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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년 |
로마 제국 로마 | |
사망 | 211년 |
로마 제국 리파리 섬 | |
아버지 |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 |
어머니 | 호르텐시아 |
남편 | 카라칼라 |
자녀 | 성명 미상의 딸 1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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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카라칼라의 황후.2. 생애
로마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근위대장인 아버지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와 어머니 호르텐시아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녀는 202년 4월 세베루스 황제의 맏아들 카라칼라와 결혼했고, 로마 소녀들은 보통 15살에 결혼했기 때문에, 아마도 187년경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자 형제로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우스 호르텐시아누스가 있었다.플라우티아누스는 북아프리카의 렙티스 마그나 출신으로, 동향친구인 황제 세베루스의 지지와 도움으로 막대한 권력과 부를 얻었다. 그는 황실 근위대장 자격으로 모든 전쟁에 황제와 동행했다. 그래서 그와 세베루스가 한때 연인 관계였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그러나 당대 기록은 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디오 카시우스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는 귀족 출신의 로마 시민 100명을 거세했다. 단지 소년이나 청년만이 아니라, 아내가 있는 남자도 포함되었다. 그의 목적은 카라칼라와 결혼한 딸 플라우티아의 수행원으로서, 특히 음악과 다른 예술 분야에서의 선생님으로 삼되, 내시만을 두려는 것이었다.
플라우티아누스가 정말로 이런 짓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에 그의 평이 매우 좋지 않았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헤로디아누스는 “플라우티아누스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 모든 일에 온갖 잔인한 행동과 폭력을 써서 역사상 가장 두려운 프라이펙투스(최고 행정관이 임명하는 관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사위인 카라칼라는 이러한 장인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아내가 아버지를 닮아 몹시 거만하고 이기적이며 방탕하다고 생각해 매우 싫어했다. 그는 아내와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려고 했으며,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둘 다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도 자식을 낳긴 했던 것으로 보인다. 204년경 플라우티아가 딸을 출산한 것을 기념해 주조된 동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딸의 성명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기록이 없는 것을 볼 때 태어난지 얼마 안 돼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카라칼라와 플라우티아누스 부녀의 갈등이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에서, 플라우티아누스는 율리아 돔나까지 적으로 돌렸다. 그녀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권력을 박탈하기 위해, 그녀의 하인과 친구들을 체포해 고문을 가하여 그녀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게 만들려 한 것이다. 이에 율리아 돔나는 분노하였고, 카라칼라와 함께 플라우티아누스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았다. 결국 205년 1월 22일, 일은 터졌다. 한 기록에 따르면, 카라칼라가 세 명의 백인대장을 설득하여 플라우티아누스를 음해하는 거짓 정보를 부친에게 알리게 했다고 한다.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플라우티아누스는 정말로 카라칼라를 제거하고 세베루스를 폐위시킨 뒤 자기가 황제가 되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황제와 황태자를 살해하기 위해 고용한 사람이 곧바로 세베루스에게 가서 알렸다고 한다.
결국 플라우티아누스는 아들과 함께 황제의 부름을 받고 황궁에 입궐했다가 교살되었고, 율리아 돔나는 플라우티아누스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원로원은 플라우티아누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했다. 카라칼라는 여세를 몰아 플라우틸라까지 죽이려 했지만, 세베루스와 율리아 돔나는 그녀를 리파리 섬으로 유배보내는 선에서 종결시켰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그녀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고, 211년 동생 게타를 자기 손으로 죽인 뒤 암살자를 리파리 섬으로 보내 그녀의 목을 베어 자기에게 가져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