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ius Fabius Cilo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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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히스파니아 바이티카(오늘날의 스페인 남부) |
사망 | 221년 12월 또는 222년 |
전체 이름 |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 셉티미누스 카티니우스 아킬리아누스 레피두스 풀키니아누스 |
직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야전 사령관 |
가족 | 킬로니아 파비아(아내) |
경력 |
집정관(2회)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황제자문회의 수석 위원 클라우디아 제11군단 트리부누스 밀리툼 크레타 에트 키레나이카 속주 재무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총독 특사 플라비아 피르마 제16군단 군단장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총독 갈라티아 속주 총독 스티키타 제4군단 군단장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 총독 판노니아 수페리오르 속주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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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사제, 야전 사령관, 총독. 두 번의 집정관 경력이 있는 인물이다.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주요 지지자로, 마리우스 막시무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 등 이상의 권력을 누렸으며, '황제의 동반자'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일찍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파피니아누스와 친구였으며, 카라칼라 황제의 개인 가정교사 겸 멘토였다. 하지만 카라칼라가 친동생 게타를 존속살해한 직후에 벌인 대학살 속에서, 선황 세베루스의 유지를 받들면서 카라칼라, 게타 형제의 화해에 힘쓴 율리아 돔나를 막지 않았다는 이유 아래, 카라칼라 앞으로 끌려가 살해됐다.
2. 생애
2.1. 고향과 가문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 셉티미누스 카티니우스 아킬리아누스 레피두스 풀키니아누스라는 전체 이름을 가진 로마 귀족이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스페인 남부 일대에 해당한 히스파니아 바이티카 속주이다.세습 원로원 의원으로 대대로 원로원 의석을 가지고 있었고, 부유한 귀족이나, 로마 건국부터 함께 한 유서 깊은 최고 명문 파트리키 일족인 파비우스 가문 출신은 아니다. 여러 연구와 킬로의 비문 2개 등을 살펴보면, 그의 일가는 파비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로 히스파니아에 정착한 로마시민의 후예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실제 연구들에 따르면, 파비우스 가문은 스페인 일대에 약 300개의 지파 성씨가 존재했고, 갈리아에는 50개의 지파가 있을 만큼 그 숫자가 많았다. 이중 킬로를 가문 성씨로 쓴 이들은 스페인과 갈리아에 수없이 많았다. 일각에서는 그가 히스파니아 출신보다는 갈리아 태생일 수도 있다고 보기도 한다. 따라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 시절에 살았던 원로원 의원으로, 마지막 파비우스 가문의 귀족으로 불린 파울루스 파비우스 페르시쿠스와는 어떤 혈연관계가 없다.
2.2. 세습 원로원 의원
킬로는 세베루스 왕조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아래에서 대단한 권세를 누린 만큼, 비문도 2개가 남아 있고, 경력이 상세하게 적혀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신참자가 아닌 세습 원로원 의원으로, 전형적인 2세기 로마 귀족 자제다운 경력을 걸었다. 이는 비문 2개에 버젓이 적혀 있다.킬로의 첫 경력은 성년식 이후 로마의 10인 위원회(Decemviri)에서 민사재판 담당을 맡은 위원을 통해 첫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곧바로 다누비우스 강(오늘날의 다뉴브 강)에 있는 모이시아 인페리오르의 두로스토룸에 주둔해 있는 클라우디아 제11군단에 말단 장교로 입대 후 곧바로 트리부누스 밀리툼이 됐고, 8년 군경력 후 곧바로 로마로 돌아온 뒤에 재무관이 되면서 크레타 에트 키레나이카 속주에서 근무했다. 이후, 원로원 의석을 받아 정규 원로원 의원으로서 명부 등록을 마친 직후, 호민관에 임명되었고,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총독의 특사가 되어 갈리아로 떠났다. 그 다음 로마로 돌아온 뒤, 법무관이 되었다고 한다. 법무관 임기가 끝나자마자, 시리아에 주둔해 있는 플라비아 피르마 제16군단을 이끄는 군단장이 되었는데, 180년부터 184년까지 시리아에서 로마군을 이끌었다.
그러다가 185년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총독이 됐고, 그 다음으로는 첫 행정 업무를 맡았다. 이후 189년 갈라티아 속주 총독이 되었고, 콤모두스 황제의 신임 아래 보결 집정관이 됐다.
2.3.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도와 세베루스 왕조를 세우다
킬로의 이름이 고대 작가들의 기록에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콤모두스 황제가 암살될 때부터였다. 그는 이때 판노니아 총독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당파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도맡아 처리했다.많은 부분이 위서로 평가받는 《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킬로는 이때 교살된 콤모두스 황제의 시신을 관료 푸블리우스 리비우스 라렌시스에게서 인도받아, 이를 확인했다고 한다. 다만, 이 주장은 이 고대기록 특성상 어느 정도 믿어야 되는가에 관하여는 의문이라고 평가받는다. 왜냐하면 소달리스 하드리아날리스 특별 사제였다고 하더라도, 암살 정국 속에서 콤모두스 황제의 시신을 황궁에서 몰래 반출해 페르티낙스에게 보인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 에클렉투스 등이 콤모두스의 신임을 받으며 승승장구한 킬로에게 자살행위를 하겠다고 이렇게 할 확률이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더욱이 킬로는 이때 판노니아에서 총독으로 있던 오랜 친구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의기투합하여 로마진군을 돕기 전까지는 조용히 있음이 확인된 터라, 그가 콤모두스 시신을 검증하고 이를 안치하는 역할을 맡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고 평가받는다.
페르티낙스가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 주도 아래 피살되고, 경매 형태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제위를 돈을 들여 사는 모양새로 즉위한 때부터 세베루스와 모종의 협력을 하며 돕다가, 로마 진군에 참여했다. 그는 이때 이탈리아에 있던 율리아 돔나와 카라칼라, 게타를 피신시켜 보호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는 친분이 일찍부터 대단한 까닭에, 로마에 들어온 직후 세베루스가 로마에 세울 동상 중 하나를 킬로의 것으로 세우게 하고, 그를 황제의 동반자인 임페라토리스라고 칭호까지 내렸다.
이후, 킬로는 세베루스의 부탁과 명령 아래,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상대로 주력군 역할을 할 트라키아 속주로 떠났고, 벡실라티오를 이끌고 페린투스 근처에서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와 싸웠다. 킬로는 군사적 역량이 대단했지만, 열세에서 싸운 터라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포위됐다. 하지만 곧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칸디두스가 휘하의 다누비우스 전선에 있는 세베루스 주력군을 끌고 구출해 위기를 넘겼고, 곧 칸디두스와 함께 니게르 군대의 주력을 마르마라 해를 건너기까지 모두 박살내면서, 승기를 잡았다. 이 승리에 이어 킬로는 비티니아, 폰투스 임시 총독이 되어 아나톨리아 일대 치안을 장악하고, 군을 징집하면서 물자를 차출해 세베루스 군의 후방과 병참 문제를 해결했다. 따라서 킬로의 공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의 멱살을 잡고 그의 남하를 제어한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버금갔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니게르의 주력을 궤멸시킨 직후, 세베루스의 요청으로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 총독에 195년 임명됐다고 하며, 다음으로는 판노니아 수페리오르 속주 총독을 197년부터 201/202년까지 맡으며 세베루스 군의 주력을 모두 진두지휘했다. 그리고 이때 킬로의 공로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상대로 모두 승리하고 내전의 승리자이자 새로운 세습왕조의 창건자가 됐다.
2.4. 황제의 친구
킬로에 대한 세베루스의 신뢰는 대단했다. 세베루스 황제의 형 셉티미우스 게타 역시 그를 외사촌형제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보다 신뢰했으며, 세베루스의 아내 율리아 돔나와 장남 카라칼라 역시 킬로를 존중하고 진심으로 받들었다.세베루스 황제는 킬로가 판노니아에서 돌아온 직후, 곧바로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자리를 내렸다. 그러다가 카라칼라와 플라우티아누스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고, 플라우티아누스가 카라칼라 손에 피살된 직후, 이를 수습하는 역할을 맡는데, 이때 카라칼라는 장인의 부하 중 회계 업무와 행정 실무에 능한 변호사이자 관료인 마크리누스를 구하기 위해 킬로에게 감찰관 권한을 줬다. 즉, 세베루스 황제와 카라칼라 모두에게 킬로의 역할과 위상은 대단했다.
이런 것처럼 그는 204년 카라칼라의 추천을 통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허락으로 다시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에 올랐으며, 이때 생애 두 번째 집정관을 정규 집정관 중 수석 자리에 올라 차지했다.
2.5. 카라칼라와의 관계
카라칼라는 10대 초반부터 성정이 나빠지고, 사춘기 무렵부터는 분노조절 장애가 있었다는 후대의 평가처럼 잔혹하고 고집불통의 공동황제가 됐다. 따라서 그는 다루기 무척 어려웠는데, 이때 그의 가정 교사 중 한명인 킬로는 그를 쉽게 다루고 제어해 평정심을 되찾게 할 만큼, 상호 신뢰가 대단했다.이렇게 카라칼라와 킬로의 관계가 깊고 대단했던 이유는 세베루스의 잔혹하고 냉혹한 제왕교육 훈련 방식 때문이었다고 한다. 세베루스는 여러 협력자, 친구 중 킬로에게 자신의 후계자를 맡겼는데, 카라칼라에게 늘 정적에게 무자비하고, 변칙적으로 원로원을 혹독히 다루는 법을 강조하고, 이를 명했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혹독하게 제왕교육을 받았고, 폭력에 시달렸다. 그런데 킬로는 천성이 유순한 카라칼라를 친아들처럼 자상하고 따뜻하게 대했고, 그에게 여러 업무를 성실히 알려줬다. 그 결과, 카라칼라는 장인을 교살하라고 명령하는 등의 모습에도, 일찍부터 킬로를 따랐다.
이런 배경으로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 관계가 아니었다. 이런 관계처럼 카라칼라와 게타 사이의 권력 투쟁이 격화될 때, 카라칼라는 킬로를 진심으로 신뢰해 따랐다. 이 모습은 마리우스 막시무스, 파피니아누스 등을 포섭하려고 하면서도, 은근히 견제한 카라칼라의 태도와는 꽤 다른 모습이었다.
2.6. 죽음
211년 세베루스가 영국 요크에서 사망한 뒤, 킬로는 황제의 유지를 받은 원로원 의원이 되어 근위대장 파피니아누스를 도우며, 세베루스 왕조의 영속에 심혈을 기울였다.킬로는 자신이 가정교사이자 멘토로 유대관계가 깊었던 카라칼라에게 성실히 협력하고 그를 도왔다. 그러나 그는 기본적으로 율리아 돔나의 뜻도 중요하게 여겼고, 세베루스 왕조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공동통치자 게타를 카라칼라가 죽이더라도 파피니아누스를 죽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1] 그래서 그는 카라칼라에게 이 점 아래에서 형제 사이의 화합과 함께 이 점을 권장했는데, 카라칼라는 이를 빌미 삼아 킬로를 죽인다.
이때의 일에 관해 디오 카시우스는 카라칼라가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에게 동생 게타를 죽인 직후, 미친 사람처럼 황궁을 날뛰며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괴성을 지르다가, 킬로를 체포하라고 했다. 카라칼라가 보낸 병사들은 한 밤 중 킬로의 저택으로 들어갔을 때, 킬로는 하루를 정리하며 목욕 중이었다. 그가 살고 있던 집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아벤티노 언덕에 만들어 선물로 준 저택으로, 오늘날 산타 발비나 성당 자리에 있었다. 카라칼라의 병사들은 킬로 저택 안에 있는 값나가는 재물을 모조리 약탈하면서, 킬로 집안 식구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목욕 후 자고 있던 킬로에게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부은 다음, 그를 짐승 끌고 가듯이 포박해 황궁으로 데리고 갔다. 따라서 킬로는 원로원 의원을 상징한 예복이 찢긴 채, 속옷 차림과 맨발로 질질 끌려 왔다. 온몸은 멍투성이였고, 그는 충격에 빠져 겁에 질린 상태였다.
그러자 카라칼라가 겁에 질린 킬로 앞에서 자신이 보낸 병사들에게 이렇게 먼저 호통을 쳤다고 한다.
"내 아버지를 모욕하지 마라! 내 가정교사를 공격하지 마라!"
이후 카라칼라는 눈물을 쏟으면서 킬로를 감쌌는데, 그 다음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는 곧 혼잣말을 하다가 격분하더니, 눈이 뒤집힌 상태에서 백인대장과 병사들에게 다시 구타를 지시했다. 그러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재차 킬로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보호해줬다. 이후 그는 미친 사람처럼 고성을 지르다가, 이렇게 명하며, 킬로를 죽이라고 지시했다.
"그에게 대항할 음모를 꾸민 자들이 나에게도 대항할 음모를 꾸몄도다!"
킬로는 이렇게 공포 속에서 살해됐는데, 이후 카라칼라는 킬로의 시신을 수습해 유족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하면서, 자신의 사촌형 셉티미우스 아페르, 오촌당숙 셉티미우스 아페르 등을 만나봐야 한다고 횡설수설했다.[2] 또 이 광경을 강제로 보게 된 어머니 율리아 돔나, 이모 율리아 마이사는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카라칼라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되레 어머니를 협박했다.
3. 사후 이야기
킬로가 살해된 직후, 카라칼라는 동생 시신을 안고 울먹이는 어머니 율리아 돔나에게 동생을 추모하면 킬로처럼 될 것을 말없이 눈빛과 행동으로 경고했다. 이어 이모 율리아 마이사와 황궁 관료들에게도 이 점을 경고하면서, 게타의 시신은 특별히 소각해버리라고 지시하고, 보결집정관 중 한명인 페르티낙스의 아들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와 그 일족 전체를 몰살하라고 명했다. 그러더니 그는 곧 프라이토리아니가 주둔한 병영으로 미친 사람처럼 말을 몰고 들어갔다. 이때 카라칼라는 거리 사람들을 신경쓰지 않고, 말을 전속력으로 몰면서, 정신없는 사람처럼 병영만 보고 달렸다.병영에 도착한 직후, 카라칼라는 병사들을 불러 모아 게타가 자신을 암살하려고 해서 죽였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충성서약을 한다면 모든 금은보화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아버지처럼 따른 킬로를 죽였다는 죄책감과 동생 게타를 죽인 뒤부터 시작된 죄책감 때문에 모든 신에게 용서와 죄책감을 구했다. 이때 카라칼라가 죄책감에 시달린 것은 자신이 킬로를 죽였다는 점이었는데, 그는 이때 자신이 킬로를 죽일 때 자신을 말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현장에 있던 병사들을 처벌했다.
다음날 아침, 카라칼라는 원로원에게 동생 게타를 죽였다고 발표하면서 기록말살형 의결을 명한다. 이어 동생 파벌의 수장인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를 개 목줄 채우듯 묶은 다음, 끌고 가서 참수하라고 명령하고, 그 머리를 효수하라고 명령함을 시작으로, 약 2만명의 로마인이 살해된 대학살을 시작한다. 이때 그 첫 희생자 중에는 킬로가 세베루스 왕조의 영속 등을 위해 반드시 보호해야 될 것을 건의한 파피니아누스도 있었다.
4. 여담
- 현재 이탈리아 로마의 아벤티노 언덕에 위치한 산타 발비나 성당이 원래 킬로 저택이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이 언덕 일대를 재개발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대저택을 친구 킬로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래서 규모가 엄청났는데, 킬로 사후 4세기 킬로의 저택은 성당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