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us Valerius Eutychianus Comazon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에우티키아누스 코마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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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직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야전 사령관, 근위대장,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
자녀 | 푸블리아 발레리아 코마시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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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의 엘라가발루스 시대의 권신.원로원 의원, 집정관, 야전 사령관,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으로, 엘라가발루스 정권의 탄생부터 몰락까지 함께 한 율리아 마이사의 친구이자 동맹자이다. 코마존은 4년의 악행을 책임지지 않고자 동료 근위대장으로 자신이 엘라가발루스 제거 작전을 기획할 당시에 내세운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장군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뒤, 본인은 은퇴 후 편히 여생을 마무리한 악인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주장은 율리아 마이사와 세베루스 왕조 입장에서 그들의 실정을 코마존에게 오롯이 뒤집어 씌우려고 한 이유 등도 있어, 그가 완전한 악인이었는지 여부는 미궁이다.
고대기록들에 따르면, 자신의 권력과 성공을 위해, 함량미달의 엘라가발루스 치세를 4년여 간 보필하면서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로 4년 연속 수도 장관 자리와 근위대장 자리를 겸직하면서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다고 한다. 그러다가 엘라가발루스의 난잡하고 악몽 같은 치세가 흔들리자, 황제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 동료 근위대장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와 함께 엘라가발루스,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제거 작전을 기획해 이를 222년 3월 성공시켰다. 엘라가발루스를 죽인 뒤, 원로원과 로마시민들에게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은 직후 정계 은퇴 후 평온하게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2. 생애
전체 이름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에우티키아누스 코마존이다. 얼핏 전체 이름 중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만 놓고보면 로마 건국과 시작을 함께 한 파트리키 명문가 발레리우스 가문 출신 같은 로마인이다. 그렇지만 그리스식 이름에서 따온 "에우티키아누스"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그리스 혈통의 신참자이다.코마존은 로마군 병졸로 입대해, 군생활을 시작했고, 장교의 길을 걸으며 승진의 길을 얻게 된 시기는 트라키아에서 근무 중일 당시에 만난 콤모두스 덕분이었다. 이 당시, 콤모두스는 공동황제로 있으면서, 맏누나 루킬라 공주가 시기심 아래에서 벌인 암살 미수 사건 전의 아주 정상적이고 평균 이상의 시절이었다. 그래서 코마존의 발탁, 승진은 그가 영리하고 용감한 부분을 높게 산 공동황제 콤모두스와 그의 매형 폼페이아누스 장군 등의 추천 덕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콤모두스 아래에서 경력을 시작하면서, 마르코만니 전쟁의 주무대였던 다누비우스(오늘날 다뉴브 강) 주둔 군단들에서 장교로 있었다. 그러다가 그곳에 있는 동안, 상관으로 부임한 원로원 의원 출신 장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탈루스 파테르쿨리아누스와 갈등이 생겨, 파테르쿨리아누스 장군에게 징계를 받고 강등 조치를 당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강등 조치는 일시적이었고, 그의 군생활과 승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허나 이런 일 때문에 코마존은 218년 권력을 쥔 직후, 자신과 갈등관계였던 파테르쿨리아누스를 비롯해, 무나티우스 술라 등 정적들을 마크리누스 지지자로 모함해 살해했다고 한다. 다만, 파테르쿨리아누스가 처형된 이유는 마크리누스를 지지한 핵심인사였고, 이를 명령한 사람이 율리아 마이사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였기 때문에, 코마존이 과거 자신과 갈등을 빚은 파테르쿨리아누스를 모함해 살해했다는 고대기록은 반쯤 걸러 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콤모두스 아래에서 코마존은 계속 승진했고, 콤모두스 치세 후기에 원로원 의석을 얻게 되면서, 노부스 호모로 분류됐다. 콤모두스 시대 말, 원로원 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생각 이상으로 꽤 콤모두스 혹은 폼페이아누스 쪽 인사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던 것을 추론할 수 있다.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되고, 193년부터 다섯 황제의 해가 터졌다. 이때 그의 행보는 분명치 않다. 다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갈등을 빚지 않았고, 여전히 안토니누스 역병에 따른 인재 수급이 어려워진 제국 현실상, 원로원 의원이 되고 난 뒤, 군사 지휘권을 가질 수 있는 법무관을 지낼 정도로 경력을 쌓아, 이를 바탕으로 군경력을 이어 나간 것은 확실하다.
세베루스 왕조 시절 동안 특별히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는다. 이 점은 코마존의 군사적 역량이 세베루스, 카라칼라 시대 동안 확실히 뛰어나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그의 이름이 다시 기록에 등장한 것은 서기 218년이었다. 때는 카라칼라가 파르티아와의 전쟁 중 동부 순행을 하다가 217년 암살되고, 마크리누스가 황제로 등극한 지 1년 뒤인데, 이때 코마존은 제국 동부의 제2 군단을 지휘 중이었다. 이때 제3군단 갈리카가 엘라가발루스를 앞세운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간니스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여러 연구를 통한 정황상 코마존은 니시비스 전투 과정과 마크리누스의 굴욕적인 평화교섭에 반기를 들지 않더라도, 불만이 아주 컸던 인사였다. 따라서 그는 곧 새로운 대체자를 물색 중이었는데, 이때 율리아 돔나의 자매 율리아 마이사 측과 접촉했고, 곧 3군단이 주도해 엘라가발루스를 옹립해 벌어진 안티오키아 전투 속에서 그 역시 합세했다. 이때 코마존은 2군단을 이끌고 이들과 합세한 뒤, 세베루스 왕조의 재건 1등 공신으로 맹활약했다.
코마존이 이때 어느 정도로 활약을 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가 이끈 2군단이 양측 지휘관의 평균 이하 능력으로 인해 난전으로 이어지다가 기세에 밀린 마크리누스 진영이 무너져 내리면서 패한 일련의 전투에서 지휘권을 행사하면서 움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코마존이 마크리누스 진영의 프라이토리아니 장교, 병사들을 동요하게 하고, 제국 동부 총독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원로원의 마리우스 막시무스 같은 인사들과 접촉해, 마크리누스가 치명타를 입고 무너지는 것을 주도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어쨌든, 이때 코마존은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는 물론, 구제불능의 엘라가발루스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던 위상을 갖게 됐고, 그들의 부하가 아닌 협력자 내지 그들의 보호자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위상처럼 그는 엘라가발루스와 두 시리아 여제가 안티오키아에 입성할 무렵부터 실질적인 엘라가발루스 군대 총사령관으로 있었고, 공로 역시 무시할 수 없어, 그 치세의 시작부터 실권을 쥐게 됐다. 이때 그는 친구이자 동맹자 율리아 마이사의 요청에 따라 로마로 먼저 건너가서, 엘라가발루스 이름으로 충성 보너스를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지급하고 근위대장에 올랐다. 그 사이,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 술라가 엘라가발루스에게 누명을 쓰고 자살 강요를 명령받아 살해당하는 등의 문제가 터지는데, 코마존은 이를 조기에 해결했다고 한다.
엘라가발루스의 4년여 재위 기간 내내, 권력을 쥐고 로마 제국 안에서 실력자로 핵심 요직을 겸직하면서 연임했다. 218년부터 근위대장 두 자리 중 수석 자리를 항상 차지했고, 220년 집정관, 220년~222년까지 3년 연속 수도 장관을 지냈다. 이때 그는 수도 경비대, 소방대 장관직까지 사실상 편법으로 겸직했고, 원로원 감시와 정치공작을 직접 명령했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가 계속해서 로마의 전통을 무시하고, 온갖 실정 속에서 난잡함을 보이자, 율리아 마이사에 앞서 먼저 엘라가발루스 제거를 기획했다고 한다. 그 시작은 베스타 여사제 아퀼리아 세베라가 엘라가발루스에게 납치된 뒤 순결을 잃고 강제 결혼을 한 사건부터였다. 이때 엘라가발루스에게 항의한 아퀼리아 세베라의 아버지 퀸투스 아퀼리우스 사비누스를 엘라가발루스는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코마존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엘라가발루스의 에메사, 중동 사투리가 심한 그리스어를 알아듣지 못한 척하고 아퀼리우스 사비누스를 정중히 이탈리아 밖으로 도피시킨 다음 추방했다고 거짓보고를 올렸다. 이어 그는 율리아 마이사 등을 압박해 이를 경고하고,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따라서 율리아 마이사는 이 사건 이후 코마존의 행동을 보고, 외손자 엘라가발루스 갱생을 사실상 포기하고 그의 뜻에 따라 손자 제거를 다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마존은 이후 율리아 마이사와 함께, 율리아 마마이아의 둘째 아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옹립할 기획을 세웠다. 그러면서 그는 안티오키아 출신의 장군으로 서방, 동방, 남부 로마군 모두에게 덕장, 용장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던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장군의 집정관 추천과 그의 동료 근위대장 취임도 은밀히 손을 썼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는 매우 인기 없는 황제였고, 할머니에게 속아 양자로 입양하고 카이사르 직위를 내린 알렉산데르를 죽이려고 했다. 이때 엘라가발루스는 코마존을 부하 취급하면서, 알렉산데르를 죽이라고 독촉했다. 따라서 코마존은 안티오키아누스와 함께, 엘라가발루스와 그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를 더 이상 못 봐주겠다고 뜻을 굳혔다. 그는 안티오키아누스와 함께,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이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았고, 이 사건은 222년 3월 11일 프라이토리아니와 엘라가발루스,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그리고 알렉산데르의 3자 대면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그는 이를 주선하면서 판을 짜고, 엘라가발루스 정권 붕괴를 유도했다. 따라서 엘라가발루스,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는 살해됐는데, 이때 코마존은 사건이 터지자마자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끌면서 이 사건을 주도하면서도 원로원에게 "임기가 끝났기 때문에 은퇴하겠다."고 뜻을 밝힌 다음, 시골로 떠났다.
정계 은퇴 후에도 프라이토리아니 전체에서 그를 대단히 신망 있는 인사로 평했는지, 비슷할 때, 지위를 내려 놓고 은퇴를 선언한 동료 안티오키아누스와 달리, 율리아 마이사와 울피아누스가 털끝 하나 건들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그는 은퇴를 하면서 자신의 모든 권력을 활용해, 엘라가발루스 실정에 어떤 책임도 없던 안티오키아누스가 울피아누스에게 살해되는 것을 방치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하지만 코마존이 방치했다거나, 안티오키아누스가 누명을 쓰고 살해되는 것을 유도했다는 주장은, 코마존을 악당으로 몰아, 율리아 마이사가 자신의 정치적 실책을 안티오키아누스에게 덮어 씌우려고 한 점에서 많은 의심을 받는다.
코마존의 은퇴와 안티오키아누스의 억울한 죽음이 결합된 이 사건은 228년 울피아누스가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증오 끝에 암살된 사건의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으며, 세베루스 왕조가 235년 무너질 때까지 군대의 신뢰를 완전히 얻지 못한 결정타가 됐다.
은퇴한 222년 이후 언제 사망했는지는 모르나,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여생을 마친 뒤 자연사했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