월 19일 시위 동안 100여명이 넘는 사망자[42]가 발생했다. 정부는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혁명적 시위에 당황하여 이 날 오후 4시 30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사태의 원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난동', '폭력사건' 운운하며 허둥댔다. 사건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던 이기붕도 사퇴를 고려한다는 애매한 말로 더욱 공분을 샀다. 이런 한심한 작태에 군대도, 미국도 마침내 등을 돌렸다. 그런 상황에도 시위는 연일 전국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더 자세한 시위 내용과 전개 과정은 아래의 문단을 참고하라.

5.1. 4월 19일, 피의 화요일

5.1.1. 서울

4.19 당일의 모습을 담은 영상.
4월 19일, 신문에 실린 어젯밤의 소식은 전국의 학생과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깡패들이 평화 시위를 하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습격해 폭력을 자행했다는 것은 크나큰 분노를 가져왔다.[43] 대학생들은 21일 예정해왔던 시위를 앞당겨 19일을 거사일로 바꿨다. 대학 곳곳에 격문이 나붙고 대학생들은 비장한 선언문을 발표하고는 거리로 나섰다. 우선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문을 나서자 여러 단과대생들이 합세하였고 서울 시내 대부분의 대학, 이어 고등학교, 중학교 학생들까지 대대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하였다.[44] 이들은 정부의 반공 프로파간다를 의식했는지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이후] 즉 자기들은 결코 용공이 아니라는 구호다.

고등학생들은 원래 19일이 거사일인지라 아침부터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일찍 수업이 끝난터라[46] 하굣길에 시위에 합류하기도 했다. 이제 고등학교와 대학교마다 수백, 수천여 명의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항의하고 이승만 정부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며 모교에서부터 쏟아져나왔다. 학생 시위대는 점차 모이기 시작했고, 시위의 방향은 이승만이 있는 경무대를 향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도 시위대열에 동참해갔다. 오후 1시가 넘자 서울에서만 시위대의 규모는 10만에 육박했다. 시위대는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를 가득 메울 정도가 되어 여러 방면에서 경무대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학생들은 각기 세 방향으로 나뉘어 대한민국 국회의사당(부민관)[47]이 있던 태평로를 점거하고 면담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승만이 있던 경무대 이기붕의 자택 쪽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경찰은 중앙청[48] 앞에서 저지선을 형성, 공포탄과 최루탄을 발포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 4월 19일 서울지역 시위 사망자 명단 : 보기 / 접기
||<-5> 4월 19일 서울지역 시위 사망자[49] 및 상이후사망자 명단 ||
강석원 강창조 고병래 고순자 고완기
곽영현 구순자 김관식 김부연 김영기
김왈영 김용안 김응수 김재준 김찬우
김창무 김창섭 김창필 김철호 김지호
김태년 김현기 남기성 남정만 노희두
문화웅 민병록 박건정 박도일 박동훈
박상범 박찬원 박호진 백남웅 서현무
손경호 손중근 송영근 신경식 신보웅
심은준 심자룡 안경식 안병채 안승준
안응헌 안종길 염춘식 유재식 윤경웅
윤광현 윤지섭 이규복 이근형 이기석
이상관 이상헌 이성엽 이시광 이익관
이정옥 이종양 이창원 이채섭 이청수
이향길 이흥수 임동성 임성희 임용학
임원협 장동원 장동환 장인서 전무영
전한승 조광집 조선관 조조남 조주광
지영헌 진삼두 진영숙 차명진 차성원
천인복수 최기두 최기태 최동섭 최신자
최정규 최태식 한명남 한정기 홍순선
홍종필 황규직 김병진 한진수 김광석
김영곤 장기성 최현석 장인모 정석조
최학서 최현철 구자숙 김길현 이기태
차대공 채광석 곽종한 원일순 유종환
이효희 안부자 정임석 전재근 김성수
정규철 이영 고해길 김정기 이항구
하정수 한인관

오후 1시 30분경, 경찰이 곽영주의 지휘하에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기 시작했고 선두에 있던 여러 명이 쓰러졌다.[50] 이 당시의 발포로 인해 총합 21명 사망, 172명 부상. 특히 하단에 다시 서술하겠지만 경무대 앞에서의 소위 "죽음의 행진" 에서 피해가 워낙 컸다. 또한 경무대 앞 발포를 시작으로 경찰의 발포는 하루종일 이어져 시위에 참여하던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날 서울에서의 총 사망자 수는 104명으로 이 중에 경찰측 사망자도 3명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총으로 시민의 분노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시민들은 끊임없이 경무대, 중앙청, 대법원, 이기붕 사옥 등으로 몰려가 경찰들과 맞서 싸웠다. 그런가하면 시위대에게 물이나 음식을 제공하거나 부족한 피를 위해 헌혈에 나서는 등 조력도 아끼지 않았다. 시위대는 먼저 이승만 독재정권과 자유당을 옹호하던 서울신문사에 불을 질렀고, 반공을 외치며 시민들을 압박하던 반공회관에도 방화했다. 서울 각지의 파출소들도 시민들에 의해 파괴되고 불살라졌다. 일부 시위대는 카빈소총으로 무장하여 경찰과 아슬아슬한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5.1.2. 광주

※ 4월 19일 광주지역 시위 사망자 명단 : 보기 / 접기
||<-3> 4월 19일 광주지역 시위 사망자 및 상이후사망자 명단 ||
강정섭 고정석 김준호
박순희 이귀봉 장기수
김재복 최금동

5.1.3. 부산

※ 4월 19일 부산지역 시위 사망자 명단 : 보기 /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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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진 김세창 김영계 백윤선 신정융
옥치용 정환규 지복수 최경자 최봉옥
최정수 강수영 전청언 박형철

5.1.4. 영남권

5.1.5. 경기권

5.1.6. 호남권

5.1.7. 강원/제주권

5.2. 학생의 주도적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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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에게 쫓기는 시위대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마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광복을 위해 기뻐해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한성여중 2학년이었던 진영숙[51]이 시위를 떠나기 전 홀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집에 남긴 쪽지였다.

4.19를 주도한 것은 학생들의 힘이었다. 서울시내 소재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왔고 청년들의 의기는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5.2.1. 고등학생

3.15 부정선거 후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른 후 가장 분개한 사람들은 실제 같은 나이 또래인 고등학생이였다. 실제 각 학교 대표들은 미리 비밀스럽게 모여서 4월 19일 전후로 지역적으로 각각 대대적인 데모를 계획하였었고 이 계획을 들은 고려대학생들이 어찌 고등학생들이 나서는데 우리가 잠자코 있을 수 있느냐며 4월 18일 먼저 시위를 하였고, 하지만 서울시내 대학연합에서 4월 19일에 대대적으로 시위하기로 결정난 것을 먼저 튀어보이기 위해 핑계를 대면서 정작 사망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그 훈장을 포기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그로 인해 고려대 피습사건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고등학생이었고 그 후에 국민 전체가 들고 일어서면서 대표면담 등 협상은 어른들에게 맡기는 분위기였으며 그러다보니 언론에서 묻히며 지금은 잘 알려지지 않게 된 것뿐이다.

그리고 대학생들이 주도하였다고 하지만 대학생들이 주도한 곳은 서울의 시위였고 그 당시 지방에는 각 시도에 한두 개의 대학과 대학생들의 인원도 작았다. 실제 주도적으로 앞장선 이들은 대부분이 그 지방의 고등학생들이 앞장섰고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동참하는 형태였다.

예를 들어 충북지방에서는 충주고를 시작으로 시위를 시작했고 참여한 학교는 청주고, 청주상고, 청주공고, 청주농고 등이였다. 실제 4.19 혁명 며칠 전 각 고등학교에서 그 학교들을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 모여 거사일을 정하여 지금의 청주시내 도청 앞에 모여 시위를 하였고 경찰들의 곤봉에 수많은 학생들이 다쳤다. 자료는 그 당시 충청일보 신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4.19 당일 맨 먼저 시위에 참가한 것은 의외로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들이었다. 신설동 로터리에 있는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오전 8시 30분경 로터리를 점거한 후 동대문 쪽으로 쪽으로 행진을 시작했고, 혜화동의 동성고등학교 학생들, 경기고등학교 학생들 또한 합류하였다. 이 대열에 점차 대학생들에 합류하면서 학생시위대가 형성된 것이다.

5.2.2. 대학생

4월 19일 당시 오전부터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거기에 거의 때를 같이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들이 종로로 진출했다. 이어 9시경에는 법대와 약대, 수의대, 치의대 등 동숭, 연건 캠퍼스의 거의 모든 단과대학이 합류했고 사범대 및 비교적 멀리 있던 상과대학생들은 9시 30분경에 합류했다.[52]

특히 다소 늦게 합류한 의대생들은 의사 가운을 입고 시위에 참여했는데 의대생답다면 의대생다운 자기들만의 독특한 구호를 썼다. 예를 들자면 "학우들이여, 메스를 들어라! 썩은 정치 수술하자!" 이런 구호들.

10시경에는 전날 시위를 벌였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다시 시위대에 합류했고 이어 건국대학교, 동국대학교,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이 각각 수천 명 단위로 몰려나왔다. 그리고 정오가 되자 연세대학교 중앙대학교 학생들까지 가세하여 학생시위대는 순식간에 10만 명까지 불어나 서울 도심을 가득 메웠다.

다음은 시위에 참여한 대학들의 이름과 참여 숫자를 시위에 참여한 순서대로 정리한 것이다. 이 중 시위에 참여한 대표적인 대학과 재학생들의 활동은 아래와 같다.
5.2.2.1. 서울대학교
시위 현장에서 가장 가까웠던[55] 서울대학교는 피해가 가장 컸다. 이 날 하루에만 7명의 학생이 사망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현재 서울대학교 교정에는 4.19 탑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사회대와 법대를 내려가면 있는 두레문예관 앞에 있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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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시스.
이하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 발표한 4월 혁명 선언문.[57]
象牙(상아)의 眞理塔(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疾風(질풍)과 같은 歷史(역사)의 潮流(조류)에 自身(자신)을 參與(참여)시킴으로써 理性(이성)과 眞理(진리), 그리고 自由(자유)의 大學精神(대학정신)을 現實(현실)의 참담한 薄土(박토)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오늘의 우리는 自身(자신)들의 知性(지성)과 良心(양심)의 엄숙한 命令(명령)으로하여 邪惡(사악)과 殘虐(잔학)의 現狀(현상)을 糾彈(규탄), 匡正(광정)하려는 主體的 判斷(주체적 판단)과 使命感(사명감)의 發露(발로)임을 떳떳이 宣明(선명)하는 바이다.

우리의 知性(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現狀(현상)이 民主(민주)와 自由(자유)를 僞裝(위장)한 專制主義(전제주의)의 표독한 專橫(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斷定(단정)한다. 무릇 모든 民主主義(민주주의)의 政治史(정치사)는 自由(자유)의 鬪爭史(투쟁사)다. 그것은 또한 如何(여하)한 形態(형태)의 專制(전제)로 民衆(민중)앞에 君臨(군림)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같이 헤슬픈 것임을 敎示(교시)한다. 韓國(한국)의 日淺(일천)한 大學史(대학사)가 赤專制(적색전제)에의 果敢(과감)한 鬪爭(투쟁)의 巨劃(거획)을 掌(장)하고 있는데 크나큰 自負(자부)를 느끼는 것과 꼭 같은 論理(논리)의 演繹(연역)에서, 民主主義(민주주의)를 僞裝(위장)한 白專制(백색전제)에의 抗議(항의)를 가장 높은 榮光(영광)으로 우리는 自負(자부)한다.

近代的 民主主義(근대적 민주주의)의 基幹(근간)은 自由(자유)이다. 우리에게서 自由(자유)는 喪失(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송두리째 剝奪(박탈)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理性(이성)의 慧眼(혜안)으로 直視(직시)한다. 이제 막 自由(자유)의 戰場(전장)엔 불이 붙기 시작했다. 正當(정당)히 가져야 할 權利(권리)를 奪還(탈환)하기 위한 自由(자유)의 鬪爭(투쟁)은 燎原(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다. 自由(자유)의 戰域(전역)은 바야흐로 豊盛(풍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民主主義(민주주의)와 民衆(민중)의 公僕(공복)이며 中立的 權力體(중립적 권력체)인 官僚(관료)와 警察(경찰)은 民主(민주)를 僞裝(위장)한 家父長的 專制權力(가부장적 전제권력)의 하수인으로 발 벗었다. 民主主義 理念(민주주의 이념)의 最低(최저)의 公理(공리)인 選擧權(선거권)마저 權力(권력)의 魔手(마수)앞에 壟斷(농단)되었다. 言論(언론), 出版(출판), 集會(집회), 結社(결사) 및 思想(사상)의 자유의 불빛은 무식한 專制權力(전제권력)의 악랄한 發惡(발악)으로하여 깜박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漆黑(칠흑)같은 밤의 繼續(계속)이다.

나이 어린 學生 金朱烈(학생 김주열)의 慘屍(참시)를 보라! 그것은 假飾(가식)없는 專制主義 專橫(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裸像(나상)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卑屈(비굴)하게도 威(위하)와 暴力(폭력)으로써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百步(백보)를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學究(학구)의 良心(양심)을 강렬히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自由(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沈默(침묵)에 自由(자유)의 鐘(종)을 亂打(난타)하는 打手(타수)의 一翼(일익)임을 자랑한다. 日帝(일제)의 鐵槌(철퇴)아래 미칠듯 自由(자유)를 歡呼(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兄(형)들과 같이...

良心(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永遠(영원)한 民主主義(민주주의)의 死守派(사수파)는 榮光(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現實(현실)의 뒷 골목에서 勇氣(용기)없는 自虐(자학)을 되씹는 者(자)까지 우리의 隊列(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自由(자유)의 秘密(비밀)은 勇氣(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隊列(대열)은 理性(이성)과 良心(양심)과 平和(평화), 그리고 自由(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隊列(대열)이다. 모든 法(법)은 우리를 保障(보장)한다.
단기 4293년 (서기 1960년) 4월 19일 서울大學校(대학교) 文理科大學(문리과대학) 學生 一同(학생일동)
사망자 명단 : 고순자(당22세) - 미술대 3학년, 김치호(당21세) - 문리대 3학년, 박동훈(당19세) - 법대 1학년, 손중근(당22세) - 사범대 4학년, 안승준(당22세) - 상대 3학년, 유재식(당24세) - 사범대 2학년
5.2.2.2. 동국대학교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태평로의 국회의사당 앞을 선점했을 때 동국대학교 학생들은 효자동 쪽으로 진출했다. 시위를 주도했던 김칠봉(당시 법대 '58)은 "이승만과 면담하러 가자!" 고 외쳤고 이 소리를 들은 학생들은 경무대(현 청와대 위치보다는 약간 뒤쪽)로 향하기 시작했다. 중앙청 앞에서 경찰과 부딪친 시위대는 이에 맞서서 큰 수도관을 굴리며 행진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최루탄을 도로 주워 경찰들에게 던지며 전진했다.

당시 동국대는 서울대보다 경무대에 가까웠고 서울대생이 동국대로 올때쯤엔 이미 바리케이트를 뚫기 시작했다. 이러한 바리게이트를 뚫을 때 동국대생은 당시 효자동 근처에서 공사중이었던 대형 수도관 2개를 앞에 굴리며 전진했다.[58] 이에 경찰은 해산을 위해 최루탄을 쐈고 이 최루탄에 항거하기 위해 학생들은 두건으로 눈을 가리고 전진했다. 이것이 유혈사태의 시작이 될거라곤 모른 채로 말이다.[59]

대치 상황에서 선봉을 맡은 법대와 농대 학생들 중 일부가 3차 저지선으로 형성해 둔 소방차(혹은 전차(電車)) 위에 기어올라갔고[60] 저지선을 뚫은 시위대 중 일부는 최종목표인 경무대를 향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위대의 선두로부터 경무대까지는 100여미터를 목전에 둔 상황. 나머지 대열은 중앙청 옆길에서 경찰과 여전히 엉켜있었다.

마침내 오후 1시 30분경(40분이라는 얘기도 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했고 총격을 맞고 노희두 열사(법대 '59)와 박흥규, 이종학(농학 '59) 등 여러 명이 즉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러한 조준사격은 경고사격에서 최루탄으로 눈을 가린 몇몇 학생들이 전방을 보지 못해 당하게 된 것이다. 시위대가 앞으로 와도 경고사격의 조준점을 낮춰야했던 경찰들은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았고 결국 이렇게 몇명의 학생들은 즉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당시 조준사격은 일반 소총이 아닌 기관총을 쏜것이다. 조준 사격에 분노할 대로 분노한 법대 학생들은 서소문을 지나 서대문 로터리로 몰려가서 적십자병원 옆 이기붕 국회의장 자택을 점거해버린 후 한달음에 서쪽 끝인 서대문에서 동쪽 끝인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까지 시위를 벌이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한참 지나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해산했다.

"희두가 4.19 혁명 당일의 최초 희생자였다" 라고 김칠봉 열사는 증언하였고 이 노희두 열사의 경우는 불행히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법정대학의 후신인 동국대학교 법과대학은 이를 기리는 의미에서 현재에도 '선봉법대' 의 칭호를 유지하고 있으며 매년 4월 중순에는 단과대 로비에 분향소를 마련해 추모하고 있다. 또한 동국대 전체적으로는 만해광장 한 켠에 '동우탑' 을 건립하여 기리고 있으며 매년 수유리 4.19 민주묘역에서 북한산을 오르는 '4.19 등반대회' 를 개최하고 있다.

이후 4.19 혁명 50주년을 맞이하여 정부에서 수여한 4.19 혁명 공로훈장 건국포장 239개 중에서는 35개가 동국대학교에 추서 혹은 서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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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당시 동국대학교 학생들이 행진에 들고 나갔던 플래카드. 2006년 당시 신축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입구 로비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옮겨졌다.
5.2.2.3. 중앙대학교
중대신문 4.19 특집기사 - 의에 죽고 참에 살았다.

4.19 혁명에 참여한 당시 재학생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하여 기사를 작성한 것이다. 4.19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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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학생들은 시위 참가자 중 하루 만에 6명이 사망했다. 7명이 사망한 서울대학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희생자를 낸 셈. 이런 연유로 중앙대의 별명이 '의혈' 이다.

다음은 중앙대에서 발표한 선언문.
우리 중대생이 자유당 정권의 폭정을 규탄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파렴치한 유산을 물려받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의 정당한 저항이다. 총칼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감행되어야 할 이 항쟁은 우리 후손에게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광적인 장기집권이 가져다 준 부정과 부패의 무서운 해독을 오염시키지 않으려함에 있다."
사망자 명단 - 고병래(상학과3), 김태연(약학과3), 서현무(법학과3), 송규석(정외과3), 지영헌(신문학과3), 전무영(신문학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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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의 열사들의 영정과 이름은 중앙도서관 앞의 탑에 새겨져 있다. 다음은 탑의 비문의 내용.
우리들은 남으로부터 싸워 올라가
마침내 사월학생혁명 그 대열에
기를 높이 올렸다
그러함에 있어 우리들은
우리들의 영원한 사랑
조국의 자유와 독립
민주와 번영
생존의 평등 평화를 위하여
모든 지성 모든 생면 모든 사랑을
다하여 아낌이 없었다
그리하여 여섯 명의 벗을 잃었으니
아! 슬프도다 4월이여! 광영이여!
벗의 이름으로 끝이 없어라

4293년[61] 9월 중앙대학교 학생일동.

5.3. 계엄령과 계엄군의 태도

사태가 워낙 심각해지자 정부는 19일 당일 오후 3시 서울지역 일대에 긴급히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런데 이때 총격사망 문제를 덮기 위해 1시로 소급하여 적용하였다. 계엄령은 서울, 부산, 광주,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수원 일대에 선포되었다. 이로써 시위는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그런데 계엄군은 경찰과는 대조적으로 중립을 지켰고[62]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시위가 있어도 발포를 하지 않았고 시위대와 협상을 하기도 하는 등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서울에 계엄군이 진주하자 어느 노신사가 계엄군에게 "우리를 죽이려고 왔는가? 죽이고 싶다면 얼른 죽여라!"라고 울부짖었고 이에 지휘관이었던 젊은 장교가 당황하여 경상도 사투리로 "같은 대한민국 사람들끼리 어떻게 죽일 수 있겠는가" 라고 대답하자 시위대는 군대가 시민의 편이라고 환호하고 군인들과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 사건도 있었다 한다. 이들 계엄군이 경찰들처럼 강경하게 시위대를 진압하지 않은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로 군부 내에서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 이승만이 경찰 세력을 비호하는 한편 독재 연장에 공헌을 한 적 있는 군부에게 보상을 제대로 내려주지 않았다는 점. 당시의 경찰은 내무치안 조직이라기보다는 공비 토벌 등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으면서 사실상 준군사조직에 가까웠으며, 국내의 '무력 조직'으로서 경찰과 군의 라이벌 의식은 상당히 강했다.[63]
  • 유력한 부통령 후보였던 국방부 장관 이범석을 부통령 후보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저지른 적이 있다는 점.
당시 서울지역 계엄을 담당했던 부대는 15사단 ( 사단장 조재미 준장)으로 자체적으로 이하와 같은 세 가지의 원칙을 엄정히 지킬 것을 각급 부대에 지시한 바 있다.
  • 상관의 허가 없이 시위대에 무단으로 발포하는 것을 금지한다.
  • 민가 건물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 민간인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받는 것을 금지한다.

저녁이 깊어가면서 시위대는 점차 진압되어가기 시작했다. 잔혹한 유혈진압을 서슴지 않는 경찰과 탱크를 앞세우고 압박해 오는 계엄군 앞에 시위대는 쫓기고 쫓기기를 거듭했다. 일부 시위대는 차량을 닥치는 대로 징발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완강하던 시위대도 맨주먹으로는 더 이상 일제 사격 앞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무렵부터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면서 도심지에서 점점 밀려났다. 한편 일부 시위대는 눈에 띄는 차량들을 닥치는 대로 징발, 차에 올라타고 경찰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한 채 길을 누볐다. 오후 6시 40분경, 소방차와 트럭 등에 분승한 시위대가 동대문경찰서 앞을 지날 때 경찰서 안에서 발포, 다시 1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기동화한 시위대는 밤 8시 경, 40여 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의 파출소를 모조리 불질렀으며 파출소에서 탈취한 카빈 소총 27정으로 무장, 한때는 경찰과 총격전까지 벌였다. 시위대 일부는 20여대의 차량에 분승, 미아리 쪽으로 퇴각하여 의정부무기고를 찾아 창동까지 밀려갔다. 이들은 창동지서 경찰들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정무렵 급거 출동한 계엄군과 경기도경이 협공할 기세를 보이자 다시 시내로 되돌아와 고려대 뒷산 쪽으로 몰렸다.[64] #, # 시위대는 결국 고려대학교 교정에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바로 이때의 에피소드가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극적인 사건이다. 궁지에 물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이대로 곧장 밀고 들어갔다가는 양쪽 모두 최악의 참사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 자명한 일. 이때 놀랍게도 사단장 조재미 준장은 단 두 명의 부관만을 대동하고 캠퍼스에 진입했고 학교 강당으로 들어가서 즐비하게 놓인 수많은 희생자들의 태극기로 덮인 시신들 앞에서 정중하고 깍듯한 태도로 조의를 표했다. 당혹감과 착잡함이 교차하는 심경으로 이를 지켜보던 시위대들은 결국 그 자리에서 전원이 무기를 버리고 해산, 계엄군에 연행됨으로써 무혈 진압에 성공했다고 한다.

6. 자유당 몰락의 전주곡

6.1. 등을 돌리는 우방들

상황이 이러할진대 이제는 감을 좀 잡아도 좋으련만 이승만은 여전히 착각 속에 빠져있었다. 다음은 4월 20일자 대국민 담화의 내용 중 일부다.
"어제의 난동으로 본인과 정부 각료들은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 전 생애를 바쳐 온 애국적인 한국민이 그러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고는 거의 믿지 못할 일이다..."

그동안 미국은 1, 2차 마산 항쟁에 유감의 뜻을 표했을 뿐이었지만 4월 19일의 사태에 대해서는 월터 패트릭 매카나기(Walter Patrick McConaughy) 주한미국대사가 경무대를 방문해 정당한 불만의 해결을 희망한다고 요청했으며 대사관으로 돌아오는 즉시 학생들의 행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미 국무부장관이 주미 한국대사에게 항의각서를 보내기에 이르렀다.[65]

다음은 미국 국무부 기자회견 내용 중 일부이다. 세세한 토씨의 경우 다소 다를 수 있다.
"국무부는 금일 오후에 한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국민의 불안과 폭력행위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중략) ...미국 정부는 한국의 시위가 근래의 선거와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에 대해 품고 있는 국민들의 불안을 반영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양유찬 대한민국 대사에게 통고하였습니다..."

이렇게 미국이 등을 돌린지 얼마 안 되어 4월 21일에는 국무위원이 일괄 사표를 냈고 23일에는 장면이 부통령 사임서를 냈으며[66] 그 날 이기붕은 부통령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67] 그러나 한 번 끓어오른 사회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6.2. 4월 25일, 다시 불붙은 시위

6.2.1. 교수들의 시위

學生(학생)의 피에 報答(보답)하라!

시간이 지날수록 소강되어가던 시위를 되살린 것은 4월 25일 서울대 대학교수단의 시위였다. 이번에는 학생이 아닌 대학 교수들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오후 5시 50분경에는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를 하기에 이른다. 이에 시민들이 호응하여 시위 군중은 삽시간에 1만 명까지 불어났다.

이들은 19일에 있었던 참혹한 사태에 대해 지식인으로서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생때같은 자신의 제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두려움 없이 나섰고 자신들을 겨누고 있는 총 앞에서 의연히 행진했고 결국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에 대해 자신들 역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굳이 25일이냐 하면 먼저 매달 25일은 교수들의 봉급날로서[68] 이 때 정기적으로 많은 교수들이 한데 모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봉급을 핑계로 당국의 의혹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생기는 셈이었다. 처음에 교수들은 많아봐야 50~60명 정도만이 모이리라 여겼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모인 교수들은 무려 258명에 이르렀다. 자기들도 이렇게 많이 모일 줄 몰라 놀랐다는 후일담이 있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는 대학가 사이에서 "교수가 시위에 참여하는 것은 벼룩을 일렬로 세우는 것보다 어렵다."라는 말이 있었다. 당시에는 유교적 문화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던 시절이라 식자층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 자체를 매우 비판적으로 보던 때였다.[69] 그만큼 교수들 사이에서 정치 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꺼렸다는 이야기이며, 교수들이 직접 시위에 참여한다는 것은 4.19혁명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교수들이 대단히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했다는 방증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열화와 같은 기립박수 속에 일사천리로 반정부 시위 및 행진을 결의하고 시국선언문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시국선언문에는 참석자 258명 전원이 서명하였다. 그 중에 몇 명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 이종우(고려대), 이희승(서울대), 정석해(연세대), 조윤제(성균관대) 외 시국선언문 서명자 25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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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4.19의거는 이 나라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중대한 계기다. 이에 대한 철저한 규정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이 비상 시국에 대처하여 우리는 이제 전국 대학 교수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아래와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1) 마산, 서울 기타 각지의 학생 데모는 주권을 빼앗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순진한 정의감의 발로이며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 정기의 표현이다.
2) 이 데모를 공산당의 조종이나 야당의 사주로 보는 것은 고의의 곡해이며 학생들의 정의감의 모독이다.
3) 평화적이요 합법인 학생 데모에 총탄과 폭력을 기탄 없이 남용하여 대량의 유혈, 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민주와 자유'를 기본으로 한 국립 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정치 집단의 사병이었다.
4) 누적된 부패와 부정과 횡포로서의 민족적 대참극, 대치욕을 초래케 한 대통령을 위시하여 국회의원 및 대법관 등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 않으면 국민과 학생의 분노는 가라앉기 힘들 것이다.
5) 3.15선거는 불법 선거이다. 공명 선거에 의하여 정, 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6) 3.15 부정 선거를 조작한 주모자들은 중형에 처해야 한다.
7) 학생 살상의 만행을 위에서 명령한 자 및 직접 하수자는 즉시 체포 처형하라.
8) 모든 구속 학생은 무조건 석방하라. 그들 중에 파괴 또는 폭행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동료 피살에 흥분된 비정상 상태하의 행동이요, 폭행 또는 파괴가 그 본의가 아닌 까닭이다.
9) 정치적 지위를 이용 또는 권력과 결탁하여 부정 축재한 자는 관, 군, 민을 막론하고 가차없이 적발, 처단하여 국가 기강을 세우라.
10) 경찰은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11) 학원의 정치 도구화를 배격한다.
12) 곡학아세하는 사이비 학자와 정치 도구화하는 소위 문인, 예술인을 배격한다.
13) 학생 제군은 38선 넘어 호시탐탐하는 공산 괴뢰들이 군들의 의거를 선전에 이용하고 있음을 경계하라. 그리고 이남에서도 반공의 이름을 도용하던 방식으로 군들의 피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악이용하려는 불순 분자를 조심하라.
14)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여 학생들은 흥분을 진정하고 이성을 지켜 속히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

- 단기 4293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

이는 이전의 시위와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인 것이었다. 위에 인용된 각 학교별 선언문에서 보듯 이전에는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는 것이 주요 요구였고 이승만 하야는 주요사항이 아니었으나 교수들은 이승만 하야를 직접적으로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교수들이 서울 시내를 질서정연하게 행진하고 그 뒤를 시민들과 학생들이 따르고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하고 애국가까지 제창했는데도 단 한 명의 경찰도 얼씬하지 않았다. 사전에 당국에 알리지도 않은 강행 시위였는데도. 당대의 교수라는 직분이 가지는 사회적 권위와 책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보여주는 예.[70][71]

교수단 데모가 끝난 뒤에도 시민, 학생들이 통금 사이렌을 무시하고 시위를 계속했으며 일부는 철야농성까지 벌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5시,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오전 7시에는 3만여 명이 모여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였고 1만여 군중은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윽고 9시경에는 서대문에 있던 이기붕의 집이 파괴되는가 하면[72] 같은 시각 45분경에 파고다 공원에 있는 이승만 동상이 군중들에 의해 철거되었다. #[73] 또한 정치깡패 보스들의 집을 공격해 부수었다. 이제 점점 상황은 이승만과 자유당을 옭아매고 있었다.

6.2.2. 어린이들까지 나선 시위

10시경 시위 군중은 10만명으로 불어났으며 국민학생[74]들도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를 하였다. 지난 19일, 피의 화요일 때 수송국민학교[75] 6학년 학생이었던 전한승(13세)군이 총에 맞아 사망하였던 것이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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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국민학교 학생들이 데모하는 모습.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라는 플래카드가 보인다.

아래는 당시 수송국민학교 학생 강명희가 남긴 글 《나는 알아요》.
아! 슬퍼요
아침하늘이 밝아 오면은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놀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하늘과 저녁 놀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6.2.3. 시위대와 계엄군이 하나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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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 전차 위에 올라간 시위대의 모습.

교수들의 시위가 끝난 후 계엄군이 출동하긴 했지만 탱크를 앞세운 데다 착검까지 하고 방독면을 쓰고서도 이미 군인들은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시위대 속 한 10대 소년이 탱크 위로 뛰어올라가서 외쳤다. " 대한민국 국군 만세!" 민주화 관련 사료들 중에는 이때 눈물을 흘리는 군인들도 있었다는 서술이 있다. [77]

이후로 계엄군은 시위대 건으로 현장에 출동할 때마다 시위대의 따뜻한 환영과 환호,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미 계엄군은 이승만 정부를 지킬 마음이 사라져버린 상태였으며, 계엄군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사병'이 아닌 국민을 지키는 '군대'가 되어있었다. 이후 시위대가 시위를 벌이는 곳에는 항상 탱크가 상징처럼 따라다녔다. 시위대는 탱크 위에 올라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쳤다.

7. 이승만의 하야

7.1.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


"미국으로 망명하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것만이 오직 유일한 길입니다."
ㅡ 이승만 대통령과 시민 대표 5명과의 면담 中

상황은 이승만에게 명백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26일 아침 김정렬 국방장관이 강경히 이 대통령에게 하야를 진언했고[78][79], 부인 프란체스카도 귀에 대고 결심을 재촉했으며, 4월 25일 수석국무위원으로 입각한 허정도 하야를 권유했다. 김정렬 회고록에 따르면 이때 이승만은 "내가 그만두면 더 이상 다치는 사람이 없단 말이지?"하고 결국 하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이승만은 박찬일 비서관을 불러 성명서를 쓸 것을 지시했다. 초안에는 대통령 하야, 내각책임제, 재선거 등이 적혀있었지만 이승만은 그렇게 쓰면 안된다고 새로 쓰게 했다. 송요찬의 건의로 이기붕의 공직 사퇴 내용도 첨가되었다. 두번째로 쓰인 성명서가 밑에 있는 성명서다.

그때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시민, 학생대표 5명과 이승만 대통령의 면담을 주선했다. 고려대 정치학과 유일나 등이 경무대 후원에서 이승만과 면담했다. 유일나가 "각하께서 하야하시는 길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입니다"라고 직언했고 이승만이 "뭘 하라고?"라고 알아듣지 못하자 옆에서 곽영주가 "step down"이라고 속삭였다. 이승만은 "날더러 저 하와이나 외국에 가서 살란 말인가?"라고 물었고 유일나는 "국민이 원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때 미국 대사 맥카나기가 도착했다. 이승만은 대사를 기다리게 한 다음에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유일나는 이집트 나세르의 예를 들며 북한과 대치 중이니만큼 2년간 군정을 한 다음에 민정으로 이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허정이 옆에서 반대의 뜻을 밝혔고 이승만은 그게 송요찬의 지시로 한 말인 줄 알고 한국과 이집트는 상황이 다르다고 반대했다. 결국 이승만은 시민 대표와의 면담을 받아들였다.

10시 20분경 드디어 이승만이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사임할 것을 발표했다.[80] 비슷한 시간인 9시 45분경 파고다공원에 몰려든 데모 군중이 이승만 동상의 목에 철사줄을 걸어 쓰러뜨렸다. 현재는 그 자리에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10시 40분에 이승만은 맥카나기 대사와 면담했는데 미국의 사퇴 압박을 전하려던 대사는 사퇴 성명서를 듣고 성명 지지 의사를 전달했다.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가지 결심을 요구했다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내가 한가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삼팔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사 공산군이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 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다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이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짐작하겠지만 저기 "국민이 원한다면" 이라는 표현이 논란의 여지가 있었는데 이에 외무부장관은 기자들에게 이는 단지 문구상 표현에 불구하고 사실상 하야한 것이라고 확인해주었다.

시민들은 방송을 듣고 경무대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승리를 환호하였다. 시민들은 새로이 "질서를 지킵시다" 플래카드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며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하였으며 길거리를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 4월 26일 시위 사망자 명단 : 보기 / 접기
||<-4> 4월 26일 시위 사망자 및 상이후사망자 ||
강명석 김경이 김두호 김선길
김영호 박완식 박춘봉 손흥구
심점구 안정수 윤석헌 이강섭
이연하 이재섬 이판갑 이한수
임기택 장영옥 정태성 정태훈
조진구 최장성 양대춘 함장호
안창원 송시환

7.2. 이 대통령의 최후의 몸부림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갑자기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이미 방송으로 다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비서들의 잇따른 사임서 사인 요구에 버텼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늙은 독재자의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허정도 설득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김정열이 나서서 또 촉구했지만, 이승만의 대답은 역시 '사임하면 온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허정이 질서를 확고히 유지할 수 있다고 역설하자 그때서야 어쩔 수 없었던지 사임서에 사인을 해 국회에 제출할 수 있었다.[81]

7.3. 제2공화국의 출범


이리하여 오후 2시, 국회는 이 대통령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고 다음날 오후 3시에 국회에 제출된 이 대통령 사임서가 즉시 수리되었으며 헌법 규정에 따라 수석국무위원인 허정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어[82] 후에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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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가는 이승만을 신문 보도한 경향신문.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자유당 정권과 이승만 추종자들은 저항할 여지도 없이 힘을 잃었으며 집이 무너진 이기붕은 이화장으로 이사한 28일 장남 이강석의 자결 총격에 의해 일가족이 모두 자살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83] 그리고 하와이에서 1965년 7월 19일에 사망하였다.[84][85]

참고로 망명은 사진에서 배웅하고 있는 허정의 주도로 각료들도 모르게 비밀리에 진행되었는데, 이승만은 떠나는 순간까지도 "하와이에서 잠시 쉬다 아이크(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가 오기 전에 곧 돌아오겠다"고 갔다고 한다. 무슨 혁명이 그저 며칠 시간이 지나면 진정될 줄 알았는지...[86]

8. 그날 이후

8.1. 한계와 의의

이승만의 하야와 더불어 4.19는 주도세력인 학생들에 의해 혁명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지식인들도 그에 동조하였다. 어느 역사학자는 4.19를 절대왕정의 구체제를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에 비유하였다. 어느 경제학자는 4.19를 국가 독점 자본주의를 해체한 민주적 혁명으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풍조 속에서 4.19가 혁명이었음은 국민의 상식으로 정착되어 갔다. 그렇지만 그 혁명의 뜻이 무엇인지는 심각하게 논의되거나 합의된 바가 없었다 4.19는 한국의 역사에서 일반 대중이 봉기하여 정권을 쓰러뜨린 최초의 사건이었다. 조선왕조 시대까지 일반 백성은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소수의 양반신분만이 조정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인정 받았을 뿐이다. 일제 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인들은 세금을 냈지만 정치적 권리는 탄압받았다. 한국인들이 정치적 주권자로 성립하는 것은 1948년 대한민국의 성립에 의해서였다. 그 국민이 봉기하여 정부를 타도한 것이 4.19인데 이런 일은 한국사에서 전례가 없었다. 이후 4.19는 보통의 한국인들에게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승화되어 갔다.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조직적인 혁명이 아니었고 민중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혁명 결과 권력은 야당인 민주당에게로 돌아갔고 반공보수가 아직까지 당내의 정책이었던 민주당은 시민들의 요구사항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장면 내각 때 경찰 내 발포 책임자에게 무죄 선고를 하자 시민들은 크게 실망하게 된다.

한편 경찰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극에 달한 데다 자유당 정권 내내 억압되었던 시민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폭발하자 시위로 시작하여 시위로 끝나는 하루가 이어지기도 했고[87] 경찰서 등 관공서 건물에 대한 파손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는 곧 대한민국 헌법4차 개정의 빌미가 되었고 법률불소급의 원칙을 무시한 이 개정은 그 이후로 줄곧 "소급입법개헌" 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시국이 안정되고 국민들 사이에서 민주화가 될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고 하는데[88] 정치권은 민주당 신파인 장면 총리와 구파인 윤보선 대통령 사이에 치킨게임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그틈을 타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사회적혼란을 잠식시킨다음 반공을 국시로 삼고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며 국가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경주해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 민정으로 이양 후 돌아가겠다는 공약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 5.16 군사정변). 장면은 수녀원으로 도망가서 나오지 않았고 윤보선은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해 쿠데타는 성공하게 되었다.[89] 정권을 잡은 이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5.16 혁명이라 치켜세우고 4.19 혁명을 깎아내리기 위해 4.19 의거라고 깍아내렸다고는 하지만...이것은 전후맥락을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는 제대로 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제2공화국은 4.19의 영향으로 폭발한 사회적불만을 잠재우지 못하고 신파와 구파로 갈라져 싸움을 걸었으며 이러한 정부에 실망한 지식인들은 당시 제3세계에 널리 유행하던 군사쿠데타를 희망하였다. 실제로 4.19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서울대학생회는 4.19를 계승한 군사혁명으로 환영식을 하였으며 정통성까지 확보하여 날개를 단 호랑이가 되었다고 평해지는 제5대 대통령 선거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듯이 군부의 슬로건에 동감하였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그리고 박정희 집권기에도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의거"로 많이 불렸지만) "의거" 못지않는 "혁명"으로 많이 언급되었다. #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는 4.19를 혁명으로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 몇 번 이의가 제기된 적이 있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의는 4.19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에서의 이의제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혁명' 의 성격과 정의에 관한 학문적인 논쟁의 일종으로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혁명이라는 명칭의 학문적 논쟁은 단순한 극우파의 유사학문은 아니다. 일례로 프랑스 혁명만 하더라도 학계에서는 현대에 그 '혁명'이라는 명칭을 엄정한 시험대에 올리고 있으며, 전체주의 비판으로 유명한 한나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이 '혁명'으로 시작했으나 '반란'으로 끝나버렸다고 평가하기까지 한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전, 프랑스 제1공화국이 태어나는 그 때에도 이미 공화국은 사산(死産) 됐다는게 아렌트의 평가다. 혁명은 해방(liberty)이 아니라 자유(freedom)를 지향하는 활동이고, 결국 자유(freedom)가 얼마나 헌법에 잘 스며들고 성공적인 체제가 들어서는지가 중요하다는게 그녀의 설명이다. 때문에 아랜트는 미국 혁명 프랑스 혁명보다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이런 엄정한 잣대로 평가한다면, 4.19가 혁명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기준은 제2공화국에 대한 평가와 크게 관련될 것이다. 만약 제2공화국이 근본적으로 자유를 헌법에 명시하는데 실패한 체제라면 4.19는 의거, 혹은 미완의 혁명일 것이다. 반대로 만약 제2공화국이 성공적으로 자유를 헌법에 명시했는데 단지 5.16 반란이라는 외부적 요인으로 붕괴한 것이라면 4.19는 혁명일 것이다.

그래도 4.19는 정권을 뒤집은 사건이며, 한국 시민들에게 민주주의 정신을 똑바로 심어주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도 4.19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문구가 있다.[90] 또한 4.19 혁명은 한국 민주주의의 첫 승리였고, 근현대사에서 처음으로 직접 정권을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가진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8.15 광복이 '첫번째 해방'이었다면, 4월 혁명은 '두번째 해방'이었다고 언급한다

8.2. 4.19 세대

4.19 세대 구술 증언록.

4.19 혁명 기간에 대학생으로 운동에 참여하고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세대를 4.19 세대라고 한다. 당시 대학생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386세대만큼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맨땅의 대한민국에서 독재정권을 타도하여 최소한의 민주적 원칙을 수호하였고 산업 발달을 실질적으로 이끌어낸 위대한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도 서술되있지만 4.19세대는 6월민주화 당시 넥타이부대가 된다.[91]

한편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 로 칭송하는 일부층에서는 '4.19 세대나 6.3 세대가 이승만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 고 주장하고 있다.[92][93] 이 주장은 보수층의 집권이 장기화되며 차츰 보수 계열 정치인들 가운데서도 심심찮게 언급되고 있다. 김문수, 김무성 그리고 이명박 전 대통령.

2011년 4월 17일 이승만의 유족인 이인수[94]가 공식적으로 사과하였으나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고 최근 동상 건립 시도 및 이승만 기념관 건립 사업으로 인한 이벤트성 퍼포먼스라고 대차게 까인데다가[95] 희생자들과 4.19 단체 또한 사과에 대해서 진정성이 없다며 사죄에 대해서 거부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결국 이인수는 당초 의도했던 대로 4.19 민주묘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사과문을 읽었다. 근데 인터뷰를 잘 들어보면 4.19 혁명을 4.19 의거라고 칭했다!

거기에 뉴라이트는 이인수 혼자만의 생각일 뿐, 4.19 혁명은 북한의 입김이 크며 이승만을 몰락시켰으므로 사과하면 안된다는 태도를 보였다.

참고로 4.19동지회는 2006년 당시 뉴라이트 학술회에서 4.19 혁명의 의의와 위상에 관련한 문제로 이영훈 교수를 비롯한 참가진들에게 항의를 격하게 한 바가 있다. 뉴라이트들도 문제 있는 것이 4.19를 진압하려던 정부 요인이 후에 세운 언론사(중앙일보 사장 홍진기가 4.19 발포 혐의로 감옥에 갔다)에 많이 기고를 하는 교수도 포함되어 학술회 자체가 문제 될 수밖에 없다.

8.3. 기타

서울특별시 강북구 4.19로8길 17 ( 수유동)에는 국립 4.19 민주묘지가 있다. 워낙에 큰 랜드마크인지라 인근의 경전철 역명도 4.19민주묘지역으로 정해졌다.[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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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컷은 정의의 불꽃 조각상이다.

국가보훈처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계절을 좀 타기는 하지만 참배객들도 꾸준히 있는 편이며 인근 주민들은 은근히 동네 공원으로 여기고 드나들기도 한다(...) 가끔 어디선가 노동자들이 와서 단합대회도 한다. 기념관은 당시 사건개요를 순서대로 둘러볼 수 있는 구조로 정리되어 있으며 나무위키에 작성된 글들도 일부 볼 수가 있다. 희생자 김주열 열사가 오웅진 신부와 주고받은 편지 등[97] 참배시 간단하게 싸온 음식들을 취식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참배를 와서 쓰레기 버리는 짓은 제발 하지 말도록 하자.

2012년 4.19 혁명 52주년 행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었을 때 화환 때문에 비난을 받기도 했다. 보통 정부주관의 행사들에 화환을 보낼 때 정부에서 지정한 권장 '규격' 이 있다고 하는데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일반 장례식장용 화환을 보냈다는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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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지역에서 4.19 운동이 크게 벌어진 곳 중 한 곳인 광주광역시에는 4.19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2012년 4월 14일 금남 56번 버스를 419 버스로 바꾸었다.[98]

현재 이투스에서 역사를 강의하고있는 설민석의 아버지 설송웅[99]씨가 이승만을 직접 대면한 시민 대표 중 한 명이다. 설민석의 말에 따르면 컬러링도 애국가고 휴대폰 번호도 0419로 끝나는 등 평생의 자랑이시라고. 설민석 한국사 교재에서도 당시 설송웅을 찍은 사진이 매년 실려있다. 설송웅 인터뷰

대구광역시에서는 4.19 혁명도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혁명의 발단이었던 2.28 학생민주의거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명덕역 근처에 2.28 민주운동기념회관이 있으며, 지방 단위 말고 국가 단위 행사로 격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이후 2018년부터 2월 28일이 국가기념일로 격상되었다.

창원시[100]에서도 본격적인 혁명의 발단이 된 3.15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최초 총격이 있었던 무학초등학교 앞 삼거리에 '3.15 의거탑'과 '3.15 회관'을 지어 기렸다.[101] 현재 마산회원구 구암동에 4.19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국립묘지도 '3.15 민주묘지'이며, 마산 시가지를 통과하는 대로를 3.15대로로 명명하여 기리고 있다.
2013년부터 4.19 혁명 국민문화제라는 이름으로 강북구에서 각종 행사를 주최하고 있다.[102]

8.4. 관련 창작물

  • 마산 MBC(現 MBC경남)에서 4.19 혁명 특집 드라마로 '누나의 3월' 을 제작했다.
  • 시인 김수영은 혁명의 요구사항 중 하나인 민주주의와 관련된 '하... 그림자가 없다' 라는 시를 썼고, 4.19혁명을 기념하여 이승만과 그의 우상화 작업을 신랄하게 비판한 시인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를 발표했다. 출처 또한 시인 김광규는 권위주의 정권에 지지하거나 침묵하는 등 현실에 순응하게 된 4.19 세대에 대한 반성으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라는 시를 썼다.
  • 일본 애니메이션 마리아 홀릭에서도 잠깐 언급된다. 일본에는 혁명 같은 건 눈 씻고 찾아 봐도 없다면서 죽간(...)에 전 세계의 혁명을 적어놨는데 거기에 잠깐 등장했다. '1960 4.19 學生運動(학생운동)' 이라고 나와있다.
  • 작가 이문열이 4.19 혁명을 다룬 배경의 소설이 있다. 하나는 그 유명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있다.
  • 보컬로이드 시유가 부른 '너를 소리쳐' #
  • 야인시대 121화에서 4.19 혁명을 다룬다.
  • 빌리 조엘의 노래 중 하나인 We Didn't Start The Fire에도 짤막하게 가사로 언급된다.
  • 제2공화국(드라마)에서는 제2공화국 탄생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기 때문에 몇회에 걸쳐 4.19 혁명을 묘사한다.
  • 효자동 이발사의 앞부분에서 4.19 혁명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러나 효자동 이발사도 박정희 정권을 다루는 부분이 길어 4.19 혁명만을 다룬 영화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 조정래 한강(소설) 1권의 중간부분부터 4.19 혁명에 대해 다루고 있다. 친구들과 시위에 참여한 유일표와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정치적 행위를 할 수 없는 신분에 자책감을 느끼면서도 동생을 찾아 나서며 관찰자 입장으로 등장하는 유일민, 시위에 참여하지 않고 숨어버리는 김선오 등 여러 등장인물의 시선을 통해 4.19 혁명을 다각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인상적이다.
  • 4.19혁명 : 윤석역작가의 소설로, 당시 증언, 김주열추모사업회의 자료 등을 토대로 만든 소설이다. 4.19혁명의 주역 김주열 열사와 고등학교도 다니지 못하는 구두닦이 소년의 이야기가 나오고 사건중심으로 3.15부정선거 등이 잘 묘사되어있다.

9. 관련 문서


[1] 뒤쪽에 보면 대한체육회 건물이 보이는데 이 건물 터에 더플라자호텔이 세워졌다. [2] 당시 이승만 정권 아래서 곳곳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서울 남산이었다. 1956년에 세워진 남산의 이승만 동상이 높이 기단을 제외하고 25m(참고로 평양 만수대언덕의 김일성 동상은 기단을 제외하고 20m)로 가장 높았다. 이 동상은 이승만의 81세 생일을 맞아 공사를 시작했기에 높이를 일부러 25m(81척)으로 맞춘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후 이 동상은 4.19 이후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끌여내려져 산산조각 났다. 또한 탑골공원에도 이승만 동상이 있었는데, 혁명 당시 시위대가 끌어내려 거리에 질질 끌고 다녔고, 각 대학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들도 혁명 이후 학생들에 의해 차츰 철거되었다. # 이 당시 파괴된 남산과 탑골공원 동산 잔해 일부가 성균관대 근처 명륜동 부근에 남아 있었는데, 동상 잔해의 소유권을 두고 법정 싸움도 있었다고 한다. [3] 그냥 이렇게 4월 혁명으로 부르는 게 보통이지만, 'April 19 Revolution'이나 '4.19 운동(April 19 Movement)'라는 명칭도 쓰인다. [4] 더 넓게는 2.28 학생민주의거가 일어난 2월 28일부터 잡기도 한다. [5] 1960년까지 집계 [6] 실제로 4.19 혁명 당시 서울신문사는 상당히 큰 재산 손실을 입었다. 민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7] 경찰이 이따위 소리를 한 이유는 간단하다. 정권의 견찰 그 자체였기 떄문이다. 실제로 고바우 영감에서도 야당의원이 다리를 저는걸 본 고바우 영감이 어쩌다 그리 다쳤나고 묻자 야당의원이 푸른 제복을 입은 개에게 물렸다고라고 말했고 후에 장면 내각 시절 가장 많은 숙청이 이뤄진 곳이 경찰이라는 곳에서 보듯 경찰이 얼마나 정권에 빌붙었는지 알 수 있다. 장면 내각의 민주당 자체도 당 이념이라든가 노선에서 자유당과 보수-진보 수준의 차이가 아닌데도 말이다. [8] 이는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여서 1950년대 들면 북한에서 문맹은 거의 퇴치되는 수준까지 다다랐다. (공식적으로 1949년에 문맹이 전부 퇴치되었다고 한다. 물론 신빙성이 있는지 의문이겠지만 그만큼 문맹 퇴치가 빨리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다만 북한은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반대파의 싹이 확 잘려버리는 바람에 이후로 학생운동이 꽃을 피우지 못했다. [9] 참고로 현재와 비교하자면 웬만한 대규모 대학의 전체 학생수가 약 1만명 정도 된다. 즉, 1945년 당시에는 전국의 대학생 규모가 지금 현재의 1개 대학 학생수만도 못했던 것. [10]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발표할 무렵 집계된 실업률만 30%에 달했으니, 아마 진짜 실업자들을 엄밀히 다 조사하면 실제 실업률은 훨씬 높았을 것이다. 실업률이 높았느냐 하면, 군대를 제대하자 취직이 하도 안 되어서 군대에 있던 자기 부하 장교한테 뇌물을 주고 다시 군인이 되게 해달라는 청탁 사건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017년 11월 25일 발행/ 246~247쪽 [11] 물론 원래 의도는 북한을 괴뢰로 만들고 남한과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을 주장하자는 거였지만. [12] 사실 자유당 측에서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일단 이승만이 너무 고령이었는데 대통령 유사시 부통령이 그 권한을 이어받는 터라 부통령 선거까지 자유당이 이겨야만 했다. [13] 홍진기에 따르면, 조병옥이 이승만과 대결할 수 없다고 하면서 후보 사퇴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와 비슷한 증언은 당시 정치부 기자들한테서도 나왔다. <출: 홍진기, '나의 혹중회고', 신세계 1962년 2월호. p208~p209. [14] 출처 - 학민사편집부 편, '혁명재판', 학민사, p39. [15] 선거 직전인 3월 3일에는 경찰의 양심선언으로 민주당이 3.15 부정선거의 진상을 폭로했지만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계속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16] 1990년대 이후로는 고등학교 학생운동의 맥이 끊겼고 고등학교 학생운동단체 자체는 존재하지만 그리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고등학생들의 시위라 하면 낯선 느낌이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생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던데다가 중학교 입학하는데도 시험 치르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지라 고등학생 쯤 되면 이미 다 배운 성인 취급했었고, 사회 참여 역시 빈번했다. 물론 명문고가 존재하는 등 고등학교가 서열화 되어있는 것도 한 이유여서 상위권 고등학교가 그 주체가 되었다. 반면에 의외로 대학생들의 사회 참여는 저조했었는데 어려운 가정 형편에 역시 어렵게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여 신분 상승의 길을 걷기 위해 대학에 입학하다 보니 체제순응적(출세지향적)인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학생들의 미적지근한 사회 참여에 열 받은 고등학생(!)들이 대학 앞에서 시위하는 일도 있었을 정도. 사실 4.19 혁명이 이후 대학생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의 신호탄이 된 사건이다. [17]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좌익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대구는 제1공화국 당시에도 야당 지지 성향이 매우 짙었던 지역이었고, 반 자유당 성향이 아주 강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진보적 성향은 박정희 정권 시절을 거치면서 사라져 갔다. [18] 원래는 명덕로터리(오늘날 명덕네거리)에 기념탑이 있었지만 훗날 두류공원으로 이전했다. [19] 이 시위는 대전에서 발생한 최초의 학생운동 시위였는데 시위를 한 학생들은 나중에 이를 '3.8 민주의거'라 불렀다. 3.8 민주의거는 2013년 사건 발생 53년 만에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었다. [20] 현 환일고등학교. [21] 현 용문고등학교 [22] 4.19 혁명 이후 폐교되었다고 한다. 참고 [23] 개성고등학교 [24] 가야고등학교 [25] 부산정보고등학교 [26] 1980년 폐교 [27] 이런 사전투표로 인해 어떤 지역에서는 이승만, 이기붕을 찍은 표가 실제 그 지역 선거인 숫자보다 많아 표를 태우는 일도 일어났다. [28] 3인조와 5인조로 투표할 경우에는 조장에게 투표지를 확인받아야 했다. 당연히 조장은 자유당 지지자였다. [29] 이런 부정선거를 견디지 못하고 선거가 끝나기 전인 오후 4시 30분, 민주당 중앙당은 "3.15 선거는 불법 무효다."라고 발표했다. [30] 이 때문에 제1차 마산의거의 사망자는 8명이 아니라 총 9명이 된다. [31] 후술하듯 이는 경찰 당국의 적극적 은폐와 사체유기에 의한 것이었다. [32] 흥미로운 것은 후일 5공화국 정권을 무너뜨린 6월 항쟁에서도 경찰이 직사한 최루탄을 머리에 맞아 죽은 사람이 나왔고, 이 사건이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래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일지도. [33] 바로 위 문단의 상고- 마고 연합 스크럼이다. 사지을 확대해 보면 모자의 교표에서 앞줄은 마고, 그 뒷줄은 상고. 그 다음줄은 마고..인 것을 알 수 있다. 촬영지는 현재의 오동동으로 추정된다. [34] 당시 마산여고는 현 경기여고 교복과 비슷한 흰 양장컬러에 검은색 바지 교복이 특징이다. 성지여고의 경우 세일러 컬러였기 때문에 이 시기를 살던 마산 시민들에게는 한눈에 구분이 가능한 부분이다. [35] 이때까지만 해도 대학생들의 참여는 상대적으로 미진한 편이었다. 앞 주석 참고. [36] 당시 신문자료는 물론이고 역사책에서도 '2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정작 의거 당시 사망자 12명의 신원과 사망 경위를 보면 2차 항쟁 당시 사망자는 1명으로 나타났다. 또한 상황일지에도 4월 11일 경찰발포로 1명이 죽었다고 나와 있다. 참고로 당시 사망자 12명 중 9명은 제1차 마산의거로, 1명은 제2차 마산의거로, 2명은 4월 26일의 시위 당시 각각 사망하였다. [37] 서울신문 대한매일신보 시절에는 강한 야당 성향을 보였지만, 조선총독부에 인수되어 매일신보가 된 이후로는 철저하게 집권여당 성향의 어용신문이다. 21세기 들어서도 서울신문은 정권 바뀌자마자 논조가 바뀐다. [38] 경남대학교 [39] 그러나 이때는 부산일보와 동아일보가 이미 11일 당시에 취재하고 전국에 특종을 터뜨린 상태였다. 이때 기자가 훗날 할 말은 하는 정치인으로 국회의장까지 오른 이만섭. [40] 서울에서만 10만여 명, 광주 5000여 명, 전주 3000여 명, 청주 300여 명 등 [41] 서울에서 4~5만여 명, 마산에서 3만여 명, 춘천 2천여 명, 영주 수백여 명, 김해 200여 명 [42] 서울에서 104명, 부산에서 13명, 광주에서 6명 등 [43] 오보였지만 학생 1명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신문에 실려 있었다고 한다. [44] 원래 문리대 학생회 등 대학생들이 계획했던 의거일은 4월 21일이었고 서울의 고등학교 학생들의 의거일이 4월 19일이었다. 그 이야기를 먼저 안 고대생들이 고등학생들에게 뒤쳐질 수 없다며 4월 18일 먼저 시위를 했고, 고려대생 피습 사건이 일어났으며 4월 19일 오전 8시 30분 서울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제일 먼저 가두시위를 시작하였고 부랴부랴 그 소식을 듣고 서울대 문리대생이 그 시위에 합류하였다. [이후]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 속에 이와 같은 구호들은 여러번 나왔다. 5.18 민주화운동 때에도 " 김일성은 오판 말라, 반공 정신 이상 없다" 같은 구호도 있었고. [46]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집단 데모를 할 것을 우려해 오후 1시에 하교하도록 했으나 이는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부추기는 꼴이었다. [47] 현재 서울특별시의회 본관 건물. [48] 광화문은 이때 복원되지 않고 있던 상태여서 세종로 앞은 뻥 뚫린 공터였다. [49] 경찰 사망자는 하늘색으로 구분하였다. [50]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의 만해광장 옆 언덕배기에 있는 동우탑은 노희두 열사를 기리기 위한 추념물이다. [51] 진영숙은 당시 희생자 중 유일하게 유서를 남긴 학생이다. 데모대의 버스를 타고 구호를 외치다 북선파출소에서 날아온 총탄에 그자리에서 사망. 당시 나이 불과 14세였다. [52] 당시 서울대학교는 단과대별로 캠퍼스 소재지가 달랐다. 상과대학의 경우는 현재의 종암동 서울사대부고 위치에, 사범대학은 신설동 건너서, 서울사대부고는 현 청량리 미주아파트 부지에 있었다. [53] 해방 후 정인보가 학장으로 취임한 종합대학이었다. 현저동에 있었다고 하며, 60년대 후반 우석대학교(현 우석대와 무관)에 흡수되었으나 이 우석대마저 통째로 1971년 고려대에 흡수합병됨에 따라 현재는 고려대학교의 전신 중 일부로 인정받고 있다. [54] 중앙대 예술대학. [55] 당시 문리대 캠퍼스는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맞은편인 마로니에공원 자리로 일설에는 관악캠퍼스로의 이전 이유가 서울시내로의 진입이 용이한 서울대생들을 산골짜기에 격리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서울대학교 정문의 로터리 구조나 전투경찰부대 입지를 보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 사실 현재 서울대의 관악캠퍼스는 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들어가는 것도 힘들다. 심지어 그 일대는 등산객들이 자주 온다는 카더라가 있다(...). [56] 본문에서는 7명으로 표시되고 있지만 확인되는 명단은 6명밖에 확인이 되지 않는다. 2009년 10월 서울대 캠퍼스 내에 조성된 '서울대 민주화의 길' 4.19 공원에 있는 명단에 보면 6명의 명단만이 확인되는데 자세한 것은 더 알아봐야 할 사항 같다. [57] 이 선언문을 기초한 이수정은 한국일보 기자로 재직하다가 후에 5공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서 5공 체제 홍보의 일익을 담당했다. [58] 지금도 좁지만 그 당시에도 좁던 그 길을 대형 수도관 2개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59] 당시 이런 두건은 최루탄을 막기도 했지만 후에는 시야 방해로 기관총에 학생들이 죽는 것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을 상대로 총을 쏜 경찰의 진압은 이러한 이유로도 용서가 될 수 없다. [60] 이 부분은 기록에 따라 전후 사정이 뒤바뀌어있다. 동국대학교 측과 3.15의거기념사업회측의 기록은 발포 전이 아니라 발포 후 탈출로를 찾는 과정에서 소방차 쪽으로 오히려 진출하여 이탈에 성공했다고 기록하고 있음. 이 외에도 여러 상황과 기록을 종합해볼 때 동국대생들이 바리케이트를 뚫은 것은 버려진 전차(電車)였고 소방차는 조준 사격을 피해 탈출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듯하다. [61] 단기로, 서기 1960년이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1961년까지 단기가 국가 공식 연호였다. [62] 여담이지만, 당시 박정희는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었다. 계엄군으로 위장한 일부 군인들이 경무대에 잠입해 이승만을 끌어내리고 쿠데타를 하겠다는 것. 그러나 이종찬 육군대학 총장이 있었기에 이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당시 박정희는 명망높은 군인이였던 이종찬 총장을 설득, 후에 일어날 구설들을 막기 위한 바람잡이로 기용할 생각이였으나, 이종찬 총장은 군이 시위진압, 쿠데타에 이용되는 걸 반대했기에 박정희의 쿠데타는 무위로 돌아갈 수 있었다. [63] 아이러니한 것은 1957년경 사망한 경찰 초대 총경 차일혁은 무정부주의자적 성향에 가까웠다는 것. [64] 김정남, '4.19 혁명', 2003, 84페이지. [65] 이는 미국이 이승만 정권의 독선배타적 외교 행태를 탐탁지 않게 보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특히 미국은 자본진영 우방국인 일본과 남한이 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원했으나 이승만은 항일운동가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승만 라인( 평화선)을 선포하는 등 대일외교 부분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행보 때문에 2ch 혐한들은 이승만을 매우 싫어한다. 정작 한국에서는 친일파를 자기 세력에 끌어들여서 친일파 득세의 원흉(게다가 보수우익 가운데 상당수도 친일을 용서했다는 이유로 이승만을 찬양하는 경우까지 있다)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여담이긴 하지만 이승만이 한 일 중 호평받는 것 중 하나가 독도 해역 들어오는 일본 배는 꼬박꼬박 나포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에(이른바 '이승만 라인( 평화선')) 이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66] 이에 대해 "이승만이 하야하면 대통령직을 받을 사람이 사임하면 어찌하겠느냐" 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승만과 이기붕의 하야를 촉구하는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 보면 배수진이기도 한 셈 [67] 전날인 23일에 이승만이 허정에게 찾아가 사태수습 방안을 물으며 입각을 권유할 때, 거의 애걸조였고 목소리가 떨렸으며 흥분되어 있었다. 출처는 《사실의 전부를 기록한다 - 허정 편》, 희망출판사, 1966, p.207. [68] 은행이 전산화 되기 이전에는 월급이 계좌이체 되는 것이 아니라 수령자가 직접 봉투에 담긴 두툼한 현금으로 받았다. [69] 그런데 이것도 사실 변질된 유교적 전통이다. 조선시대에서 식자층은 모두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했고 선비의 의무였다. 물론 벼슬하는 일을 거절하는 것이 청빈의 상징으로서 좋게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벼슬직을 해먹는 것과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가령 남명 조식은 벼슬은 전혀 하지 않았으나 상소는 여럿 올렸다. [70] 지금도 대학 교수는 대단한 직업이긴 하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직업이였다. 광복 후 가난하고 초등교육조차 못받았던 시대에 대학을 나와서 그 분야를 전공한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당시 대한민국의 최고 지식인인 셈. 다른 일화로는 사사오입 개헌 당시 이승만이 자문을 구했던 사람도 수학교수였다. [71] 이 당시의 교수들이 엄청난 직업이었던 이유는 4.19 혁명 당시에는 한국의 대학교육체제가 국내대학에서 교수를 양성할만한 환경이 안 됐던 것이 크다. 6.25 전쟁 때문에 기반이 박살났으니.. 그래서 1960년 당시의 대학 교수들은 거의 대부분이 구 일본 제국(일본 본토나 만주국, 대만)에서 박사학위를 따거나, 아니면 중화민국(공산화 이전), 유럽, 미국 등에서 연구하면서 박사학위를 딴 사람들이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없고 조선총독부 시절에 박사학위가 된 사람들이었다는 말이다. 당연히 무게감이 차원이 달랐다. 당장에 50년대 대통령 선거때 후보들도 보면 이승만 한명만 빼면(이승만은 이승만 박사) 다 'OOO 선생' 이라고 불렸다. 그 대통령 후보들조차 이승만만 빼면 다 학위없던 인물들이었으니... [72] 현재 그 자리에는 4.19 혁명기념도서관이 설립되었다. [73] 현재 그 자리에는 김구 동상이 서있다.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보수개신교계와 보수세력, 뉴라이트들이 광화문 광장에 이승만 동상 건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조선일보가 적극적으로 기사화하고 있다. 물론 실속은 영... [74] 1960년 당시 국민학교 3~6학년이면 1948~1951년 생으로 2018년 현재 60대 후반-70대다. 참고로 이 연령대에 계신 분들은 1970년대 유신철폐 운동은 물론 6월 항쟁 당시 넥타이 부대로 나선 분들이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하이라이트를 몸으로 겪으신 분들. [75] 현재 종로구청 자리에 있었다. 도심 한가운데여서 당시 총격의 한가운데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학교는 1977년에 폐교되었으나 2001년 강북구 번1동으로 자리를 옮겨 재개교했다. [76] 물론 일설에 의해 알려진 바와는 달리 국민학생들의 자발적인 시위는 아니었고 교사들이 먼저 협의하고 교사의 인솔하에 거리로 나온 것. [77] 비슷한 일화로 6월 민주항쟁 당시 진압 경찰들에게 꽃(장미)을 주며 전경들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이 꽃 받으세요 가 있다. [78] 이승만에게 가장 충격을 주었다. 이는 군대가 이승만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79] 김정렬은 정확히 20년 후인 1980년, 친구인 최규하에게도 하야를 진언해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80] 어떤 만화에서는 끝까지 버티려 하다가 도움을 줄 거라 예상했던 주미대사관의 직접적 압박에 의해 현실을 직시하고 비서에게 자신이 말하는 대로 적으라고 했으며 비서가 무슨 내용을 말하실 거냐고 묻자 사임서를 쓰겠다고 말하는 내용으로 나타나 있다. [81] 출처- 김정렬, '김정열회고록', 을유문화사, 1993년, p268~269. [82] 재미있는 것은 당시 서울시내 치안 유지를 계엄군 외에도 각급 학교에 맡겼다는 사실이다. 4월 27일, 허정 내각수반과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시민들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 이같은 조치를 요청했고 예컨대 시경과 종로경찰서는 동국대학교가 담당했다. [83] 하지만 일가족 자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타살일 가능성도 있다는 음모론이 있다지만 확실한 것은 불명. 야인시대에서는 일단 영상으로는 이승만에 양자로 들어갔던 큰아들 이강석이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다는 걸로 묘사했으며 나레이션을 통해서 타살이라는 설도 있음을 밝혔다. [84] 5.16 이듬해인 1962년 3월 귀국하려 하였으나 정부(특히 박정희 당시 의장)에서 거부하여 실패하였다. [85]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1961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했던 이승만은 한국을 떠날 때 영구 망명을 생각하진 않았다. 그는 한 달 정도 잠시 피하는 걸로만 생각했다. 하와이에서 이승만은 향수병에 걸린 나머지,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1962년 3월 17일자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1962년 3월 16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정권은 그의 귀국을 막았다. 1962년 3월 17일 박정희는 "AP보도에 의하면 이승만 박사가 귀국에 앞서 사과문을 발표하였다 하는데 사과문을 발표하였건 아니하였건 정부의 허가가 없는 한 귀국하여서는 안 된다고 총영사에 지시하라. 사과문을 발표하더라도 거기에 대하여 국민의 감정이 풀릴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1962년 3월 18일자 신문들도 사설을 통해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다. 한국일보는 "혁명재판이 진행 중이며 혁명정부에서 제정 공포한 정치활동정화법에 의해서 구 정치인들의 다수가 정치 활동을 금지당하게 될 심사업무가 개시되려는" 때라고 하는 시점을 문제 삼았으며, 경향신문은 "전비(前非)를 완전히 뉘우치지 못한" 걸 반대 이유로 제시했다.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권/ 47쪽 [86] 아이젠하워는 1960년 6월 방한하였다. [87] 마침 국제정치계에서 일던 제3세계의 비동맹주의 중립화론이 국내 지식인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유입되기도 했고, 이 영향으로 민족통일연맹(학생)과 민족자주통일협의회(혁신계 정치인) 등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모임이 결성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88] 박정희는 4.19 1주년이 되면 1주년 기념 시위로 사회가 혼란스러울 것이라 생각하고 쿠데타를 준비하였지만 그날이 생각보다 조용해서 수틀려버려 무산되었다는 말이 있다. [89]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도망친 다음날 수녀원에서 나올때 이미 늦은 거 같아 막으라고 지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윤보선 대통령은 당시 본인이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의원내각제인 당시에는 대통령의 권한이 약하여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쿠데타가 자신에게 도움이 될거라 생각해 쿠데타 진입지휘를 거부했다. / 출처:대한민국의 대통령들-강준식 [90] 헌법 전문에 나와있는 '4.19 정신 계승' 문구는 시민의 저항권에 대한 근거 내용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91] 이들은 2015년 현재 70대 중후반이다. [92] 이러한 주장들은 주로 조선일보 뉴라이트, 뉴데일리가 주도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 같은 경우는 오래 전부터 이승만 재평가에 앞장섰는데 이미 90년대에 솔빛조선 미디어라는 사업부로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이라는 CD를 내서 팔기도 했다. 더불어 이승만이 독실한 개신교인이었다고 한기총까지 동상 건립을 시도하고 있으나 개신교계에서도 찬반이 워낙에 엄청나서 갈등이 크다고 한다. [93] 다만 조선일보는 1965년 7월 24일자 사설 <지금이 자유당 천하인가>를 통해 "집권 시에 무슨 악독한 짓을 해도 해가 가고 세월이 흐르면 잊어진다는 나쁜 전통으로 국가와 사회기강을 흐리게 하여 만일의 경우 그에 기대고 싶은 저의라도 없는 한, 국무회의는 문학소년 같은 감상을 단호히 버려야 한다."라고 이승만 추모 분위기를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30년 후, 조선일보는 이승만 찬양 움직임을 주도하게 되었다(...)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권/ 47~48쪽 [94] 자식이 없던 이승만은 양아들이던 이강석(이기붕의 큰 아들)이 자살했기에 하와이에서 당시 30대인 이인수를 양아들로 받아들였다. [95] 그리고 이러한 '이벤트성' 의혹은 곧바로 사실로 밝혀졌다. 4.19 혁명을 맞아 유족에 대한 사과성명을 발표하면서도 한편에서는 서울행정법원에 ' 4.3 사건 희생자 결정 무효확인' 항소장을 원고 대리인을 통해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 [96] 해당 역에서 덕성여자대학교가 4.19 묘지보다 가깝지만 4.19 혁명 그 자체의 가치가 일개 대학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위치이며 4.19라는 것이 강북구에서도 밀어주는 주요 랜드마크이다보니 그렇게 정해진 듯 하다. [97] 꽃동네를 설립한 그 오웅진 신부 맞다. 김주열 열사와 오웅진 신부는 펜팔 친구였다고 한다. [98] 금남 56번이 광주에서 4.19 혁명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광주고등학교 앞을 지나기 때문. [99] 초대 민선 용산구청장, 16대 국회의원(용산). [100] 마산시 진해시를 병합했고, 애초에 통합 전 창원시는 구 창원군이 승격한 것이 아니라 마산시 창원출장소의 동쪽 구역이 통째로 분리된 것이기 때문에 구 마산시와 계통상으로 유래가 같으며 통합 후에는 마산시의 역사도 당연승계한다. [101] 3.15 회관은 희생자들의 숫자를 상징하는 12개의 꺾어진 너울모양 현관이 있었으며, 그 시절 마산시민의 문화공간(주로 공연이나 극장 상영)으로 활용되었으며 1970년대 이후에는 마산MBC의 공개홀 용도로도 활용되었다. 이후 건물이 너무 노후화되어 2000년대 초 철거되었다. MBC경남 항목 참조. [102] 자세한 내용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