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09:32:13

조선총독부 청사/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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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3. 폭파 해체설4. 일본의 반응5. 청사 해체 논란
5.1. 철거 반대 및 "선 건립, 후 철거" 안5.2. 건물 이전 사안5.3. 유홍준의 폐허론 제기5.4. 각종 어록
6. 해체 이후

1. 개요

![] 참수형의 참이 이 글자다.] 일제첨탑 - 철거 당일 KBS 뉴스 9 헤드라인 문구

8.15 광복 50주년을 맞아 문민정부 역사바로세우기 정책의 일환으로 1995년 8월 15일부터 1996년까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 사건.

2. 전개

조선총독부 청사의 해체가 논의된 것은 6.25 전쟁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의 상징을 서울의 심장부에 둔다는 것이 말이 되냐면서 철거를 지시하면서였다.

당시 이 계획을 검토한 사람은 육군 공병감 엄홍섭과 육군 참모총장 백선엽이었는데 공병대에서는 "이렇게 막대한 석재를 나를 장비를 도무지 못 구하겠다."고 난색을 표했고 백선엽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군에 불도저 4대를 빌려왔지만 쓸 수 있는 중장비는 이것이 전부였고, 그외에는 지게꾼들을 동원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해체할 능력은 아예 없었고, 폭파라도 시켜 억지로 없앤다고 해도 무거운 석재를 나를 능력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당시 모든 정부 재정과 수입 물자를 미국 원조에 의존할 때였다. 운전수는 교육시킨다고 해도 불도저와 트럭 같은 중장비부터 기름, 공구, 작업복, 노동자들이 먹을 식사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미국이나 다른 외국으로 부터 지원받아야 했다. 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것은 국민들의 노동력 뿐이었다.

어차피 전후 잿더미가 된 서울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거대한 건물이어서 예산을 써서 철거하고, 추가로 예산을 써서 정부 청사를 신축하는 것도 낭비이니 정부청사로 쓰는 편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따라 철거는 미뤄졌지만 그렇다고 사용하기에는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에 2공화국 시절까지 공식 정부 청사로 쓰지 않고 방치했다. 중앙청 건물을 개보수해서 쓰면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이유로 1962년에 재개관되었다. 그리고 중앙청으로 기능할 때는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에 대한 논의는 지지부진했다. 이후 1982년 과천에 정부과천청사를 신축하면서 정부 기능이 부분 이전하자 이때까지도 정부 청사로 쓰였던 조선총독부 청사도 철거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민주화 이후 경복궁 복원 계획이 확정되면서 다시금 중앙청 건물 철거 논의가 나왔다. 1991년에 노태우 대통령이 중앙청 철거를 지시했는데 이 때 일본 근대 건축사 연구단체 '메이지 건축 연구회'가 "양국 간에 불행한 역사긴 하지만, 동아시아 근대 건축물 역사상 가치가 높은 건물"이라면서 보존을 촉구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이 사실이 공분을 사 한국의 여론이 악화되는 바람에 철거 찬성 여론이 높아졌지만 이후 노태우 정부의 비서진이 바뀌면서 철거는 또 다시 유야무야됐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뒤 다시 해체 계획이 입안됐다. 이 해체 결정에도 후술될 많은 국내외적인 논쟁이 일어났으나 결국 해체가 결정됐다.

1995년 3월 1일 오전 10시에 정부는 구 총독부 앞 광장에서 '광복 50주년 3.1절 기념 문화 축제'를 열어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옛 총독부 건물을 헐어낸다고 선포했다. 이날 선포식에서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경과 보고를 통해 "오늘 삼일절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의 시발점으로 삼는다."고 천명했으며 이어 " 8월 15일까지 철거 실측 작업을 마친 뒤 광복절을 기해 총독부 건물 중앙돔의 첨탑을 끊어낸 뒤 내년 초까지 철거를 완료하겠다"고 밝혔고 경복궁 복원 계획도 같이 천명했다.

KBS 뉴스9 보도자료

드디어 8월 15일 광복절 오전 9시 옛 총독부 광장에서 열린 기념식장에서 중앙돔 첨탑 분리에 앞서 주돈식 문화체육부 장관은 해방 50년 만에 이뤄지는 일제 상징의 제거를 호국 영령들에게 고하는 고유문을 낭독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우리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말살하고 겨레의 생존까지 박탈했던 식민 정책의 본산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여 암울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 통일과 밝은 미래를 지향하는 정궁 복원 작업과 새 문화 거리 건설을 오늘부터 시작함을 엄숙히 고합니다.
9시 21분 커다란 기중기가 첨탑에 구멍을 뚫어 만든 고리에 1인치 굵기의 쇠밧줄 5개를 걸고 서서히 첨탑을 들어올렸는데 첨탑 중에서도 11.4톤짜리 첨탑 윗부분이 먼저 들어올려졌다. 첨탑의 일부분이 들어올려지는 순간 광복절 경축 행사에 모인 5만여 명의 시민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고 부채를 흔들었고 당시 식민지배를 겪었던 노인들은 만세를 부르며 일제 잔재의 청산을 환영했다. 이어 건물 주변에 설치된 수백 발의 폭죽과 불꽃이 하늘로 높이 솟아올랐다.

첨탑이 기중기에 매달려 지상으로 옮겨지는 동안 광화문 앞 경축 행사장에서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연주하는 <다시 찾은 빛>이 장엄히 울려퍼졌으며 이내 잘려진 첨탑은 15분 만인 9시 35분에 지상으로 완전히 내려졌다. 적진을 부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누가 저 탑이 잘려나가리라 생각했냐."며 "이젠 철거–보존을 둘러싸고 갈라진 국론을 새 민족 박물관 건립으로 모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겨레신문 기사)

첨탐 철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들은 지하 보관소로 옮겼다가 중앙청 바로 옆에 있는 구 국립중앙박물관 사회교육관 건물로 이전되었다.[2] 1996년 초부터 차근차근 압쇄 및 줄톱 공법으로 절단,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철거해 나가 그해 말인 11월 13일 마지막 벽면을 끝으로 철거가 완료되었다. 잘린 첨탑은 1995년 8월 말까지 구 총독부 앞마당에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가 이후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70년간 경복궁 앞을 가로막고 있던 건물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파일:attachment/capital_hall_destroyed.jpg

순수 건물 철거비로 당시 약 47억 원이 소요되었으며 중앙청 건물의 실측 및 영상 자료, 모형 제작을 합쳐 총 117억 원이 소요되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논쟁에 빠져 잊는 것이지만 관련 비용에서 가장 컸던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신축 비용이다. 1990년대 초에는 대략 1천억대로 예상되었다고 하며 지금의 건물은 2005년에 개관했는데 4,100억 원이 들어갔다. 한편 검토되었던 독립기념관 부지로 해체, 이전하는 방안에서도 500억 원에 가까운 많은 비용이 소요되리라 추산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건설 기술력의 발달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남산 외인아파트 여의도 라이프빌딩이 폭파를 통해 짧은 시간에 편하게 철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면 조선총독부는 다이아몬드 와이어쏘 머신 및 굴삭기에 장착된 크러셔를 사용함으로써 주변에 소음, 진동 등의 피해를 주지 않고 철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주택 등을 철거할 때도 브레이커를 사용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는 크러셔를 많이 쓴다.

3. 폭파 해체설

만델라 효과의 대표적 사례로, 1995년의 첨탑 절단 행사가 '폭파 행사였다'라고 와전되기도 했는데 분명히 절단해서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제거했을 뿐이지 폭파한 적은 없다. 물론 당시 감정적으로 화끈하게 다가오는 '폭파'를 바라는 사람도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폭파가 아닌 기계식 공법으로 철거한 이유는 이 건물이 도심 한복판인데다 경복궁( 사적 제117호)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저때 총독부 건물을 폭파했다면 경복궁도 광화문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총독부의 철거는 일제의 잔재라는 측면 이전에 그 대상이 무엇이든간에 경복궁을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 것이 더욱 근본적인 목적이었다. 즉 총독부의 철거가 핵심이 아니라, 경복궁의 복원이 핵심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총독부 주변에는 경복궁을 감싸는 여러 벽을 포함해, 근정전 등 핵심 시설물도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만약에 철거 방법을 폭파식으로 했다가는 그 폭발력으로 인해 발생한 파편들로 인해 근정전을 비롯한 각종 경복궁 시설물에 손상을 입힐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폭파라는 극단적이고 감정적인 방법은 철거 방법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철거 당시 지상파 3사에서 라이브로 아예 현장중계를 송출했다.

이 사례와 비슷한 예가 하나 있는데, 2006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부지 조성 공사 당시 남양건설 사옥을 폭파 해체하려고 했으나 바로 옆의 구 전남도청사가 등록 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어 결국 기계식 공법으로 철거했다. 만약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코 앞이 아닌 남산 외인아파트 같은 위치에 있었다면 폭파 해체했으리라는 말도 된다.

얼마 오래 되지 않은 일임에도 폭파로 해체했다는 거짓이 널리 퍼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당시 철거 영상을 보면 마지막 외벽 부분이 붕괴되는 것이 마치 폭파하는 것처럼 보여서 # 이런 이야기가 퍼진 듯하다. 첨탑 절단 행사 당시 첨탑 주변을 빙 둘러서 설치한 불꽃이 붉은색인 데다 연기까지 나온 것도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 아니면 모든 건물 철거를 무조건 폭파 철거로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수도 있다.

철거 1년 전 뉴스에서 총독부 철거 계획을 보도할 때 "첨탑을 자르고 건물은 가림막을 설치한 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할 듯"이라는 보도를 해서 이것이 폭파되었을 것이라고 와전되었다. 그때 건물을 어떻게 철거할지 학자들과 관계자들 간에 폭파와 해체 의견이 여러 번 설왕설래했다. 그 뉴스가 나간 후에도 여러 번 논의하다가 광복절에 즈음해 상부 돔만 폭파 해체하려는 논의도 있었으나 뒤에 있는 경복궁에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최종적으로는 조각조각 해체하기로 하고 돔 위에 있는 첨탑을 자르는 행사를 했다.

김영삼 대통령 임기 중이던 1994년에 남산의 외인 아파트와 여의도의 라이프빌딩도 철거됐는데 이 둘은 폭파로 해체하면서 그 장면이 TV로 중계됐다. 같은 문민정부 시기에 있었던 해체 행사였던 만큼 상술한 관련 기사에 더해 외인 아파트 및 라이프빌딩 폭파 해체가 총독부 건물 해체로 와전되었거나 기억이 혼재되어 총독부 폭파설이란 오해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철거되기 전까지 총독부에 대해 폭파로 철거를 할 것이다, 폭파 시도를 한 적이 있다[3] 등 여러가지 뜬소문이나 루머들이 많이 퍼졌는데 과거에 돌았던 폭파 관련설 중에는 독일의 동물원 대공포탑 철거 관련 이야기가 와전된 것도 있었다. 이를 1980~1990년대에 일부 중/고등학교 국사 교사들이 실제로 믿고 수업 때 인용했다고 한다. 게다가 저 뜬소문대로 폭파하면 전술했듯 근처 경복궁 전각들에 파편이 날아갈 수도 있고 진동이 생겨 경복궁을 파손시킬 수 있기 때문에 폭파 방법은 철거 계획에서 떨어져 나갔다. 폭파하잔 의견은 여러 번 나오긴 했지만 그동안 총독부 건물을 시도로라도 폭파한 적은 없다. 총독부 청사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된 건 1986년부터인데 윗 글은 1970~1980년대에 소장품을 옮겼다고 하여 박물관으로 사용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미 틀린 내용인 걸 알 수 있다.

비교적 최근에 '폭파설'이 광범위하게 퍼진 원인이라면 후술하겠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며 조선총독부 건물을 바로 다음날 폭탄으로 날려 버렸다는 내용이 담긴 짤방이 한때 온 인터넷에 퍼질 정도로 인기를 끈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온갖 문화재 때문에 애초에 폭탄을 사용할 수도 없지만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그 큰 건물의 폭파 계획을 세우고 시뮬레이션하고 설치하고 시행하고 하는 게 단 하루 만에 될 리가 없다. 해체 시작은 1995년 광복절이었고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라는 발언은 그 뒤인 11월 중국 방문 당시 일본의 망언에 대한 반응 #이었기 때문에 일의 순서도 맞지 않는다.

과거에 총독부 청사 철거 문제로 일본놈들의 버르장머리 고쳐놓겠다는 말 때문에 한일관계가 안 좋아졌고 일본의 자본 지원이 있었더라면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지 않고 넘어 갈 수 있었을 가능성이나 #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요청했는데도 자본을 지원 하지 않았다는 등 왜곡된 주장들이 존재하지만 실제론 당시 일본은 한국을 도울 수 없었고 일본도 금융위기가 위험해서 자본을 지원하지 못한 것이다. #

4. 일본의 반응

철거 결정이 확정된 후 일본 정부에서 "우리 일본에서 비용을 전액 지불할 테니 통째로 옮겨가겠다."고 주장했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분노하여 바로 다음 날 조선총독부를 날려버리고 " 일본 놈들의 버르장머리 고쳐놓겠다!"는 폭탄 발언을 던졌다던 루머가 있다.

사실 이 발언이 나온 이유는 당시 일본의 역사 관련 도발이 있었는데 '버르장머리' 발언 1주일 전이던 11월 8일에 전해진 에토 다카미(江藤隆美) 일본 총무성 장관의 발언이 결정적이었다. 에토 장관은 " 한일합방 당시 한국은 나라의 힘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단행된 것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한일합방을 통해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 한국에 학교도 지어주고, 철도도 만들어주고, 도로도 닦아주지 않았느냐. 창씨개명도 강제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를 놓치지 않은 김영삼 대통령이 장쩌민 중국 주석과 정상회담을 마친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했던 명언이 그 유명한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이다. 관련 기사 시기적으로 건물 해체는 8월 15일부터 시작했고 저 발언은 석 달 후인 11월 14일에 하였다.

이때 일본의 웬만한 지한파, 한국통들도 '버르장머리'란 단어를 해석하지 못했다는 후문이 있다. 이 발언 이후 철거과정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이 치솟았다 카더라. 다만 1995년 지방 선거에서 참패하고 한국통신 파업 강제진압을 비롯해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 지지율 유지에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한국갤럽 자료에 의하면 1995년 3분기의 업무 수행에 관한 긍정 지지율은 29%였다.[4]

이에 관한 일본 측의 이야기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하며 대한민국 고건축을 연구했던 학자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 亥治郎)의 책인 《韓의 건축 문화》 증보판 서문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쓰여 있다. 역자인 이광노 서울대학교 명예 교수가 쓴 서문인데 자신이 1984년 교환교수로 일본에 가서 후지시마 가이지로를 만났을 때 후지시마가 "지금 조선총독부 청사를 국립박물관으로 쓰고 있다고 들었다. 총독부 건물 속에 한국의 반만 년 역사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스모 선수가 승부에서 지면 상투를 자르듯, 이제라도 그 건물의 상투 부분(돔 부분)을 잘라버려라"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고건축을 연구한 일본인 학자다운 말이다. 다만, 일본인 고건축 학자가 상투 자르듯이 첨탑을 절단하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서 정말로 말을 따른 것인지는 알 수는 없고 당시 정치가들과 문화체육부 실무자들의 의견을 자세히 들어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문제는 한국을 식민지배한 총독부의 건물로 세워졌다는 것 외에도 있었는데 경복궁 흥례문 권역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지어 놓은 건물이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고의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있으나 경복궁을 가리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원래 광화문과 근정문, 근정전은 일직선에 있어서, 왕이 근정전에 앉으면 육조거리가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었는데 그 앞을 완전히 막아 버린 것이다. 게다가 조선총독부는 저 셋이 이루는 축에 맞지 않게 지어져서 2006년 12월 새로 복원하기 전의 광화문은 각도가 약간 비뚤어져 있었으며 기존 조선총독부 정문 자리에 지어졌다. 그러다 보니 국가 차원에서 중요한 일들이 있을 때마다 현수막이 걸리기도 했다. 사실 이는 진북과 자북의 차이로 인한 것이었지만 일제의 악의였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 한 가지 논란점이다.

개그맨 전유성은 "아깝다! 총독 집무실 자리에 화장실을 만들어서 전 국민이 시원하게 볼일을 볼 수 있도록 하면 좋았을 텐데!" 라고 신랄하게 이야기했다. 재활용 의견 중에는 전유성처럼 " 화장실로 만들어서 재활용하자든지, 쓰레기 저장고로 쓰면 되겠네?"처럼 일본을 비하하는 의견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총독부 청사를 일본으로 이전하여 복원하겠다고 제안했다는 소문은 근거가 없다. 조선총독부를 한국의 다른 곳으로 이전해 복원하자는 주장은 철거로부터 수 년 전부터 고고학계나 건축계에서 나오던 이야기였는데 철거 두 달 전인 6월에도 성금을 모으느냐 마느냐 하는 얘기가 나오던 참이었다. # 당시 정부가 계산해 본 바로는 국내 복원 비용이 1400억 원에 달했는데 일본 정부가 지불하기에는 너무나도 높은 비용이다. # 한국 국내가 아닌 바다 건너 일본까지 수송한다면 더더욱 비쌌을 것이다.

일본도 근대 건축 보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도쿄 대공습으로 도쿄가 초토화되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몇몇 건축물도 상당수가 고도 성장기에 고층 빌딩을 세우기 위해 철거되었는데 뒤늦게 근대 건축 보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런 관심을 조선총독부 건물에 그대로 투영했던 것이다. 실제로 도쿄의 마루노우치에 가 보면 근대 건축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파사드만 남겨놓고 상층부는 고층 빌딩을 올린 매우 어정쩡한 모습이 남아 있는 건물도 있다. 그 유명한 서울도서관으로 바뀐 옛 서울시청 청사도 이를 참고했다.[5][6]

5. 청사 해체 논란

일본이 회수 비용을 부담한다고 의사를 피력했기 때문에 일본에 팔아먹는 게 이득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없지는 않았지만 일단 일본이 회수한 뒤에 어떻게 치장해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할 지 걱정되는 것을 제외하고라도 1990년부터 이미 본격적으로 시작된 경복궁 복원이라는 숙원 사업을 진행할 것이 뻔한 상황이라 시간이 많이 걸리는 원형 보존식의 회수보다 철거하는 방식이 우위로 여겨졌다. 이는 국민 다수의 감정에 부합하는 조치였기 때문에 단행될 수 있었다.

정부 내부에서 '건물을 해체한 후 독립기념관 부지로 이전해 복원하자.'는 의견이 있었고 이 사안이 정부 관계자들의 지지를 적지 않게 받기도 했지만 이 안도 전술한 대로 국민정서에 불합치한다고 여겨졌던 데다 이전복원 비용이 철거 비용을 초월했다. 철거 비용은 117억 원, 이전하여 복원 공사하는 비용은 500억 원대… 그러자 정부가 내린 결론은 "그 정도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복원할 가치가 없다."였다.

5.1. 철거 반대 및 "선 건립, 후 철거" 안

당시 철거에 반대하는 여론과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이 다 지어진 후에 철거해야 한다는 '선 건립, 후 철거' 안이 있었다. 그 중 반대 측의 견해는 크게 다음으로 정리할 수 있다.

김영삼의 후임으로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철거 당시 국가적 논의 없이 철거를 강행하고 이에 대해 정부 내에 아무런 반대 의견이 나오지 않음을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철거 그 자체에 대해서는 명확한 의견을 내지 않았다.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가칭) 준비위원장은 "철거가 옳은지 그른지의 문제를 떠나 문화재들을 보관할 박물관을 먼저 건설했어야 하고 철거를 위해서는 국가적인 논의가 있어야 한다"면서 "대통령의 말한마디에 정부내에서 전혀 반대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1995.08.15. 총독부 철거 쟁점화(경향신문)

다만 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의 주장에 따르면 김대중은 자신과의 인터뷰에서 '역사파괴' 라는 이유로 철거에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사화되기 전에 김대중 측에서 해당 내용을 제외해달라고 요청하어 기사화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김대중 씨가 교정지에서 뺀 부분중 하나는 그때 김영삼 대통령이 조선총독부 건물이라면서 철거를 추진하던 국립중앙박물관(옛중앙청)에 관한 언급이었다. 김대중 씨는 철거가 '역사파괴'라고 보고 있었으나 현직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한 것이 활자화되는 데 부담을 느끼는 듯했다.
출처 - 조갑제닷컴

김종필 전 총리는 최소한 중앙홀과 국기게양대의 독립기념관 이전을 대통령에게 요구했는데 이에 대해 YS는 "씰데없는 소리 마십시오”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각종 어록 문단 참조.

철거 입안 후 1993년 10월 5일에 한국고고학회, 영남고고학회, 호남고고학회 3개 단체는 성명을 발표해 "정부 당국이 광복 50주년인 95년 8월까지 총독부 건물을 철거한다는 무모한 행정편의주의적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다"면서 "유물을 임시로 옮기는 과정에서 틀림없이 손상이 생길 것이므로 가능하면 두번보다는 한번 옮기는게 좋다"며 졸속으로 해서는 안 된다면서 "구 총독부 철거는 새 국립중앙박물관 건물 다 지은 뒤에 해야 한다."는 '선 건립, 후 철거' 주장을 내세웠지만 광복회 등이 주축이 된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촉진 위원회' 측에 의해 '민족 반역자 집단'이라고 공격받았다. 이리하여 양측은 연일 성명서를 발표해 대립각을 내세웠다. 11월 10일 '국립중앙박물관 신축 및 유물 전시장 변경에 관한 공청회 및 설명회'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1995년 8월에는 일부 서울특별시 시의원들이 서울시의회에 청사의 역사적 가치와 경제적 이유로 <구 조선총독부 건물철거보류 동의안>을 제출하기도 했으며 1996년 6월에는 ' 국립중앙박물관 건물 보존을 위한 시민의 모임'이 서울지방법원에 '건물 훼손 및 철거 금지 가처분'을 신청했지만 모두 기각됐다. 강원용 목사도 경향신문에 철거 반대 주장을 기고했고 # 일부 신문은 사설을 통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기도 했으며 조선일보는 4컷 만화로 역사적 자료가 사라진다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20세기 초 아시아의 주요 건축물이란 가치를 들어 한국 건축계는 거의 일치단결에 가까운 모습으로 적극적으로 철거에 반대했으며 적어도 이전이라도 해서 복원하길 바랐다. 건축가 승효상은 해체 결정에 대해 배타적 국수주의, 문화적 편협성, 반문화적 폭거, 천민 문화라고 극렬하게 비난했다. # 승효상은 이때 천민 문화주의 운운하며 비난한 탓에 '외세가 강제로 지은 건물을 지키는 넌 잘났으니 양반 문화주의라고 하는 거냐?'는 비난을 받았으며 이런 비난 속에 당시 그에게 건축 관련 주문을 한 사람들까지 대거 그에게 보이콧하고 주문을 취소하는 등 건축 의뢰까지 대폭 줄어 경제적 피해를 봤지만 그는 이후에도 아쉬워하고 그때 그 주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건축계는 당연히 건축 철거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한국의 고도 성장으로 인한 근대 건축 유산의 무분별한 파괴에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에 이런 태도를 취한 측면이 크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중앙청은 일본인 관광객들에겐 필수 코스였는데 일본인들이 한국에 놀러오면 이 곳에 들러 자신들의 ' 자랑스러운' 역사를 확인하고 갔다. 김영삼 대통령은 과거 일본 가고시마의 한 정치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방문했을 때 그의 집에 조선총독부 사진이 자랑스레 걸려 있었고 거기에 굉장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한다.[11] 야당 총재 시절에도 중앙청에 갔을 때 일본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중앙청을 배경으로 자랑스레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 중앙청을 최소한 그 위치에서는 없애야 한다고 마음 먹은 모양이다. 인터뷰

5.2. 건물 이전 사안

철거를 반대하던 인사들과 건축가, 고고학 전문가들 중에선 "새 박물관 건립 후 철거하자"는 주장과 "철거하지 말고 해체 후 이전[12]하여 재조립(재현)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이 중에는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지지를 받은 의견으로는 앞서 거론했던 "건물 전체를 해체한 후 독립기념관 부지 안으로 이전해서 독립기념관 본건물인 겨레의 집 기준으로 서쪽 뜰에 다시 지어 재현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왜 하필 서쪽이냐면 해가 지는 방향이라 저문 일제의 세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13] 현재 조선총독부 부재 공원도 그런 의미로 독립기념관 서쪽 밀레니엄 공원 쪽에 위치한다.

이 의견은 독립기념관 뜰 안에 건물채 옮겨 세우고 이를 항일활동 전시관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식민 지배의 상징적 건물을 이전한 사례로는 홍콩에서 영국령 홍콩 시절 총독부에 해당하는 관청이었던 머레이 하우스(Murray House)[14]를 중심가 센트럴에서 외곽 지역의 스탠리로 벽돌 하나하나의 순서까지 그대로 옮겨 버린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나온 나온 사안이었다. 후술할 김종필 전 총리도 이와 맥을 같이 하는 의견을 냈다.

물론 이렇게 되면 민족 기념관 부지 안에 식민 시대를 되돌아보는 건물을 재현하는 의미는 있었겠으나 어딘가에 식민 지배의 상징이자 흔적을 그대로 남겨놓는 것에 대한 문제 등이 논란이 되어 사장되었다. 돈이 철거 비용을 훨씬 상회할 500억대 정도로 들어간다고 보이긴 했지만 사실 그 정도를 국가적 사업에 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단지 그만한 돈을 쓸 만한 가치가 있느냐가 문제였기에 비용이 이전의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이전 비용은 다음의 기사에서 확인 가능하다. 기사 당시에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의 신축 비용만 1천억 원으로 추산되었기 때문에 500억 원은 감당하지 못할 돈은 아니었다.

이 의견은 나가떨어졌으나 부분적으로는 반영되어 현재는 건물의 일부 석재가 독립기념관 부지 안에 옮겨져 있다. 하여간 전면 철거보다는 잠시 해체하여 독립기념관 부지 안으로 이전 후 재현해서 일제강점기 역사관 등으로 활용하자는 주장 등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짧은 시간 동안 제대로 된 합의나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양측의 논쟁을 제대로 끝맺지도, 타협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1995년 8월 15일에 정부는 철거식을 강행하였다.

5.3. 유홍준의 폐허론 제기

철거 논란 와중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유홍준 영남대학교 교수는 1995년 2월 25일자 한겨레신문에 구 총독부 터를 잡초가 무성한 폐허(!)로 남기자는 칼럼을 남겼다. 그는 해당 칼럼에서 철거론자들의 주장에 대한 자기모순[15], 8.15 광복이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기에 제때 처리하지 못한 데서 생긴 오랜 소모적 논쟁 등을 비판하는 한편 굳이 경복궁 복원해서 봉건 왕조로 회귀하길 원치 않다고 생각하여 구 총독부 터를 폐허로 남기자고 주장했다. 이에 재야사학자 성낙주는 1997년 《인물과 사상》 2권에서 반론을 제기했다.

5.4. 각종 어록

김종필 前 국무총리는 중앙일보에 연재된 회고록에서 이를 회상하며 김영삼의 역사 인식에 대하여 비판의 뜻을 내비쳤다.
YS는 ‘역사의 후퇴’를 말했지만 역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뒤로 가지 않고 앞으로 전개되는 법이다. 어제는 어제의 논리로 최선을 다했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오늘이 이뤄진 것이다. 어제는 오늘의 어머니, 어제가 있기에 오늘이 있는 것이다. 역사의 평가는 역사가에게 맡겨둬야 한다. 정치인이 역사를 단죄(斷罪)하려 들면 역사를 오도(誤導)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대통령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93년 8월 9일 김 대통령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구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다”고 발표했다. 일제시대의 어두움은 청산해야겠지만 그곳은 광복 이후 현대사의 산실이었던 만큼 정치 이벤트가 아닌 역사의 긴 안목으로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철거 계획이 발표된 뒤 나는 YS와의 청와대 주례회동에서 작심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의 중앙홀은 1948년 출범한 제헌국회 의사당으로 쓰인 역사적 장소입니다. 그 중앙홀만은 부수지 말고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시지요. 제헌 국회가 탄생한 장소는 대한민국 독립의 명맥을 잇는 역사물이지 않습니까. 내 말에 YS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다 없애 버리자고 이미 결정했는데 왜 토를 다느냐’라는 생각인 듯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앞 국기 게양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됐을 때 가장 처음 태극기를 올린 게양대입니다. 또 6·25 사변으로 부산까지 피란을 갔던 우리 군이 3달 만에 서울을 수복하고 태극기를 올린 바로 그곳이기도 합니다. 이 국기 게양대도 함께 독립기념관으로 옮겨 남겨 놓으시죠. YS는 내 말에 “씰데없는 소리 마십시오”라며 거절했다.

'폐허론'을 제기한 유홍준 교수도 구 총독부 철거 사안에 침묵을 지켰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유 교수가 침묵을 지킨 게 당시 철거론자였던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과의 학연을 무시하지 못했더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16] 이에 유 교수는 월간 말 1997년 9월호에서 아래와 같이 항변했다.
이전 반대 운동에 왜 동참하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고고학계는 그걸 했지만 미술사학계는 동참 안 했어요. 난 미술사학계고, 또 박물관 건물의 이전은 새로 지어서 옮기는 게 낫죠. 그런데 당시 그것은 정직한 주장이 아니었어요. 그 주장은 총독부 건물을 허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진짜 헐 것 같으니까 궁여지책으로 내건 주장이었고요. (중략) 총독부 건물은 헐어야 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헐고 있는데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요. 그건 박물관 건물을 헌 게 아니예요. 총독부 건물을 헌 거지.
- 월간 말 1997년 9월호 p22~29. <권두인터뷰: 유홍준(유홍준-안철홍 기자 대담)>
이에 소설가이자 재야사학자 성낙주[17]는 유 교수의 항변에 대해 "도대체 문화유산을 지키는 데 소속이 뭔 상관인가. 고고학계와 미술사학계를 편가름하는 것부터 가소롭거니와, 뭔 미술사학계가 자신의 과오를 지켜주는 방패라도 된다는 말인가"는 요지로 다음 달에 같은 잡지에서 아래와 같이 반박했다. 또, 같은 시기 <인물과 사상> 2권에서도 비슷한 의견을 냈다.
게다가, '정직한 주장'이 아니라니, 박물관 관계자며 대학 교수 등 5천여 명의 지식인들이 오직 구총독부 건물을 보존하기 위한 위장 논리로 문화재 보호를 들고 나왔단 말인가. 또한 총독부 건물을 헌 것이라면, 그 안에 있는 십수만 점의 유물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논리인가. 지금 유홍준의 시계는 몇 시인가. 구시대의 유물인 권위주의 시계를 차고 이 혼돈에 찬 세기말의 시계를 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설사 미술사학계가 몽땅 침묵했다 치더라도, 언필칭(言必稱) 문화유산을 목숨처럼 사랑한다는 유홍준은 혼자라도 나섰어야 옳았다. 정작 싸워야 할 때 모르쇠로 있었으면 반성하고 자숙하는 것이 도리이거늘,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에 급급해 그분들을 매도할 수 없는 일 아닌가.
- 월간 말 1997년 10월호 p244~247. <'문화권력' 유홍준의 권위주의(성낙주 글)>

6. 해체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2005년에 현재의 용산구 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임시로 쓰던 구 중앙청 후생관, 사회교육관 건물은 원안대로 국립고궁박물관이 되었다. 왕궁 박물관 건립에 291억 원, 신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에 3,300억 원 정도가 들어갔다. 다만 10년 간 나누어 집행하기 때문에 1년에 300억 정도 들어간 셈이다.

현재 철거지에는 경복궁 복원 계획에 따라 경복궁 흥례문을 복원해 놓았고 본격적인 철거 전에 행해진 첨탑 절단 행사 당시 잘린 첨탑과 일부 잔해는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독립기념관 부지 내에 조선총독부 청사 이전을 위한 부지를 마련해 놓았는데[18] 그게 지금의 총독부 철거부재 전시 공원이다. 이 장식물들의 전시 목적은 치욕의 역사를 보존해 다시 이런 과오를 반복하지 않게 조심하자는 것이지만 총독부 부재들이 어떠한 보호 설비나 장치도 없이 사실상 방치돼 있으니 비바람과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부식되고 있으며 심지어 낙서도 있다. 해당 장식물은 5m 반매장해서 모든 사람들이 내려다 볼 수 있게 만들었고[19] 부지도 해가 지는 방향인 서쪽에 배치해 일제의 몰락과 식민 지배의 종말을 상징적으로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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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총독부 첨탑은 방치되어 있다. 독립기념관 내부의 조경이 깔끔하기로 이름난 것을 감안하면 이 총독부 철거부재 전시 공원만큼은 정말 의도적으로 갖다 버려둔 것이란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방치할 거면 차라리 아예 없애 버리지 저렇게 방치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있다. 영국령 홍콩 시절 총독부에 해당하는 관청이었던 머레이 하우스를 벽돌 하나하나 순서로 그대로 옮긴 사례처럼 독립기념관이라는 이름에 맞게 항일활동 전시관으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역사적 치욕인 삼전도의 굴욕의 상징물인 삼전도비가 현재까지도 비교적 말끔하게 보존되고 관리된다는 점을 논거로 들어 제대로 관리를 안 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중앙홀 대리석, 국기게양대 등 보존 가치가 있는 일부 자재는 신 국립중앙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20]으로 옮겨졌다.

총독부에 해태를 닮은 사자상이 두 개 있었는데, 이 사자상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학생회관(A동) 앞 공터에 있다. 예전 사진에서는 두 마리가 보이지만 2024년 기준 한 마리만 남아있다. 아마 박물관 등에 기증했거나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2023년 합천영상테마파크에 조선총독부 청사 촬영용 세트장을 건설했다. 내부는 조선총독부 이머시브 영상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

[] [2] 총독부 철거 1년 전부터 '조선왕궁 역사박물관'으로 기획됐으며 2005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구로 신축 이전하자 원안대로 국립고궁박물관이 되었다. [3] 이 내용 자체는 상술했듯 폭파 방식 논의과정에서 논의된 바 있으니 사실이긴 하다. [4] 참고 그래프:
파일:external/www.gallup.co.kr/GallupKorea_daily_opinion_51-3.jpg
[5] 일본의 이런 문화의 정점은 아이치현에 있는 메이지무라다. 근대 건축물을 그대로 옮겨 전시하는데 몇개의 전시물은 일부 조각만 전시하기도 한다. [6] 사실 이런 방식의 '보존'은 랜드마크법이 있는 뉴욕에서도 유효한 방식이다. 대표적인 예시가 보존 대상 건물은 파사드만 남기고 그 위에다 유리빌딩을 꽂은 Hearst Tower. [7] 특히 제헌헌법 공포, 정부수립식, 서울 수복 태극기 게양 등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에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했다. [8] 경성제국대학 9개의 전문학교들을 통합해서 서울대를 설립했다. [9]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부러 경복궁 앞부분을 밀어버리고 지은 데다 경복궁을 가로막고 있었고 경복궁 뒷편 북악산과의 미적 조화도 깨져 답답하고 위압적인 형상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만으로 철거가 결정된 건 아니었다. [10] 경복궁은 법궁은 법궁이었으되 이미 임진왜란 전부터 외교적 행사 등에만 주로 쓰였고 사실상 주요 정무는 창덕궁 등에서 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수백 년간 불탄 폐허 상태로 방치되었고 흥선대원군 때 중건되어 실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임진왜란 전의 경복궁 본래 원형과는 차이가 많다.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은 기와도 청자 기와를 사용했고 # 세부적인 부분도 조선 초의 경복궁과 간극이 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복원될 경복궁에 비해 총독부가 더 가치가 높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11] 자신이 한국 정치인을 초대해 놓고도 그 사진을 치우지 않았다는 건 일부러 보라고 했던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12] 이는 건물을 조각조각 블록처럼 해체해서 다른 넓은 부지로 옮긴 후 본래 크기로 재조립해서 재현하자는 것을 말한다. 흔히 만화나 영화처럼 건물 겉껍데기를 헬기 등으로 옮기는 등 건물 째로 이동시켜 세우는 연출을 생각할 수 있으나 그런 건 가능은 하겠지만 위험성도 있고 해체 후 조립보다 비용도 천문학적으로 많이 든다. [13] 피라미드 나일강의 서쪽에 있는 것과 같은 이유다. [14] 영국 홍콩을 식민지화하면서 총독부 개념으로 세운 건물인데 이전된 지금은 집무실을 포함한 내부를 고급 레스토랑으로 만들어 놨다고 한다. [15] 대략 이들은 민족적인 것에 관심이 없거나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조선총독부 철거 문제 같은 게 나오면 목소리가 높아진다는 식이다. [16] 사실 유홍준 교수는 자신과 학연 등이 있는 학계 인사들의 과실에 유독 관대한 경우가 많아서 비판의 대상이 되곤 했다. 국민교육헌장 제정을 주도했던 전 서울대학교 철학 교수 박종홍, 무령왕릉 날림 발굴로 욕을 얻어먹었던 역시 서울대학교 김원용 교수 등에 대해서는 유독 관대하게 평함을 그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7] 1955~2020년 11월 5일 뇌출혈로 사망. 이 사람은 석굴암 연구로 유명했고 석굴암 관련 분야에서도 손꼽히는 전문가였다. 사학자로서 일본의 유물 약탈 및 훼손을 조사하며 비난하고 자료도 남겼던 그도 총독부 청사를 역사적 자료로 봤다. [18] 원래는 건물을 일일이 해체한 다음 그 자재를 옮겨와 다시 짓는 방식으로 보존할 계획이었다. [19] 총독부가 존재하던 시절에 모두가 올려다 봐야 했던 첨탑이 이제는 모두가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로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20] 참고로 이곳에는 중앙청-국립중앙박물관 시절 앞에 있던 콘크리트 광화문의 부재 일부도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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