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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서기 180년(추정) |
로마 제국
시리아 에메사 (오늘날의 시리아 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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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서기 222년 3월 11일 |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로마 | |
배우자 | 섹스투스 바리우스 마르켈루스 (193년-215년) |
자녀 | 이름 미상의 아들, 엘라가발루스 |
부모 |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비투스 알렉시아누스 율리아 마이사 |
가문 | 시리아 에메사 왕가 |
형제자매 | 율리아 마마이아 |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 |
왕조 |
세베루스 왕조 (Severan dynas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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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아우구스타. 율리아 마이사의 장녀, 율리아 마마이아의 언니, 엘라가발루스의 모후이다. 아들이 황위에 오른 뒤 황제의 어머니로서 군림해 어머니와 함께 정계에 깊게 관여하였으나,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아들이 프라이토리아니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될 때 함께 살해되었다. 공식적으로 기록말살형에 처해지지 않은 아들 엘라가발루스와 달리, 원로원에게 정식으로 기록말살형에 처해졌으며 '공공의 적'으로 의결돼 사후 로마 전체에서 금기시됐다.2. 생애
2.1. 초년기
서기 180년경 시리아의 주요 도시 에메사에서 부친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비투스 알렉시아누스와 모친 율리아 마이사의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은 로마 시민권자로 에메사가 고향인 시리아인이며, 계급은 기사계급 출신이었으며, 시리아의 오랜 귀족 출신이다. 그는 오스티아에서 곡물창고를 관리, 경비한 감찰관료를 하다가 동서지간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황제를 선포할 때, 그의 로마 진군에 합세했다. 이후 그는 세베루스에게 가문 최초로 원로원 의석을 받고 곧바로 파트리키로 신분이 크게 격상됐다.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의 모친은 태양신 엘라가발을 섬기는 대사제 율리우스 바시아누스의 딸이었다.기록말살형을 당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세베루스 왕조가 사라진 뒤에도 별다른 처벌이나 보복을 당하지 않아, 초년기 시절 어떻게 살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소아이미아스는 자매 율리아 마마이아와 함께 로마에서 자랐고, 193년경, 그녀는 시리아 지방 중 오론테스 강변 오른쪽에 위치한 유서 깊은 그리스계 도시 아파메아 출신의, 시리아 귀족 섹스투스 바리우스 마르켈루스와 결혼했다. 그녀의 남편 마르켈루스는 아내의 이모 율리아 돔나, 이모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정적들을 제거하고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로 군림한 뒤, 자신들의 지지자를 무더기로 원로원에 입성시킬 때, 원로원 의석을 받고 귀족 신분을 받았다. 부부는 두 아이를 낳았는데, 하나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섹스투스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로, 훗날 엘라가발루스 황제가 되는 인물이다.
서기 208년 세베루스 황제가 칼레도니아 인들에 대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을 때, 소아이미아스는 영국을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녀의 남편이 영국에서 징세관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세베루스가 죽고 카라칼라가 즉위한 뒤, 마르켈루스는 제국의 재정 관리인을 맡다가 프라이토리아니에 배속되어 이를 관리하면서 로마시정 업무를 맡았다. 이후 누미디아 총독을 맡다가 217년 카라칼라가 암살되기 2년 전인 215년 사망했다. 그가 사망한 기록은 로마 근교의 라치오현 벨레트리에서 라틴어, 그리스어가 함께 적힌 비문으로 확인됐는데, 이를 통해 소아이미아스는 두 아들과 함께 벨레트리에서 살았고, 그녀가 남편 유골함이 묻힌 이 도시에 이를 기린 것이 공식 확인됐다.
2.2. 황제의 어머니
카라칼라 황제가 마르티알리스의 손에 암살당한 뒤, 근위대장 마크리누스가 황제가 됐다. 일설에 따르면 마크리누스의 꾀임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마르티알리스가 카라칼라에게 원한이 깊어 벌어진 별개의 사건 속에서 카라칼라가 암살되었고, 어부지리로 마크리누스가 제위를 차지했다는 것이 현재 일반적인 평이다. 217년 4월 18일 카라칼라는 길가에서 노상방뇨 중 허무하게 암살됐고, 세베루스 왕조는 단절되었다. 율리아 돔나는 반격을 꿈꾸고 마크리누스에게 대적하려고 했지만, 이는 실패했고, 그녀는 절망 속에서 스스로 굶어 죽었다. 돔나의 이 행동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와 그녀의 어머니 마이사, 여동생 마마이아 부부 모두를 위기로 몰아 넣었다. 마크리누스는 이들의 재산을 압류하지 않았지만, 율리아 돔나가 벌인 일을 겪은 뒤, 돔나의 자매 마이사와 두 딸의 모든 재산을 압류했고, 이들을 시리아 에메사로 추방했다. 마마이아의 남편과 마마이아의 수양딸 부부는 에메사 근처에서 마크리누스 부하들에게 처형당했다.이런 가운데 니시비스 전투 후 마크리누스 황제의 인기는 동방 로마군을 시작으로 빠르게 식었다. 제2군단의 레가투스였던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은 굴욕적 협상으로 큰 실망감을 준 마크리누스 지지를 사실상 철회했고, 소아이마이스의 어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모든 재산을 잃고 재기를 꿈꾸고 있음에도 할 방법을 찾지 못한 점을 파고 들었다. 그는 마이사에게 접근했고, 율리아 마이사는 세베루스 왕조를 복구하여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기로 마음 먹고, 이를 위한 청사진을 기획했다. 이런 상황에서 율리아 소아이미아스가 사별 후 사실혼 관계를 맺고 있던 간니스가 소아이미아스와 마이사에게 꾀를 냈다. 그는 마이사와 두 딸이 카라칼라 시대 내내 황궁에서 함께 거주한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소아이미아스와 카라칼라와 불륜 관계를 맺었으며, 바시아누스가 사실 카라칼라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꾀를 냈다. 마이사와 소아이미아스는 이 꾀를 듣자마자 적극적으로 찬성했고, 다음날 이들은 코마존을 비롯한 동방 주둔 로마군 레가투스들에게 병사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막대한 로비를 했다. 동시에 마이사와 소아이미아스는 에메사의 모든 재산을 팔아치워, 현금화한 재산을 카라칼라의 아들이 기부한다는 이름으로 기부했다.
이후, 소아이미아스는 어머니 마이사와 함께 바리우스 아비투스를 데리고 시리아 군단을 방문했다. 이들은 니시비스 전투 후 온갖 치욕을 안고 불만에 찬 로마군에게 바리우스 아비투스가 카라칼라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밝혔다. 소아이미아스는 포섭한 율리아 돔나의 옛 시종들과 함께 카라칼라와 소아이미아스가 오랜 불륜을 맺었고 관계를 통해 임신 후 바리우스 아비투스를 낳고 에메사에 숨겨 키웠다고 주장했다. 병사들은 황실을 오랫동안 모신 시종들까지 입을 모아 이렇게 떠들자, 흥분했다. 그리고 그 순간, 율리아 마이사가 외손자를 앞세워, 카라칼라의 친아들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친손자인 소년이 황위를 정당하게 계승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3군단 갈리카는 막대한 뇌물을 받고 그녀의 말을 믿기로 하고, 서기 218년 5월 16일 바시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바시아누스는 즉위 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로 개명했다.
이후 새 황제의 군대는 마크리누스와 격돌해 승리를 거뒀고, 마크리누스는 패배 후 로마로 가서 지원군을 규합하려고 북쪽으로 도주하다가 칼케돈에서 체포된 뒤 카파도키아의 아르켈라이스에서 백인대장에게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새 황제는 로마 제국의 유일무이한 군주가 되었고, 세베루스 왕조를 복구하겠다는 마이사의 계획은 성공했다.
218년 겨울 엘라가발루스와 수행원들이 니코메디아에 있었을 때, 황제의 종교적 신념이 처음으로 문제로 대두했다. 안티오크 전투에서 마크리누스의 군대를 격파하여 엘라가발루스의 등극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간니스 장군이 엘라가발루스에게 살해당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간니스는 엘라가발루스에게 "절제하고 신중하게" 살라고 조언했다가 황제의 분노를 사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 역시 소아이미아스가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기록이 미비해서 확실하지 않다.
소아이마이스는 아들과 함께 로마에 입성한 뒤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다. 또한 엘라가발루스를 통해 '세나쿨룸'이라는 특별기구를 원로원에 설치한 뒤, 어머니와 함께 원로원 회의에 출석하여 국정에 직접 참여했다. 그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태양신 헬리오가발루스를 로마 판테온의 주요 신으로 삼기로 작정했다. 14살 소년 엘라가발루스가 로마에 입성한 이래 태양신 숭배에 열을 올린 배경엔 그녀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엘라가발루스는 로마에 입성한 이래 수많은 기행을 저질러 민심을 잃었다. 급기야 저명한 귀족 가문 출신의 아내 율리아 코르넬리아 파울라와 이혼하고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인 아퀼리아 세베라와 결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베스타 여사제는 은퇴할 때까지 순결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었기에, 로마인들은 이 결혼을 최악의 스캔들로 간주했다. 소아이미아스는 엇나가는 아들을 방치했거나, 제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나, 정황상 그녀가 본인과 아들의 권위 수립을 위한 목적으로 옹호했다는 평이 일반적이다.
이 사건은 원로원 전체가 들고 일어나고, 세베루스 왕조 부활에 도움을 준 코마존이 결정적으로 등을 돌린 분수령이 됐다. 퀸투스 아퀼리우스 사비누스가 공개적으로 엘라가발루스를 비난한 일에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엘라가발루스가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사형을 지시했을 때, 코마존은 부하들에게 황제가 아랍어 섞인 그리스어를 구사하니까 못 알아듣는 척하고 아퀼리아 세베라의 아버지와 남자형제들을 모두 이탈리아로 안전하게 피신시키라고 명했다. 그는 이들을 이탈리아 밖으로 정중히 피신시키고 보호해줬다. 이에 소아이미아스 모자는 코마존에게 따졌는데, 코마존은 이를 시원하게 무시하면서 못 알아들었다는 투로 말하면서, 무언으로 율리아 마이사에게 세베루스 왕조의 존속과 멸망 중 하나를 택할 것을 내보였다.
결국 율리아 마이사는 자신과 세베루스 왕조 존속을 택했고, 장녀와 외손자를 내버려두면 왕조가 무너지고 자신과 가문의 운명 마저 위험해진다는 걸 자각했다. 그녀는 코마존의 뜻에 따라 행동했고, 221년 여름 엘라가발루스를 설득하여 자신의 또다른 외손자이자 엘라가발루스의 이종 사촌 동생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양자로 삼게 했다. 또한 아퀼리아 세베라와 이혼하게 설득하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피를 물려받은 안니아 파우스티나와 약혼하게 했다. 하지만 소아이미아스 역시 가만히 당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 엘라가발루스보다 먼저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다. 하지만 이 역시 그녀의 아들 엘라가발루스가 폼포니우스 바수스에게서 빼앗은 안니아 파우스티나와 결혼하는 과정에서 폼포니우스 바수스를 처형하는 등 악행을 저지르면서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마이사와 소아이미아스의 자매 마마이아는 막대한 자금을 알렉산데르 이름으로 시혜했고, 민심이 알렉산데르에게 급격하게 쏠렸다. 이에 엘라가발루스는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221년 12월, 엘라가발루스는 어머니 소아이미아스와 상의 후, 친정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고 있던 아퀼리아 세베라를 황궁으로 강제로 데리고 온 뒤 재혼을 선포했다. 소아이미아스 모자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알렉산데르를 죽이려고 했다. 엘라가발루스는 원로원에게 알렉산데르를 죽여달라고 했지만, 이 조치는 실패했고, 카이사르 칭호 박탈 요청도 거절당했다. 이에 그는 222년 초 부터는 아예 알렉산데르와 함께 대중 앞에 함께 서지 않았다. 소아이미아스 역시 같았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프라이토리아니 내부에 예지몽과 점괘라는 이름으로 알렉산데르가 죽어야 될 것을 퍼트렸다. 이어 이들은 당시 근위대와 로마 시가지를 완전히 장악 중인 코마존, 안티오키아누스에게 사람을 보내 알렉산데르를 죽여달라고 밝혔다. 두 사람과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는 이를 기회로 여겼고, 코마존과 안티오키아누스는 장교, 병사 대표들과 면담 후 소아이미아스 모자에게 3월 11일 프라이토리아니에서 이 문제를 상정하면 삼자대면 후 명을 집행하겠다고 전했다.
222년 3월 11일, 소아이미아스는 아들 엘라가발루스, 조카이자 법적 손자 알렉산데르를 데리고 두 근위대장과 함께 로마 근교의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에 도착했다. 엘라가발루스와 소아이미아스는 자신들을 소개하면서, 신들이 명한 것처럼 알렉산데르를 죽여주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프라이토리아니는 알렉산데르 지지를 천명했고, 두 근위대장의 명령 아래 프라이토리아니가 들고 일어났다.
소아이미아스와 엘라가발루스는 결국 죽었다. 첫 번째 버전에 따르면 엘라가발루스가 체포되자 소아이마이스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프라이토리아니의 주둔지에 제발로 찾아갔다가, 아들처럼 옷이 모두 벗겨지고 온갖 능욕을 당한 뒤, 피살됐다고 한다. 다른 버전에 따르면 이들은 가까스로 탈출해 황궁으로 도망친 뒤, 궤짝 또는 화장실에 숨었다가 붙잡힌 다음, 비텔리우스처럼 옷이 다 찢겨진 뒤 온갖 험한 꼴을 당하고 살해된 뒤 시신이 마차 뒤에 매달려 키르쿠스 막시무스 한 바퀴를 돈 다음 시신이 조각나 티베리스 강에 버려졌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소아이마이스와 아들 엘라가발루스의 시신은 온 로마 시내에 질질 끌려나다니다가 난도질당한 뒤, 머리는 사라지고 몸통은 티베리스 강 하수구에 버려졌다. 이후 히에로클레스 등 엘라가발루스 시대의 총신들 역시 각자의 집에서 체포돼 모두 처형되고 시신이 티베리스 강에 던져졌다.
원로원은 소식을 접한 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황제로 인정하고 전 황제인 엘라가발루스와 더불어 그녀 또한 아들이 국가를 망치는 데 옆에서 말리기는 커녕 적극 기여한 점을 감안하여 기록말살형을 선고받았다. 아울러 그녀는 아들과 함께 '공공의 적'으로 단죄돼, 로마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