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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Gaius Pius Esuvius Tetricus)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직위 | 카이사르 |
반란 대상 | 아우렐리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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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군인 황제 시대의 반란자. 아버지 테트리쿠스 1세에 의해 부황제( 카이사르)로 세워졌다가 로마 재통합 전쟁에서 아버지와 함께 아우렐리아누스에게 항복한 뒤 여생을 평온하게 보냈다.2. 행적
갈리아 제국 황제 테트리쿠스 1세의 아들로, 이름이 아버지와 동일하다. 273년 늦봄이나 초여름에 아버지에 의해 카이사르로 세워졌다. 신뢰도가 떨어지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테트리쿠스 1세가 그의 아들을 동등한 황제로 세웠다고 기술했지만,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와 에우트로피우스 등 다른 역사가들은 이를 언급하지 않았고, 테트리쿠스 2세의 초상화와 이름이 새겨진 동전에서도 카이사르로 옹립되었다는 사실만 나와 있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다.274년,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는 갈리아 제국을 정복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다. 274년 1월 1일 공동 집정관으로서 아들과 함께 취임한 테트리쿠스 1세는 이에 맞서고자 군대를 일으켰다. 274년 2월 또는 3월, 양군은 샬롱에서 마주쳤다. 하지만 테트리쿠스 1세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한 아우렐리아누스의 위명을 두려워했고, 병사들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기에 승리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자신의 신변을 보장해준다면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기꺼이 받아들였고, 전투 당일 테트리쿠스는 아들과 함께 아우렐리아누스에게 귀순했다. 갈리아 제국 장병들은 두 사람의 배신에 비난을 퍼부으며 전투를 감행했으나, 끝내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섬멸되었다.
이후 아우렐리아누스는 로마에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테트리쿠스 부자는 개선식에 '전리품'으로서 참석해야 했지만, 제노비아와는 달리 쇠사슬에 묶이지 않은 채 갈리아인의 바지인 브라가를 착용했다. 그 후 아버지와 함께 사면된 그는 원로원 의원을 역임했고, 아버지는 훗날 루카니아 총독을 역임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